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4
이반 부닌 지음, 최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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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은 1870년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오랜 귀족이자 광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 집안이 휘황찬란해서 소개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라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듯하다. 다만 이반의 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부닌으로 말하자면, 이반은 훗날 부친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강인한 인물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성질이 급하고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으며, 충동적이지만 관대하고, 연극적일 정도로 웅변적인, 완전히 비논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크림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진 와인 맛도 몰랐는데, 전쟁이 끝나 돌아온 다음엔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었으나 전형적인 과음자가 됐다고. 왜 아버지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 하면 중단편 소설 일곱 편을 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에서 작가의 유소년 경험이 가장 많이 들어있음 직한 중편 <수호돌>에 이런 성격의 형제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유일하게 작품의 주인공이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평생 죽도록 일을 해서 기어코 백만장자가 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이제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아내와 딸을 동반해 2년 기한으로 유럽을 여행하기로 결정, 초호화 여객선 아틀란티스 호에 탑승해 유럽땅, 이탈리아의 카타리 섬, 가장 호화로운 호텔의 디럭스 스위트룸에 여장을 푼다. 그러나 세계최고의 휴양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허와 숙명의 페이소스.

  다른 작품은 러시아 귀족, 부르주아, 장교들이 주인공이며 다분히 19세기적 운명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의 광고글을 보면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의 명맥을 잇는 20세기 러시아 작가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른 이해가 간다. 다만 한 작품 <수호돌>의 사실상 주인공은 나탈리야라는 이름의 집안 하녀이자 화자의 아버지의 젖누이, 유모의 딸이다. 제일 길기도 하니, <수호돌>의 스토리를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


  수호돌은 무슨 돌멩이가 아니다. 작품 속 지명. 화자 ‘나’는 루네보에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미 오래 전에 수호돌을 떠나 할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엄마 올가 키릴로브나 소유의 영지가 있는 루네보로 이사해 할머니가 세상 뜨자마자 영지를 홀랑 잡아 잡순 거였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불평을 한 적이 있다. “한 명. 흐루쇼프 집안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남았어. 수호돌이 아닌 이곳에.” 이 단 한 명이 화자 ‘나’. 죽어가는 아버지는 그 마당에서도 딱 한 명 남은 (흐루쇼프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 후손이 수호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 거다. 아버지 주장에 따르면, 수호돌은 저주받은 좋은 곳이라고. 좋지만 저주받았다고.

  사실상의 주인공 나탈리야는 결혼하지 않았다. 19세기 귀족 가문의 하녀이긴 하지만 흐루쇼프의 둘째 아들이자 ‘나’의 아버지인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와 젖누이 사이라서 자신을 ‘어엿한 규수’인 줄 알았던 것이 나탈리야에게는 큰 비극이 싹틀 수 있는 오해였다. 이이는 훗날 ‘나’의 어린시절에 루네보 집으로 와서 8년동안 함께 살아 ‘나’와는 정이 돈독했다. 하지만 당연히 수호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집착을 보이고 있었으며, 8년이 지난 후에 정말로 수호돌에서 나탈리야가 필요하다고 부르자 생각하고 말 것 없이 이제는 늙은 몸을 끌고 돌아갔다.

  수호돌이 나탈리야네한테 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탈리야의 아버지(하녀의 아버지라서 ‘아비’라고 표현한다)는 농장 일을 하다가 실수, 잘못을 한 적이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죗값을 묻는다며 강제로 입대시켜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어미는 유모 역할이 끝난 다음에 집안의 가금을 돌보는 일을 했다가 하루는 심한 우박이 내려 새끼 칠면조 몇 백마리가 순식간에 죽는 걸 보고 기겁을 하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얼마나 주인인 흐루쇼프 사람들이 거칠었으면.

  그러나 나탈리야는 수호돌의 주인들만큼 선하고 소박한 사람들은 전 우주에 없었고, 그들보다 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 역시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정신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듯. 할아버지 표트리 키릴리치는 미쳤다. 자신의 혼외자이며 ‘나’의 아버지와 가장 친해서 의형제까지 맺기도 했으며, 나탈리야의 사촌오빠인 게르바시카한테 살해당해 죽었다. 카라마조프? 3천루블 때문에? 그건 아니고, 게르바시카도 결국 흐루쇼프 집안의 혈관을 흐르는 기질이 있었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의 딸, 토냐 고모는 장교 보이트케비치와 사랑하다가 애정전선에 먹구름이 끼자 미쳐버렸다. 아들들도 성격이 참 별나서 (이반 부닌의 친아버지처럼) 크림 전쟁에 지원해 참전하고 돌아온 다음부터 서로 격정적으로 다투기를 즐겨 저녁 식사를 할 때, 언제 싸움이 붙을 지 몰라서 각자의 무릎 위에 채찍을 올려둔 채로 밥을 먹었단다. 맛이 가지 않았다면 형제끼리 매일 이 정도로 살벌할 수 있을까?

  이런 집구석에 무슨 애착이 있어서 나탈리야는 곧 죽어도 수호돌에서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느냐는 말이지. 나탈리야의 죄는 하녀 주제에 주인집 큰아들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연모한 것. 작은 아들의 젖누이라서 자신도 번듯한 신붓감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나탈리야는, 군대에서 제대해 집에 돌아온 표트르에게 연정을 품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할아버지와 표트르가 자주 목욕을 하는 목욕탕에 제대할 때 가져온 아름다운 은도금 테를 두른 거울을 두고 나왔고, 주인들이 사용한 목욕탕을 청소하러 온 나탈리야가 거울을 발견해 표트르에 대한 애정의 증거로 숨긴 것 때문에 사달이 났다. 표트르는 흐루쇼프 집안의 맏아들답게 양털 깎는 가위로 나탈리야의 머리털을 밀어버리고, 누더기를 입혀 옆동네도 아니고 마차를 타고 하루 종일 가야하는 소러시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 소시키 마을로 보내버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 밑에 수염이 거뭇하지만 작고 예쁜 몸매에 얼굴도 예쁘장한 클라브디야 마르코브나 아가씨와 혼인을 해버렸다. 종족이 다른 소러시아의 작은 지주 또는 관리인 집에서 몇 년을 보내고 다시 수호돌로 돌아온 나탈리야한테 좋은 팔자가 찾아오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 이이는 안주인의 수발을 들다가 임시로 들어온 거구의 하인에게 한 달 동안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하고,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자신의 팔자를 완전히 구겨놓은 주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흐루쇼프를 향한 정을 포기하지 못한 채. 물론 이제 연정에서 앞의 말 연戀이 빠지고 오리온 초코파이 미운 정情만 남았지만.

  몇 번의 화재와 세월로 인한 쇠락 때문에 이젠 거의 폐허가 된 수호돌. 저택이었던 초가집을 보며 옛 시절을 회상하는 중편이 <수호돌>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좋지만 재미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와 <수호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족 출신의 부르주아나 장교들이 사랑 때문에 죽니사니 하는 건데, 사색적인, 달리 말해 분위기 잡는 애수의 언어 말고는 별로 볼 것 없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것이지 러시아 사람 가운데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먹은 작가의 품질을 논하는 건 아니다. <아르셰니예프의 인생>을 흥미롭게 읽어서 초장부터 기대가 너무 커 그랬던 것도 같다.

  193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혁명 당시 반혁명파의 일원으로 서유럽으로 망명. 잘했다. 안 그랬으면 노벨상은 다음으로 하고 레닌은 그만 두고라도 스탈린이 내비뒀겠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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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2-2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마틴 맥도나, <필로우맨>
화요일. 랠프 앨리슨, 《집으로 날아가다》
수요일.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목요일. 보리스 사빈코프, <창백한 말>
금요일. 구레이, <날개 달린 두약>

coolcat329 2024-12-2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제목이 좋아서 샀는데 기대 안하고 읽어야겠네요.
<아르셰니예프...> 보다 먼저 읽어야겠습니다.

Falstaff 2024-12-20 09:49   좋아요 1 | URL
넵. 이 책 먼저 읽으셔요. 좋은 선택입니다. ^^
 
미나리아재비 창비시선 506
박경희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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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생 범띠 여사님 박경희는 참 살뜰하게 자기 프로필을 숨긴다. 충남 보령에서 출생해서 자란 박경희는, 전적으로 그가 낸 시집을 유추해 보면, 광부였다가 농부로 전업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는 것 같다. 대천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보령시는 얼핏 어업과 농업을 업으로 하는 반농반어 주민들로 구성될 것 같지만, 상당히 많은 매장량을 보유한 탄광도 보령시의 남동쪽 지역에 있다. 성주산이라고 하는 해발은 별로 높지 않지만 정상까지 오르다가 여차하면 땅이 이마를 칠 정도의 급경사로 악명을 떨치는 산도 있고, 이 산 서쪽 초입 계곡 가기 전엔 석탄 박물관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박경희의 부친이 광부에서 소작농부로 전업한 것도 이해가 된다. 석탄의 소비량이 80년대 들어 확 줄어들었으니까.

  보령에서 자라 대학은, 나는 이승우가 졸업한 이 학교가 이날 이때까지 서울 4.19탑 근처 수유동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새 경기도 수원 찍고 병점 아래 오산으로 이사 간 한신대 문창과를 졸업했으니 이때는 보령을 벗어나 생활했으리라 여긴다. 졸업한 이후에 어쨌건 고향에 돌아가 오래 살고 있는 것 같으며, 70년대 초반 출생답게 이이를 보는 할머니들이 드물지 않게 신랑감을 소개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아직 혼인은 하지 않은 거 같다. 젊은 시절에 비구니가 되려 산에 올라 절에도 들어가보고, 고기가 먹고 싶어 혼자 산문을 빠져나와 읍내까지 가려다 너무 멀어 다시 돌아가본 적도 있는, 머리 긴 비구니였던 적도 있거나 여직 머리 긴 비구니로 산다… 시집 《미나리아재비》를 보면서 이러지 않았나 싶었던 거다. 그저 넘겨짚어본 거니까 절대 믿지 마시라.

  이 책이 창비시선 506호. 505호가 지난 번에 소개한 권선희의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권선희는 동해 바닷가 구룡포, 박경희는 서해 바닷가를 낀 도시 보령의 농촌. 둘이 좀 친한 듯하다. 권선희의 시집에 실린, 잠수 중에 사고 나 죽을 뻔한 인공호흡 받은 할머니가 이 시집 《미나리아재비》에서도 나오는 걸 보니. 비슷한 성향의 시인끼리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다. 두 시집도 비슷하다. 구룡포 사람들과 보령 농부들이 사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가끔 덧칠도 하고, 거기에 자기 마음도 가져다 붙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진짜 날 것보다 더 날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시. 근데 박경희는 권선희에 비하면 시에 자주 자기 가족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꿈자리



  잠자리를 서쪽에 두던 엄니가 꿈이 시끄럽다고 동쪽으로 돌렸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자리를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이승 일에 저승 사람이 끼면 될 일도 안 된다고

  소금 한줌 뿌렸다   (전문 p.18)



  박경희의 시는 읽기 편하다. 마지막 줄, “소금 한 줌 뿌렸다” 읽기를 마치자마자 여태까지 위에서 읽은 시가 한 방에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꿈에 죽은 배우자가 나오면? 나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이가 내 몸에 손을 대면 나쁜 꿈이란다. 나는 꿈에 돌아간 부모 안 나오시는 게 그렇게 좋다. 시의 엄마처럼 한 번 갔으면 그곳에서 잘 사는 게 장땡이다. 괜히 여기저기 신경쓰지 말고. 나도 죽으면 아이들 꿈엔 얼씬거리지도 말아야지.

  《미나리아재비》에는 <미나리아재비>라는 시가 들어 있지 않다. 그럼 왜 미나리아재비라고 제목을 달았느냐고? <더없이 깊고 짙은 여름>이라는 시에 이런 대목이 있어서.


  어둠을 짚고 가는 별이 까마득해서 솟을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 맞은 별이 까딱거리다가 뒤꼍 조릿대 숲으로 떨어졌다

  달려가보니 집 앞 개울가

  미나리아재비 앞에 앉은 별이 반짝거렸다  (3연 p.50~51)


  윽. 까마득한 별에 돌팔매질을 했더니 그게 똑 떨어져 미나리아재비 앞에 떨어져 반짝였다고? 그렇다. 별, 별 무슨 별? 정답은 반딧불이.


  반딧불이는 서둘러 간 발자국을 비추고

  그림자 따라간 달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건너 은행나무만 스러져가는 별을 쓰다듬었다  (부분. 같은 시 4연 p.51)


  예쁘장한 서정시. 이 책에는 주로 삶의 곤고함을 다룬 시, 생활시가 많은데, 역시 이웃들, 이젠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환갑이 넘은 강씨 아저씨가 “마파람에 돼지 불알 놀 듯 하는” 동네 막내로 등장하니 보령 농촌도 심각하다. 시골 부동산에 관심있는 분은 조심하시라. 언제까지 땅값이 치솟을 줄 아시나? 진짜로 가 보면 귀신 나올 듯한 빈집이 널리고 널렸다.

  그래도 박경희는 이런 촌에서 시를 쓰고 산다.



  읎는 소리



  농약 비료 안 뿌리고 똥거름으로 밭농사를 지으면 월급을 주고

  땅이 더 거름질수록 해 월급, 달 월급, 별 월급을 준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까?


  어림도 읎는 소리


  써레질 끝난 논바닥을 환하게 바라보는 농부의 눈동자 속 소금쟁이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출렁이고

  땅 한평에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상추, 가지, 고추, 쑥갓, 토마토, 오이를 심어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다면

  서로를 귀하게 여긴 밥상 위에

  살구꽃잎이 먼저 든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까?


  어림 반푼어치도 읎는 소리


  온 세상 귀퉁이를 반딧불로 비춘다면, 반짝이는 숨죽임에 바람의 춤을 춘다면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까?


  쓰잘데기읎는 소리


  곰팡이 핀 벽,

  바랜 3월 농사 달력에 삐뚤빼뚤 쓴 글자가 밭두둑처럼 길다


  구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 고만허고 나와서 밭에 돼지똥거름이나 뿌리라고!   (전문 p.20~21)



  보통 글자체로 쓴 1, 3, 5, 7연은 다분히 시인이 하는 말이고, 굵은 이탤리체의 2, 4, 6, 8연은 보령 농촌에서 농협 빚에 쪼들리며 직접 농사를 짓는 농부나 시인의 부모 정도의 사람들이 댓거리로 하는 말처럼 읽힌다. 시인도 고향에서, 농사짓는 농촌에서 살기가 만만하지는 않을 거 같다. 시골 출신 74년생 범띠, 집에서 떠나 대학이라고 졸업시켰더니 집에 돌아와 (시집 읽어 짐작하는 바대로만 하면) 돈벌이도 안 하고, 시집도 안 가고, 농사일도 변변하지 않고, 절에 들어가 중질도 제대로 못할 거 같으면서, 조잘조잘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이 시와 시집을 구룡포에서 낳든, 보령시 농촌에서 낳든, 동네 사람들 사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훨씬 더 좋아한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절에 들어가 중질도 제대로 못”했을 거 같다는 추측도 이런 시에서 나왔다.



  폐사지를 걷다가



  오래전 비구니가 되겠다며 법당에 앉아 합장했다 깜박이는 전등이 부처님 말씀인 것처럼 머리 조아리다가 법당을 내려왔다 울리지 않는 범종이 귓가에 울렸고 스님 목탁 소리에 으스름달이 떠올랐다


  눈빛이 흔들리는 물빛이라,

  흔들리고 싶은 대로 흔들려야 한다는 말에

  절 마당 구석에 앉아 훌쩍이다가 문득,


  빈 절간을 지키는 개 반달이의 느린 걸음이고 싶어졌고 슬쩍 날아와 털신의 털을 뽑아 가는 박새 부리이고 싶어졌고 무너진 축대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목련나무를 스쳐 가는 바람이고 싶어졌고 극락전 앞 뒹구는 매미 허물이고 싶어졌다 바랜 단청 흐린 색으로 머물다 지워지고 싶었고 문살 나간 창호지 구멍이고 싶었고 그늘도 없는 폐사지에 머물다 간 구름이고 싶었다 요사체에서 병든 사내가 밟은 절 마당이고 싶었고 승복 말리는 빨랫줄이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달 서성이는 발자국으로


  머리가 긴 비구니가 되어 그늘 많은

  도시로 돌아왔다   (전문.P.26~27)



  아무래도 옆집 할머니, 뒷집 할아버지 고생한 이야기보다, 공장에 다니다가 기계에 끼어 아내와 두 아이를 두고 숨 넘긴 동생의 직장 선배 이야기보다, 시인이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에 훨씬 공감한다. 모두 4부로 되어 있는 시집에서 자신에 대한 시는 1부에 몰려 있다. 물론 다른 재미있는 시도 많고, 박경희의 이 시집을 소개하는 많은 신문, 인터넷 자료 역시 위에 내가 올린 시를 인용한 건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시집에서는 내가 공감하는 시가 제일 좋은 법이다.


  이 시집 《미나리아재비》에서 각종 매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시를 첨부하며 오늘 독후감을 끝낸다.



  오소



  나가 구십 하고도 거시기 두살인가 세살인가 헌디도 까막눈 아녀, 젓가락을 요로코롬 놔도 뭔 자인지 모른당께, 그냥 작대기여 헌디, 할멈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수술받는다고 병달이 놈 손 잡고 올라갔잖여, 병달이가 무신 일 있으믄 편지 쓰라고 봉투에다가 주소는 적어두고 갔는디, 나가 글씨가 뭔지 오치게 알어, 기냥 알았어, 라고만 혔지, 그때는 산 넘어가야 전화가 있을랑 말랑 혔어 암만,

  어찌어찌 보름이 지났는디 이 할멈이 오지를 않는겨, 저짝에서 소쩍새가 쏘찌럭 소쩌 소쩌 여러날 우는디 환장허겄데, 혼자 사는 노인네들은 어찌 사나 몰러, 그나저나 수술받다 죽었으믄 연락이라도 홀 텐디 꿩 궈 먹은 소식이더라고,

  병달이가 써준 봉투 생각이 나서 종이 꺼내놓고 뭐라 쓰야겄는디, 뭐라 쓰야 헐지 몰라서 고민허다가 에라 모르겄다, 허고는 소 다섯마리 그려 보냈당께, 근디 할멈이 용케 알아보고 열흘 만에 왔더만, 나가 글씨보단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걸 그때 알았당께   (전문 p.23)



  제목 “오소”는 五少: 휘파람을 부는 방법의 하나, 또는 嗷訴: 무리를 지어 호소함이 아니라, 소 다섯 마리, 5소. 할아버지가 수술받은 할머니한테 수술 잘 받았으면 “오소”했다는 말이다. 난 원래부터 형광등 기가 좀 있고, 별 생각 없이 읽었다가, 별 뻘짓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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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19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나리아재비 앞에 앉은 별이 반짝거렸다‘
저는 미나리아재비 작고 노란 꽃잎을 떨어진 별이라고 했나보다 생각했더니 아니네요.

falstaff님도 시집 읽으시면서 시인을 상상하시는 걸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그런데 ^^

Falstaff 2024-12-19 14:54   좋아요 0 | URL
시인을 대강이라도 아는 것이 시 읽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사실 문학이란 게 사람 사는 일 아니겠습니까. ^^
 
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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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말엔 특히 아일랜드 작가의 책을 많이 읽는다. 에드나 오브라이언에서 시작해 북아일랜드 출신의 애나 번스, 다시 남 아일랜드의 클레어 키건과 또다시 에드나 오브라이언. 1주에 한 권은 아일랜드 작가가 쓴 책을 읽은 셈이다. 오브라이언은 1930년에 태어나 2024년 올해 여름에 별세했다. 천수를 다 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 생일이 지나지 않아 93세까지 살았는데, 요즘엔 90 넘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예전같이 호호 할머니 모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오브라이언도 그러했기를 바란다.

  젊은 시절에 나는, 이가 다 빠져 볼이 홀쭉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를 보면서, 이 할머니도 몇 십 년 전에는 불꽃 같은 사랑을 했고, 질투에 휩싸여 하늘이 무너지는 저주도 했을 터이고, 팽팽한 몸으로 밤을 세워 관능의 어지럼증도 숱하게 겪었겠지, 이런 건 추측도 해보지 못한 거 같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지. 늙은 적이 없었던 젊음의 자연스럽고 그래서 당연한 오만이었으리라.


Edna O'Brien


  <8월은 악마의 달>이 출간된 해가 1965년. 이이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사랑도 해보고, 결혼도 해보고, 당연히 출산도 해보았지만, 그러기 위하여 마땅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질투, 다툼, 기다림, 안타까움, 욕지기 같은 고통도 모두 겪어보았을 것이다. 이것들을 통해 인생과 문학은 바야흐로 전성기를 향해 극적인 도약을 할 시기. 앞으로 자기 앞에 60년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조금도 염두에 두고 싶지 않은 시절. 하지만 당시 교조적 가톨릭이 기성계급과 시민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어서, 오브라이언은 이미 몇 년 전에 발표한 소녀 삼부작 <시골 소녀들>, <외로운 소녀> 그리고 <행복한 신부가 된 소녀들>이 아일랜드 땅에서는 판매 및 출판 금지의 금서 딱지를 받게 된 것처럼, <8월은 악마의 달> 역시 판매 및 출판 금지 도서 목록에 제목을 올린다. 성애 묘사와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신성? 한자어로 써서 神聖을 모독했다고? 한 세대 후의 작가 클레어 키건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건할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성애 묘사 역시 요즘엔 중학생들조차 심심해서 안 읽어볼 지도 모르겠다. 다 그런 거지 뭐. 세상이 바뀐 걸. 근데 올해 여름까지 살아 있었으니 60년 전에 자신이 당했던 금서 조치를 떠올리면서 얼마나 웃었겠어? 아흔다섯 살 할머니를 보면서 저 할머니가 당시에 성애 묘사의 달인이었으리라, 짐작이라도 할 젊은이들 있으면 세 명만 거수해보실까요?


  “엘런은 그가 자기 안에서 꽃줄기처럼 굳고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고 또 단단하게. 그는 그 어떤 남자도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엘런을 사랑해 주었다. 남편조차, 엘런을 갈기갈기 찢어 갈망과 사랑과 고통과 후회의 순환 속으로 몰아넣은 남편조차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그런 종류의 사랑은 결국 허망할 뿐이니까. (p.27~28)


  이 정도가 높은 수위의 베드씬이다. 조금 더 높은 수위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엘런은 이제 두번째 만난 휴 휘슬러와 밤을 보냈고,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엑스터시를 맛보았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로 순결을 벗은, 기념할 만한 8월이었다. 여성의 ‘진정한 처녀성’은 첫경험이 아닌 ‘첫 오르가슴’이라고, 그래서 아이 셋 낳은 마흔 살 아주머니도 그제서야 순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라고 1989년 충청북도 충주시 민방위 교육 강사가 충주시 여성회관에서 주장했다. 꽤 그럴 듯해 아직 기억하고 있다. 조금 비껴 말하면 엘런의 남편은 아내에게 아들 마크를 주었을 지는 몰라도 엘런의 처녀성을 없애 주지는 못했고, 앞으로 다른 여성을 만나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는 말. 세상의 많은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 한 여성의 처녀성도 삭제하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는 거다. 흠. 내 아내도 손주가 둘이나 있는 할망구인데 혹시 아직 처녀 아녀? 은근히 켕기네 이거….

  이런 얘기하니까 재미있네. 말 나온 김에.

  위에서 인용한 건, 딱 저 부분만 따와서 그렇지, 사실 앞 뒤 사정을 더 알면 훨씬 더 에로틱하다. 아무리 보수적인 아일랜드 문화계라도 저 정도로 설마 판매 금지를 때렸겠는가. 그런데 사실 보고 듣는 사람을 가장 애태우고 갈급하게 만드는 건 포르노 필름이나 동영상도 아니고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물론 내 경우에 그렇다는 건데 야설보다 조금 소프트한 에로틱한 은유의 문자들. 동영상은 이미 시청각으로 보는 사람에게 제공할 건 다 제공해서 뇌가 더 활동할 여지를 주지 않아서 다 그게 그거인 반면에, 문자로 쓴 에로틱한 묘사는, 읽으면서 등장인물이 어떤 모습과 자세를 하고 있는 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이를 뇌가 충분히 보완해주어 동영상을 볼 때보다 훨씬 더 흥분 수치가 상향한다. 최소한의 감각만 제공하는 은유적 자극제가 진정한 자극제다.

  하여간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1960년 초기에 문제작을 연달아 발표했는데, 그게 하나같이 여성 속의 리비도 배출 욕구와 과정, 그리고 실행을 탐색하고 있어서 점잖은 아일랜드에 작지 않은 파문波紋을 일으켰고, 오브라이언의 진짜 작가 남편 언스트 게블러는, 이이가 에드나의 처녀성을 벗겨주었는지는 별개로 하고, 소녀들 3부작을 쓸 때부터 “계속 이 따위 글을 쓰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위협을 하더니 3부작이 다 나오자 정말로 이혼 소송을 했으며, 다음 해까지 진행한 소송에서 <8월은…>을 증거자료로 제출했지만 패소했다.


  잉글랜드 런던. 엘런은 별거중이다. 법적으로는 유부녀이고 다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산다. 여름철이라 아이 아빠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몇 주 동안 웨일스의 농촌으로 야영을 갔다. 두 해 전부터 남편과 별거중이지만 이제는 뾰로통한 평화 같은 것에 안착했다. 서로가 많이 포기해 평화를 찾았다는 얘기겠지. 이렇게 해서 스물여덟 살의 아이 엄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됐고, 전에 딱 한 번 만난 휴 휘슬러라는 남자가 집에 찾아와, 연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는) 미란다가 집에 눌러 앉더니 도무지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기가 나와버렸다고 신세 한탄을 하러 왔다. 이이는 자기 잡,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잔뜩 있으며 아내는 기진맥진했을 때 미란다가 휴에게 접근했다고. 이후 이혼을 했든지, 별거중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다. 어떤 경우라도 잔뜩 만든 아이들 양육비 조달하느라고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도리도 없기는 하겠다.

  그래서 이날 오후부터, 영국인답게 차를 대접하고, 혼자 있었다면 그냥 대충 때우고 말 저녁 식사도 요리 비슷하게 해서 함께 먹고, 와인과 위스키도 곁들이다가 처음엔 뜻이 맞아, 조금 후엔 입술이 맞아, 더 있다가 몸이 맞아, 식당 식탁에서, 응접실 소파에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침실 침대에서, 아들 마크를 키우는 스물여덟 살 우리의 엘런 세이지 여사는 드디어, 드디어 처녀성을 벗어서 내다버렸던 거였다.

  내가 (만들어서) 가끔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어떤 사람들은 사랑해서 섹스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섹스를 하고나서 사랑을 시작한다. 엘런 세이지는 두번째 경우였다. 겨우 두 번 만난 휴 휘슬러와 오후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함께 지내고, 이제 헤어져야 할 때, 잠깐이 되겠지만 잠깐이라도 굳이 서로를 구속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음 약속을 잡지 않고, 누구든지 생각나면 전화를 하기로 하고, 휴는 직장으로, 엘런은 식사 약속 때문에 외출을 한다. 이후 엘런은 지독한 고통 속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뒤라스가 말한 지독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고통. 먼저 전화하기는 어딘가 좀 어색하고, 그래서 기다리기만 하는데, 혹시 전화가 올까봐 미나리 한 단과 삼겹살 3백그램 사려고 동네 마트에도 못 가는 심정. 불행하게 이 때가 1960년대. 30년은 흘러야 휴대전화가 나온다. 이런 또는 비슷한 경험, 고통 없는 그대, 사랑을 논하지 말라.


  전화는 오지 않는다. 이제 사랑이라는 뜻의 저주받은 다른 이름의 것들,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오기 시작한 엘런. 엘런은 전화한다. 그리운 휴. 그의 깊숙한 바리톤 음성이 대답한다.

  “난 미란다를 사랑해요. 떠날 때마다 그걸 깨닫고 다시 돌아가 버릇하는군요. 어쩌면 나는 다 갖고 싶은 건가 봐요. 내 안에 너무 많은 죄책감과 책임감과 골칫거리가 있어요.”

  엘런은 죽을 만큼 용기를 내어 쿨한 척한다. “괜찮아요?”

  이 남자가 저지른 가장 사악한 짓은, 이제 겨우 엘런이 죽은 듯 살자고 체념했을 때, 딱 그때 다가와서 거짓된 희망을 건네어 하룻밤 동안 새 삶이라는 걸 준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든 일이다.

  심하게 낙심한 엘런. 이게 독자의 눈에는 님포매니악은 아닐지언정 남편과 휴 휘슬러로 인해 다친 심상을 다른 남자들과의 무분별한 쾌락으로 풀고 싶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때는 8월, 절정의 휴가기를 맞아 엘런은 자기가 다니는 연극을 다루는 소규모 잡지사에 하기 휴가원을 내고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 칸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잘생긴 남자가 보이면 빼먹지 않고, 상대가 누구든 접근하리라 마음먹고. 오브라이언은 밝히지 않지만 하필이면 칸을 택한 것도 영화제가 열리는 유명도시라 미남들이 다른 곳보다 밀집해 있을 것 같았을까? 엘런에게 휴가는 일종의 남자 탐색 여행이 될 모양이다.

  실제로 엘런의 헌팅은 프랑스행 비행기 기내에서 시작한다. 호텔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오스트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앞에서 옷을 차례차례 한 꺼풀씩 벗으며 사진을 찍히기도 하고, 괜찮게 생긴 호텔 종업원과 뜻을 모르는 은어를 썼다가 심한 터치도 당하는가 하면, 나이는 많지만 정도 많고 돈도 많고 손도 크고, 미국에서 온 큰 부자와 아무 느낌없이 하룻밤을 잤으며, 자상한 미국 배우 바비도 만나 굳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비를 기어이 자빠뜨리기도 하는데, 하여간 내가 읽기로, 지중해에 도착한 이후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앞부분의 남편, 아들 마크, 자신, 그리고 휴 휘슬러와의 연애에서 기대했던 조밀한 감정의 소묘에 미치지 못해 아쉽다. 비록 프랑스에서의 일이 본문 격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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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2-18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아내도 손주가 둘이나 있는 할망구인데 혹시 아직 처녀 아녀? 은근히 켕기네 이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빵터집니다. 분발하십시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12-18 16:5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이제 분발이고 뭐고 다 끝났는데요 뭐. ㅋㅋㅋㅋ

잠자냥 2024-12-18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고통. 먼저 전화하기는 어딘가 좀 어색하고, 그래서 기다리기만 하는데, 혹시 전화가 올까봐 미나리 한 단과 삼겹살 3백그램 사려고 동네 마트에도 못 가는 심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명문이 많습니다. 그려, ㅋㅋㅋㅋ

Falstaff 2024-12-18 16:52   좋아요 1 | URL
앗, 이 심정 이해하신다, 이것이지요! ㅋㅋㅋㅋㅋ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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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4월과 11월, 두 중편소설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큰 선풍을 일으킨 작가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는 동네 도서관의 관심도서 목록에 올렸는데, 작년부터 이날 이때까지 대출중이며 늘 예약자가 있는 상태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찬사. 그러다가 난데없이 개가실 신착도서 선반에 떡, 꽂힌 클레어 키건의 신간 《푸른 들판을 걷다》가 보이는 거다. 주저하지 않고 집어 그날 당장 읽었고, 250쪽 분량이 반 나절 조금 넘는 시간에 훌훌 읽어버릴 수 있는 넉넉한 편집이어서 앉은 자리에서 몽땅 읽었는데, 어, 이것 봐라, 많은 독자들이 클레어 키건에게 홀딱 빠지는 이유가 있기는 있구나, 하고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키건하고 비슷한 문체로 글을 쓰는 사람, 물 좋은 아일랜드라서 이렇게 쓸쓸한 이야기를 쓸쓸한 문장으로 직조할 수 있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 윌리엄 트레버 유형의 문체로, 가부장적 아버지에 의한 딸에 대한 성폭력을 포함한 깊은 상처, 의도했건 아니건 남자의 이기적 행위에 의하여 다친 심신의 흉, 그리고 마지막 작품 <퀴큰 나무 숲의 밤>에서의 이에 대한 극복을 다루고 있으니.

  클레어 키건.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의 농장에서 대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미국의 루이지애나, 다시 웨일스와 더블린에서 공부하고 작품을 썼다. 이후 출간하는 단편집 《남극》, 《푸른 들판을 걷다》와 두 단행본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각종 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하고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적인 명성과 돈을 한꺼번에 얻은 작가이다.


  단편집 속의 일곱 이야기를 읽으며 주목한 것은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역시 문체와 문장이었다. 하루 전에 읽은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유려하고 상세하고 길게 묘사하는 문체 그리고 문장과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황량하고 간결한 키건. 두 작가 모두 독특한 매력이 넘치며, 각자가 자기 문장, 문체, 스타일에 최적화한 서로 다른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도 책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짜장면이면 짜장면이고 짬뽕이면 짬뽕이지, 좋은 소설 속에 짬짜면은 없다. 뭐 내가 읽어본 경우에 그렇다는 거다. 있을 수 있겠지, 많고 많은 작품 속에 그런 것도 있어야 정상이겠지.

  그런데 지금 독후감을 쓰면서 당장 맞닥뜨린 문제는, 책을 읽고 한 마흔 시간 흘렀을 뿐인데, 아버지에 의하여 저질러진 성폭력(또는 성적 학대)와 가톨릭 신부 사이에서 있었던 섹스 후의 이별이란 상처와 흔적을 지니고 나머지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모습 말고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 그런데 사실 친부의 성적 학대와 가톨릭 신부의 성접촉은 말을 하기 쉬워서 그렇지 사회적, 종교적으로 대단한 불경의 경우이다. 키건은 이런 불경을 넘어선 패륜과 파문의 지경에 이른 심각한 부도덕, 지독한 폭력을 앞에서 말한 쓸쓸한 문체로 쓸쓸한 분위기에서 슬쩍 이야기하고 만다. 이런 걸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피해자의 심정에 몰입하게 되고, 피해자와 함께 마음이 찢어진다. 이래서, 이리 극단적으로 자극적이라서, 그리고 이렇게 쓸쓸해서 전세계 독자들이 열광을 하는 것이고, 숱한 영화제작자가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아직 읽어보지 않아 전적으로 짐작이지만 단행본 <맡겨진 아이>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문학적 영토의 의미로 말해, 아일랜드는 참 물이 좋은 동네인 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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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2-1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짬짜면! ㅋㅋ
참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를 간결한 문장 안에 넣어 전달하고, 독자가 그 주제에 직면하도록 하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제일 좋았습니다.

Falstaff 2024-12-17 15:58   좋아요 0 | URL
ㅎㅎ 다른 책 전부 대여중, 예약대기 무지 많습니다. 가히 인기작가 맞습니다. 여기가 촌이라서 그런가요? ㅋㅋㅋ

hnine 2024-12-17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고난의 역사는 문학적 영토를 기름지게 만드나 봅니다.
저도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읽었는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좀 더 좋았어요.

Falstaff 2024-12-17 15:59   좋아요 0 | URL
흠. 사소한 것은 읽어봐야겠군요. 제가 빌리기 전에 책 다 헐겠더라고요.

stella.K 2024-12-17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손이 안 가던데. 막연히 뭔가 싱겁고 밋밋한 거 아냐?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하긴 요즘 제가 읽는 소설마다 시큰둥해서..요. ㅠ

Falstaff 2024-12-17 15:59   좋아요 1 | URL
독자마다 감상이 좀 달라야 사는 맛이 있지요. ㅎㅎ

yamoo 2024-12-17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키건의 책은 재미가 없더라구요...왜알까요?? 아마도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또는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일겁니다..^^;;

Falstaff 2024-12-17 19:42   좋아요 0 | URL
읽는 독자마다 다 재미있다 그러면 그게 사는 일이겠습니까? ㅎㅎㅎ
 
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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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는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산티아고 데 과야킬에서 태어나 산티아고 데 과야킬 대학을 졸업한 에콰도르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어를 쓰는 에콰도르의 스페인 이민자들에 관한 르포를 쓰기 위해 스페인을 방문했다가 그곳에 눌러 앉아 근 10년 동안 많은 기사를 써서 에콰도르로 보내거나 스페인 현지의 매체에 발표했다. 당시의 기사들을 모아 <미용실에 배운 것들>과 <거주 허가>를 2011년, 2013년에 출간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8년에 단편집 《투계》를 발표해 센세이셔널한 주목을 받았다. 《투계》 외에 2021년에 역시 단편집인 《인간 제물》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투계》를 읽어보니까 《인간 제물》 역시 급관심이 생긴다. 1976년생이면 지금 바야흐로 전성기를 지나고 있다. 장편도 좋고, 저널리스트 생활을 오래 해 장편이 무리라면 단편집이라도 꾸준하게 발표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투계》의 임팩트가 강했다.


  2백쪽도 되지 않는 분량에 단편소설 열셋을 담았다. 작품집의 제목인 “투계”라는 단편은 없다. 대신 제일 앞에 실린 <경매>에 닭싸움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투계, 싸움닭은 그냥 닭 두 마리가 싸우는 게 아니다. 관중들의 흥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싸움닭의 며느리발톱에 매우 예리한 칼날을 매단다. 투계장에 두 마리의 싸움닭이 서로 째려보며 기싸움을 하다가, 팽팽한 잠시를 지나, 닭도 새라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 순식간에, 공중전으로 돌입한다. 날개를 파다닥, 흔드는가 싶은 눈썹 한 가닥의 시간에 사람 키 정도로 훌쩍 날아오른 닭 두 마리는 서로의 복부를 향해 며느리발톱을 쭉 내뻗는다. 발톱대신 크롬 도금을 한 듯 번쩍 눈부신 칼날이 백열등 조명을 반사하는 이 숨막히는 찰라가 지나면,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배가 갈라져 분수 같은 피를 쏟으며 동시에 울컥, 내장과 닭똥을 뱉아낸다. 암푸에로는 닭싸움 장면을 묘사하지 않는다. 싸움이 끝난 후 죽은 닭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죽은 닭은 맨손으로 집어 내다 버려야 했던 여자애, 그 아이의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닭들과 남자들. 기억 속에서.

  세월이 흘러 아이는 성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그 남자와 남자의 아내 앞에서 우정을 연기하며 술을 마셔야 했으며, 그게 슬퍼서 마신 술에 비해 더 취기가 올랐는 지는 모르지만,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잠깐 졸았는데, 눈을 떴을 때, 택시는 텅 빈, 캄캄한, 공장 단지에서 멈췄으며, 택시 운전수는 권총으로 여자의 배를 쿡 쑤시면서, 인신매매단에게 넘겨버렸다. 이 악당들이 납치해온 사람은 여자 한 명이 아니었다. 돈이 좀 있을 것 같은 남자도 잡혀왔다. 이들은 다른 악당들에게 인질을 판매하는 경매를 시작하고, 낙찰 받은 악당은 인질의 신용카드, 은행계좌의 돈, 집안에 보관한 보석과 현금 그리고 값나갈 만한 가전제품을 몽땅, 아주 몽땅 갈취한다. 자신들도 본전을 뽑아야 하니까. 아니면 적어도 몸으로 육체적 보상이라도 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닭의 피와, 창자와 닭똥 속에서 자라야 했던 젊은 여자는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당연히 결말은 안 알려준다.

  그런데, 문제는 문장과 문체. 이런 그로테스크하며 엽기적이고 막장의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 놀랍게도 매우 유려하고 상세하고 그래서 더 호소력있는 긴 문장으로 적혀 있다. 물론 작품을 읽으며 문장과 문체라는 하드웨어에 집중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는 책이라면.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렇게만 단정하기에는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글은 너무 매력적이다.


  에콰도르 또는 라틴 아메리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대륙 주거인들보다 훨씬 불안정한 치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물리적 폭력이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읽게 되는데, 공권력과 범죄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이 나오지 않는 라틴 아메리카 작품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렇다. 이런 면에서도 암푸에로의 단편들은 기존에 익숙한 라틴 아메리카의 폭력과 차별을 둔다. 앞에서 암푸에로가 페미니즘 소설가라고 했듯이 당연히 남성에 의하여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과 가부장제 하의 폭력은 물론이고, 같은 여성 연대 속에서도 고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하녀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도 적나라하다. 물론 여성 사이의 폭력은 몸에 가하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재산과 계급과 인종 등 “다름”에서 비롯하는 극단 차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좋은 이야기만 해도 “꽃노래도 삼세번”이건만 처음부터 끝까지, 열세 작품이 모두 이런 식의 극단적인 폭력과 그로테스크한 과정을 거친 그로테스크한 결말로 치닫는 바람에 앉은 자리에서 몽땅 읽을 경우 내가 그랬듯이 나중엔 질려 버릴 수도 있다. 작가의 시선은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를 점령한 가톨릭을 향하기도 한다. 마르타와 예수에게 향유를 바른 마리아, 그리고 부활. <상중喪中>은 이렇게 끝난다.


  “이 계절엔 바람이 지독하게 몰아칠 때가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다시 음식을 먹다가 문 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고, 누가 손으로 문을 밀 듯 문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파리 떼가 들어왔고 이어서 죽은 오빠가, 구역질 나는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마치 그녀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으나, 이가 다 빠진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못했고 다만 구더기들만 기어 나왔다.” (p.141)


  죽은 자 가운데 삼일 만에 살아 돌아온 오빠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긴 왔는데, 죽기 전에 이미 충분히 부패한 상태였고, 죽은 다음에도 사흘 동안 열심히 파리들이 알을 까서, 이 모양 이 꼴을 하고 돌아온 거다. 그럼에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왔음에도, 죽었다가 다시 “육신의 부활”을 이룬 오빠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부활을 했냐는 말이지. 가부장제? 남성에 의한 폭력? 혹시 중세?

  좋다. 좋지만 과하게 그로테스크한 거 아냐 이거?

  같은 가톨릭의 품에서 자랐는데도, 내일 독후감을 쓸 아일랜드 “여성” 작가 클레어 키건하고, 세상에나,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두 작가 다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다양한 건 거의 언제나 찬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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