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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1962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의 한 밤,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최고급 호텔 메트로폴리탄의 스위트룸에 기거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뉴욕의 일간지 “브루클린 프레스”의 문화부 칼 페이트 부장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실과 내용을 뉴욕 프레스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브루클린 프레스는 1971년에 사명을 뉴욕 프레스로 바꾸고 사옥도 6번가 619번지로 이전했다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다.
영어로 이루어진 이 날의 인터뷰 내용이 그해 나보코프가 출간한 <창백한 불꽃>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머리말,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무려 280쪽에 달하는 주석, 그리고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보코프와 페이트 부장 간의 대화의 상당한 부분이 영어를 포함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의 운율을 다루고 있어, 그 부분은 해석해 낼 도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언어 또는 문자나 단어를 가지고 노는 희문작업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을 설명하는 도중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숱하게 유사한 언어유희를 펼쳐 영어에 그리 밝지 못한 나를 단어의 늪에 빠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를 짧게 정리해 옮기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하는 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그냥 어떤 의미인지만 파악하셔야 하지, 대 문호와 뉴욕 프레스의 문화부장 간에 나눈 고차원적 문학이야기를 내가 올바로 전한다고는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나보코프는 매체와의 인터뷰를 호환 마마보다 더 싫어했다고 하는데 정말 우연히 그리고 다행스럽게 이런 기사를 구해 읽게 됐다.
나보코프는 19세기의 끝인 189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이자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후 아버지 블라디미르 디미트리비치는 당연히 백군에 참여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당하는 바람에 크림으로 이주했고 와중에 나보코프는 1919년부터 동생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를 하면서 아버지가 현지에서 러시아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나보코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극우 집단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조국인 소비에트에서 또 다른 암살자를 보내 자신의 심장에도 총알을 박아 넣을지 아닐지, 일종의 습관성 피해망상 비슷한, 결코 병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종류의 두려움에 휩싸인 채 63세가 된 지금(1962년)까지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비교적 안전한 유럽에 살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완전하게 (테러로부터)안전한 미국시절까지 저 의식 깊숙한 곳에서 “가끔 솟아나와 찔러대는 공포”에는 대책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자신이 올해(1962년)에 출간한 <창백한 불꽃>의 기본적 발화점은 러시아 귀족집안 출신이면서 소비에트에 적대행위를 한 부친을 둔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의 집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나보코프와 칼 페이트 문화부장 사이의 대담에 무수한 언어유희가 난무해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검색해 원어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터뷰 가운데에서 유독 희문戱文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이 쓴 4부로 구성된 시 <창백한 불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보코프 본인은 이런 구성을 호프만슈탈의 희곡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염두에 두었으며, 원래는 호프만슈탈처럼 “극중극劇中劇”의 형태를 구상했으나 아예 처음부터 독자를 희롱(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내 영어수준으로 고른 최선의 단어임을 이해해주시라.)하는 것으로, 책을 쓰는 도중에 스토리 라인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영문학자 킨보트라고 명명하고 존 셰이드가 쓴 표제 시 <창백한 불꽃>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손에 넣어 책을 출간할 권리를 얻은 다음, 무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기준으로) 280쪽에 달하는 주석을 달고, 주석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했는데, 자신도 그렇게 플롯을 바꾼 다음에 읽어보니 훨씬 더 흐뭇하더라고 고백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나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 숙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마는 젬블라 왕국의 망명 폐왕廢王 ‘카를 크사베리 프세슬라프’ 이야기를 어떻게 작중 미국의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와 그의 가정사家庭事에 엮어 넣을 것인가 이었다면서, 그 해결을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요약하는 인터뷰 내용을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면에 이미 읽어보신 분은 단박에 이 독특하고 해괴망측한 소설 <창백한 불꽃>의 탄생설화를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하여간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두 시간에 걸쳐 검색을 해 찾아보고 그걸 하루 종일 해석을 해 독후감을 대신하기는 내가 가나다라 익힌 이후에 처음이다. 그만큼 <창백한 불꽃>은 좋은 의미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작품이고, 놀라자빠질 구성으로 만들었으며, 마지막 두어 페이지의 반전으로 최후의 어퍼컷을 먹인다는 것쯤은 미리 아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근데 최후의 카운터 블로우는 출간 당시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벌써 근 60년이 흘러 독서력이 좀 있는 독자들은 책의 70% 정도가 되면 마지막 반전을 눈치 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당신이 진짜로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 가지로 놀라고, 힘겹고, 심지어 짜증나다가 점점 책 속에 푹 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걸?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