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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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먼 옛날, 멀고도 먼 까마득한 시절엔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었단다. 하늘이 땅 위에 닿아 있으면 그것은 언제나 천국이라는 이야기. 사람들은 언재든지 하늘에서 산책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시절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 인간보다 먼저 거인들이 땅으로부터 삐질삐질 머리통을 내밀더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인들은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인들은 악하고 질투심이 많아서 땅을 통째로 자기들이 갖기를 원했던 거다. 오직 자기들만. 그래서 돌을 가져다가 높이 쌓았다. 돌로 온 하늘을 받쳐 땅으로부터 완전히 떨어뜨릴 때까지. 그래서 하늘은 더 이상 땅 위에 놓여 있지 않게 됐으며, 하늘은 슬퍼했음에도 어쩔 수 없었고, 그때 거인들이 쌓은 돌로 ‘쿠프론’ 산을 만들었단다. 그렇게 하늘은 다시는 아래로 내려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혹시 모른다. 누군가 마음이 깨끗하고 어린 눈으로 보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살짝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곤 했는지도. 헤르만 브로흐의 이야기는 저 먼 시절에 거인들이 쌓아올린 돌의 산, 쿠프론 절벽의 비탈에 자리한 두 마을을 배경으로 풀려나간다.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
  스물여덟 살의 소아과 전문의 바르바나. 뛰어난 실력과 환자는 물론이고 동료 의사와 간호사까지 한 눈에 사로잡는 장악력, 그리고 헌신적인 직업의식까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는 전문인. 마흔두 살의 외과의사가 날이 갈수록 바르바나에게 우정을 느끼다가 당연한 수순으로 애정으로 발전하고 넘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해 청혼을 했지만 부드럽게 거절당한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심한 뇌진탕이 생긴 아이를 혼신을 다해 치료했으나 바르바나가 우려한 증상을 그대로를 겪으며 결국 숨지자 그녀는 결국 외과의를 자신의 침상에 불러들이고 한 번의 일탈은 임신으로 이어진다. 임신사실을 알게 된 외과의는 바르바나에게 다시 한 번 청혼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두 가지 직업과 아이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하니, 두 번째 직업이란 공산당 행동대원.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두 번째 직업은 병원 내 세포조직을 만드는 일이란다. 두 번째 직업과 상관없이 바르바나는 외과의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며 외과의로 하여금 희망을 끈을 이어가게 했으나 바르바나는 어느 날 한 호텔방에서 바로 그 실험실에서 빼낸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해버리고 만다. 외과의는 점점 도시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껴 급기야 의사면허를 가진 어떤 사람도 찾지 않는 산골 오지의 의사를 지원해 쿠프론 절벽 윗동네로 부임해 십 수 년이 흐른 어느 여름, 작년 3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하고 제목을 <현혹>이라 한다.
  요란한 역사를 가진 모라비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요제프 브로흐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와서 행운과 노력과 사주팔자 덕에 섬유업계의 거상으로 성장한 다음, 친척누이이자 가죽업계 거상의 딸인 요한나 브로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는다. 둘 가운데 첫째가 이 책을 쓴 헤르만.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글쓰기가 탁월해 수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 공학과 경영학을 배웠단다. 그러나 자신이 부친의 소원대로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마흔이 넘어서면서 회사를 홀랑 팔아먹고 본격적인 집필활동에 들어서서, 소비성향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해, 나중엔 쪼들리는 생활을 겪었다고 한다. 헤르만은 몰랐지. 세상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빵이란 엄혹한 사실을.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때를 맞춰 브로흐 가족에게 들이닥친 건 나치의 폭력. 브로흐 자신도 1938년에 3주 가량 불법 수감되어 고초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1938년이면 그의 나이 52세. 마흔이 넘어 늦게 시작한 작가생활일지라도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몽유병자들>을 간행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라 토마스 만, 알베르 아인슈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이 도와줘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족 중 어머니 요한나 브로흐는 1942년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나치 입장에서도 브로흐가 더욱 눈꼴시었던 이유는 더러운 유대인 주제에 감히 ‘반파시즘적인 민족연합’을 결성해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어차피 이리 당하나 저리 당하나 시간이 문제였을 뿐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브로흐가 전체주의, 파시즘에 관해 작품 하나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 그리하여 1935년에 집필을 시작해 36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이후 개작을 하다가 1951년 3본 집필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뉴욕에서 운명한다. 향년 65세. 당시 나이로 그 정도면 짧게 살지는 않았지만 <현혹>은 그래서 결국 ‘미완’이며 ‘유작’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내가 본문이 겨우 557쪽에 불과한 <현혹>을 무려 나흘에 걸쳐, 입시공부 하듯 노트에 빽빽하게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 사건의 개요 같은 걸 요점정리 해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브로흐의 소설은, 비록 이것이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외피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상징과 의미의 중복, 철학적 논제 같은 것 때문에 잠시라도 맥을 놓으면 곧바로 혼돈의 골짜기로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유독 눈에 힘을 주고 읽어야 했다. 물론 다 읽고나면 <몽유병자들>에 비교해서 훨씬 수월한 난이도 덕에 비교적 편하게 읽힌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시라. 정작 읽기 전에 먼저 또 브로흐를 겪어야 한다는 걱정이 오죽했었는지.
  상부 쿠프론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부의 후예로 이들 사이에는 오래 전에 난쟁이들이 금을 채굴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난쟁이들을 노예로 만들어 황금을 약탈하려 하자 난쟁이 왕이 사람들에게 학살당하면서 난쟁이가 아니라면 이 갱을 확장하거나 갱의 높이를 더 높이지 못하리라고 저주하면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짜로 난쟁이갱坑이란 폐광이 존재하기도 하고 주민들도 이 갱을 더 깊이 파기만 하면 틀림없이 황금을 캘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중요한 등장인물인 산山마티아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훌륭한 인격체이며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예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기손, 이들과 매우 친분이 있는 토마스 주크 등은 진짜로 금을 캐내기 위해서는 먼저 산이 허락을 해야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하부 쿠프론에는 원래부터 이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던 농부들의 집단으로 어떤 의미에선 이방인인 상부 쿠프론 사람들을, 비록 두 집단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와 종교행사 등을 차별 없이 나누지만 은근히 멸시하는 경향이 있어 후에 산신부山新婦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름가르트의 아버지 로렌츠 밀란트 씨가 젊은 시절에 상부 쿠프론 출신의 아가씨 에르네스티네 기손 양을 아내로 맞이하자 부친이 극도로 불쾌하게 여겨 죽을 때까지 며느리를 외면했으며, 아들에게 재산을 유증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작은 고을에 3월의 어느 날, 석탄을 운반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피곤한 몰골에 형편없는 신발을 신은 ‘마리우스 라티’라는 젊은 남자가 도착하면서 이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소설의 막이 올라간다. 마리우스는 얻어 타고 오는 차 속에서 운전기사와 두 명의 조수에게 끊임없이 ‘정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들의 분노를 사면서 등장한다. 마리우스는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는데, 밀란트 씨는 마땅하지 않았음에도 우연인지 아니면 지역의 운명인지 그를 받아들였고,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맏딸 이름가르트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금광의 꿈과 자기가 주장하는 정결을 기치로 점점 하부 쿠프론의 농부와 지역공동체의 젊은이들에게 독자들만 실체를 알 수 있는 '헛된' 꿈을 심어주기 시작하고 고을이 생긴 이래 공통적인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장년층과 지도층까지 모두 이것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설정을 하게 된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키가 작지만 상당한 팔 근육의 사나이 벤첼. 벤첼은 급기야 상부, 하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군대편성 비슷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신이 거의 난쟁이 수준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전설로만 내려오는 난쟁이갱을 파내려가려 하다가 상부 쿠프론에 사는 소수의 현명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아, 한 명의 등장인물만 더 소개하자.
  라디오 대리점이자 농기구 대리점에다가 보험외판까지 하는 도시출신의 못생기고 가난하고 허약한 ‘베취’ 씨. 마리우스가 지역에 들어와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어 책 속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률에 맞춰 밀란트 씨의 작은 딸 체칠리에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라디오를 꺼버린 일이다. 음악과 춤은 도시용이어서 땅과 연결하는 정결의 의지와 반대되기 때문에. 이후 마리우스와 그의 하수인으로 볼 수 있는 키 작은 벤첼과 벤첼의 부하들은 수시로 베취 씨를 괴롭히다가 급기야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린치를 가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지역 주민에게 금, 즉 부와 정결과 약한 사람들의 추방을 약속하는 마리우스와 키 작은 벤첼. 초고를 쓰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의 오스트리아, 독일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독자는 안다. 마리우스는 지역 주민들에게 거대한 최면의식으로 기독교적 축제를 이용하여 피에 의한 정화를 주장했음에도 책이 끝날 때쯤에는 공동체위원으로 발탁된다. 현혹이란 무엇인가. 이런 거대한 공동최면 상태에 휩쓸리는 일. 주인공인 의사 화자 ‘나’조차 숱한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 집단 최면에 취하게 되는 힘. 그게 바로 전체주의의 실체이며, 실체의 핵심인 최면상태에 빠지게 하는 현혹이다. 현혹은 언제나,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음을 인류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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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 있는 책인데...
도서관이나 좀 묵혀서 중고로
만나는 것으로.

Falstaff 2020-01-23 09:59   좋아요 0 | URL
브로흐 책 중에서 그래도 제일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선택이야 어떻게 하시든 한 번은 읽어봄 직한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얄라알라 2020-01-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557쪽^^:;;;
겸손하신 Falstaff님.

동의도 하지 않고 라디오를 꺼버린.
이 부분은 실제 묘사를 더 자세히 읽고 싶어지네요.

Falstaff 2020-01-23 12:36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게, 페이지 수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거였는데요. ^^;;;

마리아스가 밀란트 씨의 피고용인이잖아요. 일꾼 주제에 주인댁 둘째 따님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걸 그냥 팍 꺼버리는 장면입니다. 이제 어린 애는 자야 할 시간이며, 그다음 이유로 라디오는 도시용이라 우짜구 저짜구 하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아무도 마리아스의 허튼 짓에 뭐라하지 않는 것이지요. 뭔가 주위를 지배하는 힘, 아우라가 있는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랍니다.
 
모리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244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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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연애소설. 무릇 소설의 꽃은 연애소설이라는데 나는 이의가 없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라도.
 책 소개 글에도 나왔듯이 작품은 1913년에 시작해 1914년에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보듯 원고는 포스터의 책상 서랍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바싹 말라가다가 “성인들 간의 합의된 동성애에 관해서는 처벌하지 말 것을 권고한” 1957년의 ‘울펜든 권고’가 법제화된 1967년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도 될까? 이제는 이 작품을 발간해도 여태 쌓아온 E.M. 포스터,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명성이 진흙탕에 쑤셔 박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간을 보다가 그가 죽고 일 년이 지난 1971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1879년에 태어나 퍼블릭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를 졸업한 영국의 상류계급, 노동하지 않거나 변호사나 금융업 등의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신사계급으로 당연히 집안에 하인과 하녀를 수다하게 거느린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19세기에 출생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수 요소인 다독,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신분에서만 나왔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포스터보다 불과 1년 늦게 태어났으며 심지어 포스터와 같은 킹스칼리지 출신의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래드클리프 홀1이 있다. 이 사람도 <모리스>와 유사한 주제의 <고독의 우물>을 써서, <모리스>를 쓴 시기와 비교해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1928년 런던의 하늘 아래 붉은 불온 삐라처럼 자신의 작품을 살포하고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당당하게’ 출판금지 처분을 접수했다. 같은 해, 포스터보다 6년 늦게 태어난 D.H. 로렌스는 동성애는 아니지만 러브씬이 대단히 끔찍하다고 외설이라는 판정을 받아 필생의 역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출판 금지의 월계관을 쓴다. 포스터는 자신의 문제작(이 될 수도 있었던) <모리스>를 세상의 법에 의거한 ‘자유로운 출판’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자유롭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신이 천국의 즐거움이 어떤 맛인가를 확인 한 다음 해에야 세상에 나오게 한 반면, 홀과 로렌스는 기존의 율법은 개나 물어가라고 외치면서 속세의 콘크리트 바닥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물론 <모리스>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연애소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연애소설의 초점은 외로움과 기다림과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것에 결판이 나고, 이 방면에 관해서 E.M. 포스터만큼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말이 쉽지 어떻게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만드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쓰는 작가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것도 “잘 생겼고 건강하고 육체적 매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둔하지만 사업능력이 있고 또 얼마간 속물”의 성향을 지닌 모리스 홀이 작품의 중후반까지 계속 유지하는 신사계급의 위선과 거만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부의 약속을 물리치고 기꺼이 사랑을 좇아 하층 계급으로 스스로 편입한다는 점에서 포스터의 (상대적으로)진보적인 시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 그날 밤 내내 그의 몸은 알렉의 몸을 갈망했다. 그는 그 욕망에 <음탕함>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직업, 가족, 친구들, 사회적 지위를 거기 맞세웠다. 이 목록에는 당연히 그의 의지도 포함시켜야 했다. 의지가 계급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가 건설해 온 문명을 산산조각 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을 위해 계급과 문명마저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작품 속에만 있는 바였으며,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포기, 또는 의도적으로 지연시킴으로 해서 자신의 진보적 운동성이 허구에 불과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런 해석이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책을 발간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작품 역시 영불해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영국 내 문화의 협소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다른 작가들과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터는 홀과 로렌스가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그들을 지지했겠지만(포스터는 1949년 영국 왕실이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정중하게 사양한 이력이 있다) 나서서, 엄혹한 영국의 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적이 있을까? 이건 내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다. 모르고, 또 의심이 들어.
 133쪽 부근에, 이미 모리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버린 클라이브 더럽, 모리스로 하여금 동성애의 즐거움으로 인도해놓고 자신은 다시 이성애의 벽 너머로 가버리면서 진정한 동성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소리만 늘어놓는 개자식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모리스를 떠났음에도 그걸 내색하지 못할 즈음, 그의 어머니 더럽 부인은 모리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라이브는 대신 여행을 해야 돼. 아메리카에 가야하고, 가능하다면 옛 대영 제국령에도 가야 해. 요즘에는 그게 필수코스처럼 굳어져 있으니.”
 “클라이브도 졸업 후에 여행을 가겠다고 해요. 저더러 같이 가자고 했어요.”
 E.M 포스터는 동성 간의 사랑을 위하여 계급과 문명 따위는 폭파해버릴 수 있어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식민지 수탈로 인한 서구 문명의 발전까지는 포기하지 못했다. 포스터는 이 작품을 써놓고 무려 46년이 지난 1960년,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2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 런던의 서재에 앉아 이 책에 관한 열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쓰면서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에 결코 한 줄의 퇴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모리스>가 좋은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혐오하며, (다른 작가와 비교해)작가적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그의 행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1. <고독의 우물>을 쓴 용감한 래드클리프 홀은 여성입니다. 요즘 '여류작가'란 말을 썼다가 꾸짖는 댓글을 여러번 받아(왜요, 남류 독자님?) 젠더에 관계없이 그냥 '작가'라고 썼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까 1920년대에 동성애 소설을 쓴 (남자가 아닌)여자 작가라는 위상이 더욱 E.M. 포스터와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래 '여류'라고 다시 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고독의 우물>은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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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사이의 식사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56
강봉덕 지음 / 실천문학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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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는 ‘시인의 말’을 싣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더 낮아진다는 것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의 말’을 길게 써놓은 시인 강봉덕. 그러나 시인이여, 세상은 시가 없어도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갈 것이며, 특별히, 시를 빙자해 교묘한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면 심지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더욱 특별하게, 껍데기들이 가 주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의 인구증가율까지 높아질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사랑하며 살게 될 거 같으니까.
 공개된 장소에 독후감을 쓰면서 난감한 일은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리 작가, 시인들의 작품에 대하여 ‘솔직하게’ 독후감을 쓰는 일이다. 몇 번 인용을 했지만 누군가가 유명 시인 김x정에게 “이게 시냐?”라고 문자를 보내자 적어도 오줌발 하나에 관해서는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시인이 “이게 시다, 씨발놈아!”라고 답글을 쓰려다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일개 독자의 독후감일망정 혹평을 하면 “xxx입니다.” 자신이 글을 직접 쓴 작가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 쉬운 얘기로 하자면, 쥐똥도 모르면서 함부로 짖지 말라는 취지의 댓글이 달리는 일이 제법 있다. 나? 당연히 나도 몇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대응하다가 이제 그런 댓글 올라오면 안면 덮고 그냥 지워버리고 말지만 절대 개운한 기분을 유지할 수 없다. 당연하지. 작품을 쓴 시인, 작가들은 나름대로 전력을 다 해 자기가 뽑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씨줄과 날줄을 엮었을 터이니. 근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읽기에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을 뿐이란 점. 내가 무식한 것도 알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유사 이래 독자의 수준이 낮은 걸 통탄해마지않았던 쥐뿔도 없는 시인, 작가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궁무진하게 많았지 않은가. 독자의 낮은 수준은 시인, 작가들이 깔고 앉아야 하는 형틀이다. 그걸 핑계로 독자의 혹독하고, 이해할 수 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비평을 비난하지 말지어다. 너희들은 똑똑한 족속이니까.
 시집의 경우엔 한 권 읽으면서 두 편의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면 횡재, 한 편의 시는 본전, 아예 없으면, 꽝이지 뭐. 이런 의미에서 강봉덕의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는 나한테는 꽝이다. 오죽했으면 독후감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것이 책의 뒤 끝에 달린 ‘시인의 말’이었겠는가.
 내 취향에 이 시집은 맞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시들에 관해 독후감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아, 이 다음에 줄줄이 써내려간 나머지는 싹 지워버렸다. 그러나 시인이여, 나는 그저 일개 아마추어 무식한 독자일 뿐이니 당신은 계속해서 시를 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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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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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의 한 밤,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최고급 호텔 메트로폴리탄의 스위트룸에 기거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뉴욕의 일간지 “브루클린 프레스”의 문화부 칼 페이트 부장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실과 내용을 뉴욕 프레스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브루클린 프레스는 1971년에 사명을 뉴욕 프레스로 바꾸고 사옥도 6번가 619번지로 이전했다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다.
 영어로 이루어진 이 날의 인터뷰 내용이 그해 나보코프가 출간한 <창백한 불꽃>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머리말,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무려 280쪽에 달하는 주석, 그리고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보코프와 페이트 부장 간의 대화의 상당한 부분이 영어를 포함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의 운율을 다루고 있어, 그 부분은 해석해 낼 도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언어 또는 문자나 단어를 가지고 노는 희문작업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을 설명하는 도중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숱하게 유사한 언어유희를 펼쳐 영어에 그리 밝지 못한 나를 단어의 늪에 빠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를 짧게 정리해 옮기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하는 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그냥 어떤 의미인지만 파악하셔야 하지, 대 문호와 뉴욕 프레스의 문화부장 간에 나눈 고차원적 문학이야기를 내가 올바로 전한다고는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나보코프는 매체와의 인터뷰를 호환 마마보다 더 싫어했다고 하는데 정말 우연히 그리고 다행스럽게 이런 기사를 구해 읽게 됐다.
 나보코프는 19세기의 끝인 189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이자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후 아버지 블라디미르 디미트리비치는 당연히 백군에 참여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당하는 바람에 크림으로 이주했고 와중에 나보코프는 1919년부터 동생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를 하면서 아버지가 현지에서 러시아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나보코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극우 집단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조국인 소비에트에서 또 다른 암살자를 보내 자신의 심장에도 총알을 박아 넣을지 아닐지, 일종의 습관성 피해망상 비슷한, 결코 병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종류의 두려움에 휩싸인 채 63세가 된 지금(1962년)까지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비교적 안전한 유럽에 살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완전하게 (테러로부터)안전한 미국시절까지 저 의식 깊숙한 곳에서 “가끔 솟아나와 찔러대는 공포”에는 대책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자신이 올해(1962년)에 출간한 <창백한 불꽃>의 기본적 발화점은 러시아 귀족집안 출신이면서 소비에트에 적대행위를 한 부친을 둔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의 집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나보코프와 칼 페이트 문화부장 사이의 대담에 무수한 언어유희가 난무해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검색해 원어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터뷰 가운데에서 유독 희문戱文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이 쓴 4부로 구성된 시 <창백한 불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보코프 본인은 이런 구성을 호프만슈탈의 희곡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염두에 두었으며, 원래는 호프만슈탈처럼 “극중극劇中劇”의 형태를 구상했으나 아예 처음부터 독자를 희롱(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내 영어수준으로 고른 최선의 단어임을 이해해주시라.)하는 것으로, 책을 쓰는 도중에 스토리 라인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영문학자 킨보트라고 명명하고 존 셰이드가 쓴 표제 시 <창백한 불꽃>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손에 넣어 책을 출간할 권리를 얻은 다음, 무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기준으로) 280쪽에 달하는 주석을 달고, 주석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했는데, 자신도 그렇게 플롯을 바꾼 다음에 읽어보니 훨씬 더 흐뭇하더라고 고백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나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 숙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마는 젬블라 왕국의 망명 폐왕廢王 ‘카를 크사베리 프세슬라프’ 이야기를 어떻게 작중 미국의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와 그의 가정사家庭事에 엮어 넣을 것인가 이었다면서, 그 해결을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요약하는 인터뷰 내용을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면에 이미 읽어보신 분은 단박에 이 독특하고 해괴망측한 소설 <창백한 불꽃>의 탄생설화를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하여간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두 시간에 걸쳐 검색을 해 찾아보고 그걸 하루 종일 해석을 해 독후감을 대신하기는 내가 가나다라 익힌 이후에 처음이다. 그만큼 <창백한 불꽃>은 좋은 의미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작품이고, 놀라자빠질 구성으로 만들었으며, 마지막 두어 페이지의 반전으로 최후의 어퍼컷을 먹인다는 것쯤은 미리 아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근데 최후의 카운터 블로우는 출간 당시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벌써 근 60년이 흘러 독서력이 좀 있는 독자들은 책의 70% 정도가 되면 마지막 반전을 눈치 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당신이 진짜로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 가지로 놀라고, 힘겹고, 심지어 짜증나다가 점점 책 속에 푹 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걸?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 위 본문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브루클린 프레스란 언론사는 있어본 적도 없고,
  뉴욕 프레스는 1988년 창간해서 2011년 폐간한 주간지이며,
  뉴욕 6번가 619번지 바로 길 건너 620번지에는 뉴욕 타임즈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나보코프가 묵었다는 호텔은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살던 "메트로폴"리탄 호텔 스위트룸 이었으며,
  신문사 문화부장 칼 페이트 역시 미치너의 <소설>에서 나오는 평론가의 이름 '칼'과 볼라뇨의 <2666>에 출연한 뉴욕 할렘가 신문 <검은 새벽>의 문화부 기자의 성姓의 합성이며,

  호프만슈탈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희곡이 아니라 오페라 대본이며,
  당연히 기사 내용 전부 다, 싹, 구랍니다.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 정말 화딱지 날 정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져서 저도 한 순간 심술이 도져 마음 먹고 구라 한 번 풀어봤답니다.
  진지하게 읽으셨다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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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1-1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킨보트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1-15 11:4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이래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닷!!! ^^

CREBBP 2020-01-2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나서 비슷한 컨셉의 리뷰의 작성을 시도했었는데, falstaff님은 해내셨네요. 그냥 여기저기 작품분석 논문들만 찾아 가며 흥미롭게 읽다가 관둔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0-01-20 11:59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반갑습니다. 한 번 써보시지요. 궁금하네요.
 
유도라 웰티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4
유도라 웰티 지음, 정소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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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유도라 웰티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현대문학사社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가 나옴으로 해서 주로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독자의 한 사람으로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물론 이이가 <낙천주의자의 딸>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은 절판 상태라 읽기가 힘들겠으나, 뜻이 있으면 다 방법이 있는 법, 올해 안에 내가 독후감 쓰고 만다. 그만큼 유도라 웰티의 작품들이 나하고 맞았다는 말이다.
 연표를 보면 웰티가 그리 많은 작품을 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1909년생인데 1943년에 첫 번째 단편집 《초록 장막》을 냈으니 당시가 34세. 43년에 두 번째 작품집 《커다란 그물》, 49년 나이 마흔에 세 번째이자 연표 상에서는 마지막 작품집 《황금 사과》를 출간한다. 이 책 《유도라 웰티 -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은 연표에 소개한 세 권의 단편집 전부를 한 권으로 묶어 번역해놓았다.
 책의 앞날개에 작가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 보면, 웰티는 “미국 남부 문학에서 포크너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미국 남부 문학”을 대도시에 기반을 둔 작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 예로 든 포크너를 위시해서 스타인벡, 캐더, 셔우드 앤더슨, 매컬러스 등을 다 망라한다 해도 이 유도라 웰티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작품으로는 더 그렇다. 웰티는 위 작가들과 비교하면 삐딱하지 않다. 적어도 ‘훨씬 덜’ 삐딱하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안정된 집안에서 곱게, 거기다가 ‘착하게’ 자라 지역 여자대학과 위스콘신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김에 뉴욕에 자리를 잡지도 않고, 어머니가 부르자마자 예스 맘, 하면서 곧바로 다시 귀향해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변변하게 해보지 못한 채 여전히 ‘곱게’ 나이 먹어가면서 열심히 촌구석 사교계 활동에 전념하며 틈틈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당연히 결혼은 선택이지만 이건 지금 논리고, 당시 쁘띠 부르주아, 특히 남부의 족보 있는 가문의 아가씨한테는 필수였음을 상기하자. 이렇게 마흔 살이 넘게 살다가 당시 미국 문학계의 큰 별이며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30번으로 책도 낸 적이 있는 선배 캐서린 앤 포터가 웰티를 방문하고자 했을 때도 늙은 딸이 더 늙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방문을 승낙했을 정도였다니 정말 ‘착하지?’ 그러니까 캐서린 앤 포터가 방문을 했을 때가 1950년대다. 아무리 남부 시골지역이라 해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펼쳐질 때임에도 웰티에게는 예외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을 듯.
 웰티의 작품은 실제 지명인지 아니면 가상지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치즈’라고 하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말이 배산임수지,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부에서 배산임수라는 건 만일 강이 범람했다하면 5마일, 그러니까 6km 떨어져있는 강에서 쳐들어 온 강물이 이층, 삼층집 지붕만 남겨두고 몽땅 잠수시켜버리는 벌판을 뜻한다. 물에 근접해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다. 땅이 워낙 크니까. 시골 사교계의 유력인사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결혼생활을 하는 대신 사진 찍기에 취미를 들려 다양한 계급, 피부색의 미국인들을 필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이런 취미활동이 이이의 단편소설들에서 특징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들어냈음직하다. 특징적 인물? 그렇다. 첫 번째 수록작 <릴리 도와 세 부인>의 주인공 릴리 도는 정신지체아로 세 명의 부인이 릴리를 시설로 보내려하지만 릴리 도는 서커스의 실로폰 연주자와 결혼을 약속한 설정을 했고, <화석인>에선 기형인畸形人을 보여주는 공연에서 하반신이 경화되어 점점 돌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네 명의 여자를 강간하고 지명수배중인 페트리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열쇠>에선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 부부, <쫓겨난 인디언 처녀 킬라>는 닭을 산 채로 잡아먹는 모습을 공연하는 내반족內反足(극심한 안짱다리) 흑인 리틀 리 로이, <클라이티>에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처녀 주인공과 뇌졸중인 아버지에다가 알코올 중독기미가 있으며 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아내가 도망친 오빠 제럴드, <늙은 마불홀씨>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저쪽에도 아들을 하나 둔 중혼자, <자선방문>에선 노인 요양소의 문제 있는 두 할머니, <어떤 외판원의 죽음>에선 심장병 있는 세일즈맨 보먼 씨에다가 <첫사랑>의 주인공 조엘 메이스는 귀머거리고, <황금소나기>의 주인공 스노디 매클레인 여사는 정상인 두 아들을 낳은 백색증, 즉 알비노, <6월 발표회>에선 로크 모리슨이란 소년은 말라리아 투병 중에다가 주인공 에크하르트 피아노 선생은 와병중인 노모를 봉양하느라 맛이 조금 간 상태여서 다음 작에선 방화범으로 현장 체포되며, <달 호수 Moon Lake> 주인공 이스터는 목에 때가 끼어 검은 줄이 생긴 고아소녀, <방랑자>에서 케이티는 뇌졸중이었다가 급기야 숟가락 놓고 만다. 내가 잠깐씩 메모 했던 것만 그렇다는 거다.
 이 많은 결손들. 이게 어디서 왔을까? 웰티가 수집해놓은 1930년대부터 약 20년간 사진을 보고 등장인물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신 스스로가 연애 못해본 마흔이 넘은 노처녀로 뭔가 결핍을 느껴 이런 사람들을 작품에 캐스팅하게 된 걸까. 그건 모르겠다. 물론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에서도 정신지체아가 등장하고 그의 시각에서 본 세상을 묘사하기는 하나 이렇듯 골고루, 다양한 결핍까지는 아니다. 반면에 이들의 일탈은 소설적 시각으로 봐서, 싱겁다. 가장 귀여운 일탈은 재미있게 읽은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에서 주인공 아가씨가 집을 나와 우체국, 전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규모의 우체국에 커튼을 치고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었고, 제일 심각한 건 <클라이티>에서 주인공의 작은 오빠 헨리가 자기 얼굴에다 총을 쏴 총알이 얼굴을 관통해 사망에 이른 것인데 소설은 작은 오빠가 죽은 한참 후부터 시작하니 엽기적 장면은 아예 등장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넘어간다.
 내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읽기에 관해서 소양이 많이 떨어지는 아마추어임에도 조금 건방지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지루함을 참는 힘이 부족한 독자들이 ‘읽어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단편소설답게 한 작품에서 시간적 배열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사람의 관점에서 저 사람의 관점으로 시각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그때그때 상황판단이 팍팍 되어야 하지만 이게 무려 본문만 830쪽에 육박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여덟 시간 내내 집중하고 있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변변한 유머 코드도 없다. 여차하면 지루함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작품씩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읽는 것이라는 건 알고는 있으나, 불행하게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여유’를 부릴 여유가 있겠는가 말이지.
 내가 읽기로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단편집 《황금 사과》, 이 책의 3부였다. 모두 일곱 개의 중단편이 들어 있고 총 356쪽이다. 무대가 미시시피주의 모개나 마을과 매클레인 카운티이며, 시간적 배경은 1900년경부터 현대(1940년대 후반)까지다. 가장 중요한 가족은 역시 매클레인 가문. 킹 매클래인이 알비노인 스노디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는데, 카운티 이름이 매클레인인 것처럼 킹의 아버지가 처음 이 동네로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단다. 그런데 킹은 스노디와의 사이에서 정상인 아들 쌍둥이를 낳고는 집을 나가 일 년이면 일 년, 삼년이면 삼년, 소식을 뚝 끊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소식 하나 없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이박삼일 간 실컷 잠을 자고나서는 또다시 사라져버리는 사이클을 단행해 동네에서 참으로 싹수없는 인간으로 호가 나버린다. 동시에 일종의 신비함이랄까 경외심이랄까 하는 것도. 이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출신 여자 피아노 선생 에크하르트와 이웃들, 킹 매클래인의 쌍둥이 아들이 소위 연작 형태의 중단편을 만든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형태의 작품은 이문구의 <우리동네>나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처럼 그냥 ‘연작장편’이라 부를 듯. 글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이 연작 가운데 <6월 발표회>이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수 있겠다. 그것 말고도 <파워하우스>도 좋았으며 <커다란 그물> 역시 인상 깊게 읽었다. 굳이 단편소설의 내용을 독후감에 써서 나중에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의 김을 뺄 수는 없다.
 내가 읽기로는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가운데 (그래봤자 완독은 이제 아홉 권뿐이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하기는 하나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고 미리 다짐을 해야 할 책. 어떠셔? 관심 돋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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