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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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먼 옛날, 멀고도 먼 까마득한 시절엔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었단다. 하늘이 땅 위에 닿아 있으면 그것은 언제나 천국이라는 이야기. 사람들은 언재든지 하늘에서 산책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시절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 인간보다 먼저 거인들이 땅으로부터 삐질삐질 머리통을 내밀더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인들은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인들은 악하고 질투심이 많아서 땅을 통째로 자기들이 갖기를 원했던 거다. 오직 자기들만. 그래서 돌을 가져다가 높이 쌓았다. 돌로 온 하늘을 받쳐 땅으로부터 완전히 떨어뜨릴 때까지. 그래서 하늘은 더 이상 땅 위에 놓여 있지 않게 됐으며, 하늘은 슬퍼했음에도 어쩔 수 없었고, 그때 거인들이 쌓은 돌로 ‘쿠프론’ 산을 만들었단다. 그렇게 하늘은 다시는 아래로 내려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혹시 모른다. 누군가 마음이 깨끗하고 어린 눈으로 보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살짝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곤 했는지도. 헤르만 브로흐의 이야기는 저 먼 시절에 거인들이 쌓아올린 돌의 산, 쿠프론 절벽의 비탈에 자리한 두 마을을 배경으로 풀려나간다.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
  스물여덟 살의 소아과 전문의 바르바나. 뛰어난 실력과 환자는 물론이고 동료 의사와 간호사까지 한 눈에 사로잡는 장악력, 그리고 헌신적인 직업의식까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는 전문인. 마흔두 살의 외과의사가 날이 갈수록 바르바나에게 우정을 느끼다가 당연한 수순으로 애정으로 발전하고 넘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해 청혼을 했지만 부드럽게 거절당한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심한 뇌진탕이 생긴 아이를 혼신을 다해 치료했으나 바르바나가 우려한 증상을 그대로를 겪으며 결국 숨지자 그녀는 결국 외과의를 자신의 침상에 불러들이고 한 번의 일탈은 임신으로 이어진다. 임신사실을 알게 된 외과의는 바르바나에게 다시 한 번 청혼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두 가지 직업과 아이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하니, 두 번째 직업이란 공산당 행동대원.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두 번째 직업은 병원 내 세포조직을 만드는 일이란다. 두 번째 직업과 상관없이 바르바나는 외과의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며 외과의로 하여금 희망을 끈을 이어가게 했으나 바르바나는 어느 날 한 호텔방에서 바로 그 실험실에서 빼낸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해버리고 만다. 외과의는 점점 도시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껴 급기야 의사면허를 가진 어떤 사람도 찾지 않는 산골 오지의 의사를 지원해 쿠프론 절벽 윗동네로 부임해 십 수 년이 흐른 어느 여름, 작년 3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하고 제목을 <현혹>이라 한다.
  요란한 역사를 가진 모라비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요제프 브로흐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와서 행운과 노력과 사주팔자 덕에 섬유업계의 거상으로 성장한 다음, 친척누이이자 가죽업계 거상의 딸인 요한나 브로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는다. 둘 가운데 첫째가 이 책을 쓴 헤르만.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글쓰기가 탁월해 수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 공학과 경영학을 배웠단다. 그러나 자신이 부친의 소원대로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마흔이 넘어서면서 회사를 홀랑 팔아먹고 본격적인 집필활동에 들어서서, 소비성향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해, 나중엔 쪼들리는 생활을 겪었다고 한다. 헤르만은 몰랐지. 세상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빵이란 엄혹한 사실을.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때를 맞춰 브로흐 가족에게 들이닥친 건 나치의 폭력. 브로흐 자신도 1938년에 3주 가량 불법 수감되어 고초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1938년이면 그의 나이 52세. 마흔이 넘어 늦게 시작한 작가생활일지라도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몽유병자들>을 간행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라 토마스 만, 알베르 아인슈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이 도와줘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족 중 어머니 요한나 브로흐는 1942년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나치 입장에서도 브로흐가 더욱 눈꼴시었던 이유는 더러운 유대인 주제에 감히 ‘반파시즘적인 민족연합’을 결성해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어차피 이리 당하나 저리 당하나 시간이 문제였을 뿐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브로흐가 전체주의, 파시즘에 관해 작품 하나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 그리하여 1935년에 집필을 시작해 36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이후 개작을 하다가 1951년 3본 집필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뉴욕에서 운명한다. 향년 65세. 당시 나이로 그 정도면 짧게 살지는 않았지만 <현혹>은 그래서 결국 ‘미완’이며 ‘유작’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내가 본문이 겨우 557쪽에 불과한 <현혹>을 무려 나흘에 걸쳐, 입시공부 하듯 노트에 빽빽하게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 사건의 개요 같은 걸 요점정리 해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브로흐의 소설은, 비록 이것이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외피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상징과 의미의 중복, 철학적 논제 같은 것 때문에 잠시라도 맥을 놓으면 곧바로 혼돈의 골짜기로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유독 눈에 힘을 주고 읽어야 했다. 물론 다 읽고나면 <몽유병자들>에 비교해서 훨씬 수월한 난이도 덕에 비교적 편하게 읽힌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시라. 정작 읽기 전에 먼저 또 브로흐를 겪어야 한다는 걱정이 오죽했었는지.
  상부 쿠프론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부의 후예로 이들 사이에는 오래 전에 난쟁이들이 금을 채굴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난쟁이들을 노예로 만들어 황금을 약탈하려 하자 난쟁이 왕이 사람들에게 학살당하면서 난쟁이가 아니라면 이 갱을 확장하거나 갱의 높이를 더 높이지 못하리라고 저주하면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짜로 난쟁이갱坑이란 폐광이 존재하기도 하고 주민들도 이 갱을 더 깊이 파기만 하면 틀림없이 황금을 캘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중요한 등장인물인 산山마티아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훌륭한 인격체이며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예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기손, 이들과 매우 친분이 있는 토마스 주크 등은 진짜로 금을 캐내기 위해서는 먼저 산이 허락을 해야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하부 쿠프론에는 원래부터 이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던 농부들의 집단으로 어떤 의미에선 이방인인 상부 쿠프론 사람들을, 비록 두 집단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와 종교행사 등을 차별 없이 나누지만 은근히 멸시하는 경향이 있어 후에 산신부山新婦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름가르트의 아버지 로렌츠 밀란트 씨가 젊은 시절에 상부 쿠프론 출신의 아가씨 에르네스티네 기손 양을 아내로 맞이하자 부친이 극도로 불쾌하게 여겨 죽을 때까지 며느리를 외면했으며, 아들에게 재산을 유증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작은 고을에 3월의 어느 날, 석탄을 운반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피곤한 몰골에 형편없는 신발을 신은 ‘마리우스 라티’라는 젊은 남자가 도착하면서 이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소설의 막이 올라간다. 마리우스는 얻어 타고 오는 차 속에서 운전기사와 두 명의 조수에게 끊임없이 ‘정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들의 분노를 사면서 등장한다. 마리우스는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는데, 밀란트 씨는 마땅하지 않았음에도 우연인지 아니면 지역의 운명인지 그를 받아들였고,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맏딸 이름가르트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금광의 꿈과 자기가 주장하는 정결을 기치로 점점 하부 쿠프론의 농부와 지역공동체의 젊은이들에게 독자들만 실체를 알 수 있는 '헛된' 꿈을 심어주기 시작하고 고을이 생긴 이래 공통적인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장년층과 지도층까지 모두 이것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설정을 하게 된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키가 작지만 상당한 팔 근육의 사나이 벤첼. 벤첼은 급기야 상부, 하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군대편성 비슷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신이 거의 난쟁이 수준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전설로만 내려오는 난쟁이갱을 파내려가려 하다가 상부 쿠프론에 사는 소수의 현명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아, 한 명의 등장인물만 더 소개하자.
  라디오 대리점이자 농기구 대리점에다가 보험외판까지 하는 도시출신의 못생기고 가난하고 허약한 ‘베취’ 씨. 마리우스가 지역에 들어와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어 책 속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률에 맞춰 밀란트 씨의 작은 딸 체칠리에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라디오를 꺼버린 일이다. 음악과 춤은 도시용이어서 땅과 연결하는 정결의 의지와 반대되기 때문에. 이후 마리우스와 그의 하수인으로 볼 수 있는 키 작은 벤첼과 벤첼의 부하들은 수시로 베취 씨를 괴롭히다가 급기야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린치를 가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지역 주민에게 금, 즉 부와 정결과 약한 사람들의 추방을 약속하는 마리우스와 키 작은 벤첼. 초고를 쓰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의 오스트리아, 독일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독자는 안다. 마리우스는 지역 주민들에게 거대한 최면의식으로 기독교적 축제를 이용하여 피에 의한 정화를 주장했음에도 책이 끝날 때쯤에는 공동체위원으로 발탁된다. 현혹이란 무엇인가. 이런 거대한 공동최면 상태에 휩쓸리는 일. 주인공인 의사 화자 ‘나’조차 숱한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 집단 최면에 취하게 되는 힘. 그게 바로 전체주의의 실체이며, 실체의 핵심인 최면상태에 빠지게 하는 현혹이다. 현혹은 언제나,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음을 인류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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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 있는 책인데...
도서관이나 좀 묵혀서 중고로
만나는 것으로.

Falstaff 2020-01-23 09:59   좋아요 0 | URL
브로흐 책 중에서 그래도 제일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선택이야 어떻게 하시든 한 번은 읽어봄 직한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얄라알라 2020-01-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557쪽^^:;;;
겸손하신 Falstaff님.

동의도 하지 않고 라디오를 꺼버린.
이 부분은 실제 묘사를 더 자세히 읽고 싶어지네요.

Falstaff 2020-01-23 12:36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게, 페이지 수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거였는데요. ^^;;;

마리아스가 밀란트 씨의 피고용인이잖아요. 일꾼 주제에 주인댁 둘째 따님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걸 그냥 팍 꺼버리는 장면입니다. 이제 어린 애는 자야 할 시간이며, 그다음 이유로 라디오는 도시용이라 우짜구 저짜구 하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아무도 마리아스의 허튼 짓에 뭐라하지 않는 것이지요. 뭔가 주위를 지배하는 힘, 아우라가 있는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