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라 웰티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4
유도라 웰티 지음, 정소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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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유도라 웰티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현대문학사社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가 나옴으로 해서 주로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독자의 한 사람으로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물론 이이가 <낙천주의자의 딸>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은 절판 상태라 읽기가 힘들겠으나, 뜻이 있으면 다 방법이 있는 법, 올해 안에 내가 독후감 쓰고 만다. 그만큼 유도라 웰티의 작품들이 나하고 맞았다는 말이다.
 연표를 보면 웰티가 그리 많은 작품을 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1909년생인데 1943년에 첫 번째 단편집 《초록 장막》을 냈으니 당시가 34세. 43년에 두 번째 작품집 《커다란 그물》, 49년 나이 마흔에 세 번째이자 연표 상에서는 마지막 작품집 《황금 사과》를 출간한다. 이 책 《유도라 웰티 -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은 연표에 소개한 세 권의 단편집 전부를 한 권으로 묶어 번역해놓았다.
 책의 앞날개에 작가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 보면, 웰티는 “미국 남부 문학에서 포크너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미국 남부 문학”을 대도시에 기반을 둔 작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 예로 든 포크너를 위시해서 스타인벡, 캐더, 셔우드 앤더슨, 매컬러스 등을 다 망라한다 해도 이 유도라 웰티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작품으로는 더 그렇다. 웰티는 위 작가들과 비교하면 삐딱하지 않다. 적어도 ‘훨씬 덜’ 삐딱하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안정된 집안에서 곱게, 거기다가 ‘착하게’ 자라 지역 여자대학과 위스콘신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김에 뉴욕에 자리를 잡지도 않고, 어머니가 부르자마자 예스 맘, 하면서 곧바로 다시 귀향해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변변하게 해보지 못한 채 여전히 ‘곱게’ 나이 먹어가면서 열심히 촌구석 사교계 활동에 전념하며 틈틈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당연히 결혼은 선택이지만 이건 지금 논리고, 당시 쁘띠 부르주아, 특히 남부의 족보 있는 가문의 아가씨한테는 필수였음을 상기하자. 이렇게 마흔 살이 넘게 살다가 당시 미국 문학계의 큰 별이며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30번으로 책도 낸 적이 있는 선배 캐서린 앤 포터가 웰티를 방문하고자 했을 때도 늙은 딸이 더 늙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방문을 승낙했을 정도였다니 정말 ‘착하지?’ 그러니까 캐서린 앤 포터가 방문을 했을 때가 1950년대다. 아무리 남부 시골지역이라 해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펼쳐질 때임에도 웰티에게는 예외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을 듯.
 웰티의 작품은 실제 지명인지 아니면 가상지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치즈’라고 하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말이 배산임수지,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부에서 배산임수라는 건 만일 강이 범람했다하면 5마일, 그러니까 6km 떨어져있는 강에서 쳐들어 온 강물이 이층, 삼층집 지붕만 남겨두고 몽땅 잠수시켜버리는 벌판을 뜻한다. 물에 근접해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다. 땅이 워낙 크니까. 시골 사교계의 유력인사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결혼생활을 하는 대신 사진 찍기에 취미를 들려 다양한 계급, 피부색의 미국인들을 필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이런 취미활동이 이이의 단편소설들에서 특징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들어냈음직하다. 특징적 인물? 그렇다. 첫 번째 수록작 <릴리 도와 세 부인>의 주인공 릴리 도는 정신지체아로 세 명의 부인이 릴리를 시설로 보내려하지만 릴리 도는 서커스의 실로폰 연주자와 결혼을 약속한 설정을 했고, <화석인>에선 기형인畸形人을 보여주는 공연에서 하반신이 경화되어 점점 돌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네 명의 여자를 강간하고 지명수배중인 페트리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열쇠>에선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 부부, <쫓겨난 인디언 처녀 킬라>는 닭을 산 채로 잡아먹는 모습을 공연하는 내반족內反足(극심한 안짱다리) 흑인 리틀 리 로이, <클라이티>에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처녀 주인공과 뇌졸중인 아버지에다가 알코올 중독기미가 있으며 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아내가 도망친 오빠 제럴드, <늙은 마불홀씨>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저쪽에도 아들을 하나 둔 중혼자, <자선방문>에선 노인 요양소의 문제 있는 두 할머니, <어떤 외판원의 죽음>에선 심장병 있는 세일즈맨 보먼 씨에다가 <첫사랑>의 주인공 조엘 메이스는 귀머거리고, <황금소나기>의 주인공 스노디 매클레인 여사는 정상인 두 아들을 낳은 백색증, 즉 알비노, <6월 발표회>에선 로크 모리슨이란 소년은 말라리아 투병 중에다가 주인공 에크하르트 피아노 선생은 와병중인 노모를 봉양하느라 맛이 조금 간 상태여서 다음 작에선 방화범으로 현장 체포되며, <달 호수 Moon Lake> 주인공 이스터는 목에 때가 끼어 검은 줄이 생긴 고아소녀, <방랑자>에서 케이티는 뇌졸중이었다가 급기야 숟가락 놓고 만다. 내가 잠깐씩 메모 했던 것만 그렇다는 거다.
 이 많은 결손들. 이게 어디서 왔을까? 웰티가 수집해놓은 1930년대부터 약 20년간 사진을 보고 등장인물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신 스스로가 연애 못해본 마흔이 넘은 노처녀로 뭔가 결핍을 느껴 이런 사람들을 작품에 캐스팅하게 된 걸까. 그건 모르겠다. 물론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에서도 정신지체아가 등장하고 그의 시각에서 본 세상을 묘사하기는 하나 이렇듯 골고루, 다양한 결핍까지는 아니다. 반면에 이들의 일탈은 소설적 시각으로 봐서, 싱겁다. 가장 귀여운 일탈은 재미있게 읽은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에서 주인공 아가씨가 집을 나와 우체국, 전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규모의 우체국에 커튼을 치고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었고, 제일 심각한 건 <클라이티>에서 주인공의 작은 오빠 헨리가 자기 얼굴에다 총을 쏴 총알이 얼굴을 관통해 사망에 이른 것인데 소설은 작은 오빠가 죽은 한참 후부터 시작하니 엽기적 장면은 아예 등장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넘어간다.
 내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읽기에 관해서 소양이 많이 떨어지는 아마추어임에도 조금 건방지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지루함을 참는 힘이 부족한 독자들이 ‘읽어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단편소설답게 한 작품에서 시간적 배열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사람의 관점에서 저 사람의 관점으로 시각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그때그때 상황판단이 팍팍 되어야 하지만 이게 무려 본문만 830쪽에 육박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여덟 시간 내내 집중하고 있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변변한 유머 코드도 없다. 여차하면 지루함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작품씩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읽는 것이라는 건 알고는 있으나, 불행하게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여유’를 부릴 여유가 있겠는가 말이지.
 내가 읽기로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단편집 《황금 사과》, 이 책의 3부였다. 모두 일곱 개의 중단편이 들어 있고 총 356쪽이다. 무대가 미시시피주의 모개나 마을과 매클레인 카운티이며, 시간적 배경은 1900년경부터 현대(1940년대 후반)까지다. 가장 중요한 가족은 역시 매클레인 가문. 킹 매클래인이 알비노인 스노디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는데, 카운티 이름이 매클레인인 것처럼 킹의 아버지가 처음 이 동네로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단다. 그런데 킹은 스노디와의 사이에서 정상인 아들 쌍둥이를 낳고는 집을 나가 일 년이면 일 년, 삼년이면 삼년, 소식을 뚝 끊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소식 하나 없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이박삼일 간 실컷 잠을 자고나서는 또다시 사라져버리는 사이클을 단행해 동네에서 참으로 싹수없는 인간으로 호가 나버린다. 동시에 일종의 신비함이랄까 경외심이랄까 하는 것도. 이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출신 여자 피아노 선생 에크하르트와 이웃들, 킹 매클래인의 쌍둥이 아들이 소위 연작 형태의 중단편을 만든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형태의 작품은 이문구의 <우리동네>나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처럼 그냥 ‘연작장편’이라 부를 듯. 글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이 연작 가운데 <6월 발표회>이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수 있겠다. 그것 말고도 <파워하우스>도 좋았으며 <커다란 그물> 역시 인상 깊게 읽었다. 굳이 단편소설의 내용을 독후감에 써서 나중에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의 김을 뺄 수는 없다.
 내가 읽기로는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가운데 (그래봤자 완독은 이제 아홉 권뿐이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하기는 하나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고 미리 다짐을 해야 할 책. 어떠셔? 관심 돋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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