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역시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제일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서, 제가 읽어본 것들로만 추렸습니다. 예컨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개선문> 등은 대단한 작품이긴 하지만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어서 이 목록에선 빠졌습니다. 아울러 늘 우리가 얘기하는 걸작들, 오비디우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위고, 뒤마 이런 양반들이 쓴 것도 제외했습니다. 괜히 입 아프잖아요.

 근데 '좋아하는 책'하고 '추천하는 책'하고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추천해달라고 하면 빼놓지 않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넣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번호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번호입니다.

 

 

 

32. 33. 귄터 그라스, <양철북>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한 건 재미있게 봤던 영화 <양철북>보다 훨씬 매력적인 작품이란 거. 책 읽고 꼭 독후감 쓰던 시기 이전 것이라 당시 느낌을 컨닝해올 수도 없지만 처참하기 그지없던 시기를 넘치는 은유와 해학과 그러나 무엇보다 그냥 덤덤하게 넘어가는 그림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다.

 무엇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만들던 광경. 독보다, 독보.

 

 

 

 

 

 

 

 

 

 

78. 79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길고 긴 해안선은 가진 아름답고 매혹적인 나라. 요샌 축구까지 진짜 잘하는 나라 칠레.

 칠레 국민에 대한 헌사. 한 손엔 기관총을 들고 한 손엔 방송 마이크를 든 채 대통령 궁 옥상에서 피노체트의 주구들에게 벌집이 된 채 죽음을 맞은 아옌데 대통령을 위한 조종이자 쿠데타로 부르주아 독재를 이어갈 수 있다고 확신했던 우파 정치인에 대한 조롱.

 신화적 리얼리즘에 대한 찬란한 종언.

 

 

 

 

 

 

 

 

 

 

 

97.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미치광이 늙은이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난 아직까지 이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이 책에서 문제적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산적질까지 했었다는 게 나올 걸?

 

 

 

 

 

 

 

 

 

 

 

 

 

116. 117.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말레이 반도 쯤의 아시아 원주민 집단에 흘러든 '짐'이란 이름의 서양 백인 이야기. 같은 백인 이야기지만 조지프 키플링의 '아시아 내에서의 백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짐이 한 시절 저지른 불명예를 평생의 멍에로 여기고 사는데, 누구나가 스스로 원죄로 생각하는 과거의 불명예, 잘못, 실수 또는 이것들과 비슷한 과오를 짊어지고 사는 법. 그리하여 이 책에 더욱 더 큰 공명을 느끼게 한다.

 

 

 

 

 

 

 

 

 

 

 

139.140.141 존 바스, <연초 도매상>

 이 책에 관해선 정말 할 말 많은데, 다른 말 다 생략하더라도 이거 하나만 밝혀두자.

 겁나 재밌다.

 바스, 이 작자가 새로운 소재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딱 선언한 다음 과거의 작품이나 신화, 이딴 것들을 배배꼬아 즐겨 소설을 만들었는데 <연초 도매상>에선 목차를 18세기 소설들과 비슷하게 해놓고 요절복통, 잘못 읽으면 사레들려 마치 맹물 마시다 체한 상태 비슷하게 만들어 놓는다.

 근데 이걸로 끝? 천만의 말씀. 자세한 건 독자 리뷰에 써놨으니 참조하시압.

 

 

 

 

 

 



 

142.143 조지 엘리엇,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에잇. 여자 이름이 조지가 뭐야, 조지가.

 근데 참 이 사람, 묵직하니 좋다. 빅토리아 시대의 규범적인 작품. 더 이상 빅토리아스러운 건 없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만날 사교 모임에 가면무도회, 신사 의식 (꼴값하는 이디스 워튼 왈, 찰스 디킨스하고 마크 트웨인은 작품 속에 신사들이 등장하지 않아 싫어요!)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방면의 시대의식. 강건하고 굳세며 근면한데다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여인들.

 동 시대에 이만큼 건강한 여류는 엘리자베스 케스켈 말고는 없다.

 

 

 

 

 

 

 

 

 

 

174.175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빨갱이 스타인벡이 쓴 백미. 1920~30년대 아메리카. 대공황과 가뭄에 시달리는 오클라호마, 네브라스카 촌놈들은 캘리포니아 드림 하나만 가지고 서쪽으로 죽음의 행군을 시작한다. 그러나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도착한 캘리포니아엔 부르주아에 의한 착취만이 기다리고 있고 가난한 인민들의 단결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스타인벡의 조합운동을 위한 소설은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근데 정작 사람을 감격시키는 건 오클라호마의 거친 땅을 닮은 존의 어머니. 그녀는 가장 견디기 힘들 때 또다시 생명을 발견한다.

 진정한 리얼리즘 소설.

 

 

 

 

 

 

 

 

 

186.187 조지프 헬러, <캐치 22>

 최고의 반전소설. 난 이 책을 읽은 다음 일단 헤밍웨이부터 우습게 알기 시작했다. 진정한 반전소설이면서도 사람 혼을 빼놓는 웃음의 만발.

 용감무쌍한 미군 비행사의 꿈은?

 놀랍게도 탈영이다.

 비겁하다고? 천만의 말씀. 어떤 전쟁이 죄악이 아니었던가.

 반전소설을 이토록 가비야운 터치로 쓸 수 있었던 조지프 헬러. 일어나 갈채하라!

 

 

 

 

 

 

 

 

 

195.196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누보 로망의 한 분파인 유르스나르가 이런 책을 썼다는데 깜짝 놀랐으며, 이 책을 위해 그토록 고집스럽게 고증해나갔다는 것에 경악했고, 무엇보다 한 찬란한 인간의 일생을 그리도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조망했다는 데 대하여 유르스나르를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가 양세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남기는 회상록. 여기에 곽광수 선생의 옛스런 번역도 멋있기 짝이 없다.

 난 내 아이들에게 내 삶을 통하여 이야기해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사주려 한다.

 

 

 

 

 

 

 

 

 

 

207. 글로리아 네일러,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흑인, 무학의 여인들이 20세기 중반의 미국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색. 거기다가 동성연애자라면?

 세상을 살기 위한 모든 악조건을 갖춘 여자들이 한 아파트에 입주해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 수작. 피부색과 젠더와 성적선택에 관한 차별. 책은 비록 이의 극복을 위한 어떤 방향도 제시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당시 입장에선 획기적일 수도 있게 문제제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

 과연 무학의 흑인 여성들은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아파트 바로 옆에 쳐저있는 완강한 콘크리트 벽을 무너뜨렸을까? 당신이 확인하시라.

 

 

 

 

 

 

 

 

 

208. 치누아 아체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식민주의를 이야기할 때 조지프 콘래드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인물. 근데 주로 아체베가 콘래드를 씹는 방향으로 등장하며 이때 콘래드의 작품은 위에서 얘기한 <로드 짐>이 아니라 <암흑의 핵심>이 보통이다.

 근데 내가 보기엔 치누아 아체베도 식민현상을 그저 보여주고만 있고, 조금 세게 얘기하면 폭로하는데 그치지 결코 식민의 해소를 위해 투쟁하거나 하다못해 반식민을 위해 조직하지도 않는다. 주로 식민이 현지인에게 어떤 형태로 침입해서 어떻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뿐. 그건 아체베의 삼부작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신의 화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쉬움이다.

 

 

 

 

 



226.227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말 하면 뭘해. 비트 문학의 선구.

 개판무인지경의 청춘들. 재즈와 블루스 그리고 히치하이킹. 거기다가 좀 보탠다면 무책임한 차량절도와 임신. 다 합쳐 대책없는 젊음의 분출과 무책임. 의미없이 치열하고 의미없이 절망적인 질주.

 그러나 거의 다 그렇듯이 결국엔 출발한 곳으로의 회귀. 그래서 슬픈.

 

 

 

 

 

 

 

 

 

 

 

229. 카울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아, 정말 사랑스런 아몰랑주의 소설. '환상소설'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지. 더하기 아름다운 문장들.

 몽환 속에 빠진 젊은이. 마주치는 여인들. 사랑과 섹스. 그로데스크한 낡고 어두운 건물에서 벌어지는 아스라한 분위기.

 난 이 작품 하나 읽고 단박에 푸엔테스의 다른 책 <의지와 운명>도 읽어버렸다.

 

 

 

 

 

 

 

 

 

 

 

244.245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모델로 한 작품이란 걸 알아챌 수 있다.

 천재 작곡가 레버퀸이 자신의 음악과 (음악 속에 융해되어 있는)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지랄발광. 어떻게 보면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주인공 장과 비슷한 부류인데 더 지랄 같은 성격의 레버퀸. 근데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롤랑이나 만이나 똑같이 쇤베르크를 모델로 쓴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거 같다. 그럼에도 쇤베르크는 유독 만한테만 태클을 걸었는바, 만은 괘씸하게도 12음 기법 비슷하게 흉내까지 내서 그런 듯.

 음악에 관심 없는 분한테 추천하면 두고두고 욕먹을 소설.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개선문>은 내게 일생의 책이었는데 옛적에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민음사로 읽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사실 책도 아닌데 그건 전적으로 개판무인지경 비교불가 열린책들이 만들어서 그런 거고. 하여간 이 세 소설은 인생 살면서 꼭 읽어봐야 할 책들.

 근데 정여사는 나 소싯적에 왜 <사랑할....>을 재미없다고 그렇게 얘기하셨을까? 자라나는 청소년한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 것. 상처받음.

 진짜 멋있고 진중한 반전소설. 위에 쓴 <캐치 22>와는 또다른 반전 철학을 진지하고 아름답게 그린다.

 

 

 

 

 

 

 

 

 

 

273.274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큰아이가 하는 말이 "<유리알 유희>에선 단 한 번도 유리알 유희의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정말? 아니다. 나온다. 근데 그걸 발견하지 못할 뿐.

 헤세 소설의 백미. 누군들 <데미안> <지와 사랑> <시타르타> <황야의 이리>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지 않고 청춘을 보냈을까 싶지만, 세상에나, 회사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읽기는커녕 책 제목들도 모르더라. 오호 애재라.

 음악, 철학, 미학에 관한 장대한 서술. 엉덩이 질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즐거이 이 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나, 아니라면 아예 시도도 하지 말것.

 

 

 

 

 

 

 

 

 

339. 응구기 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가리봉동에도 응국이 사는 거 아시지? 농담이다.

 진정한 신흥국의 문학. 식민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을지언정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인 상태. 이름하여 반식민半植民. 대한민국에서도 1980년대까지 반식민에 대한 논의가 매우 치열했었는데 그걸 제대로 문학화한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몇 십년이 지나 대한민국이 아닌, 한국은 이미 반식민을 극복했다고쳐서 꼭 반식민 문학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하여간 한국이 아니라 케냐 출신 작가가 쓴 소설에서 제대로 된 반식민半植民 소설을 읽는 기회가 됐다.

 정말 잘 썼다. 하긴 내가 뭐라고 늘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사람이 쓴 걸 가지고 잘 썼네 아니네 육갑을 떠느냐마는, 내 수준에 정말 잘 맞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으... 써놓고 보니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빠졌다. 그냥 내비둔다.

 

 

 

 여때까지 몇 개의 작품을 언급했는데, 이제 시간이 된 거 같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약 230권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싹 다 읽었는데, 그 가운데 내가 제일 절절하게 동감하면서, 가슴이 정말로 막 쓰라린 것을 느끼면서까지 처절하게 감동한 작품. 바로 이것.

 

 

69.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피를 토해 쓴 백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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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3-09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말씀하신 것 중에 제가 읽지 않은 책이 꽤 되는군요. 특히 흑인 문학과... 저쪽 남미 문학이요. ㅋ 리스트로 적어놓고 차근히 꼭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17-03-09 15:43   좋아요 0 | URL
오오... 위에서도 써놨는데요, 이거 추천은 아닙니다. ㅎㅎㅎ 읽어보신 다음에 후회하셔도 책임 안 집니다. ㅋㅋㅋ

비로그인 2017-10-2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시작만 했는데;;) 참고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17-10-23 09:22   좋아요 0 | URL
시작이 반입니다. 힘내세요!

수많은 고전을 언제 다 읽지 2020-08-30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추천감사합니다~ 구매목록에 잘 저장해둬야겠어요

Falstaff 2020-08-30 07:46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유부만두 2022-09-07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명절 직전인데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시작해버렸어요!!! 아, 정말 재미있어요. 이걸 어쩌죠???

Falstaff 2022-09-07 21:4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어떻게 하긴요 뭘, 읽으셔야지. ㅋㅋㅋㅋ 팔잡니다.
 

전 그냥 일반적인 독자입니다. 그냥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좋은 것도 있고 언짢은 것들도 있고, 심지어 세계적인 명작 대작 걸작의 반열에 오른 책들도 정작 읽어보면 저하고 극적으로 맞지 않아 책값 아까운 적도 있습니다. 근데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찍은 것들이라면 출판사의 핵심부서에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한 번 읽어보십사 권유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서 전적으로 제 취향상, 기호상 맞지 않아 도무지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지 못하는 것들의 리스트입니다.

 왜 이런 리스트를 쓰는가 하면, 추천하는 책들의 정보만 넘쳐흐르지 반대의 것은 보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비추천 리스트도 독자들에겐 유용할 수 있는 정보란 것이 제 생각인데 그렇지 않나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첫번째로 우리나라에서 세계문학전집의 가장 많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을 골랐습니다. 다만 제가 읽어본 책들에 한정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번호는 시리즈의 번호와 같습니다.

 

 

6.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어려서 숱하게 읽었으나 한 번도 완역을 본 거 같지 않아 선택해 어른이 되어 읽어보니,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악동들이 얼마나 악마와 비슷해질 수 있는가 하는 점 외엔 별로 없다. 하는 짓이 동양의 어린이들하고 서양의 어린이들하고 많이 다른 거 같다.

 괜히 읽었다.

 

 

 

 

 

 

 

 

 

 

 

21.22,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무리 세계 최고의 명작이라도 나하고 맞지 않으면 개떡이란 진리.

 이거 정말 재밌나? 왜?

 이거 정말 교훈적인가? 왜?

 내 무식한 질문에 실소 및 냉소하실 분 무척 많은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평양 감사도 내가 싫으면 싫은 거. 난 <파우스트>를 포함해 모든 괴테를 이 목록에 올려놓고 싶다.

 혹시 해서 괴테 하나 더 읽은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찬가지.

 

 

 

 

 

 

46.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프랑코 개자식에 반대해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거 까진 좋았는데 오웰의 논점은 어떻게 프랑코 군대를 극복하고 혁명을 쟁취하는가에 있지 않고 공산주의의 내분을 밝히는 데 있다. 더 괘씸한 건 노골적으로 전쟁을 지지한다는 점. 세상에 정의로운 전쟁이 어딨나. 추악하지 않았던 전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내 신념에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의 조지 오웰. 내 눈엔 조지 오웰이나 스탈린이나 거기서 거기다.

 

 

 

 

 

 

 

 

 

71. 가오싱젠, <버스 정류장>

 

  중국인 쓴 현대희곡이라서 관심을 갖고 읽어본 바, 기본적으로, 재미없다. 희곡 안에 음악적 화성을 집어넣으려고 한 거 같은데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뭔 얘긴가 하면, 음악극에서 이중창, 사중창, 팔중창, 합창 같은 걸 연극에 도입하려 했던 건 아닌가 싶다는 뜻. 언어에 사성체계가 있는 중국어일 경우와 그게 없는 한국어 사이의 간극 때문일까? 난 동의하기 힘들었다.

 

 

 

 

 

 

 

 

 

 

76. 노발리스, <푸른 꽃>

 

 서양 소설을 읽어보면 <푸른 꽃>이 <오디세이아> 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인용된다. 서양인에겐 질풍노도, 찬란한 낭만주의의 시발점(발음주의!)이 대단히 중요한 거 같은데 정작 읽어보니 뭐 별 재미도 없고 격동하는 청춘의 염통도 뭐 그냥 그렇고, 무엇보다 나서부터 지금까지 주로 문장이 "...다."로 끝나는 언어권에서 살아 그런지 공명도 없었다.

 

 

 

 

 

 

 

 

 

 

109.110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이것도 중1 때 읽고는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봤더니 개떡.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지금부터 170년 전에 쓴 건데 당시 수준으로 봐서는 모르겠으나 지금 동아시아 독자가 읽기에는 좀.

 이 책 속의 등장인물을 다시 주인공으로 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면 내가 즐거이 추천을 하는데 조건이 <제인 에어>를 먼저 읽어본 사람에게. 그래서 이걸 추천한다는 거야 뭐야? 하시면 좀 그렇지만 하여간 이 작품 하나만 가지고 말하자면 적극적 비추.

 

 

 

 

 

 

 

 

 

150.151.152 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지옥의 입구에 이렇게 써있다.

 "이곳에 들어온 자, 희망을 모두 버리라."

 이 책을 집어든 자, 희망을 모두 버리라고 하고 싶다. 서양 운문을 읽는 거 자체가 대단히 힘든 일이며, 더구나 기독교하고 전혀 친하지 않은 내가 읽기엔 더욱 힘들었던 일이었고, 그것도 끝까지 읽느라 하마터면 지옥구경을 할 뻔했다.

 팍 때려주고 싶은 인간 있으면 점잖게, 이거 한 번 읽어봐, 그래야 지성인이지, 하고 권해주고 싶은 책.

 

 

 

 

 

 

 

 

158 노먼 킹슬리 메일러, <밤의 군대들>

 

 저널리스트. <밤의 군대들>을 써서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

 미국인들이 자국 내에서 얼마나 완강하게 집회 시위의 자유를 탄압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책. 전적으로 기자의 입장에 의해 썼다. 근데 대한민국이 유구한 근대사를 통틀어 국민의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탄압했는지 경험해보지 못해 이 책에 퓰리처 상을 줬다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책.

 천상 신문기자. <벌거벗은자와 죽은자>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건 재미나 있지, 이건 뭥미?

 

 

 

 

 

 

 

 

 

185. 앙드레 브르통, <나자>

 

 초현실주의 작품.

 우선 나는 초현실주의 '문학'을 싫어한다. 초현실주의 회화나 영화 같은 건 즐겨 보지만 도무지 브르통을 대표로 하는 이 계파가 쓴 책은 못 읽어주겠다.

 혹시나, 해서 사봤더니, 역시.

 

 

 

 

 

 

 

 

 

 

 

189. 장 폴 사르트르, <말>

 

 이거 굳이 돈 들여 책 사서 읽으면서까지 사르트르의 잘난 척을 꼭 들어줘야겠어?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라.

 "20세기가 사르트르인줄 알았더니 사르트르가 20세기더라."

 그럼 난 20세기 사람이 아님을 인정한다.

 사르트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다면 그에게 딱 하나를 묻고싶다.

 "도대체 뭘 주장한거야?"

 

 

 

 

 

 

 

 

 

263. 잉에보르크 바흐만, <말리나>

 이 책 읽느라 죽을 똥을 쌌다.

 내가 대단한 것이,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 인종인지 증명하려면, 이 책을 무려 완독, 끝까지 읽었다는 거 하나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궁금하셔? 그럼 시도해보시든지.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한테 비웃음 받기 가장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보르헤스 책을 읽고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다, 안 좋다, 뭐 이런 얘기 하는 거란 것쯤은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읽으면 읽을 수록 오리무중인 것을 어떻게 좋다고 하나.

 난 일찌기 보르헤스를 필두로 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소위 말하는 환상문학을 하는 일단의 작가들을 "나몰랑 주의"라고 일컬은 바 있으며 지금도 그렇다. 보르헤스를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은 늪 속에 빠지는 느낌.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다른 읽을 것도 차고 넘치는데 이런 얇은 책 한 권 때문에 괜히 뇌를 괴롭힐 생각 없다. 가뜩이나 잘 돌아가지도 않는데 잘 관리하면서 남은 삶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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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3-0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집어든 자, 희망을 모두 버리라고 하고 싶다‘ ㅋㅋㅋ 이 포스팅 제목을 이걸로 삼으면 딱이겠는데요! ㅋ

괴테의 모든 작품을 저는 올리고 싶습니다. 정말 지겨워요. 전 괴테 작품 싫습니다. <빌헬름 마이스터 수업시대, 편력시대> 다 구리고요. <이탈리아 기행>도... 아 나참. (근데 왜 또 다 읽었는지 ㅋㅋ)
가오싱젠 희곡 ㅋㅋㅋㅋ 와.. 이토록 짧고 가벼운 책을 이토록 끝마치기 어려울 줄이야. 아직 다 못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사르트르의 <말> 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잘난척 바가지
<말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결국 똥싸다 말았어요. 인내심 최고이십니다. 전 읽다가 포기..... 그냥 도서관 반납했어요. 다시 대출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지 않은 게 천만다행 ㅋㅋㅋ
초현실주의 저도 정말 싫어해요. 언제나 보르헤스를 읽을지? ㅋㅋㅋ

Falstaff 2017-03-09 12:0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다행스럽게도 잠자냥 님하고 제 취향이 비슷한가봅니다. 이거 쓰면서 조금은 용기가 필요했었거든요. ㅋㅋㅋㅋ
근데 답글 읽어보니 완전 우문현답을 해주셨네요. 진짜 재밌어요. ㅋㅋㅋㅋ
잠자냥 님도 비추 리스트 작성을 좀 해주셨으면 쇤네한테도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말씀입죠.

물감 2017-03-09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까는 글 너무 좋아합니다!
저도 한 까칠 하는 성격이거든요 ㅎㅎ 잘읽었습니다 😀

Falstaff 2017-03-09 20:40   좋아요 1 | URL
잘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 이거 까는 글... 아닌데요. 하여간 난 이 책이 싫다,는... 아, 그게 같은 말 비슷하긴 합니다. ㅎㅎㅎ

싱클레어 2019-05-1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나>에 대한 평을 살펴 보다가 이 리스트를 봤습니다.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을 저도 한 100권쯤 읽어서 여기 리스트 중에 반 이상은 읽었는데 <카탈로니아 찬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 의견과 정말 일치합니다. 당연히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라서 이게 정답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저와 취향이 거의 흡사한 분을 만나서 굉장히 신뢰가 되네요. 저도 괴테 할아버지 책 매우 지루했었고, 사르트르의 <말>을 누군가는 거의 최고의 책으로 꼽았지만 저한테도 잘난 척으로밖에 안 들렸고, 보르헤스가 위대한 작가인 것은 알겠으나 남미의 초현실, 환상주의 문학 안 맞습니다. 덕분에 <말리나>는 믿고 거르겠습니다 ^^

Falstaff 2019-05-13 09:14   좋아요 0 | URL
동의하신다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 글 쓴지도 벌써 2년이 넘어가서 새로 업데이트를 해야 하겠는데, 아시다시피 이런 비추 리스트 같은 글은 함부로 쓰기가 쉽지 않군요.
<말리나> 말고 같은 이가 쓴 <30세>는 그나마 읽을 만했습니다. 문예출판사에서 나옵니다. 근데 바흐만 등 골아픈 47세대 말고도, 본문에 썼다시피 읽을 책은 무지 많잖아요? ^^;

leftclub 2019-06-0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나의 얄팍함을 탓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게 아쉽네요...강추합니다도 좋지만 비추입니다도 자주 볼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Falstaff 2019-06-01 16:02   좋아요 0 | URL
공감하시는 거 같아 반갑습니다.
근데 지극히 주관적인 평이고요, 거기다가 제가 완벽한 아마추어라는 점이 걸립니다.

내로남불이니 2021-04-1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에 밤의 군대들 같은 소설이 없는데 어떻게 상을 주겠어-요?
아마추어가 아니라 그냥 땡깡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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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보는 일기장에 자기 하고 싶은 말 아무거나 써놓는 애덜 보면 꼭 ‘주관적‘ 이라고 사족 붙이더라. 내가 남 까는 것 괜찮고 내가 남한테 까임 당하는 건 싫고? (근데 지극히 주관적인 혼잣말이고요,^^ )

Falstaff 2024-05-12 16:15   좋아요 0 | URL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쓴 거 까셔도 좋습니다.

오진영 2024-05-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밤의 군대들은 저자가 직접 참여한 1부 베트남 반전 시위와 2부 언론에서 보도하는 역사 두부분으로 나뉘어서 쓴 글입니다. 카탈로니아 찬가(11장에서 언론이 다루는 역사를 직접적으로 비판)와 밤의 군대들(2부에서 전쟁을 다루는 언론을 기술)은 언론이나 승전국 혹은 역사와 무관한 거대한 나라가 역사를 편향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현장과 언론의 갭을 통해 서술하는 책입니다. 최근 나오는 가짜뉴스의 편향을 봤을때 그 의미와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죠.

르포문학을 싫어하시는 건 알겠으나 르포문학은 재미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직접 현장에서 다룬 사실적 역사이고 무심고 지나칠 수 있는 역사의 순간들은 사람의 눈으로 다룬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오웰은 작품 안에서도 자신의 기술마저도 왜곡이 될 수 있기에 의심하라고 적고 있지요(후기에는 씻지못해서 냄새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죽음의 공포와 매순간 마주하고 있었지만 가치있었던 순간이라고 적는데.. 그건 참전한 사람들만 적을 수 있는 내용인거죠). 르포문학을 단순하게 훑어보고 재미와 그 가치를 폄훼하는건... 옳지 않은 것 같네요.

Falstaff 2024-05-12 16:14   좋아요 0 | URL
선생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옳지 않았습니다.
 
웃는 남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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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 드 파리>를 읽었다. 난 보통의 독자다. 그럼 이걸로 빅토르 위고는 졸업, 혹은 땡! 맞지? 나도 위고 졸업장을 받은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른다. 존애하는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읽는데 이 이모가 위고 작품 가운데 딱 <레 미제라블>하고 <노트르담 드 파리>만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다. 그러면서 아주 곳곳에 유럽의 낭만주의에 대해 토론하면서 <웃는 남자>의 등장인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또 가끔은 <93년>을 짤막하게 짚고 넘어가니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리하여 올 1월 다이허우잉의 책을 읽는 도중에 급하게 인터넷 접속해서 카드 긋고 산 책이 <웃는 남자>와 <93년>.

 상,하권 합해서 본문만 950쪽에 달하는 <웃는 남자>를 정말로 읽어보니, 물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완전 개인적 감상에서 얘기하자면,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 드 파리>를 능가하는 재미와 감동의 진짜 낭만주의 작품.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리하여 19세기는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규정하는 것이다.

 먼저 그림 좀 보시고.

 

 


 앞의 것이 위고의 희곡 <환락의 왕> 속 궁정광대 리골레토, 뒤의 것은 유랑 익살광대극단 단장 카니오. 내가 생각하는 등장인물의 캘릭터하고는 좀 맞지 않는 사진이지만 하여간 목적상 가져왔다.


 리골레토는 연극 또는 익살극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 사진은 내가 확실히 아는데, 젊은 마누라는 동네 총각하고 눈이 맞고 배가 맞았고, 하필이면 그걸 자기 눈으로 직접 봐서 이 작것들을 죽여 말아 마음 속엔 눈물과 질투와 분노와 악마의 꿈틀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 바야흐로 익살광대극을 시작해야 하는 희극 광대다. 그가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하게 분장을 하면서 노래하는 "의상을 입어라", 희대의 테너 아리아, 아마 한 번은 다들 들어보셨을 걸?

https://youtu.be/rRhmogBs-gU

 


 근데, 저 익살광대의 얼굴이 분장을 한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 위해 외과수술을 해서 일부러 얼굴을 만든 거라면? 어린 아이를 유괴하지 않고 법적으로 돈을 주고 사서 목적상 외과수술을 하는데, 중국에서 천년 전부터 시행하던 마취술을 써 아이를 잠들게 해놓고 눈꺼풀을 아래 위로 찢고, 코뼈를 제거한 다음 나머지 살덩이도 콧구멍만 빼고 뭉개버리고 입술을 귀 아래까지 절개해 잇몸이 드러나면서 피수술자의 기분과 관계없이 언제나 함빡 웃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실제로 야만족들이 득시글거렸던 유럽에선 17세기까지 이런 행위를 해서 수술한 아이를 비싼 값에 되팔아 수익을 올리는 '콤프라치코스'란 조직이 여럿 있었다는 보고가 있으며 17세기 말에 들어서야 영국의 제임스 몇세던가 하는 작자의 치하에 이르러서야 이를 불법으로 여겨 처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에선 위 문단에서 내가 예로 들었던 외과수술을 받은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는 모습을 그린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 위 위고의 <환락의 왕> 리골레토는 거기다가 곱사등 시술까지 받은 후천적 기형이 아니었던가 의심이 가는 것이, 자신의 어여쁜 딸 질다에게 유독 자신의 가족관계와 자기 이름까지 알려주지 못하는 정경 때문이었다. 어려서 팔려와 기형수술을 받은 후 만토바 성의 익살광대로 되팔린 신세. 가족은커녕 자신의 진짜 이름도 모르는 광대가 리골레토 아니었을까.

 하여간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얼굴에 중점적으로 기형수술을 받아 기괴한 웃는 모습을 지니게 된 그윈플레인은 열살 때 콤프라치코스 일당이 잉글랜드에서 바다 건너로 도망치던 한겨울에 콤프라치코스 무리에 의하여 얼어 죽거나 굶어 죽으라고 외딴 잉글랜드 땅에 버려져 황량한 포틀랜드 일대를 방황하면서 인생을 시작하는데, 당시 지구를 뒤덮던 소빙하기를 맞아 눈내리는 밤 꼬마 그윈플레인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이 터무니없이 엄정한 법에 의하여 교수형을 당한 다음 온 몸에 타르를 뒤집어 쓰고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썩지도 않으면서 오랜시간 인민들로 하여금 경계하라는 교훈을 내리고 있는, 바람에 흔들리는 시신이었고, 두번째가 젖먹이를 품에 안고 길을 가다가 기아와 추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죽은 여인이었으며, 깊은 밤에 도착한 조촐한 시내의 두드려도 두드려도 결코 열리지 않던 시민들의 안식처로서의 집 혹은 도시였다.

 이것으로 책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마친다.

 위고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곳곳에 예상치 못한 장치를 숨겨놓아 앞의 것이 뒤의 장면과 연결되는 은밀하고 교묘한 거미줄이 함빡 쳐져있어 서툰 독자가 자신이 이 소설을 읽었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스토리를 조금 이야기하다보면 여차했다간 세밀한 복선이나 열쇠의 끄트머리를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나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다고 어깨에 힘 줄 이유가 없는 바,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서로를 위해 바람직하다.

 다만 한 가지, 꼭 이야기하고 싶은 건, 왠만하면 한번 읽어보셔. 소위 말하는 작중 클라이막스에 가서 당신의 가슴도 내것처럼 안타깝고 찌르르하고 가슴 아프고 가엽고 그럴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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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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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보헤미아의 숲 / 숲속의 오솔길>을 먼저 읽었고 그 책이 참으로 아름다워 기꺼이 <늦여름>도 고르게 되었다. 그러나 앞의 책에서 슈티프터가 자연과 숲과 산맥과 그 속의 생명을 묘사하는 방식이 느꺼울 정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로 하여금 책갈피 속으로 확 빠져들게 하는 대단한 흡인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어서, 각 100쪽 언저리의 두 단편소설(<보헤미아의 숲 / 숲속의 오솔길>)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라 받아들인 효용이 과연 촘촘하게 쓰여진 880 쪽의 길고 긴 장편소설에서도 가능할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 책을 살 때부터 조금 걱정이었고, 책을 읽기로 한 시기가 가까워 옴에 따라(내 책읽는 방식을 서재친구분들은 아신다!) 읽기도 전에 왠지 부담이 되어 왔다는 걸 숨기지 못하겠다.

 게다가 막상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어찌도 내가 싫어하는, 싫어하다못해 아주 짜증을 내는 요소들을 그리도 골고루 갖추었는지.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먼저 나열을 해보자.

 1. 스스로 한 건 하나도 없으면서 그냥 조상 잘 만나 큰 돈 상속받아 애초부터 부자로 살고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기로 예약되어 있는 거. 나와 내 친구는 이런 족속을 '물총 잘 맞았다'고 표현한다. 어떤 물총? 에이, 내 입으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집에 가서 아빠한테 물어보셔.

 2. 등장인물의 관심사는 전적으로 동류들에만 있으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난한 인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동전이나 은화 한 잎 던져주곤 그걸로 입 싹 닦는 거.

 3. 몸과 마음이 고결하기 짝이 없어 매사에 조심 또 조심, 행실에 눈꼽만 한 과오도 일으키지 않으며 설사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행위에 대한 끔찍하고 오버스런 자기 반성으로 인간성 과시하는 거.

 4. 배냇적부터 습관화 한 소위 신사 숙녀 의식에 절어 처음부터 끝까지 손끝부터 발끝까지 우아함과 고귀함과 순결함에 절어 소박한 식사를 하되 식사가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결코 배설은 하지 않을 거 같은 인물들.

 5. 완벽한 지성과 지식으로 무장한 무결점 무오류 인간, 특히 남자. 분명히 예수와 초등학교 동창일 듯.

 말 했다시피 이 책에선 내가 싫어하는 거, 빠짐없이 다 들어있다.

 거기다가 호흡이 유장하기 짝이 없어서 한 문단이 서너 페이지에 달하기도 하고, 도무지 마침표가 나오지 않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까 봤던 내용 같은데 또 나오고. 허벅지 쥐어 뜯어도 도무지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밤만 깊어가는 진퇴양난. 어떤 기분인지 아시지? 이걸 다 합쳐서 무엇을 만드는가 하면 친애하는 한 서재동무님께서 얘기하시듯, '재미없는 독일 소설'의 전형. 전형 가운데서도 완전한 전형을 만든다. 이 정도만 쓰면 이해하실 거다.

 근데 여기서 끝나면 내가 얘기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위에 써놓은 온갖 마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거기다가 '재미없는' 독일소설에서도 드물게 철학, 문학, 역사 더하기 미학에 관한 한 끝판왕이 무려 두 명이나 등장하는 잘난 척까지, 그리하여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 예술에 관한 동의할 만하지만 색다를 것도 없고 분명히 과장되어 있는 무리수 마저 다 보태는 야만에도 불구하고, 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이 책 <늦여름>을 대단히 인상깊게, 그리고 좋게, 아울러 아름답게 읽었다는 사실.

 이거 대단히 드문 경험이다. 다 아시다시피 난 위대한 <파우스트>조차 개떡으로 아는 종자다. <파우스트> 말고도 누가 위대하지만 개떡인 책 딱 하나 골라달라고 하면 주저없이 <신곡>을 집어주는 인간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말하건데, 정말 근사하게 읽었고 근래에 보기드문 '생각하면서 읽을 책'으로 <늦여름>을 꼽겠다. 하지만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 우연히 오프 라인에서 서로 볼 일 생기면 귀싸대기 한대 얻어맞기 십상일 테니까.

 내가 이 책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건 여러가지가 있지만 첫째가 오직 내가 읽어본 경험만으로 말하건데, 스티프터만큼 자연을 멋있고 맛있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친숙하고 생동감있고 건강하고 태내적 익숙함으로 묘사하는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나무와 숲과 숲 속의 식물과 곤충과 새들과 짐승과 돌맹이와 흙과 암반과 암괴와 화석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놀라운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숲을 보는 것하고 오직 태생적 미학의 관념으로만 보는 숲하고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스티프터는 태생적 미학의 관념을 갖고 있는 위에다가 자연과학적 지식까지 습득한, 거기다가 글도 잘 쓰는 작가다. 그러니 애초부터 게임 끝. 미학적 관점은 회화와 조각과 조소와 건축과 구조물과 공예품과 화훼까지 끝간 데가 없이 광활한 조망을 이루고, 때에 따라선 독자를 가르쳐보려 들이대는 기미도 있기는 한데 그까짓 것만 좀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나처럼 이 책에 반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상찬했을지언정 전적으로 개인의 기호라는 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동감이나 감동까진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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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3-0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ㅋㅋㅋ 제가 이 책 사놓고 그 재미없는 독일 소설의 전형에 1권 반쯤 읽었을 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아.....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데...... 다시 이겨내야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지금 그 재미없는 독일 소설의 또 다른 하나인 <마의 산>을 예전에 읽다 말아서 다시 읽고 있는데 너무나 그 산은 넘기 힘들군요... <마의 산> 다 읽고 연달아 <늦여름> 읽으면 미쳐버리겠죠? ㅋㅋㅋㅋ

Falstaff 2017-03-07 14:39   좋아요 0 | URL
ㅋㅋㅋ 확실한 건 <마의 산>에 이어 <늦여름>까지 읽으시면 다른 건 몰라도 몸에 사리 생깁니다. 열반하실 수도 있고요. ㅋㅋㅋㅋ
근데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에 관해선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호‘란 점을 확실히 밝혀야해요. ㅠㅠ 음악 듣는 거에도 가끔 이런 경우가 생기는데 그걸 ˝나만의 명반˝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의 산>. 어제도 어디서 이 작품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삼중당 문고판으로 <마의 산>을 읽은 게 고딩 2학년 땐데, 지금 생각해도 첨부터 끝까지 스위스 산자락 요양원에서 미열에 시달리는 젊은이 얘길 어떻게 다 읽어치웠는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그 후엔 살면서 다시 읽어볼까, 라는 생각이....... 전혀 나지 않더라고요.

귀도발도 2022-12-09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클라우디오 마그리스가 다뉴브에서 언급했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선생님의 이 재치있고 유쾌씁쓸한 리뷰를 만나게 됐네요. ㅋㅋㅋ 결론은... 선생님 리뷰 덕에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겁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ㅋㅋㅋ

Falstaff 2022-12-09 05:30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혹시 낚이신 건지도 모릅니다. ㅋㅋㅋ 어쨌든 즐기는 게 제일이니 아무쪼록 공감하며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대산세계문학총서 50
나다니엘 호손 지음, 김지원.한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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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 나온 <큰 바위 얼굴>의 작가 이름은 '나다니엘 호돈'이라고 배웠는데 이제 세월이 지나니 이젠 이 사람 이름은 쓰는 사람 마음대로다. 나사니엘 호손(문학과지성사, 소담출판사), 너새니얼 호손(민음사, 문예출판사), 너대니얼 호손(푸른숲), 기타등등. 이거 뭐 대한민국 출판을 책임지는 것들이 외국어 표기에 관해선 다들 지 잘났다고 맘대로야.

 호손의 책을 한 권 정도 더 읽으려고 해서 <일곱박공의 집>을 고를까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를 고를까 잠깐 망설이다가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책. 왜냐면 오랜만에 시내 나가 5천원짜리 커피 마시며 사람 기다리다가, 물론 술 약속 시간 맞추려고 그랬는데, 커피집이 입구 전광판에 오늘 들어온 책 474권, 이렇게 써있는 중고책 가게도 겸해서 무슨 책들이 나왔나 둘러보다가 싼 김에 산 거다. 싸서 샀다고? 하이고, 커피값 5천원은 생각 안 해? 직장생활 하면서 하도 인스턴트 커피에 입이 길들어 난 몇 천원짜리 원두커피는 맛이 없어 잘 안 먹는데, 맛없는 원두커피 값 생각하면 절대로 싼 김에 산 거 아니다. 하여간 그랬다.

 이걸로 호돈인지 호손인지 하는 19세기 초반 태생의 미국작가는 내게 작별을 고한다. 아, 호손이 그리고 <블라이드데일 로맨스>가 후져서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내게 큰 어필을 하는데 실패했다는, 아주 전적으로 개인적인 기호에서 그렇다는 말씀. 이 양반이 1804년생. 마흔 여덟살에 출간한 이 책은 호손으로선 이색적으로 1인칭 시점에서 썼다고들 하는데 뭐 그리 관심이 있는 바는 아니고, 왜 개인적으로 내가 호손에게 실망했는가 하면, 실제로 호손이 유럽에 비해 완전 꼴보수 상태였던 아메리카에서 농촌 공동체 내의 사회주의를 실험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가해서 경험한 것을 소설적으로 만든 것이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라고 하지만, 그 사회주의 농촌 공동체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해 7개월만에 쫑을 낸 것처럼 다분히 공동체를 좀 비틀어보려는 악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1인칭 소설이 제일 재수 없는 건 주인공 '나', 이 책에선 '커버데일'이란 작잔데,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무결점의 정의로운 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거. 하지만 곳곳에 그놈의 '나'가 견지하는 시선의 삐딱함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건 거의 전적으로 작가의 사상 자체가 그래서 그렇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뭐, 이 책에선 화자 '나'가 주인공이라기보다 다분히 관찰자로 등장하고, 주인공 삼인방이라고 할 수 있는 등장인물은 (화자, 즉 작가의 시선으로 보면) 다분히 위선적이고 허황한 성격의 박애주의자 홀링스워스와 그를 둘러싼 두 여자, 제노비아와 프리실라로 이 세 사람 사이에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 설킨 로맨스를 그렸지만, 제일 마지막 문장, 즉 결론에 이르는 화자 '나'의 선언이 어째 좀, 당최, 여간해서, 여기까지 써놓고 온라인에서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점 대여섯개 찍는 일. 이렇게. "…".

 마지막 문장, 혹은 '나'의 선언이 뭐냐고? 그거 아시면 책 못읽음. 그래서 안 알려드림.


 근데, 그러지 말고 호손이 쓴 다른 책 한 권 정도 더 읽어볼까? 그래 뭐 세상 별거 있나. 그깐 책이 뭐라고 단칼에 자르겠단 말을 해.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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