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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4
이반 부닌 지음, 최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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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은 1870년 러시아 보로네시에서 오랜 귀족이자 광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 집안이 휘황찬란해서 소개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라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듯하다. 다만 이반의 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부닌으로 말하자면, 이반은 훗날 부친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강인한 인물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성질이 급하고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으며, 충동적이지만 관대하고, 연극적일 정도로 웅변적인, 완전히 비논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크림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진 와인 맛도 몰랐는데, 전쟁이 끝나 돌아온 다음엔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었으나 전형적인 과음자가 됐다고. 왜 아버지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 하면 중단편 소설 일곱 편을 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에서 작가의 유소년 경험이 가장 많이 들어있음 직한 중편 <수호돌>에 이런 성격의 형제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유일하게 작품의 주인공이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평생 죽도록 일을 해서 기어코 백만장자가 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이제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아내와 딸을 동반해 2년 기한으로 유럽을 여행하기로 결정, 초호화 여객선 아틀란티스 호에 탑승해 유럽땅, 이탈리아의 카타리 섬, 가장 호화로운 호텔의 디럭스 스위트룸에 여장을 푼다. 그러나 세계최고의 휴양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허와 숙명의 페이소스.
다른 작품은 러시아 귀족, 부르주아, 장교들이 주인공이며 다분히 19세기적 운명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의 광고글을 보면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의 명맥을 잇는 20세기 러시아 작가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른 이해가 간다. 다만 한 작품 <수호돌>의 사실상 주인공은 나탈리야라는 이름의 집안 하녀이자 화자의 아버지의 젖누이, 유모의 딸이다. 제일 길기도 하니, <수호돌>의 스토리를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
수호돌은 무슨 돌멩이가 아니다. 작품 속 지명. 화자 ‘나’는 루네보에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미 오래 전에 수호돌을 떠나 할머니, 그러니까 아버지의 엄마 올가 키릴로브나 소유의 영지가 있는 루네보로 이사해 할머니가 세상 뜨자마자 영지를 홀랑 잡아 잡순 거였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불평을 한 적이 있다. “한 명. 흐루쇼프 집안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남았어. 수호돌이 아닌 이곳에.” 이 단 한 명이 화자 ‘나’. 죽어가는 아버지는 그 마당에서도 딱 한 명 남은 (흐루쇼프의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 후손이 수호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 거다. 아버지 주장에 따르면, 수호돌은 저주받은 좋은 곳이라고. 좋지만 저주받았다고.
사실상의 주인공 나탈리야는 결혼하지 않았다. 19세기 귀족 가문의 하녀이긴 하지만 흐루쇼프의 둘째 아들이자 ‘나’의 아버지인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와 젖누이 사이라서 자신을 ‘어엿한 규수’인 줄 알았던 것이 나탈리야에게는 큰 비극이 싹틀 수 있는 오해였다. 이이는 훗날 ‘나’의 어린시절에 루네보 집으로 와서 8년동안 함께 살아 ‘나’와는 정이 돈독했다. 하지만 당연히 수호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집착을 보이고 있었으며, 8년이 지난 후에 정말로 수호돌에서 나탈리야가 필요하다고 부르자 생각하고 말 것 없이 이제는 늙은 몸을 끌고 돌아갔다.
수호돌이 나탈리야네한테 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탈리야의 아버지(하녀의 아버지라서 ‘아비’라고 표현한다)는 농장 일을 하다가 실수, 잘못을 한 적이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죗값을 묻는다며 강제로 입대시켜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어미는 유모 역할이 끝난 다음에 집안의 가금을 돌보는 일을 했다가 하루는 심한 우박이 내려 새끼 칠면조 몇 백마리가 순식간에 죽는 걸 보고 기겁을 하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얼마나 주인인 흐루쇼프 사람들이 거칠었으면.
그러나 나탈리야는 수호돌의 주인들만큼 선하고 소박한 사람들은 전 우주에 없었고, 그들보다 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 역시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정신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듯. 할아버지 표트리 키릴리치는 미쳤다. 자신의 혼외자이며 ‘나’의 아버지와 가장 친해서 의형제까지 맺기도 했으며, 나탈리야의 사촌오빠인 게르바시카한테 살해당해 죽었다. 카라마조프? 3천루블 때문에? 그건 아니고, 게르바시카도 결국 흐루쇼프 집안의 혈관을 흐르는 기질이 있었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의 딸, 토냐 고모는 장교 보이트케비치와 사랑하다가 애정전선에 먹구름이 끼자 미쳐버렸다. 아들들도 성격이 참 별나서 (이반 부닌의 친아버지처럼) 크림 전쟁에 지원해 참전하고 돌아온 다음부터 서로 격정적으로 다투기를 즐겨 저녁 식사를 할 때, 언제 싸움이 붙을 지 몰라서 각자의 무릎 위에 채찍을 올려둔 채로 밥을 먹었단다. 맛이 가지 않았다면 형제끼리 매일 이 정도로 살벌할 수 있을까?
이런 집구석에 무슨 애착이 있어서 나탈리야는 곧 죽어도 수호돌에서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느냐는 말이지. 나탈리야의 죄는 하녀 주제에 주인집 큰아들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연모한 것. 작은 아들의 젖누이라서 자신도 번듯한 신붓감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나탈리야는, 군대에서 제대해 집에 돌아온 표트르에게 연정을 품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할아버지와 표트르가 자주 목욕을 하는 목욕탕에 제대할 때 가져온 아름다운 은도금 테를 두른 거울을 두고 나왔고, 주인들이 사용한 목욕탕을 청소하러 온 나탈리야가 거울을 발견해 표트르에 대한 애정의 증거로 숨긴 것 때문에 사달이 났다. 표트르는 흐루쇼프 집안의 맏아들답게 양털 깎는 가위로 나탈리야의 머리털을 밀어버리고, 누더기를 입혀 옆동네도 아니고 마차를 타고 하루 종일 가야하는 소러시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 소시키 마을로 보내버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 밑에 수염이 거뭇하지만 작고 예쁜 몸매에 얼굴도 예쁘장한 클라브디야 마르코브나 아가씨와 혼인을 해버렸다. 종족이 다른 소러시아의 작은 지주 또는 관리인 집에서 몇 년을 보내고 다시 수호돌로 돌아온 나탈리야한테 좋은 팔자가 찾아오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 이이는 안주인의 수발을 들다가 임시로 들어온 거구의 하인에게 한 달 동안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하고,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자신의 팔자를 완전히 구겨놓은 주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흐루쇼프를 향한 정을 포기하지 못한 채. 물론 이제 연정에서 앞의 말 연戀이 빠지고 오리온 초코파이 미운 정情만 남았지만.
몇 번의 화재와 세월로 인한 쇠락 때문에 이젠 거의 폐허가 된 수호돌. 저택이었던 초가집을 보며 옛 시절을 회상하는 중편이 <수호돌>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좋지만 재미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와 <수호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족 출신의 부르주아나 장교들이 사랑 때문에 죽니사니 하는 건데, 사색적인, 달리 말해 분위기 잡는 애수의 언어 말고는 별로 볼 것 없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것이지 러시아 사람 가운데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먹은 작가의 품질을 논하는 건 아니다. <아르셰니예프의 인생>을 흥미롭게 읽어서 초장부터 기대가 너무 커 그랬던 것도 같다.
193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혁명 당시 반혁명파의 일원으로 서유럽으로 망명. 잘했다. 안 그랬으면 노벨상은 다음으로 하고 레닌은 그만 두고라도 스탈린이 내비뒀겠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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