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을 회상하며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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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시니컬한 유머 작가 커트 보니것은 85세에 맨해튼에 있는 집 계단에서 낙상,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굴러 떨어져 하필이면 머리에 크게 상처를 입고 병원에 실려가 몇 주 있다가 그토록 원했던 지구 탈출에 성공,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이주했다. 가히 보니것답게 우화처럼 죽었다. 커트의 맏아들 마크 보니것은 이 책의 서문에서 아버지 커트가 비록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1984년), 우울증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지만, 의사인 자기가 보기엔 우울증 또는 정신병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썼다. 마치 내성적인 것처럼 보이기 원하는 외향적인 사람처럼 커트 보니것은 비관적인 척하는 낙관주의자였다고. 정작 커트에게 우울증이 생긴 건, 이라크 전쟁이 터진 이후라고 한다.

  이라크 전쟁 때문에? 그렇다. 가장 최근에 미국이 거둔 완벽한 승전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불과 일 주일만에 포로가 된 경험이 있는 커트 보니것. 이게 평생의 흉터로 남아 그는 남은 평생을 통해 반전주의자가 됐으며, 반전의식을 담은 작품생산에 몰두했으며, 미국이 승패가 정해진 상태에서 극악한 폭력을 저지른 드레스덴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늘 기억했다.

  인디애나주에서 인디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독일 이민자 이디스와 커트 보니것 시니어 사이의 막내로 태어난 보니것 주니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미치게 만들려면 글을 쓰는 것 말고 다른 걸 직업으로 하면서 정년을 맞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보니것 주니어 스스로 고백하기를 다른 일을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보니것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장난기가 그득하다. 아니, ‘언제나’는 아니고 ‘거의 언제나.’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제5 도살장> 속에서도 소이탄이 최후의 날의 불덩이처럼 쏟아지는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 드레스덴의 밤에도 그는 풍성한 육체를 자랑하는 영화배우와 함께 저 멀고 먼 행성으로 마실을 다녀오는 주인공 빌리 필그림한테는 어마어마어마어마한 크기의 페니스가 달려 있었다. <고양이 요람>에선 1945년 8월 6일 일본 상공에서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 호가 세계최초로 진짜로 터질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할 시점에, 인디애나주의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몇 십 년 후에 인류 멸절을 초래할 무시무시한 촉매제, 섭씨 45도에 물이 꽝꽝 얼어붙게 만드는 화학약품 제조에 성공할 필릭스 호니커 씨가 아들과 함께 실뜨기 놀이, 미국말로 “고양이 요람” 놀이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끝도 없고, 보람도 없고, 몸서리쳐지고, 결국 무의미한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실어 보내는데 이 속에 장편소설 <갈라파고스>의 주인공이 들어 있으니 이름이 뭐라고? 그렇다. 레온 트로츠키 트라우트. <타이탄의 세이렌>에서 나오는 주인공 맬러카이 콘스탄트는 알코올과 마약, 여자와의 관계 후에 오는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배달할 품위있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 좌우명이 “배달부는 기다린다”이다.

  이렇게 시니컬하고 니힐한 작품 속에 ‘거의 언제나’ 장난스러운 장치를 배치해 놓는다고 해서 커트 보니것 주니어가 작품을 한 방에 휙, 일필휘지로 쓰는 건 아닐 터. 그는 안경을 쓰고 타자기 앞에 앉아 쓰고,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썼단다. 아무렴. 레프 톨스토이로 <전쟁과 평화>를 50번 고쳐 썼다잖아? 고쳐 쓰기 싫으면 작가를 하지 말아야지.


  그의 연설문에도 장난끼가 그득하다. 인디애나폴리스 대학의 홀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던 커트 보니것은 집안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난데없이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아들 마크가 대신했던 연설에서 말하기를, 이제 자기가 펠멜 담배회사를 고소할 생각이라고. 지금 자기가 여든네 살인데, 아직도 펠멜 회사가 자기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형질인류학자가 보기에 호모 사피엔스의 수명은 35세란다. 이의 내구성을 근거로 보면, 이가 몽땅 빠질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포유류는 없으니까, 35세면 죽어야 했던 옛날이 좋았을 거란다. 35세야말로 신적인 지적 설계의 표본이라나? 그래서 보니것 주니어가 주장하기를, 치의학을 불법으로 규정해야 하고, 의사들은 노인들의 친구인 폐렴 치료를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도 아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의견도 있다. 커트 보니것이 생각해낸 최초의 범미국적 정서는 “설탕은 달다.” 우리나라처럼 현대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부자와 가난한 자, 이성애와 동성애, 유색인과 백인으로 흉폭하게 나뉘어져 있어 범국민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란 “설탕은 달다” 말고 찾아낼 수 없다는 거다. 1922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딱 4년이 흐른 날 인디애나폴리스의 감리교 병원에서 출생한 불경한 무질서의 일원인 커트 보니것 주니어를 굳이 정의한다면, 끝없는 실망의 성모교도라고 고백한다. 자신도 속한 교도들은 이성애자인 로마가톨릭 성직자의 50퍼센트와 마찬가지로 순결을 지키고 있다나? 자기가 로마가톨릭 성직자처럼 순결을 지키는 50퍼센트 안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는 당연히 프라이버시니까 알 거 없고.


  독특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던 작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카를 마르크스는 분명하게 “종교는 하층계급의 아편”이라고 했다. 이걸 현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다니. 이 말을 한 1840년대에 아편은 유일한 진정한 진통제로 치통이든 인후암이든 어떤 병에 걸리건 사용할 수 있었으며, 마르크스 자신도 고통 때문에 쓴 적이 있단다. 이어서 말하기를, “탄압받는 사람들의 진실한 친구로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지금 다시 말을 한다면, “종교는 많은 불행한 사람들의 타이레놀이 될 수 있고, 약효가 있어서 무척 기쁘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다. 아들 마크가 하버드 의대 입학심사위원회에 있었는데, 만약 위원회가 공정하게 심사한다면, 신입생 중 절반은 아시아계 여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인구 비율로 하자면 단연 우리나라 여학생이 제일 많을 거 같다. 이제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유일하게 우월한 건 오줌 누는 시간이 짧다는 거 말고는 없으니까. 남학생들은 PC 게임이 나오자마자 망했던 거다. 땅따먹기와 걸거리에서 맞짱뜨기를, 실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자위하듯 화면을 통해 대리만족하다가 쫄딱 망했다.

  미국이 세상에 준 선물 가운데 가장 환영받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시나? 커트 보니것 주니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재즈라고 주장한다. 재즈야말로 지구인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급의 안전한 섹스라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화려하게 입을 턴 다음, 마지막을 장식한다.

  “주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제 여길 뜨겠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떠서 가버렸다.


  이 책은 아들 마크가 쓴 서문, 커트 보니것 주니어의 연설문,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파리에 도착해 실컷 먹은 다음에 고향 인디애나폴리스에 보낸 편지, 그리고 단편소설(로 볼 수 있는) 열한 편이 실려 있다. 소설은 대부분 포로수용소와 공습, 공습 후 폐허와 시체와 시체처리를 비롯한 사역/노동인데, 그리 흥미롭지 않다. <사령관의 책상>이 볼만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연합군과 합세했는지는 안 나와 모르겠는데 (합세한 거 같기는 하다) 독일을 찌부러뜨리고, 소련까지 쳐들어가 공산주의자를 몽땅 거덜내는 데 성공하고, 이제 모스크바 근방에 출몰하는 소련 파르티잔만 남았을 때 프라하에 진주한 미군 이야기다. 미국은 영국과 합동으로 드레스덴에서 십만 명을 태워 죽인 것처럼 모스크바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수십만 명의 소련 민간인들을 골로 보냈다. 키예프에서는 5만명. 기타 등등. 프라하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은 소령으로 개전 때부터 계속 기갑장교로 복무하며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만 싸웠던 인간. 그의 부관은 이제 유럽에 파병된 신삥 대위. 결론은 독일군이나, 소련군이나, 미군이나 점령군은 비슷하다는 거. 전쟁 자체가 인간 본성 또는 뇌의 DNA 배열을 흐뜨려 놓는다는 거. 내용은 익숙하지만 화법이 재미있다. 결말은 더 재미있다. 그래서 안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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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02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존 치버하고 이 사람하고 자꾸 헷갈려요. 두 사람은 분명 다를텐데.
가끔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요? 이를테면 장강명과 정지돈도 뭔가 비슷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ㅋ
보니것 재밌다고 하던데 한 번도 못 읽었네요. 그게 어디 보니것 하나겠습니까만. ㅠ
그의 죽음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네요.
조금 더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 사람다운 죽음이라는 생각엔 동의하겠더군요.

Falstaff 2024-07-02 16:17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시구먼요. 팔코너하고 도살장 표지가 은근히 맥이 통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근현대 문학사상 가장 폼 나는 우화적 죽음이, 남태평양 섬에 휴가 가서 야자 나무 아래 낮잠을 즐기다가 떨어진 야자 열매에 맞아 단번에 뇌출혈로 가고 싶다는 토마스 브루시히였습니다. 읽자마자 곧바로 제 로망이 되고 말았습지요. ㅋㅋㅋㅋ
정지돈은 이번 금요일에 독후감 올릴 건데.... 장강명은 <표백> 한 권밖에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