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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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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다섯, 중편 하나가 실린 작품집. 사기당한 느낌이다. 마지막에 실린 80쪽짜리 중편 <그랑 주떼>는 읽은 책이다. 같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십 년 전에 찍은 단행본 <그랑 주떼>와 같은 작품이다. 본문을 다 합해도 220쪽에 불과하거늘 여기서 80쪽 분량을 이미 단행본으로 사서 읽은 독자가 이 책을 샀으면, 물론 목차 제대로 안 보고 산 작자가 눈이 삐어서 삽질을 한 거겠지만, 어떤 기분일까? 아마 그지 같은 경우라고 푸짐하게 욕 한 번 했을 거같다. 욕 먹어 싸다. 모른 척하고 이렇게 책 내는 데 동의한 김혜나 씨도 반성… 이하 생략. 게다가 김혜나 스스로 <그랑 주떼>는 전작이자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제리>와 <정크>에 이은 청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는데 말씀이야.
지금은 민음사에서 절판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독자가 <정크>는 모르겠고 <제리>, 김혜나 표 <제리>는 기억할 거 같다. 참 구질구질한 청춘들이 등장하는 이 삼부작으로 말할 거 같으면, 무진장 징징댔지 않나 싶다. 인천에 가까운 전문대학에 다니며, 설마 진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한 듯 함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 무한 섹스와 동성애와 약물에 전 ‘자기 학대’의 그림이, <제리>에서는 처음이라 그랬는지 안타깝고, 마음 짠하고, 불쌍하더니 <정크>에서도 마찬가지니까 세상에나, 그렇게 한 순간에 정이 뚝 떨어지던 경험. <그랑 주떼>로 와서 김혜나는 자기 학대의 시작을 조금씩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앓았던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화되고 사시가 생겨 초등학교 다닐 때 급우들한테 사팔뜨기라고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래서 공부도 못하던 실제 경험(어제 읽은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에서도 수막염에 의한 청력 손실이 나오더니 오늘 <그랑 주떼>에서도 수막염. 이 정도면 정말 조심해야 할 질병이다.) 진짜인지, 소설이라 있을 법한 거짓인지 모를 초등 저학년 시절에 당한 성폭력의 기억. 작가 스스로 “청춘 삼부작”이라 했으니 3부에서 밝힌 이 두 가지 내상, 성처로 인해 <제리>와 <정크>의 주인공들이 그리 자기 학대의 삶을 ‘아무렇게나’ 꾸려가면서도 방향 찾기조차 포기를 했나 보다.
필리핀에서 온 외숙모 로레나의 이야기인 <로레나>와 타이틀 롤인 <청귤>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랑 주떼>도 이미 읽은 텍스트만 아니었다면 괜찮았다고 할 것 같은데 암만해도 이 얘기는 기분 나빠 못하겠다.
전체적으로 김혜나 표 맞다. 상처를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양 엄지 손가락으로 환부를 넓혀 벌건 속살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째졌는지 독자의 눈으로 목격하라는 듯한 날 것의 조망. 데뷔작인 <제리>에서는 더 했다. 이 책 초판이 2018년이니까 82년생 혜나 씨 서른여섯 살, <제리> 나오고 8년 지났을 뿐인데 그래도 부드러워진 거다.
단 한 편만 고르라면 나는 단연 <로레나>를 선택한다. <로레나>만 골라서 별점을 매긴다면 넷 이상. 한 권을 통째로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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