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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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드 방튀라. 1992년생. 결혼 13년차, 같이 산 지는 15년이 되는 마흔 살의 아름답고, 부유하고, 아들-딸 두 자녀를 둔 부르주아 부부의 결혼생활에 관한 소설 <내 남편>을 쓰기 시작했을 때, 방튀라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 없다고 판단해서 첫 작품인 <내 남편>의 주인공을 자신의 진짜 모습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자신에게 가장 내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했다고, 문학과 인권을 통해 전 세계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1922년에 설립한 펜-아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니까 모드 방튀라는 주인공과 다르게 스물다섯 살의 미혼이며, 아름답지도 않고, 금발도 아니고, 당연히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리옹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영어 교사도 아니고, 영어를 불어로 번역하는 역자도 아니다. 그리하여 <내 남편> 역시 13년차 부부, 이 가운데 아내의 부부간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 일반적인 남녀간 집착, 집착을 넘어선 편집과 질투, 허영, 열정, 복수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작가는 현 체제에서 가장 공고한 사랑의 형태라고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부부”, 그것도 아이가 둘 달린 부부 사이에서 ‘사랑’이란 것이 어떻게 표현이 될까, 상상을 했고, 그걸 작품으로 써서, 데뷔작 한 편으로 대박을 쳐, 이후 직업인 음악전문 라디오 방송국의 팟캐스트 편집일을 대폭 줄이고 더 많은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한 주일 동안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애정전선의 엽기적 밀고 당기기로 생각하면 나처럼 기가 넘어갈 수가 있다. 특히 결혼해 십년이 넘고 아이도 한 둘이 있어서 아내나 남편을 그냥 늘 있는, 있어야 하는, 있는지도 모르는 공기air 같은 존재로 여기는 부부 구성원이라면, 아직도 지긋지긋하게 사랑타령을 4분의 3박자, 왈츠스텝으로, 세 문장에 한 번씩 “사랑”이란 단어를 되풀이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엔 속이 미식거리고, 점점 현기증이 나다가, 눈알이 앞으로 확 쏟아질 것 같아서 책 보기를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을 10년 이상 하지 않았더라도 연애 기간이 오랜 커플도 뭐 비슷하지 않겠나? 나도 왕년에는 한 아가씨와 5년 정도 연애해본 적 있는데, 아이쿠, 제발 아내가 이 포스트는 보지 않기를, 데이트라는 것도 나중엔 서로 할 말도 별로 없고, 특별히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고 그렇더라고. 그러다가 장렬하게 걷어 차였지 뭐. 인생이란.

  이 책의 화자 ‘나’는 ‘내 남편’과 더불어 이름을 상실했다. 즉 한 개체와 다른 개체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단위이어야 한다는 강박, 편집에 싸인다. 화자 ‘나’는 내 남편과 사랑에 빠져 있다. 놀랍게도.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딛어 작품의 첫 문단에 “나는 내 남편과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다.”라고 단언하며, 만난 “첫날에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기에 사랑하듯,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마치 열다섯 살인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좀 과하다. “마치 우리에게 어떤 속박도 집도 아이도 없는 것처럼 사랑한다. (중략) 마치 그가 첫 남자였던 것처럼, 마치 내가 일요일에 죽게 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 일곱 살 난 딸과 아홉 살 난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아이도 없는 것처럼이라니? 실제로 조금 뒤로 가면 ‘나’는 도무지 아이들한테 그리 큰 애정도 없는 것 같다. 오직 내 남편, 내 남편, 그리고 내 남편, 내 남편의 사랑이 먼저고 아이들은 ‘내 남편’ 건너, 건너다. 징글징글한 내 남편.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편집증으로 진화, 발전한다. 즉 어느 새 ‘나’도 내 남편에게, 내가 ‘내 남편’을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내 남편은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필요 없지만 ‘나’는 내 남편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꼼꼼하고 조금은 가혹하게 평가해야 하며, 만일 ‘나’를 사랑하는 데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다면 내 남편은 ‘나’로부터 당연히, 이에 대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

  예컨대 내 남편이 ‘나’에게 저지르는 범죄는 이런 것들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나’가 내 남편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 내 남편이 ‘나’의 손을 빼낸 일. 저녁 시간에 ‘나’의 옆에 앉아 휴대전화를 오래 내려다보거나 자주 보고 있는 일.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몇 시간이 지나서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 불안해 내 남편에게 전화를 해 물어보니까, 그런 말을 속삭인 적이 없다고 답한 것.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내 남편이 ‘나’의 앞에서 예쁘게 생긴 젊은 웨이트리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후한 팁을 남긴 일. 밤중에 잘 자라는 말도 없이 혼자 방에 들어가 잠든 일. 아침에 잠깐 이야기할 시간을 갖자고 했으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나’를 겁먹게 한 것. 친구 집 저녁 파티에 가서 ‘나’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은 것. 내 남편이 ‘나’를 모든 과일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못생긴 ‘귤’을 닮았다고 한 일. 딸 아이 생일 파티에 ‘나’가 초대해 방문한 가장 친한 이웃 옆집 아내에 친절하게 대한 일.

  이럴 때 ‘나’는 내 남편의 일상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침에 가벼운 애무를 해주지 않거나, 내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두 번 정도 아예 휴대전화를 받지 않거나, 평소에 놓아두는 곳에 잘 둔 열쇠를 내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어 바쁜 아침 시간에 허둥대게 만들거나, 서류봉투를 숨겨두어 사무실에 가서 ‘나’에게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게 만들고 심부름 값으로 점심식사를 같이 하게 만들거나, 여기까지는 귀여운 복수라고 쳐도, 간혹 심각한 처벌을 위해 그저 문자로만 데이트를 하던 남자를 갑자기 만나 대낮 호텔방에서 내 남편은 전혀 서비스해주지 않은 갖가지 방법으로,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오르가슴에 오르게 하는 남자와 땅거미가 질 때까지 여러가지 기교와 다양한 체위로 섹스를 하거나, 흠, 여기까지만 하자. 직접 읽어보실 분 있을지 모르니까.

  내 남편의 범죄에 대한 ‘나’의 처벌은 내 남편의 행동과 ‘나’의 행동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중요한 것으로 ‘나’는 이것을 일종의 “회복적 정의의 원칙”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만 부부간에 최소한의 공평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은 처벌이니 복수니 했지만, 이런 ‘나’의 행위가 결코 “응보적 정의” 즉 원수 갚음의 수단이 아니라는 뜻인데, ‘나’도 알다시피 내 남편은 ‘나’가 아는 한 ‘나’와 달리 애인이 없다. 그런데 참 희한도 하지, ‘나’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 날이면 내 남편도 꼭 섹스를 원하거든. ‘나’의 몸에서 다른 남자 냄새를 맡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자기 영역, 자기 암컷을 지키려는 유전자의 지시를 수행하는 것인지 거 참 아리송하다.


  아휴, 나는 이런 소설 안 좋아한다. 이 작품이 프랑스와 영어권에서 얼마나 대박을 쳤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하고 맞지 않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다. 처음엔 귀엽게 시작했다가 읽어가면서 점점 답답해지고 막 읽기 싫어지기까지 했다. 대낮의 정사 씬이 흥미로웠지만 그거 말고는 대체 내가 왜 이런 종류의 책을 선택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까지 해서 읽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 시마오 도시오가 쓴 <죽음의 가시>와 결은 달리 하고, 시마오에 비하면 굉장히 순화된 여성이기는 하다. 그래도 읽는 일 자체가 징글징글했으며, 난데없는 에필로그에 이르러서는 경악했다. 아오, 프랑스 사람과 나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르구나.

  오늘은 도서관 휴관일.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아내한테 아욱국 끓여 먹였고, 점심 때는 국수장국하고 양념장 만들어 국수 삶아 먹였다. 저녁이 다가오니 뭘 해준다? 고추장 양념해서 오겹삽 볶음 해줄까, 아니면 마트 가서 우럭 한 마리 사와 우럭 매운탕을 해줄까? 이 정도면 난 “회복적 정의”를 당하지는 않겠지? 사는 게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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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7-04 0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폴스타프님 리뷰 읽으면서 정말 나랑은 안 맞는 소설이겠구나 합니다ㅋㅋㅋㅋ

Falstaff 2024-07-04 06:55   좋아요 1 | URL
많은 분들이 별5 평가했습니다. 그래도 비추! 안 맞는 사람은 끈기가 필요할 거예요. ㅎㅎㅎㅎ

잠자냥 2024-07-0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현재 화요일까지 읽었습니다….🤣🤣 리뷰는 다 읽고 나서~!! (근데 아직까진 그 여자 징그럽네요! ㅋㅋㅋㅋ)

Falstaff 2024-07-04 19:30   좋아요 0 | URL
화요일이면 아직 징그러운 단계는 아닌데요. 간지럽지...
 
아마겟돈을 회상하며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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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시니컬한 유머 작가 커트 보니것은 85세에 맨해튼에 있는 집 계단에서 낙상,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굴러 떨어져 하필이면 머리에 크게 상처를 입고 병원에 실려가 몇 주 있다가 그토록 원했던 지구 탈출에 성공,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이주했다. 가히 보니것답게 우화처럼 죽었다. 커트의 맏아들 마크 보니것은 이 책의 서문에서 아버지 커트가 비록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1984년), 우울증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지만, 의사인 자기가 보기엔 우울증 또는 정신병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썼다. 마치 내성적인 것처럼 보이기 원하는 외향적인 사람처럼 커트 보니것은 비관적인 척하는 낙관주의자였다고. 정작 커트에게 우울증이 생긴 건, 이라크 전쟁이 터진 이후라고 한다.

  이라크 전쟁 때문에? 그렇다. 가장 최근에 미국이 거둔 완벽한 승전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불과 일 주일만에 포로가 된 경험이 있는 커트 보니것. 이게 평생의 흉터로 남아 그는 남은 평생을 통해 반전주의자가 됐으며, 반전의식을 담은 작품생산에 몰두했으며, 미국이 승패가 정해진 상태에서 극악한 폭력을 저지른 드레스덴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늘 기억했다.

  인디애나주에서 인디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독일 이민자 이디스와 커트 보니것 시니어 사이의 막내로 태어난 보니것 주니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미치게 만들려면 글을 쓰는 것 말고 다른 걸 직업으로 하면서 정년을 맞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보니것 주니어 스스로 고백하기를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보니것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장난기가 그득하다. 아니, ‘언제나’는 아니고 ‘거의 언제나.’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제5 도살장> 속에서도 소이탄이 최후의 날의 불덩이처럼 쏟아지는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 드레스덴의 밤에도 그는 풍성한 육체를 자랑하는 영화배우와 함께 저 멀고 먼 행성으로 마실을 다녀오는 주인공 빌리 필그림한테는 어마어마어마어마한 크기의 페니스가 달려 있었다. <고양이 요람>에선 1945년 8월 6일 일본 상공에서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 호가 세계최초로 진짜로 터질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할 시점에, 인디애나주의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몇 십 년 후에 인류 멸절을 초래할 무시무시한 촉매제, 섭씨 45도에 물이 꽝꽝 얼어붙게 만드는 화학약품 제조에 성공할 필릭스 호니커 씨가 아들과 함께 실뜨기 놀이, 미국말로 “고양이 요람” 놀이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끝도 없고, 보람도 없고, 몸서리쳐지고, 결국 무의미한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실어 보내는데 이 속에 장편소설 <갈라파고스>의 주인공이 들어 있으니 이름이 뭐라고? 그렇다. 레온 트로츠키 트라우트. <타이탄의 세이렌>에서 나오는 주인공 맬러카이 콘스탄트는 알코올과 마약, 여자와의 관계 후에 오는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배달할 품위있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 좌우명이 “배달부는 기다린다”이다.

  이렇게 시니컬하고 니힐한 작품 속에 ‘거의 언제나’ 장난스러운 장치를 배치해 놓는다고 해서 커트 보니것 주니어가 작품을 한 방에 휙, 일필휘지로 쓰는 건 아닐 터. 그는 안경을 쓰고 타자기 앞에 앉아 쓰고,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썼단다. 아무렴. 레프 톨스토이로 <전쟁과 평화>를 50번 고쳐 썼다잖아? 고쳐 쓰기 싫으면 작가를 하지 말아야지.


  그의 연설문에도 장난끼가 그득하다. 인디애나폴리스 대학의 홀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던 커트 보니것은 집안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난데없이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아들 마크가 대신했던 연설에서 말하기를, 이제 자기가 펠멜 담배회사를 고소할 생각이라고. 지금 자기가 여든네 살인데, 아직도 펠멜 회사가 자기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형질인류학자가 보기에 호모 사피엔스의 수명은 35세란다. 이의 내구성을 근거로 보면, 이가 몽땅 빠질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포유류는 없으니까, 35세면 죽어야 했던 옛날이 좋았을 거란다. 35세야말로 신적인 지적 설계의 표본이라나? 그래서 보니것 주니어가 주장하기를, 치의학을 불법으로 규정해야 하고, 의사들은 노인들의 친구인 폐렴 치료를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도 아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의견도 있다. 커트 보니것이 생각해낸 최초의 범미국적 정서는 “설탕은 달다.” 우리나라처럼 현대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부자와 가난한 자, 이성애와 동성애, 유색인과 백인으로 흉폭하게 나뉘어져 있어 범국민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란 “설탕은 달다” 말고 찾아낼 수 없다는 거다. 1922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딱 4년이 흐른 날 인디애나폴리스의 감리교 병원에서 출생한 불경한 무질서의 일원인 커트 보니것 주니어를 굳이 정의한다면, 끝없는 실망의 성모교도라고 고백한다. 자신도 속한 교도들은 이성애자인 로마가톨릭 성직자의 50퍼센트와 마찬가지로 순결을 지키고 있다나? 자기가 로마가톨릭 성직자처럼 순결을 지키는 50퍼센트 안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는 당연히 프라이버시니까 알 거 없고.


  독특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던 작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카를 마르크스는 분명하게 “종교는 하층계급의 아편”이라고 했다. 이걸 현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다니. 이 말을 한 1840년대에 아편은 유일한 진정한 진통제로 치통이든 인후암이든 어떤 병에 걸리건 사용할 수 있었으며, 마르크스 자신도 고통 때문에 쓴 적이 있단다. 이어서 말하기를, “탄압받는 사람들의 진실한 친구로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지금 다시 말을 한다면, “종교는 많은 불행한 사람들의 타이레놀이 될 수 있고, 약효가 있어서 무척 기쁘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다. 아들 마크가 하버드 의대 입학심사위원회에 있었는데, 만약 위원회가 공정하게 심사한다면, 신입생 중 절반은 아시아계 여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인구 비율로 하자면 단연 우리나라 여학생이 제일 많을 거 같다. 이제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유일하게 우월한 건 오줌 누는 시간이 짧다는 거 말고는 없으니까. 남학생들은 PC 게임이 나오자마자 망했던 거다. 땅따먹기와 걸거리에서 맞짱뜨기를, 실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자위하듯 화면을 통해 대리만족하다가 쫄딱 망했다.

  미국이 세상에 준 선물 가운데 가장 환영받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시나? 커트 보니것 주니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재즈라고 주장한다. 재즈야말로 지구인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급의 안전한 섹스라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화려하게 입을 턴 다음, 마지막을 장식한다.

  “주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제 여길 뜨겠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떠서 가버렸다.


  이 책은 아들 마크가 쓴 서문, 커트 보니것 주니어의 연설문,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파리에 도착해 실컷 먹은 다음에 고향 인디애나폴리스에 보낸 편지, 그리고 단편소설(로 볼 수 있는) 열한 편이 실려 있다. 소설은 대부분 포로수용소와 공습, 공습 후 폐허와 시체와 시체처리를 비롯한 사역/노동인데, 그리 흥미롭지 않다. <사령관의 책상>이 볼만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연합군과 합세했는지는 안 나와 모르겠는데 (합세한 거 같기는 하다) 독일을 찌부러뜨리고, 소련까지 쳐들어가 공산주의자를 몽땅 거덜내는 데 성공하고, 이제 모스크바 근방에 출몰하는 소련 파르티잔만 남았을 때 프라하에 진주한 미군 이야기다. 미국은 영국과 합동으로 드레스덴에서 십만 명을 태워 죽인 것처럼 모스크바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수십만 명의 소련 민간인들을 골로 보냈다. 키예프에서는 5만명. 기타 등등. 프라하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은 소령으로 개전 때부터 계속 기갑장교로 복무하며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만 싸웠던 인간. 그의 부관은 이제 유럽에 파병된 신삥 대위. 결론은 독일군이나, 소련군이나, 미군이나 점령군은 비슷하다는 거. 전쟁 자체가 인간 본성 또는 뇌의 DNA 배열을 흐뜨려 놓는다는 거. 내용은 익숙하지만 화법이 재미있다. 결말은 더 재미있다. 그래서 안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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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2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존 치버하고 이 사람하고 자꾸 헷갈려요. 두 사람은 분명 다를텐데.
가끔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요? 이를테면 장강명과 정지돈도 뭔가 비슷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ㅋ
보니것 재밌다고 하던데 한 번도 못 읽었네요. 그게 어디 보니것 하나겠습니까만. ㅠ
그의 죽음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네요.
조금 더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 사람다운 죽음이라는 생각엔 동의하겠더군요.

Falstaff 2024-07-02 16:17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시구먼요. 팔코너하고 도살장 표지가 은근히 맥이 통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근현대 문학사상 가장 폼 나는 우화적 죽음이, 남태평양 섬에 휴가 가서 야자 나무 아래 낮잠을 즐기다가 떨어진 야자 열매에 맞아 단번에 뇌출혈로 가고 싶다는 토마스 브루시히였습니다. 읽자마자 곧바로 제 로망이 되고 말았습지요. ㅋㅋㅋㅋ
정지돈은 이번 금요일에 독후감 올릴 건데.... 장강명은 <표백> 한 권밖에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읎네요.
 
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백수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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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년쯤 전에 이탈리아 사람 에밀리오 크레스피가 프랑스에 와서 파리의 남서부, 오를리 공항이 있는 비트리쉬르센에 정착했다. 그는 건설회사에 들어가 벽돌공을 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시 외곽의 숙소에서 2년 정도 혼자 살았다. 이곳에서 열린 이탈리아 사람들의 연간 파티(연말 파티인지, 정기적으로 1년에 한 번 여는 파티인지는 모르겠다)에 혼자 찾아온 앙카 리솝스카야라는 이름의 스무 살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나 아주 어려서 죽었다. 아이 이름이 블라디미르였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첫 아이 이후에 순서대로 에르네스토, 잔, 수잔나, 조르조, 파블로, 호르텐시아, 마르코, 이렇게 일곱 아이를 더 생산하지만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는 에르네스토가 두번째 블라디미르, 조르조는 세번째, 파블로가 네번째, 막내 마르코도 다섯번째 블라디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곱 아이 중에서 위로 둘, 에르네스토와 잔 만 제대로 된 이름으로 등장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남동생들’, ‘여동생들’ 또는 다 합해 ‘동생들’로 칭하고 만다. 

  <여름비>는 1989년에 쓰기 시작해 90년에 발표한 말기 작품이다. <부영사> 독후감에서 말했듯이 50년대 후반, 콕 집어서 말하자면 <모데라토 칸타빌레> 부터 뒤라스의 작품 속에는 서사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누보로망에 한 발을 담그게 되는데, 기존의 누보로망 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이는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생명체를 미분하듯이 쪼개 놓는 대신, 소리치고, 대상을 바라보며 넋이 나가기도 하고, ‘광폭한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 속에 작가가 별로 개입해 있지 않다는 듯이. 세상의 어떤 작가가 등장인물의 감정에 개입을 하지 않겠는가? 다만 독자가 작품을 읽으며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정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확실히 시침 뚝 뗀 것처럼 읽힌다. 물론 그렇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아직도 체류자 신분으로 살며, 벽돌공 외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 없는 장기 실업자로, 부양가족 수당과 실업수당을 받아 하루도 빼지 않고 감자로만 배를 채워야 하는 이 가족은 방 하나 부엌 하나 두 칸짜리 집에서 사는데, 부모와 맏아들 에르네스토가 작은 방에, 나머지는 모두 한꺼번에 부엌을 겸한 거실에서 잔다. 수당이 나오는 날엔 엄마와 아버지는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 외출을 해서 적어도 자정이 지나고, 심하면 새벽 세 시까지 술집을 순례하며 잔뜩 취한 채 돌아온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와 우랄 산맥 사이에서 출생한 엄마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왔을 때 열차에서 만난 남자와 나눈 사랑을 질투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진짜 내가 주목했던 것은, 아버지 에밀리오는 교외선 기차(역)에서 책을 주워 오는 습관이 있다는 것부터 시작이다. 주운 책을 읽고, 책 읽기에 재미를 들이면서 이젠 쓰레기통 옆에 이사간 집이나 학생이 버린 책도 가져와 읽더니, <조르주 퐁피두의 인생>을 재미있게 읽은 다음부터 헌책방 진열대에서 슬쩍 훔쳐오기도 했다. 책방 주인이 아버지가 헌책을 주머니에 넣는 걸 확실히 본 것 같은데 그냥 내버려둔 것은 책값이 별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버지 행색이 너무 추레했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작품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에르네스토와 잔도 모른다. 이 부부는 그냥 지금 사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에르네스토가 너무 총명하다. 그래, 그게 문제다.

  부부는 아이들을 방치해 학교에 다니는 애가 하나도 없다. 이것을 시청에서 알게 되면 처벌을 받을 거라고 누군가 귀띔하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면담을 했고, 선생은 에르네스토와 잔을 학교에 보내라고 한다. 그런데 뒤라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에르네스토의 나이가 12세에서 20세 사이란다. 덩치가 큰 12세? 그럴 수도 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아버지가 늘 책을 주워 오거나 훔쳐오는 집인데도.

  이웃집의 개방형 지하실은 거의 창고로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집 아이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하루는 에르네스토가 지하실의 중앙난방용 파이프 통로 석고 파편 아래에서 검은 가죽표지로 장정된 아주 두꺼운 책을 발견한다. 이쪽 저쪽이 불에 타고 잔혹하게 훼손된. 이걸 본 동생들이 울었을 정도였다. 에르네스토는 이 책을 가져와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글을 모르니 읽는 건 아닐 터이고, 그의 말에 의하면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자기가 책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스스로 글 읽기와 쓰기를 터득한 것.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많은 아이들이 누구에게 글자를 배우지 않고 읽기 시작하니까.

  이때 불탄 책에 미쳐 있던 에르네스토가 다른 하나에도 집착을 했다. 카멜리나가街 사이 모퉁이에 철제 울타리로 둘러 싸인 정원이 있고, 정원 안에 오직 한 그루의 나무, 직선처럼 곧고 궁륭 모양으로 우거진 가지에 물에 젖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처럼 빽빽하고 윤이 나는 무성한 잎사귀가 달린, 에르네스토가 생각하기에 프랑스에 딱 한 그루밖에 없을 것 같은 나무가 대상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단 한 명, 사랑하는 누이동생 잔에게만 말했을 뿐. 잔은 에르네스토가 책이 지닌 고독과 나무가 지닌 고독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에르네스토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했어.” 이후 불탄 책과 나무는 에르네스토의 것으로, 그가 발견했고, 손과 눈과 생각으로 만졌으며, 에르네스토가 잔에게 전해준 “무언가”가 되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책을 주워 오거나 훔쳐오는 일,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에서 에르네스토의 불에 탄 책으로, 그리고 카멜리나가 정원에 선 나무로. 이렇게 뭔가가 흐른다. 이 작품이 <율리시스>나 <델러웨이 부인>을 쓴 작가들의 것이라면 자신있게 “의식의 흐름”이라고 할 텐데, 똑 부러지게 의식이 흐른 것 같지는 않고, 어쩌면 그것도 “의식”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하여튼 뭔가가 흐르기는 흐른다. 실제로 나는 책이 끝날 때까지 정원 속의 나무가 언제 등장할까, 여간 신경의 쓰였던 것이 아니다. 알려드릴까? 안 나오더라. 나오건 나오지 않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서사가 없으니.

  불탄 책에서 무언가를 읽었다고 말하는 에르네스토. 그에게 읽는 행위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가 자신의 고유한 육체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것에 주목하면, 뒤라스 자신이 <여름비>라는 작품을 쓰긴 했으나,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이것을 다시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즉 작가 자신은 독자가 독자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해독불능의 언어”만 제공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50년대 후반부터 뒤라스의 소설은, “빠짐없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많은 작품에서 서사가 사라져 독자는 갈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 이 점이 뒤라스를 읽으면 뭔가 조금 만족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내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읽는 행위가 독자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여야 하니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한다. 문학을 한 번도 배우거나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나는, 책읽기에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 누보로망의 전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이들 무리의 일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물론 누보로망 작가라는 것이 무슨 벼슬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오히려 에르네스토는 불탄 책이 아주 오래 전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한 나라를 다스렸던, 그 자신도 이방인이었던 한 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으며, 그럼 누구? 당연히 예수일 터이고 검은 가죽 정장의 두꺼운 불탄 책은 신구약 성서일 것이다. 뒤라스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뒤라스 역시 비시정권에서 검열 일을 하며 뒤로 레지스탕스를 하다가 남편이 부헨발트에 끌려가 몸무게가 38킬로그램까지 빠진 상태로 종전을 맞기도 했다. 이때 전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 학살에 큰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유대의 조상 이야기책인 불탄 책 성경을 읽으며 난데없이 동생들에게 “비트리에 있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그들의 부모님”이라고 말한다. 뒤라스와 같은 시절의 사람들은 그럴 듯하다고 하겠으나, 솔직히 어처구니없긴 하다.


  재미있게, 등장인물의 대화 부분은 (괄호 없는) 지문도 있는 희곡처럼 쓰였다. 뒤라스 본인이 괜찮은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내가 읽기에는 희곡 양식을 채택한 것이 독자에게 더 빠르고 효율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거 같은데, 독자들은 이것도 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작가의 메시지가 뭔지, 등장인물 간에 의사소통이 진짜로 제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졌는지, 그것도 불분명하지만. 하여간 그렇다. 하여튼 그랬다. 독서는 독자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이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를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당신도 알지 못하리. 그냥 그렇게 읽을 수밖에. 하여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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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01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이니까~ 습한 날의 뒤라스는 어쩐지 어울립니다. 읽고 다시 읽으러 오겠습니다!

Falstaff 2024-07-02 05:32   좋아요 1 | URL
예. 그러고보니 뒤라스는 고온다습한 날씨에 어울릴 것 같기도 합니다. ㅎㅎㅎ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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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집. 모두 아홉 편을 실었다. 책 앞날개에 간단한 작가 소개가 있다. “1987년 서울생.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펑크록 스타일 빨대 디자인에 관한 연구>가 당선되어 등단.” 검색해보면 2022년에 한국일보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소설 때려치우고 창업을 하려 했다가 소설을 좀 더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다. 이 책 이후에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두번째 작품집도 팔고 있다.

  이 책, 오늘 오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컵밥 먹고, 오후부터 읽기 시작해 네 시간만에 다 읽었다. 휴게시간 포함해서. 그냥 훌훌 읽으면 된다. 성장소설 비슷한 것도 있고, 새로 성인으로 진입은 했지만 조금은 갈팡질팡하는 청춘을 다룬 것도 있고, 나는 이게 제일 좋았는데, 여성 연대로 볼 수 있는 <흔한, 가정식 백반>도 있고, 그러고 보니 “가정식 백반” 들어간 여성 작가 작품이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근데 그건 내 소설 취향이 이미 한물 간 시대이기 때문에 나이 든 여성들이 나오는 사는 이야기라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여튼 그렇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책 뒤에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신샛별도 참 기가 막히게 입을 턴다. 이래봬도 내가 면허증 있는 평론가야, 평론가. 서평가가 아니라는 말씀이야, 하는 것도 같다. 신샛별이 첫번째 작품집을 낸 송지현을 두고 “에피메테우스 형 소설가”라고 선언한다. 와. 에필로그 더하기 프로메테우스. 아니다, 아니다. 프로메테우스, 즉 Pro가 앞에 나오는 거니까 형, 에피메테우스, Epi가 뒤에 따라붙는 거니까 아우, 동생이라는 말씀.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의 반대 요소만 생각하면 되겠다. 무슨 뜻이냐고? 모르겠다. 난 그런 거 모르고 그냥 읽었다. (평론가가)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걸 단어로 써서 설명하려면, 아니 그냥 모르겠다. 아니면 신샛별의 해설을 읽고나니까 야코죽어서 도무지 말을 보태지 못하겠다. 역시 사람은 가방끈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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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28 05: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마르그리트 뒤라스, <여름비>
화요일. 커트 보니것, 《아마겟돈을 회상하며》
목요일. 모드 방튀라, <내 남편>
금요일.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stella.K 2024-06-28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천하의 팔님께서 야코를 당하시다니요. 말도 안되십니다.
그래도 뭐라고 써놔는지 궁금하네요. 예전에 평론가들 주례사한다고 엄청 욕먹고 살았는데 요즘 평론가들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ㅎ

Falstaff 2024-06-29 04:54   좋아요 1 | URL
여전히 주례사입니다. 이젠 평론가들도 통통 튀어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거 같아 짠하기도 하고 뭐 그렇더라고요 ㅎㅎ

2024-06-28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9 0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골동품 진열실 을유세계문학전집 13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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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표 구라, 장광설. 최고의 발자크인 <잃어버린 환상>의 최상위 귀족 버전. 게다가 짧기도 하다. 서문, 헌사, 본문 합해서 235쪽. 물론 활자 수는 만만치 않을 걸? 발자크의 능란한 문장에 별5를 바침. 나, 도서지원 안 받고 별5 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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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6-27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계속 발자크 읽고 있는데
발자크는 잘 나가다가 끝에서 조금 매끄럽지가 않아 좀 안타까워요.
골동품 진열실, 기대됩니다^^

Falstaff 2024-06-27 20: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가 하도 많이 작품을 써서요.
여기서도 자잘한 에러가 숱하게 많습니다. 30만 프랑을 이야기했다가 뒤에는 10만 에퀴, 즉 50만 프랑이 되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빨리 작품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에러를 낳고, 마무리를 산뜻하게 하지 못하게 만든 거 아닌가 싶어요. 결론으로 가면 작가들이 좀 급해지는 경향도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