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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반의 당구 ㅣ 지만지 고전선집 478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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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의 소설은 대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병정들의 허무한 죽음과 전장에서의 생활, 전쟁이 끝난 후 귀향한 도시의 폐허상태와 굶주림, 인간관계의 실종 및 소외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같은 옐로우 페이퍼에 대한 간접적이며 흥미로운 작품도 있지만 대개 전쟁과 폐허로 규정하는 것이 보통인 거 같다. <9시 반의 당구>는 이색적이다. 전쟁 전과 후를 다루고 있으나 뵐의 전작들에서 볼 수 있는 황폐와 폐허와 간난과 고통과 이별 같은 것은 없다.
독일은 패전 후 나치 잔당을 싸그리 숙청하고 오랜 기간 독일과 나치가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는 진정성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장면은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1970년 12월에 폴란드 봉기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은 정치적 장면, 그리고 독일의 정보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 정보국에 의한 나치 전범의 추적을 사람들이 혼동한 때문이기도 하다. 전후에 나치에 부역한 사람들을 전부 숙청해버리면 가뜩이나 전쟁 그리고 인구 감소로 일할 사람이 부족한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정권인 공권력을 채우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하인리히 뵐 같은 골수 나치 청산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사회 곳곳에 과거 나치 집단의 일원이었던 자들이 여전히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일정부분 그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런 현상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나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절 그들의 생각과 행위에 동조하던 사람들은, 나치에 의하여 탄압받던 피해자들인 유대인, 유색인, 공산주의자, 반정부인사, 집시, 그리고 많은 수이었지만 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자들에 비해 월등한 사회적 권위와 폭력을 대동한 힘, 그리고 압도적 분위기를 지녔을 것이다. 거대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의 경우라면 더욱. 하인리히 뵐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독일인들을 크게 양과 물소의 그룹으로 나눈다. 양은 말 그대로 죄도 없고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럴 힘도 없는 존재. 목자가 있어 풀밭에 방목하고 늑대와 다른 야수만 막아주면 아무 탈 없이 젖과 털을 제공하는 인간형이다. 물소는 역시 생긴 것처럼 무게있고, 근엄하고, 점잖고, 예의바르고, 명예와 성실과 규율과 질서를 숭배하지만 반면에 어리석고 야만적인 힘을 거칠게 과시하는 측면이 있는 인간형이다. 당연히 물소형 인간은 1차 세계대전 당시엔 빌헬름 2세, 간전기엔 나치를 추종하던 인물로, 특히 간전기 내내 유대인,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반정부주의자로 구성하는 양의 집단을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린치를 가하거나, 세월이 더 심각해지자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이르렀다가, 패전 후엔 곧바로 변신하여 가장 정의롭고 명예로운 공직자의 모습으로 표변해버린다. 양의 형질을 가진 사람들은 그동안 물소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맞으며 산 자들만 살아남았어도 전쟁이 끝나 극적 전환기를 맞았지만 여전히 양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 <9시 반의 당구>의 주인공 로베르트 페멜 박사 같은 사람의 역할은 양을 돌보는 목자이다. 이이는 젊은 시절이었을 때부터 크리켓을 선수 수준으로 잘 했다. 1935년 7월 14일은 토요일이었다. 교외의 풀밭에는 루트비히 고등학교와 오토 고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모여 체육교사 벤 바케스가 심판을 보는 결승전을 치루고 있었다. 크리켓 공은 야구공만큼 딱딱하다. 맞으면 심한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시합 도중 슈렐라, 라고 하는 양이 있어서 상대방의 물소 네틀링거는 경기와 관계없이 슈렐라의 몸을 향해 강하게 공을 던져 얼굴에 멍이 들고 피가 나게 했으며 콩팥 부근에 심한 타박상을 입게 만들었다. 슈렐라가 더 이상 루(베이스)에 있으면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한 로베르트 페멜은 공은 저 멀리 풀밭 깊은 곳까지 쳐서 경기를 끝내고 말았다. 물소의 폭력은 이런 식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나치의 광기가 한계를 넘어가면 네틀링거는 철조망으로 만든 채찍으로 슈렐라의 등을 때려 등판엔 철조망의 가시에 박혀 촘촘하게 딱지가 앉아버렸고, 부르주아 건축가의 아들 로베르트 페멜도 이제는 더 이상 예외일 수 없었다.
로베르트의 아버지 하인리히 페멜 박사는 건축가이다. 하인리히가 이 도시로 오게 된 것은 반백 년도 전에 도시의 동굴에 있던 무너진 수도원을 건설하기 위한 공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페멜 박사는 도착하자마자 카페 크로너에 가서 “고추치즈”를 주문했다. 고추치즈? 어떤 것을 말하는 지 몰라 웨이터가 묻자, 고추를 하나 잘게 썰어 치즈와 함께 구운 것이라 대답했고, 페멜 박사는 이후 한 번도 빼지 않고 매일 고추 치즈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아주 나중에 알려지지만 사실 페멜 박사가 고추 치즈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야 한다는 생각의 하나였을 뿐. 페멜 박사는 결국 공모전에 당선을 해 사실상 건축가로 첫번째 건축을 하게 되는데, 이게 독일의 문화재 급 명소 가운데 하나로 인정을 받아 젊은 페멜은 한 순간에 명예와 명성을 떨치고, 귀족 출신 부르주아의 딸 요하나와 결혼까지 한다. 하인리히 페멜은 결코 물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양도 아니었고. 그는 적당한 선에서 물소들과 타협한 채 세상일을 다음으로 하고 건축에 온 힘을 쏟았던 인물이다. 반면에 아내 요하나는 적극적인 목자 타입의 여성. 요하나의 적극적인 반 물소 행위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하여, 어처구니없게 요하나는 정신병원인 덴클링겐 요양소에 오래 갇혀 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건축가. 아들 로베르트 페멜은 정역학자. 정역학靜力學. 정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 어떻게 하면 에펠 탑이 태풍이 부는 데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삼풍백화점은 옥상에 과다한 무게의 수조가 있었다고 해도 왜 버티지 못하고 붕괴해버렸을까? 이런 것을 연구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밀집한 도심의 낡은 건물을 주변 환경에 아주 작은 영향만 주면서 철거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변주할 수도 있다. 건축학하고 매우 비슷하면서도 반대이기도 하다. 하인리히는 세상을 살면서 1894년 누이 샤를로테를 묻고, 1909년 딸 (아내와 같은 이름의)요하나를 묻고, 1919년 아들(자신과 이름이 같은) 하인리히를 묻고, 1942년에는 아들 오토의 사망통지를 받는다. 오토 역시 대단한 물소였으나, 하여간 자신의 자식 셋이 물소의 제단에서 스러져갔다. 그러고 나서야 세상에서 물소의 존재를 인식한 하인리히. 반면 로베르트는 청소년 시절부터 반골인 엄마를 탁해서 그러했는지 적극적 양의 목자로 나섰다. 이제 1958년 9월 6일, 아버지 하인리히의 여든 번째 생일날까지 그는 오전에 사무실에 들러 딱 한 시간만 일하겠다는 원칙을 세워왔다. 한 시간이 넘게 필요한 주문이 들어오면 “안타깝지만 업무량 폭주로 귀하의 소중한 주문을 단념합니다.”라는 회신을 보낼 정도다. 이후 정리를 하고 프리츠 하인리히 호텔에 가서 9시 반부터 11시까지 당구를 친다. 당구실의 보이 후고는 페멜 박사가 준 붉은 카드를 가지고 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내 딸과 아들 그리고 슈렐라 씨와 연락이 언제나 가능함. 그 외에는 아무도 연결시키지 말 것.” 이제 고위 경찰로 근무하는 왕년의 큰 물소 네틀링거조차 이 시간에 로베르트를 만날 수는 없다. 이후 정오까지 카페 존스에서 차를 마시고, 12시부터 산책을 한 후 1시에 딸과 뢰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이후 집에 칩거한다.
로베르트 페멜. 두 자녀가 있으며 아들 요제프는 스물두 살의 건축가로 독립해 산다. 1917~18년생. 그러면 2차 세계대전에 복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그 역시 독일 공병대 장교로 전쟁에 참가했다. 전쟁 중에 공병대가 하는 건 주로 폭파임무였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1945년이 오고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러 로베르트는 장군과 함께 이 도시까지 후퇴하게 됐다. 이때 장군으로부터 놀라운 명령을 전해 듣는다. 아버지 하인리히 페멜 박사가 건축한 동굴 수도원을 폭파하라는 것. 장군은 망설인다. 문화유적을 폭파해도 어차피 지는 전쟁은 지는 전쟁일 뿐. 미군의 주요 진행 방향도 아닌데 굳이 수도원을 파괴할 이유가 있을까? 장군은 번민하다가 공병 대위이며 수도원을 건설한 페멜 박사의 아들이기도 한 로베르트를 불러 상의한다. “수도원을 폭파하면 안 되겠지?”
로베르트 페멜, 그의 대답은 안 알려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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