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수사나 포르테스는 어제 읽은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를 쓴 하들그리뮈르 헬가손과 같은 돼지띠 1959년생이다. <…청소가이드>를 어제 읽었다고? 그럼 <알바니아의 사랑>은 오늘 하루만에 읽어 치웠겠네? 맞다. 본문이 285페이지에서 끝난다. 글자가 크고 편집도 널널해서 점심에 백제 김치맛 쌀국수 후딱 먹고 빠져서 읽으니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읽으면서 머리 속에서 뱅뱅 돈 생각은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자치구의 폰테베드라에서 태어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과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지리와 역사를 전공한 여사님이 마흔세 살에 어쩐 일로 저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서 벌어진 사랑 이야기에 관해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꼬? 하는 거였다. 책을 읽으면, 포르테스가 대학에서 지리,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이렇게 짐작할 수밖에. 1930년대에 에스파냐에서 있었던 2차 세계대전 전초전 성격의 프랑코 내전. 이때 프랑코 파시스트로부터 에스파냐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하여 유럽 각지와 (라틴)아메리카, 공산 중국에서 많은 해외 지원병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공산주의 국가 알바니아에서도 대大 자눔이란 젊은 사령관이 ‘알바니아 여단’을 지휘하여 참전했다. 여단을 파병한 것은 맞는데 이때 ①사령관의 이름이 자눔인 것과, 그가 에스파냐에서 한 소녀를 만나 순전히 “구출”의 의미로 프랑스 국경의 친척집에 맡겨 놓았다가 패전에 임박해 ②소녀를 트럭에 태워 함께 시에라 산맥을 넘어 알바니아까지 데려온 건 포르테스의 허구일 것 같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허구, 거짓, 혹은 이야기. 이 정도면 소설 한 편이 탄생할 수 있는 충분한 재료는 준비한 셈이다.


  사령관 자눔이 귀환하자마자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연에 휩싸이게 된다. 자눔은 또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이번엔 나치 파시스트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상,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뛰어들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전쟁에 승리한 1945년, 영광스럽게 귀환한다. 수도 티라나에 복귀해 며칠 간의 보고와 환영대회 같은 것들을 끝내고 순국선열로street와 엘바산 사이의 보기드문 저택인 빌라는 전쟁 당시에 독일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바람에 거의 다시 지어야하는 폐허로 변했지만, 에스파냐에서 데려온 소녀는 키가 훌쩍 큰 스무 살의 미인이자 완벽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한눈에 반한 자눔은 ‘그 여자’한테 단박에 청혼, 이들은 결혼을 해 아들 둘을 낳는다. 큰 아이는 강건한 체격과 천생 군인체질의 빅토르. 작은 아이 이스마일은 훗날 시를 쓰는 자질이 어린 시절 성격에서 나타난 조금은 병약한 아이. 네 살 차이가 나는 형제 다 엄마를 많이 닮아 그런지 유난스럽게 우애가 깊었다. 공유하지 못하는 장난감 선물은 애초 받지도 않았고, 네 살 먹은 동생이 폐렴(훗날에 늑막염으로 밝혀짐)으로 사흘 동안 고열과 고통에 시달리자, 형 빅토르는 잠 한숨 자지 않고 침대 곁을 지켰다가, 이스마일이 깨어난 넷째 날 새벽, 탈진해버린 여덟 살짜리 빅토르가 혼절해버린 이야기가 오래 전해졌을 정도였다.

  빅토르 못지않게 힘들여 이스마일을 보살핀 가족 주치의 기오르크 박사는, 낫기는 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라서 요양을 권했다. 그리하여 네 가족과 기오르크 박사는 산악지역 페시코피 시에 있는 박사의 고향집에서 몇 달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삶이 끝난 사람은 아팠던 이스마일이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 알바니아로 이주해 온 ‘그 여자’가 죽었다. 이스마일이 다섯 살 때. 이후 빅토르와 이스마일의 어머니이자 알바니아의 실세 가운데 실세인 대 자눔의 아내인 에스파냐 여인의 이름은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것이 ‘그 여자.’ 이제 ‘그 여자’는 초상 속 그림으로 남아 서재 벽에 걸려져, 자신을 테라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만 기억시키고 있다. 며칠 동안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숨을 거둔 이스마일의 기억 저편 속 ‘그 여자’가 죽은 다음에도 형제간 우의는 전혀 틀어지지 않았지만,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서, 빅토르가 군사예비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몇 년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자, 네 살 차이가 나는 형제는 여전히 우의가 깊기는 하되, 어딘가로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용맹한 군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빅토르와 새롭게 사춘기를 맞이하게 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이스마일. 이들의 감정적 거리감은 지극히 자연적인 이격이라고 할 수밖에.


  사춘기가 지난 아들들은 다 자기 유전자 속 특징이 발현하는 곳으로 간다. 빅토르는 정통 군인으로 국무회의의 가장 높은 지위를 갖기도 했던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준비하고 있고, 이스마일은 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에 강철 장벽을 친 채 무한정 강권통치를 펼치고 있는 엔베르 호자 정부에 대한 반체제운동에 가담한다. 젊은 시절을 통째로 반 파시즘 전쟁에 투신했던 아버지 대 자눔이 이젠 알바니아의 독한 파시스트가 된 것에 어이없어 하는 것도 세월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1930년대 40년대 젊은 자눔은 신념에 의하여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이젠 호자 정부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스스로 타당하다고 믿는 양심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물과 역사를 보는 시점이 변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파쇼타도를 외치던 70년대, 80년대, 90년대 민주투사들이 세월이 변하니까 이젠 스스로를 진보세력이라 굳게 확신하면서도 자기들의 꿈이 강남 건물주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됐잖아? 신진세력은 바로 이 (한 시절엔 옳았던) 늙은 것들을 때려잡아야 하는 거라고. 그래야 진보가 진화한다니까? 그게 변증이다.

  그래도 형제 사이는 여전히 좋았다. 알바니아도 의무 군복무 기간이 있는데, 8개월. 이스마일이 징집을 당해 훈련을 받고 있을 때 빅토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관습법이 여전했던 북부 지역에 장교로 나가 있다가 그곳 아가씨 헬레나와 연분이 나 북부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이스마일이 결혼식에 가려고 몇 번이나 아버지와 형의 빽을 썼지만, 짧은 복무기간 대신 빡세게 훈련시키는 군대는 형의 결혼식 참석을 위한 휴가를 거절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이스마일은 그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빅토르의 결혼식 때 혼수로 가져온 헬레나의 북부 알바니아의 전통 옷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고, 딱 하나, 조끼 주머니에 총알 하나를 담아, 장인이 사위에게 직접 주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만일 자신의 딸이 사위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생기면, 그 불명예가 집안 담벽을 넘어가기 전에 자기 딸에 대한 “명예살인”을 허락한다는 의미란다. 이게 발칸의 회교도다.

  작가가 굳이 이 대목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이상 내비치는 건 틀림없이 복선이겠지? 그렇겠지? 아니면 혹시 독자가 그쪽으로 믿으라는 작가의 짓궂은 의도? 아이고, 소설 읽기도 쉽지 않다. 뭐든 과하게 발전하면 그렇다니까.

  만일 이 총알 하나가 혼수품이라면, 대 자눔 라드지크 가문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헬레나에 의한 불륜이 벌어지고, 그녀의 심장엔 비록 금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총알 하나가 박히든지 관통해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사건이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불운은 언제나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서 빅토르와 이스마일의 어머니이자 대 자눔의 젊은 아내인 ‘그 여자’의 불명예도 언젠가는 암시되고, ‘그 여자’의 죽음 역시 단순한 병사가 아니어야 할 터.

  에그머니, 너무 많이 떠들었다. 물론 내가 쓴 줄거리가 진짜 작품에 나오는지 아닌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작품의 발단, 전개 과정을 읽다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니까. 뒤에 어떤 결론이 날 지는 다음으로 하고 말이지. 하나 더 일러드릴까?

  어느 날 새벽 여섯 시 15분 전. 이스마일은 오르파돌을 한 알 먹고 자는 바람에 잠이 깨기는 했어도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폭발음이 들려 곧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어디서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단지 폭발음. 흠. 총소리. 집안의 누군가가 총상으로 심장손상을 입어 죽었다. 단 한 발의 총알. 베이지색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 위에서 죽은 모습.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권총을 가슴에 밀착시키고 발사했고, 총알은 심장과 견갑골을 뜷고 나가 침대 바닥에 변형된 모습으로 발견됐다. 1차 조사에서 검시관은 자살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결론으로 맺지는 않았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상태로. 누굴까? 누구들일까?

  알바니아에서는 누가 누구를, 아니면 둘이 서로 죽음을 각오해가면서 사랑을 할까? 그것도 발칸식 사랑일까?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4-10-10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녘의 일루셔니스트 시리즈 폴스타프님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제목보고 알바니아 작가의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스페인 사람이군요. 이 책도 마음에 드네요.😊

Falstaff 2024-10-10 16:18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가 이미 끝났더라고요. 품절, 절판 책도 수두룩하고요.
이 책 괜찮습니다. 걍 도서관 가셔요. ^^

다락방 2024-10-10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은 것 같아서 뭐라고 써놨나 찾아보니 여주인공의 벌어진 치열에 대해서만 써놨네요. -.- 덕분에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는.. ㅠㅠ

Falstaff 2024-10-10 16:22   좋아요 0 | URL
앗, 스페인 아가씨 얘기군요! ㅎㅎㅎ
앞니 치열이 조금 벌어진, 특히 위쪽 앞니 틈이 있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한테 뻑 가는 남자 작가들이 꽤 있더라고요. ㅋㅋㅋ 지금 팍 떠오르는 인물이 만화가 고우영이었습니다.
 
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위화, 이 진절머리 날만큼 유쾌한 설레발장이가 마음 독하게 먹고 무려 1,000 쪽의 (위화의 다른 저작과 비교하면) 길고 긴 장편소설을 썼다. 작가 스스로가 후기에서 말했듯이 처음엔 가비얍게 한 200 쪽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거야? 기어이 주인공 이광두와 송강, 이 의붓형제의 일대기 전부를 담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건 이 한없이 슬프고 유쾌한 주인공들이 개같은 가난과 문화혁명의 야만과 개혁개방에 따른 처절한 실패와 성공, 다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천박함까지 온 몸으로 다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식 공중 화장실을 아시는가? 쭈그리고 앉으면 겨우 아랫도리만 가릴 수 있는 낮은 칸막이에 쪼르르 앉아 일을 보는 재래식. 지방에 따라 그놈의 칸막이 마저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남녀 사이에는 벽이 쳐져 있지만. 그래도 중국인데 어딜 삼강오륜을 통째로 잊을 수 있겠는가. 여기까진 나도 알고 있었던 그냥 인류학적 지식이다. 자, 그럼, 자유낙하 방식의 재래 화장실에서 고약하기 그지없는 암모니아와 메탄의 숙성 가스, 그리고 똥파리 애벌레의 머리카락 속과 콧구멍, 귓구멍 침공을 굳은 의지로 인내하며 변기 속으로 깊이 고개를 거꾸로 디민 상태에서 고개를 활랑 뒤집어 칸막이 옆 여자 화장실을 올려다본다는, 이런 걸 상상이라도 한 번 해보신 분, 거수하시압!

  주인공 이광두는 실제로 그렇게 해보았으며 그 때 다섯 명의 여인네들의 거대하고 자그마하고 동그랗고 탄탄한 엉덩이를 보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유난히 예쁜 엉덩이를 발견하고는 한 술 더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광두의 눈 바로 앞에 놓였던,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았던 그 엉덩이는 다섯 개 가운데 가장 그 모양이 둥글어서 마치 뭔가를 말아놓은 것 같았고, 탱탱한 피부는 조금 위쪽의 꼬리뼈를 살짝 드러나게 했다. 심장이 사납게 콩닥거리는 가운데 꼬리뼈 반대쪽에 난 털을 보고 싶었다. 여자의 거기 털은 어디서부터 자라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몸을 더 깊숙이 파묻고 머리를 처박아서 여자의 거기 털을 거의 다 보게 되었을 무렵, 뒷덜미가 낚아채져 버렸다." (1권 16쪽)


  근데, 이 못말리는 사건이 우연이 아닌 것은, 이광두가 태어나던 14년 전의 어느날 그의 진짜 아버지이자 날건달 잡종자 역시 똥통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여자들의 엉덩이를 훔쳐보다가 그대로 똥통에 빠져 온갖 건더기에 기도가 막혀 그만 세상 하직했던 바이니 위의 인용은 말 그대로 내리물림이었던 것. 그런 이광두가 나중엔 2,000만 달러 약 220억원을 들여 러시아의 우주선을 타고 가는 패키지 여행을 떠날 정도의 큰 부자가 되는 인생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데, 어떻게 해서?

  자, 난 단연코 줄거리에 관해선 더 이상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


  그러면 이 세권짜리 책이 참 웃기고 재미나기만 한 것 같이 생각하실 수 있을 터이다. 저번에 위화의 <인생>에서도 얘기했듯이 중국의 13억 잠재독자한테 책을 팔아먹기 위해서 그냥 재미만 있으면 절대 안 된다. 13억 인구가 그냥 우습게 보일지 모르는데 그건 우리나라 원화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게 얼마나 큰 숫자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13억? 얼마나 거대한 인구인지 내가 계산해드리지.

  13억 중국인들이, 원래 점잖은 분들이라서 다른 인종들과 비교해 무척 적은 양인 하루 200 그램 씩의 똥 오줌 슬럿지(좀 쉬운 얘기로 '건더기')를 배설하신다고 가정하면, 하루에 260,000,000 킬로그램이고 이걸 드럼통에 담으면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30 만 개의 드럼통이 필요한데, 드럼통의 바깥쪽 높이가 90 센티미터라 130 만 개의 드럼통들을 똑바로 세우면 1,170 킬로미터를 위로 올릴 수 있다. 매일. 이 높이, 실감이 나지 않으시리라. 이해를 돕기 위해,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산을 132개 포개 놓은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는 말씀.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얘기를 좀 더 천문학적, 우주공학적으로 옮기자면, 그래서 일년도 안 되는 328일 동안 중국인들의 분뇨를 모아 드럼통에 담은 다음 똑바로 높이 세우면, 그걸 타고 올라, 오직 중국인들의 똥 오줌만 부둥켜 안고 드디어 인류는 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으때, 으시으시하시지? 그러니 이광두의 생부가 똥통에 빠져죽은 거, 그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던 거다.

  이 거대한 중국인들한테 책을 팔아먹어야 하는 중국 전업작가의 입장에서 당연히 위화는 정말 터무니 없게 웃겨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이 책 속에, 같은 눈물이라도 종류를 달리한 또다른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과 슬픔과 염병무지할 분노와 애뜻함과 살뜰, 안타까움 그리고 인정, 사랑, 형제애, 의리 이런 것들도 같이 담아냈다. 그래서 억지스러운데가 있고 분명한 과장과 두드러지게 의도한 역설,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연출된 모습임을 뻔히 알면서도 즐거이 감동해줄 수 있었다.


  위화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잘 나가는 작가로 현재 자기 수입에 만족하면서 달마다 통장에 꽂히는 인세만 가지고도 남은 세월 편히 즐길 수 있는 위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그는 개혁개방 전, 그 너머 문화혁명 전, 비교적 순수했던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아닌가싶었다. 아, 이 독후감을 쓰면서 어쩔 수 없는 나의 고민. 그건 왜 위화의 고민을 이렇게 생각하는지 밝힌다면, 이 책의 마지막 모습, 즉 결론에 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그걸 얘기하느니 난 차라리 위화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한 내 생각을 취소하는 편을 택하겠다.


.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4-10-08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 이 책 처음부터 참 웃기고 더럽죠 ㅋㅋㅋㅋㅋ 말씀하신대로 인구가 하도 많으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ㅎㅎ
잊고 있었는데 폴스타프님 덕분에 다시 웃습니다.

Falstaff 2024-10-09 07:28   좋아요 2 | URL
ㅎㅎㅎ 오래 전에 읽고 독후감을 올리지 않았더라고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지 않은 독자는 없을 듯한, ㅋㅋㅋㅋ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명작입니다!

moonnight 2024-10-08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앜 상상해버렸어요ㅠㅠ

Falstaff 2024-10-09 07:28   좋아요 2 | URL
킄! 그러면 어떻습니까. ㅎㅎㅎ 유쾌하게 슬픈 책이잖습니까.

바람돌이 2024-10-08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읽은 책이 나와서 반갑네요. ㅎㅎ
읽은지 오래 돼서 결말이 어쨌는지 생각도 안나긴 하지만요. 그럼에도 저는 문화혁명의 그 황폐함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 인상적으로 읽긴했어요.

Falstaff 2024-10-09 07:30   좋아요 2 | URL
아휴 중국의 그 당시는 참. 정말 여러가지로 구질구질하고 망가졌던 시절... 그 때를 넘긴 작가들은 시대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케이 2024-10-10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친구가 이 소설을 읽고 너무 충격받았다고 읽으면서 미친 듯 울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게 3권이나 되는 책인진 몰랐네요.
그 친구는 이 책에 반해 그 뒤로 한국에 출판된 모든 위화의 책을 읽어버렸어요.
외국 유학하는 사람이 일본인/중국인 비교에 일본인은 어떻게 저러냐 싶을 정도로 규칙적이고 근면성실한데 중국인은 진짜 망했다고 너 이러다 큰일난다고 아무리 말해도 천하태평이라고 진짜 큰일 닥치기 전엔 눈하나 꿈쩍 안한다고 써놓은 걸 봤거든요.
13억 인구와 살다보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모양입니다.
세권이나 되서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네요. 길긴 해도 지루하진 않겠죠...

Falstaff 2024-10-10 16:26   좋아요 1 | URL
친구분의 무엇이 스토리하고 맞았던 모양입니다.
이광두처럼 어처구니없는 인간들도 많지만, 걔네들 하는 말이... 서울대 들어갈 수 있는 인재들이 너네 나라 인구 수만큼 있을 거라고.... ㅋㅋㅋ
하여튼 재미난 나라입니다. 도라이들도 많고 천재들도 많은. 하여간 복잡해요.

2024-10-10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11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10-16 09:33   좋아요 1 | URL
제가 갖고 있는 책은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4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백종유 옮김 / 들녘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추운 나라 사람들이 쓴 (조직)폭력, 살인, 강간 등이 난무하는 범죄소설은 스티그 라르손의 B급 명작 “밀레니엄 시리즈”로 이미 졸업했다. 그럼에도 <살인정부업자의 청소가이드>를 선택한 이유는 출판사 들녘이 낸 “일루저니스트 세계의 작가” 시리즈가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츠쯔젠, 다니엘 켈만, 에펠리 하우오파,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등 당시엔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작가들의 훌륭하다 까지는 아니지만 매력적인 작품을 소개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서관에 책이 있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백수 입장에서 내돈내산 해 낭패를 보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게 웬 떡, 할 수밖에.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의 철자는 이렇다. Hallgrimur Helgason. 1959년에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출생한 아이슬란드 사람이다. 그 나라 글자로 쓴 알파벳 표기는 같은 유럽 사람들도 제대로 읽지 못한단다. 흔히 알고 있는 패밀리 네임, Helgason은 가문의 핏줄을 타고 전해지는 이름이 아니라 애칭이란다. 아빠는 헬기 하들그림손 Helgi Hallgrimsson. 아버지의 Hallgrimsson을 물려받아 이름을 하들그리뮈르Jallgrimur로 지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도 이런 아이슬란드의 이름 짓기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온다.

  하들그리뮈르는 1980년대 전반부에 아이슬란드 미술 아카데미와 뮌헨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화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당연히 당시에 유행하던 미니멀과 개념 미술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동인과 결별한 후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그려 미국 보스턴과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살아 있는 화가가 돈을 벌기는 지독하게 어려운 법이라서 헬가손은 밥을 빌어먹기 위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신문사에 정기적으로 뉴욕생활에 관한 기사를 팔아 현금을 얻는다. 기사가 괜찮았는지 아이슬란드 국영라디오에도 뉴욕 맨해튼의 미드타운에서의 생활 기사를 보내 더 쏠쏠한 경비를 얻어 쓸 수 있어, 어라, 그림보다 글을 쓰는 게 돈이 더 되네, 싶어 작업시간을 글 쪽으로 늘이다가 급기야 소설까지 쓰게 된 인물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소설작업을 시작해 1990년에 첫 소설 <헬라>를 출간하고,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다시 개인전을 하는 와중에 두번째이지만 첫번째 작품과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을 <멋지게 될 거야>를 출간한다. 1995년에 다시 뉴욕 브루클린에서 살면서 <레이캬비크 101번지>를 썼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한 첫번째 유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기분이 삼삼해진 하들그뤼미르 헬가손은 1996년부터 아예 고향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로 귀국, 말뚝을 박았다.

  레이캬비크로 돌아온 하들그뤼미르는 계속해서 미술회화, 드로잉, 만화 같은 방향으로 시야를 넓히는 동시에 자기 작품이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이어 계속적으로 소설을 써서 드디어 대표작 <청부살인업자의 청소가이드>를 완성하고, 이만큼은 아니지만 작은 히트작 <1000° 여인>이 나온다. 이외에도 잦은 미술전시와 연극, 영화까지 온갖 곳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명인의 자리에 오른 것 같다. 좋은 일이다. 이이의 작업이 나하고는 맞지 않아서 지랄이지만. 나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운 좋은 놈을 질투하지 않는다.” 하들그뤼미르 헬가손, 당신의 인생을 즐기기 바란다.


  한 시절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리던 나라, 지금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렇게 다섯 나라로 갈라지고 말았고, 이 분리 독립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던 내전은, 원래 모든 내전이 국가간 전쟁보다 훨씬 잔인한 법이라, 이들의 영토는 거덜이 나고 말았다. 당시 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체크무늬를 축구 유니폼 상의에 장식했던 크로아티아에서 대대로 사냥을 업으로 하던 보크시치 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전형적인 발칸 반도 남자들인 이 세 부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몽땅 지원병으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부대장이 보니까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 벌어질 자리에 가문의 남자들을 몽땅 몰아넣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버지와 형만 보내고 막내는 2선에서 경계근무를 세운다. 발칸의 사냥꾼 족보의 장남이라는 피가 흐르는 형은 귀신 같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 불리해져 옆의 동료들이 총을 맞아 피식피식 쓰러지는 걸 보더니 한 순간 아드레날린의 과하게 분비되는 바람에 홀로 돌격 앞으로, 각개약진을 해버렸고,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한 세르비아 병사들 몇 명을 총검으로 도륙을 냈으나, 아무리 내전이라도 이미 총검술의 시대는 가버려, 주위에 몰려든 세르비아 병사들이 간단하게 총알을 퍼부어 죽여버렸다. 말이 필요없는 영웅의 죽음이었지만 이 분리독립을 위한 내전에서는 자신의 신체와 목숨을 내 놓은 병사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을 주어지지 않았다. 같은 날 아버지는 세 불리를 감당하지 못해 후퇴하는 과정에서 독후감엔 차마 밝힐 수 없는 일로 총을 맞아 절명하고 만다. 이에 눈이 돌아버린 막내, 토미슬라브 보크시치는 한 순간에 전쟁귀신이 되어 늙은 ‘여성’을 포함해 수십 명의 세르비아 병사를 죽이는 전과를 올린 후, 이제 아버지와 형이 죽어 없어진 크로아티아에 정이 떨어져 미국으로 이민해 버렸다. 그리하여 폴 오스터가 쓴 <4 3 2 1>의 민스크 출신 중요한 등장인물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뉴욕의 이민국 안에서 이커보드 퍼거슨이 된 내력과 비슷하게, 토미슬라브 보크시치는 ‘톰 보식’이 되었으며, 이후 탈리아 마피아들도 거친 방면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발칸 크로아티아 마피아에 합류, 원샷원킬의 대명사이자 전문 청부살인업자로 변신해 잘 먹고 잘 사는, 한 마디로 신세 고쳤다.

  청부살인업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성을 유지하는 일. 이를 위하여 토미슬라브, 톰 보식은 “자그레브 사모바르”라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으며, 인도계 페루 여성 무니타와 정신없이 사랑을 하고 있다.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열심히 하긴 한다. 물론 알건 모르건 살인청부업자와 연애를 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만.

  톰은 전설의 원샷원킬이다. 66개의 총알을 써서, 66명을 저세상으로 보내 이 방면에도 기네스북이 있다면 당연히 이름을 기록해 마땅하다. 근데 다 좋을 수 있나, 세상일이. 66번째 피의뢰인이 하도 좋은 차를 타고 있어서, 간혹 좋은 차가 보일 경우 대상자만 소거하고 차는 중고차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친구의 형에게 넘겨 가외수입을 올리고는 했는데, 이번엔 정말 좋은 차라, 대상자가 굳이 문 밖에 있을 때 역시 딱 한 방으로 보내버렸고,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쓰레기장에 버렸는데, 아뿔사, 죽은 인간이 FBI였다. FBI는 범 미국적으로 열을 받아 당장 악마 같은 스나이퍼를 찾아 죽이려 날뛰기 시작했고, 레스토랑 자그레브 사모바르의 사장이자 톰의 고향 선배인 다칸이 먼저 정보를 입수해 톰에게 스몰렌스크가 고향인 이고르 일리치라는 가명의 여권과 비행기표를 건네줘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항에 도착한 톰. 차를 타고 오면서 브루클린의 대형 전광판에 벌써 자기 사진이 올라왔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우짜고 저짜고 하는 자막까지 달린 것을 본 톰은 대기소에서 비행기를 기다릴 수 없어 남자화장실 좌변기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 칸에 (변장을 위해 머리를 박박 민) 톰과 비슷하게 대머리이며 퉁퉁하게 살진 남자가 들어온 것을 알고, 어떻게 했느냐 하면, 숙달된 조교의 솜씨로 소리 없이 칸막이를 넘어가 역시 소리 없이, 무기도 없이 한 방에 조용히 목을 비틀어버렸다. 그리하여 자기가 입고 온 옷을 싹 벗고, 남자의 옷으로 갈아 있었는데, 아뿔싸, 이 남자는 이름을 “데이비드 프렌들리”라고 하는 성공회 신부였던 거다. 행선지도 자그레브와는 거리가 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이때까지는 몰랐을 걸? 프렌들리 신부로 변장한 철저한 무신론자, 교회에 갈 일은 결혼할 때와 죽어 장례식을 당할 때 말고는 없다고 여겨온 토미슬라브 보크시치가 뉴욕에서 직항으로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 도착하면 바로 다음날 TV 생방송에 나와 전 레이캬비크 시민들한테, 이 가운데 정말로 종교 TV를 볼 인간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지만, “데이비드 프렌들리” 신부의 자격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이 거하심을 증명하는 연설을 하게 되니 말이지. 거기다가 미국 FBI는 불과 몇 시간만에 미국의 공항에서 발견한 변사체의 정체를 파악할 것이고, 그의 목적지도 알아낼 것이며, 그럼 당연히 수사협조의뢰를 할 예정이리라. 만일 이란이나 북한이 아이슬란드에 수사협조를 의뢰하면 엿이나 먹어라, 하겠지만 거대국가 미국이 한 마디라도 했다 하면 그걸 어떻게 모른 척하겠느냐고? 그리고 하나 더. 뉴욕의 암흑가에 그렇게 분탕칠을 했으니 FBI가 자그레브 사모바르 파를 내비두겠어? 그럼 오랜 세월 동지였지만 천생 의리없는 깡패새끼에 불과한 보스 디칸과 크로아티아에서부터 죽마고우 니코는 또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르잖여. 거 참.

  근데 작가 하들그뤼미르 헬가손이 크로아티아 출신 토미슬라브 보크시치를 다른 곳도 아닌 자기네 고향 레이캬비크로 초대를 해놓았으니 그럴듯한 연애사건 하나 선물해야 할 것 같지 않아? 말로만 청부살인이 아니라 정말 전문 청부살인업자를 등장시킨 바에 그럴 듯한 액션도 한 두 번 등장해야 하겠고. 그리하여 결론은, 다분히 대표작이 될 만큼 잘 쓴 B급 소설. 시간 죽이는데 더 이상 좋은 게 없을 듯. 역시 이런 작품엔 적절한 폭력과 베드씬이 나와 줘야 한다니까! 본문만 4백쪽, 하루 날 잡으면 그날 다 읽고 동태찌게에 쐬주 한잔할 수 있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4-10-08 14: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4백페이지인데 하루만에 다 읽고 쐬주 한잔은???? ㅎㅎ 폴스타프님만 가능합니다. ^^

Falstaff 2024-10-08 19:55   좋아요 2 | URL
아이구... 이 책은 정말 금방 읽습니다. 진짜로 선택하시려면요, 제목에서 말했다시피 B급 소설이란 걸 꼭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ㅋㅋㅋ 재미있습니다.
 
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단편 다섯, 중편 하나가 실린 작품집. 사기당한 느낌이다. 마지막에 실린 80쪽짜리 중편 <그랑 주떼>는 읽은 책이다. 같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십 년 전에 찍은 단행본 <그랑 주떼>와 같은 작품이다. 본문을 다 합해도 220쪽에 불과하거늘 여기서 80쪽 분량을 이미 단행본으로 사서 읽은 독자가 이 책을 샀으면, 물론 목차 제대로 안 보고 산 작자가 눈이 삐어서 삽질을 한 거겠지만, 어떤 기분일까? 아마 그지 같은 경우라고 푸짐하게 욕 한 번 했을 거같다. 욕 먹어 싸다. 모른 척하고 이렇게 책 내는 데 동의한 김혜나 씨도 반성… 이하 생략. 게다가 김혜나 스스로 <그랑 주떼>는 전작이자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제리>와 <정크>에 이은 청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는데 말씀이야.

  지금은 민음사에서 절판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독자가 <정크>는 모르겠고 <제리>, 김혜나 표 <제리>는 기억할 거 같다. 참 구질구질한 청춘들이 등장하는 이 삼부작으로 말할 거 같으면, 무진장 징징댔지 않나 싶다. 인천에 가까운 전문대학에 다니며, 설마 진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한 듯 함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 무한 섹스와 동성애와 약물에 전 ‘자기 학대’의 그림이, <제리>에서는 처음이라 그랬는지 안타깝고, 마음 짠하고, 불쌍하더니 <정크>에서도 마찬가지니까 세상에나, 그렇게 한 순간에 정이 뚝 떨어지던 경험. <그랑 주떼>로 와서 김혜나는 자기 학대의 시작을 조금씩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앓았던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화되고 사시가 생겨 초등학교 다닐 때 급우들한테 사팔뜨기라고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래서 공부도 못하던 실제 경험(어제 읽은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에서도 수막염에 의한 청력 손실이 나오더니 오늘 <그랑 주떼>에서도 수막염. 이 정도면 정말 조심해야 할 질병이다.) 진짜인지, 소설이라 있을 법한 거짓인지 모를 초등 저학년 시절에 당한 성폭력의 기억. 작가 스스로 “청춘 삼부작”이라 했으니 3부에서 밝힌 이 두 가지 내상, 성처로 인해 <제리>와 <정크>의 주인공들이 그리 자기 학대의 삶을 ‘아무렇게나’ 꾸려가면서도 방향 찾기조차 포기를 했나 보다.

  필리핀에서 온 외숙모 로레나의 이야기인 <로레나>와 타이틀 롤인 <청귤>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랑 주떼>도 이미 읽은 텍스트만 아니었다면 괜찮았다고 할 것 같은데 암만해도 이 얘기는 기분 나빠 못하겠다.

  전체적으로 김혜나 표 맞다. 상처를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양 엄지 손가락으로 환부를 넓혀 벌건 속살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째졌는지 독자의 눈으로 목격하라는 듯한 날 것의 조망. 데뷔작인 <제리>에서는 더 했다. 이 책 초판이 2018년이니까 82년생 혜나 씨 서른여섯 살, <제리> 나오고 8년 지났을 뿐인데 그래도 부드러워진 거다.

  단 한 편만 고르라면 나는 단연 <로레나>를 선택한다. <로레나>만 골라서 별점을 매긴다면 넷 이상. 한 권을 통째로 말하자면?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4-10-07 09: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빌려서 읽으셨죠? 그러면 다행, 아니면 좀 많이 억울하겠어요. ㅎㅎ

Falstaff 2024-10-08 04:26   좋아요 2 | URL
넵. 다행히 빌려 읽었습니닷! ㅋㅋㅋ 아니었다면.... 안 샀을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렇네요.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

  내가 레이철 커스크를 한 번 읽었나? 아닌 줄 알았다. 그러다가 원래 제목이 The Country Life인 것을 우리말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 생활>로 바꾸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낸 것을 읽은 게 기억났다. <…시골생활>로 서머싯 몸 상을 받아 “모던-클래식”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지. 서머싯 몸 상은 서른다섯 살 미만의 청년 작가에게 주는 건데 1998년엔 네 명의 신진 작가가 받았다. 1997년과 1999년에도. 얼핏 수상자 면면으로 보니, 도리스 레싱, 킹슬리 에이미스(마틴의 아빠), V.S. 나이폴, 앤절라 카터, 마틴 에이미스, 줄리언 반스, 피터 애크로이드, 새라 워터스, 존 맥그리거, 제이디 스미스 등인데 원래는 한 해에 한 명 주던 걸 요즘엔 대여섯 명한테 확확 뿌려준다. 그러니 당신이나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영국작가(셰익스피어, 필딩, 디킨스, 새커리는 빼고)가 다 받았다고 생각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뭐 그렇다는 것이지 수상자가 많은 걸 가지고 레이철 커스크가 별로다, 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레이첼 커스크는 캐나다 서스캐처원(이곳 북부에는 한 번 가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주 새스커툰에서 영국인 부모의 (순서에 입각해) 딸, 딸, 아들, 아들 가운데 둘째로 1967년에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거의 L.A에서 보내다가 1974년에 드디어 조국(어째 이제는 이 단어가 좀 어색하다)인 영국 서퍽에 정착한다. 일곱 살. 앞뒤 잴 거 없이 완벽한 영국사람이다. 성공회가 아니라 가톨릭 가정이긴 하지만. 공부도 잘했나 보다. 옥스포드 뉴 칼리지 국문과 졸업했다. 당연히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여 쓰고 있는데, 커스크가 첫 작품 <아그네스 구하기>를 발표한 것이 1993년 스물여섯 살 때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을 출간하기 전까지 뭐했을까? 은행가와 짧게 첫번째 결혼생활을 했다는데 부모에 이어 은행가 남편에 기대 자기만의 방과 연 5백 파운드를 구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다른 경제활동을 했을까? 했겠지. 아닐 수도 있겠다. <…시골생활>과 <…변주곡>의 여성 주인공은 법무관과 교수/학과장이라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대단한 수준의 인텔리겐치아 계급이기는 하지만 계기가 생기는 순간, 가차없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시골 부자 가정의 오페어로 들어가고(<…시골생활>), 아니면 귀 한 쪽이 들리지 않는 외아들에 전념하기 위해 전업주부를 선택한다.


  왜 이딴 거 가지고 까탈이냐고? 아니, 거 뭐.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 의하면 레이철 커스크가 “영국 젊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제일 앞에서 말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남자의 일상을 통해 현대 페미니즘의 중요 쟁점인 부부간 역할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해서, 그게 좀 께름칙해 그렇다.

  토니와 토머스 브래드쇼 부부는 둘 다 잘 나가는(것처럼 보이는) 직장인이었다. 잠깐 동안은. 토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딸 알렉사를 낳고, 섹스와 인연을 (거의)끊은 기간을 다 포함해 8년간 하는 일 없이, 물론 공부는 계속 했겠지, 가정주부로 살다가 한 달 전에 새 직장, 1류는 아니지만 2류 정도 되는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는 덜컥, 학과장 자리에 올랐다. 런던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몬테규 가에 고만고만한 집에 산다. 부르주아적 분위기가 풍기지만 정작 주민들은 박봉에 시달리는 성마른 인상을 한, 그러니까 정말로 박봉에 시달리지는 않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전문직 종사자가 대부분이다. 토니가 학과장이 되니, 남편 토머스는 여름 휴가를 받은 후, 여름이 끝날 때까지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9월이 되자 스스로 알아차린 것이, 이젠 자유스러워졌거나 추방당했다는 거였다. 어디에서부터? 직장에서의 자유 또는 추방. 즉, 이제부터 토머스는 자유의지로 직장인이 아닌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했다는 거다. 대신 토니가 적지 않은 연봉을 받는 가장이 되고. 이렇게 작품은 제목대로 브래드쇼 가족의 변주곡이 되는 거다.

  토니와 토머스 브래드쇼 부부만 나오면 아무래도 분량이 적어질 것 같았을까? 커스크는 그래서 토머스의 형 하워드과 동생 레오 가족도 우정출연 정도의 수준이 아닌, 당당한 조연 정도의 무게로 등장해 나름대로 에피소드를 만든다. 제목에 변주곡variation을 붙였으니 형과 아우의 성향과 사는 방법은 달라야 하겠지? 형 하워드는 브래드쇼 집안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25세이 이미 부자가 됐고, 그때부터 머리도 벗겨지기 시작한 반면, 막내 레오는 완벽할 정도로 편안한 삶을 살아, 토머스가 보기에 레오가 하는 일에는 어쩐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런 상태를 토머스는 하워드는 장조major, 레오는 단조minor의 삶이라 한다. 그럼 토머스 부부는? 장조와 단조 사이의 조변화 같은 변주의 삶이지.

  이쯤에서 앞에서 했던 걸 이어보자. 남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主婦 말고 主夫) 선택하면 작품이 페미니즘이 되는 건가? 뭐 그럴 수 있기는 하겠다. 굳이 그렇게 보자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언제적 이야기? 2009년작. 21세기다. 한 가족의 가장(여편이 됐든, 남편이 됐든)이 갑자기는 아니겠고 누적된 타격에 조금씩 금이 가 번아웃이 되는 걸 느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는 힘들겠지만, 그래서 사회 여러곳에서 사고가 터지는 거겠지만, 만일 그 상태에 이르면 부부간에 깊이 이야기를 해서, 이제껏 일 한 사람은 쉬어야 마땅하다. 대신 먹고 살기 위해 다른 편이 수입을 담당해야 하겠지. 그게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떤데?

  실제로 이 책에서 토머스 브래드쇼는 정식 연주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베토벤과 쇼팽도 치고,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다가 왼손과 오른손이 똑 같은 혹은 비슷한 정도의 비중으로 다른 박자로 연주(템포 루바토!)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하기도 한다. 아무리 아마추어라 해도 치열한 건 치열한 거다. 그러면 <…시골생활>에서 스텔라 기븐스의 <춥지만 편안한 농장>과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면, 혹시 토머스 브래드쇼의 피아노 연주는 글을 쓰기 위해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를 주장하는 버지니아 울프를 염두에 둔 거 아냐? 아니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반면에 아내이자 알렉사의 엄마인 토니는 2류 대학 국문과의 학과장으로 있으면서 사회 생활 상 빠질 수 없는 파티에 갔다가 생전 처음 만난 나이든 신사, 평생 스톡홀름에서 산 독일인 의사, 석 달 동안 런던의 병원에 파견 온 이방인과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원나잇을 즐기고, 샤워도 하지 않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에 돌아온다. 설마 이 책이 이래서 페미니즘이란 것도 아니지? 아니겠지? 결말을 알면 더 기가 막힐 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무리 읽어도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더는 회사에 다니기 싫다. 누구나 다 경험한다. 나도 수십번은 그랬을 거다. 그러나 정말로 때려치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때, 우연히 아내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 게다가 대학의 학과장이다. 자기가 벌지 않아도 아내의 수입이면 하나밖에 없는 딸 학교 다니는 거하고, 국영수 학원 보내는 거하고,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때마침 여름 휴가다. 유럽인들 휴가는 무척 길다. 근데, 원래 오래 놀면/쉬면 더 놀고/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여름이 끝났다. 휴가도 끝났지만 토머스는 직장에 가기 싫다. 아내 토니는 새로 학과장이 되어 일상에도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이는 듯하다. 나는 휴가철에 직접 해보니까 집안일, 밥짓고, 국 끓이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게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럼 아내한테 말이나 한 번 해볼까? 이런 생각 드는 것도 별스럽지 않다. 토니도 생각해보니, 여차하면 이런 사람들 간혹 “극단적 선택” 한다는 걸 TV에서 봤거든. 겁이 덜컥 날 수도 있지. 그래서 어이 토머스, 관둬, 때려 치워. 했겠지, 과부 되는 것보다는 낫잖아.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4-10-04 04: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김혜나, 《청귤》
화요일.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목요일. 수사나 포르테스, <알바니아의 사랑>
금요일. 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 ----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