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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백수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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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쯤 전에 이탈리아 사람 에밀리오 크레스피가 프랑스에 와서 파리의 남서부, 오를리 공항이 있는 비트리쉬르센에 정착했다. 그는 건설회사에 들어가 벽돌공을 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시 외곽의 숙소에서 2년 정도 혼자 살았다. 이곳에서 열린 이탈리아 사람들의 연간 파티(연말 파티인지, 정기적으로 1년에 한 번 여는 파티인지는 모르겠다)에 혼자 찾아온 앙카 리솝스카야라는 이름의 스무 살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나 아주 어려서 죽었다. 아이 이름이 블라디미르였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첫 아이 이후에 순서대로 에르네스토, 잔, 수잔나, 조르조, 파블로, 호르텐시아, 마르코, 이렇게 일곱 아이를 더 생산하지만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는 에르네스토가 두번째 블라디미르, 조르조는 세번째, 파블로가 네번째, 막내 마르코도 다섯번째 블라디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곱 아이 중에서 위로 둘, 에르네스토와 잔 만 제대로 된 이름으로 등장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남동생들’, ‘여동생들’ 또는 다 합해 ‘동생들’로 칭하고 만다.
<여름비>는 1989년에 쓰기 시작해 90년에 발표한 말기 작품이다. <부영사> 독후감에서 말했듯이 50년대 후반, 콕 집어서 말하자면 <모데라토 칸타빌레> 부터 뒤라스의 작품 속에는 서사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누보로망에 한 발을 담그게 되는데, 기존의 누보로망 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이는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생명체를 미분하듯이 쪼개 놓는 대신, 소리치고, 대상을 바라보며 넋이 나가기도 하고, ‘광폭한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 속에 작가가 별로 개입해 있지 않다는 듯이. 세상의 어떤 작가가 등장인물의 감정에 개입을 하지 않겠는가? 다만 독자가 작품을 읽으며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정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확실히 시침 뚝 뗀 것처럼 읽힌다. 물론 그렇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아직도 체류자 신분으로 살며, 벽돌공 외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 없는 장기 실업자로, 부양가족 수당과 실업수당을 받아 하루도 빼지 않고 감자로만 배를 채워야 하는 이 가족은 방 하나 부엌 하나 두 칸짜리 집에서 사는데, 부모와 맏아들 에르네스토가 작은 방에, 나머지는 모두 한꺼번에 부엌을 겸한 거실에서 잔다. 수당이 나오는 날엔 엄마와 아버지는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 외출을 해서 적어도 자정이 지나고, 심하면 새벽 세 시까지 술집을 순례하며 잔뜩 취한 채 돌아온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와 우랄 산맥 사이에서 출생한 엄마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왔을 때 열차에서 만난 남자와 나눈 사랑을 질투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진짜 내가 주목했던 것은, 아버지 에밀리오는 교외선 기차(역)에서 책을 주워 오는 습관이 있다는 것부터 시작이다. 주운 책을 읽고, 책 읽기에 재미를 들이면서 이젠 쓰레기통 옆에 이사간 집이나 학생이 버린 책도 가져와 읽더니, <조르주 퐁피두의 인생>을 재미있게 읽은 다음부터 헌책방 진열대에서 슬쩍 훔쳐오기도 했다. 책방 주인이 아버지가 헌책을 주머니에 넣는 걸 확실히 본 것 같은데 그냥 내버려둔 것은 책값이 별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버지 행색이 너무 추레했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작품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에르네스토와 잔도 모른다. 이 부부는 그냥 지금 사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에르네스토가 너무 총명하다. 그래, 그게 문제다.
부부는 아이들을 방치해 학교에 다니는 애가 하나도 없다. 이것을 시청에서 알게 되면 처벌을 받을 거라고 누군가 귀띔하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면담을 했고, 선생은 에르네스토와 잔을 학교에 보내라고 한다. 그런데 뒤라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에르네스토의 나이가 12세에서 20세 사이란다. 덩치가 큰 12세? 그럴 수도 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아버지가 늘 책을 주워 오거나 훔쳐오는 집인데도.
이웃집의 개방형 지하실은 거의 창고로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집 아이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하루는 에르네스토가 지하실의 중앙난방용 파이프 통로 석고 파편 아래에서 검은 가죽표지로 장정된 아주 두꺼운 책을 발견한다. 이쪽 저쪽이 불에 타고 잔혹하게 훼손된. 이걸 본 동생들이 울었을 정도였다. 에르네스토는 이 책을 가져와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글을 모르니 읽는 건 아닐 터이고, 그의 말에 의하면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자기가 책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스스로 글 읽기와 쓰기를 터득한 것.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많은 아이들이 누구에게 글자를 배우지 않고 읽기 시작하니까.
이때 불탄 책에 미쳐 있던 에르네스토가 다른 하나에도 집착을 했다. 카멜리나가街 사이 모퉁이에 철제 울타리로 둘러 싸인 정원이 있고, 정원 안에 오직 한 그루의 나무, 직선처럼 곧고 궁륭 모양으로 우거진 가지에 물에 젖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처럼 빽빽하고 윤이 나는 무성한 잎사귀가 달린, 에르네스토가 생각하기에 프랑스에 딱 한 그루밖에 없을 것 같은 나무가 대상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단 한 명, 사랑하는 누이동생 잔에게만 말했을 뿐. 잔은 에르네스토가 책이 지닌 고독과 나무가 지닌 고독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에르네스토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했어.” 이후 불탄 책과 나무는 에르네스토의 것으로, 그가 발견했고, 손과 눈과 생각으로 만졌으며, 에르네스토가 잔에게 전해준 “무언가”가 되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책을 주워 오거나 훔쳐오는 일,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에서 에르네스토의 불에 탄 책으로, 그리고 카멜리나가 정원에 선 나무로. 이렇게 뭔가가 흐른다. 이 작품이 <율리시스>나 <델러웨이 부인>을 쓴 작가들의 것이라면 자신있게 “의식의 흐름”이라고 할 텐데, 똑 부러지게 의식이 흐른 것 같지는 않고, 어쩌면 그것도 “의식”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하여튼 뭔가가 흐르기는 흐른다. 실제로 나는 책이 끝날 때까지 정원 속의 나무가 언제 등장할까, 여간 신경의 쓰였던 것이 아니다. 알려드릴까? 안 나오더라. 나오건 나오지 않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서사가 없으니.
불탄 책에서 무언가를 읽었다고 말하는 에르네스토. 그에게 읽는 행위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가 자신의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것에 주목하면, 뒤라스 자신이 <여름비>라는 작품을 쓰긴 했으나,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이것을 다시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즉 작가 자신은 독자가 독자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해독불능의 언어”만 제공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50년대 후반부터 뒤라스의 소설은, “빠짐없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많은 작품에서 서사가 사라져 독자는 갈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 이 점이 뒤라스를 읽으면 뭔가 조금 만족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내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읽는 행위가 독자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여야 하니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한다. 문학을 한 번도 배우거나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나는, 책읽기에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 누보로망의 전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이들 무리의 일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물론 누보로망 작가라는 것이 무슨 벼슬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오히려 에르네스토는 불탄 책이 아주 오래 전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한 나라를 다스렸던, 그 자신도 이방인이었던 한 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으며, 그럼 누구? 당연히 예수일 터이고 검은 가죽 정장의 두꺼운 불탄 책은 신구약 성서일 것이다. 뒤라스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뒤라스 역시 비시정권에서 검열 일을 하며 뒤로 레지스탕스를 하다가 남편이 부헨발트에 끌려가 몸무게가 38킬로그램까지 빠진 상태로 종전을 맞기도 했다. 이때 전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 학살에 큰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유대의 조상 이야기책인 불탄 책 성경을 읽으며 난데없이 동생들에게 “비트리에 있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그들의 부모님”이라고 말한다. 뒤라스와 같은 시절의 사람들은 그럴 듯하다고 하겠으나, 솔직히 어처구니없긴 하다.
재미있게, 등장인물의 대화 부분은 (괄호 없는) 지문도 있는 희곡처럼 쓰였다. 뒤라스 본인이 괜찮은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내가 읽기에는 희곡 양식을 채택한 것이 독자에게 더 빠르고 효율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거 같은데, 독자들은 이것도 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작가의 메시지가 뭔지, 등장인물 간에 의사소통이 진짜로 제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는지, 그것도 불분명하지만. 하여간 그렇다. 하여튼 그랬다. 독서는 독자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이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를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당신도 알지 못하리. 그냥 그렇게 읽을 수밖에. 하여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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