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는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산티아고 데 과야킬에서 태어나 산티아고 데 과야킬 대학을 졸업한 에콰도르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어를 쓰는 에콰도르의 스페인 이민자들에 관한 르포를 쓰기 위해 스페인을 방문했다가 그곳에 눌러 앉아 근 10년 동안 많은 기사를 써서 에콰도르로 보내거나 스페인 현지의 매체에 발표했다. 당시의 기사들을 모아 <미용실에 배운 것들>과 <거주 허가>를 2011년, 2013년에 출간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8년에 단편집 《투계》를 발표해 센세이셔널한 주목을 받았다. 《투계》 외에 2021년에 역시 단편집인 《인간 제물》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투계》를 읽어보니까 《인간 제물》 역시 급관심이 생긴다. 1976년생이면 지금 바야흐로 전성기를 지나고 있다. 장편도 좋고, 저널리스트 생활을 오래 해 장편이 무리라면 단편집이라도 꾸준하게 발표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투계》의 임팩트가 강했다.


  2백쪽도 되지 않는 분량에 단편소설 열셋을 담았다. 작품집의 제목인 “투계”라는 단편은 없다. 대신 제일 앞에 실린 <경매>에 닭싸움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투계, 싸움닭은 그냥 닭 두 마리가 싸우는 게 아니다. 관중들의 흥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싸움닭의 며느리발톱에 매우 예리한 칼날을 매단다. 투계장에 두 마리의 싸움닭이 서로 째려보며 기싸움을 하다가, 팽팽한 잠시를 지나, 닭도 새라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 순식간에, 공중전으로 돌입한다. 날개를 파다닥, 흔드는가 싶은 눈썹 한 가닥의 시간에 사람 키 정도로 훌쩍 날아오른 닭 두 마리는 서로의 복부를 향해 며느리발톱을 쭉 내뻗는다. 발톱대신 크롬 도금을 한 듯 번쩍 눈부신 칼날이 백열등 조명을 반사하는 이 숨막히는 찰라가 지나면,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배가 갈라져 분수 같은 피를 쏟으며 동시에 울컥, 내장과 닭똥을 뱉아낸다. 암푸에로는 닭싸움 장면을 묘사하지 않는다. 싸움이 끝난 후 죽은 닭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죽은 닭은 맨손으로 집어 내다 버려야 했던 여자애, 그 아이의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닭들과 남자들. 기억 속에서.

  세월이 흘러 아이는 성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그 남자와 남자의 아내 앞에서 우정을 연기하며 술을 마셔야 했으며, 그게 슬퍼서 마신 술에 비해 더 취기가 올랐는 지는 모르지만,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잠깐 졸았는데, 눈을 떴을 때, 택시는 텅 빈, 캄캄한, 공장 단지에서 멈췄으며, 택시 운전수는 권총으로 여자의 배를 쿡 쑤시면서, 인신매매단에게 넘겨버렸다. 이 악당들이 납치해온 사람은 여자 한 명이 아니었다. 돈이 좀 있을 것 같은 남자도 잡혀왔다. 이들은 다른 악당들에게 인질을 판매하는 경매를 시작하고, 낙찰 받은 악당은 인질의 신용카드, 은행계좌의 돈, 집안에 보관한 보석과 현금 그리고 값나갈 만한 가전제품을 몽땅, 아주 몽땅 갈취한다. 자신들도 본전을 뽑아야 하니까. 아니면 적어도 몸으로 육체적 보상이라도 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닭의 피와, 창자와 닭똥 속에서 자라야 했던 젊은 여자는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당연히 결말은 안 알려준다.

  그런데, 문제는 문장과 문체. 이런 그로테스크하며 엽기적이고 막장의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 놀랍게도 매우 유려하고 상세하고 그래서 더 호소력있는 긴 문장으로 적혀 있다. 물론 작품을 읽으며 문장과 문체라는 하드웨어에 집중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는 책이라면.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렇게만 단정하기에는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글은 너무 매력적이다.


  에콰도르 또는 라틴 아메리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대륙 주거인들보다 훨씬 불안정한 치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물리적 폭력이 등장하는 소설을 많이 읽게 되는데, 공권력과 범죄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이 나오지 않는 라틴 아메리카 작품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렇다. 이런 면에서도 암푸에로의 단편들은 기존에 익숙한 라틴 아메리카의 폭력과 차별을 둔다. 앞에서 암푸에로가 페미니즘 소설가라고 했듯이 당연히 남성에 의하여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과 가부장제 하의 폭력은 물론이고, 같은 여성 연대 속에서도 고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하녀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도 적나라하다. 물론 여성 사이의 폭력은 몸에 가하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재산과 계급과 인종 등 “다름”에서 비롯하는 극단 차별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좋은 이야기만 해도 “꽃노래도 삼세번”이건만 처음부터 끝까지, 열세 작품이 모두 이런 식의 극단적인 폭력과 그로테스크한 과정을 거친 그로테스크한 결말로 치닫는 바람에 앉은 자리에서 몽땅 읽을 경우 내가 그랬듯이 나중엔 질려 버릴 수도 있다. 작가의 시선은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를 점령한 가톨릭을 향하기도 한다. 마르타와 예수에게 향유를 바른 마리아, 그리고 부활. <상중喪中>은 이렇게 끝난다.


  “이 계절엔 바람이 지독하게 몰아칠 때가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다시 음식을 먹다가 문 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들었고, 누가 손으로 문을 밀 듯 문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파리 떼가 들어왔고 이어서 죽은 오빠가, 구역질 나는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마치 그녀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으나, 이가 다 빠진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못했고 다만 구더기들만 기어 나왔다.” (p.141)


  죽은 자 가운데 삼일 만에 살아 돌아온 오빠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긴 왔는데, 죽기 전에 이미 충분히 부패한 상태였고, 죽은 다음에도 사흘 동안 열심히 파리들이 알을 까서, 이 모양 이 꼴을 하고 돌아온 거다. 그럼에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왔음에도, 죽었다가 다시 “육신의 부활”을 이룬 오빠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부활을 했냐는 말이지. 가부장제? 남성에 의한 폭력? 혹시 중세?

  좋다. 좋지만 과하게 그로테스크한 거 아냐 이거?

  같은 가톨릭의 품에서 자랐는데도, 내일 독후감을 쓸 아일랜드 “여성” 작가 클레어 키건하고, 세상에나,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두 작가 다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다양한 건 거의 언제나 찬양할 만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