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244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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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연애소설. 무릇 소설의 꽃은 연애소설이라는데 나는 이의가 없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라도.
 책 소개 글에도 나왔듯이 작품은 1913년에 시작해 1914년에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보듯 원고는 포스터의 책상 서랍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바싹 말라가다가 “성인들 간의 합의된 동성애에 관해서는 처벌하지 말 것을 권고한” 1957년의 ‘울펜든 권고’가 법제화된 1967년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도 될까? 이제는 이 작품을 발간해도 여태 쌓아온 E.M. 포스터,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명성이 진흙탕에 쑤셔 박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간을 보다가 그가 죽고 일 년이 지난 1971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1879년에 태어나 퍼블릭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를 졸업한 영국의 상류계급, 노동하지 않거나 변호사나 금융업 등의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신사계급으로 당연히 집안에 하인과 하녀를 수다하게 거느린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19세기에 출생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수 요소인 다독,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신분에서만 나왔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포스터보다 불과 1년 늦게 태어났으며 심지어 포스터와 같은 킹스칼리지 출신의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래드클리프 홀1이 있다. 이 사람도 <모리스>와 유사한 주제의 <고독의 우물>을 써서, <모리스>를 쓴 시기와 비교해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1928년 런던의 하늘 아래 붉은 불온 삐라처럼 자신의 작품을 살포하고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당당하게’ 출판금지 처분을 접수했다. 같은 해, 포스터보다 6년 늦게 태어난 D.H. 로렌스는 동성애는 아니지만 러브씬이 대단히 끔찍하다고 외설이라는 판정을 받아 필생의 역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출판 금지의 월계관을 쓴다. 포스터는 자신의 문제작(이 될 수도 있었던) <모리스>를 세상의 법에 의거한 ‘자유로운 출판’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자유롭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신이 천국의 즐거움이 어떤 맛인가를 확인 한 다음 해에야 세상에 나오게 한 반면, 홀과 로렌스는 기존의 율법은 개나 물어가라고 외치면서 속세의 콘크리트 바닥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물론 <모리스>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연애소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연애소설의 초점은 외로움과 기다림과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것에 결판이 나고, 이 방면에 관해서 E.M. 포스터만큼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말이 쉽지 어떻게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만드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쓰는 작가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것도 “잘 생겼고 건강하고 육체적 매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둔하지만 사업능력이 있고 또 얼마간 속물”의 성향을 지닌 모리스 홀이 작품의 중후반까지 계속 유지하는 신사계급의 위선과 거만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부의 약속을 물리치고 기꺼이 사랑을 좇아 하층 계급으로 스스로 편입한다는 점에서 포스터의 (상대적으로)진보적인 시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 그날 밤 내내 그의 몸은 알렉의 몸을 갈망했다. 그는 그 욕망에 <음탕함>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직업, 가족, 친구들, 사회적 지위를 거기 맞세웠다. 이 목록에는 당연히 그의 의지도 포함시켜야 했다. 의지가 계급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가 건설해 온 문명을 산산조각 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을 위해 계급과 문명마저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작품 속에만 있는 바였으며,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포기, 또는 의도적으로 지연시킴으로 해서 자신의 진보적 운동성이 허구에 불과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런 해석이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책을 발간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작품 역시 영불해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영국 내 문화의 협소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다른 작가들과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터는 홀과 로렌스가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그들을 지지했겠지만(포스터는 1949년 영국 왕실이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정중하게 사양한 이력이 있다) 나서서, 엄혹한 영국의 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적이 있을까? 이건 내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다. 모르고, 또 의심이 들어.
 133쪽 부근에, 이미 모리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버린 클라이브 더럽, 모리스로 하여금 동성애의 즐거움으로 인도해놓고 자신은 다시 이성애의 벽 너머로 가버리면서 진정한 동성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소리만 늘어놓는 개자식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모리스를 떠났음에도 그걸 내색하지 못할 즈음, 그의 어머니 더럽 부인은 모리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라이브는 대신 여행을 해야 돼. 아메리카에 가야하고, 가능하다면 옛 대영 제국령에도 가야 해. 요즘에는 그게 필수코스처럼 굳어져 있으니.”
 “클라이브도 졸업 후에 여행을 가겠다고 해요. 저더러 같이 가자고 했어요.”
 E.M 포스터는 동성 간의 사랑을 위하여 계급과 문명 따위는 폭파해버릴 수 있어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식민지 수탈로 인한 서구 문명의 발전까지는 포기하지 못했다. 포스터는 이 작품을 써놓고 무려 46년이 지난 1960년,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2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 런던의 서재에 앉아 이 책에 관한 열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쓰면서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에 결코 한 줄의 퇴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모리스>가 좋은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혐오하며, (다른 작가와 비교해)작가적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그의 행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1. <고독의 우물>을 쓴 용감한 래드클리프 홀은 여성입니다. 요즘 '여류작가'란 말을 썼다가 꾸짖는 댓글을 여러번 받아(왜요, 남류 독자님?) 젠더에 관계없이 그냥 '작가'라고 썼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까 1920년대에 동성애 소설을 쓴 (남자가 아닌)여자 작가라는 위상이 더욱 E.M. 포스터와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래 '여류'라고 다시 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고독의 우물>은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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