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보헤미아의 숲 / 숲속의 오솔길>을 먼저 읽었고 그 책이 참으로 아름다워 기꺼이 <늦여름>도 고르게 되었다. 그러나 앞의 책에서 슈티프터가 자연과 숲과 산맥과 그 속의 생명을 묘사하는 방식이 느꺼울 정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로 하여금 책갈피 속으로 확 빠져들게 하는 대단한 흡인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어서, 각 100쪽 언저리의 두 단편소설(<보헤미아의 숲 / 숲속의 오솔길>)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라 받아들인 효용이 과연 촘촘하게 쓰여진 880 쪽의 길고 긴 장편소설에서도 가능할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 책을 살 때부터 조금 걱정이었고, 책을 읽기로 한 시기가 가까워 옴에 따라(내 책읽는 방식을 서재친구분들은 아신다!) 읽기도 전에 왠지 부담이 되어 왔다는 걸 숨기지 못하겠다.

 게다가 막상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어찌도 내가 싫어하는, 싫어하다못해 아주 짜증을 내는 요소들을 그리도 골고루 갖추었는지.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먼저 나열을 해보자.

 1. 스스로 한 건 하나도 없으면서 그냥 조상 잘 만나 큰 돈 상속받아 애초부터 부자로 살고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기로 예약되어 있는 거. 나와 내 친구는 이런 족속을 '물총 잘 맞았다'고 표현한다. 어떤 물총? 에이, 내 입으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집에 가서 아빠한테 물어보셔.

 2. 등장인물의 관심사는 전적으로 동류들에만 있으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난한 인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동전이나 은화 한 잎 던져주곤 그걸로 입 싹 닦는 거.

 3. 몸과 마음이 고결하기 짝이 없어 매사에 조심 또 조심, 행실에 눈꼽만 한 과오도 일으키지 않으며 설사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행위에 대한 끔찍하고 오버스런 자기 반성으로 인간성 과시하는 거.

 4. 배냇적부터 습관화 한 소위 신사 숙녀 의식에 절어 처음부터 끝까지 손끝부터 발끝까지 우아함과 고귀함과 순결함에 절어 소박한 식사를 하되 식사가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결코 배설은 하지 않을 거 같은 인물들.

 5. 완벽한 지성과 지식으로 무장한 무결점 무오류 인간, 특히 남자. 분명히 예수와 초등학교 동창일 듯.

 말 했다시피 이 책에선 내가 싫어하는 거, 빠짐없이 다 들어있다.

 거기다가 호흡이 유장하기 짝이 없어서 한 문단이 서너 페이지에 달하기도 하고, 도무지 마침표가 나오지 않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까 봤던 내용 같은데 또 나오고. 허벅지 쥐어 뜯어도 도무지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밤만 깊어가는 진퇴양난. 어떤 기분인지 아시지? 이걸 다 합쳐서 무엇을 만드는가 하면 친애하는 한 서재동무님께서 얘기하시듯, '재미없는 독일 소설'의 전형. 전형 가운데서도 완전한 전형을 만든다. 이 정도만 쓰면 이해하실 거다.

 근데 여기서 끝나면 내가 얘기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위에 써놓은 온갖 마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거기다가 '재미없는' 독일소설에서도 드물게 철학, 문학, 역사 더하기 미학에 관한 한 끝판왕이 무려 두 명이나 등장하는 잘난 척까지, 그리하여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 예술에 관한 동의할 만하지만 색다를 것도 없고 분명히 과장되어 있는 무리수 마저 다 보태는 야만에도 불구하고, 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이 책 <늦여름>을 대단히 인상깊게, 그리고 좋게, 아울러 아름답게 읽었다는 사실.

 이거 대단히 드문 경험이다. 다 아시다시피 난 위대한 <파우스트>조차 개떡으로 아는 종자다. <파우스트> 말고도 누가 위대하지만 개떡인 책 딱 하나 골라달라고 하면 주저없이 <신곡>을 집어주는 인간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말하건데, 정말 근사하게 읽었고 근래에 보기드문 '생각하면서 읽을 책'으로 <늦여름>을 꼽겠다. 하지만 당신에게 권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 우연히 오프 라인에서 서로 볼 일 생기면 귀싸대기 한대 얻어맞기 십상일 테니까.

 내가 이 책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건 여러가지가 있지만 첫째가 오직 내가 읽어본 경험만으로 말하건데, 스티프터만큼 자연을 멋있고 맛있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친숙하고 생동감있고 건강하고 태내적 익숙함으로 묘사하는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나무와 숲과 숲 속의 식물과 곤충과 새들과 짐승과 돌맹이와 흙과 암반과 암괴와 화석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놀라운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숲을 보는 것하고 오직 태생적 미학의 관념으로만 보는 숲하고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스티프터는 태생적 미학의 관념을 갖고 있는 위에다가 자연과학적 지식까지 습득한, 거기다가 글도 잘 쓰는 작가다. 그러니 애초부터 게임 끝. 미학적 관점은 회화와 조각과 조소와 건축과 구조물과 공예품과 화훼까지 끝간 데가 없이 광활한 조망을 이루고, 때에 따라선 독자를 가르쳐보려 들이대는 기미도 있기는 한데 그까짓 것만 좀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나처럼 이 책에 반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상찬했을지언정 전적으로 개인의 기호라는 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동감이나 감동까진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3-0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ㅋㅋㅋ 제가 이 책 사놓고 그 재미없는 독일 소설의 전형에 1권 반쯤 읽었을 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아.....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데...... 다시 이겨내야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지금 그 재미없는 독일 소설의 또 다른 하나인 <마의 산>을 예전에 읽다 말아서 다시 읽고 있는데 너무나 그 산은 넘기 힘들군요... <마의 산> 다 읽고 연달아 <늦여름> 읽으면 미쳐버리겠죠? ㅋㅋㅋㅋ

Falstaff 2017-03-07 14:39   좋아요 0 | URL
ㅋㅋㅋ 확실한 건 <마의 산>에 이어 <늦여름>까지 읽으시면 다른 건 몰라도 몸에 사리 생깁니다. 열반하실 수도 있고요. ㅋㅋㅋㅋ
근데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에 관해선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호‘란 점을 확실히 밝혀야해요. ㅠㅠ 음악 듣는 거에도 가끔 이런 경우가 생기는데 그걸 ˝나만의 명반˝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의 산>. 어제도 어디서 이 작품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삼중당 문고판으로 <마의 산>을 읽은 게 고딩 2학년 땐데, 지금 생각해도 첨부터 끝까지 스위스 산자락 요양원에서 미열에 시달리는 젊은이 얘길 어떻게 다 읽어치웠는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그 후엔 살면서 다시 읽어볼까, 라는 생각이....... 전혀 나지 않더라고요.

귀도발도 2022-12-09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클라우디오 마그리스가 다뉴브에서 언급했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선생님의 이 재치있고 유쾌씁쓸한 리뷰를 만나게 됐네요. ㅋㅋㅋ 결론은... 선생님 리뷰 덕에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겁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ㅋㅋㅋ

Falstaff 2022-12-09 05:30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혹시 낚이신 건지도 모릅니다. ㅋㅋㅋ 어쨌든 즐기는 게 제일이니 아무쪼록 공감하며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