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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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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 방튀라. 1992년생. 결혼 13년차, 같이 산 지는 15년이 되는 마흔 살의 아름답고, 부유하고, 아들-딸 두 자녀를 둔 부르주아 부부의 결혼생활에 관한 소설 <내 남편>을 쓰기 시작했을 때, 방튀라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 없다고 판단해서 첫 작품인 <내 남편>의 주인공을 자신의 진짜 모습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자신에게 가장 내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했다고, 문학과 인권을 통해 전 세계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1922년에 설립한 펜-아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니까 모드 방튀라는 주인공과 다르게 스물다섯 살의 미혼이며, 아름답지도 않고, 금발도 아니고, 당연히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리옹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영어 교사도 아니고, 영어를 불어로 번역하는 역자도 아니다. 그리하여 <내 남편> 역시 13년차 부부, 이 가운데 아내의 부부간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 일반적인 남녀간 집착, 집착을 넘어선 편집과 질투, 허영, 열정, 복수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작가는 현 체제에서 가장 공고한 사랑의 형태라고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부부”, 그것도 아이가 둘 달린 부부 사이에서 ‘사랑’이란 것이 어떻게 표현이 될까, 상상을 했고, 그걸 작품으로 써서, 데뷔작 한 편으로 대박을 쳐, 이후 직업인 음악전문 라디오 방송국의 팟캐스트 편집일을 대폭 줄이고 더 많은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한 주일 동안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애정전선의 엽기적 밀고 당기기로 생각하면 나처럼 기가 넘어갈 수가 있다. 특히 결혼해 십년이 넘고 아이도 한 둘이 있어서 아내나 남편을 그냥 늘 있는, 있어야 하는, 있는지도 모르는 공기air 같은 존재로 여기는 부부 구성원이라면, 아직도 지긋지긋하게 사랑타령을 4분의 3박자, 왈츠스텝으로, 세 문장에 한 번씩 “사랑”이란 단어를 되풀이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엔 속이 미식거리고, 점점 현기증이 나다가, 눈알이 앞으로 확 쏟아질 것 같아서 책 보기를 멈춰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을 10년 이상 하지 않았더라도 연애 기간이 오랜 커플도 뭐 비슷하지 않겠나? 나도 왕년에는 한 아가씨와 5년 정도 연애해본 적 있는데, 아이쿠, 제발 아내가 이 포스트는 보지 않기를, 데이트라는 것도 나중엔 서로 할 말도 별로 없고, 특별히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고 그렇더라고. 그러다가 장렬하게 걷어 차였지 뭐. 인생이란.
이 책의 화자 ‘나’는 ‘내 남편’과 더불어 이름을 상실했다. 즉 한 개체와 다른 개체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단위이어야 한다는 강박, 편집에 싸인다. 화자 ‘나’는 내 남편과 사랑에 빠져 있다. 놀랍게도.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딛어 작품의 첫 문단에 “나는 내 남편과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다.”라고 단언하며, 만난 “첫날에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기에 사랑하듯,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마치 열다섯 살인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좀 과하다. “마치 우리에게 어떤 속박도 집도 아이도 없는 것처럼 사랑한다. (중략) 마치 그가 첫 남자였던 것처럼, 마치 내가 일요일에 죽게 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 일곱 살 난 딸과 아홉 살 난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아이도 없는 것처럼이라니? 실제로 조금 뒤로 가면 ‘나’는 도무지 아이들한테 그리 큰 애정도 없는 것 같다. 오직 내 남편, 내 남편, 그리고 내 남편, 내 남편의 사랑이 먼저고 아이들은 ‘내 남편’ 건너, 건너다. 징글징글한 내 남편.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편집증으로 진화, 발전한다. 즉 어느 새 ‘나’도 내 남편에게, 내가 ‘내 남편’을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내 남편은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 필요 없지만 ‘나’는 내 남편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꼼꼼하고 조금은 가혹하게 평가해야 하며, 만일 ‘나’를 사랑하는 데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다면 내 남편은 ‘나’로부터 당연히, 이에 대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
예컨대 내 남편이 ‘나’에게 저지르는 범죄는 이런 것들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나’가 내 남편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 내 남편이 ‘나’의 손을 빼낸 일. 저녁 시간에 ‘나’의 옆에 앉아 휴대전화를 오래 내려다보거나 자주 보고 있는 일.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몇 시간이 지나서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 불안해 내 남편에게 전화를 해 물어보니까, 그런 말을 속삭인 적이 없다고 답한 것.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내 남편이 ‘나’의 앞에서 예쁘게 생긴 젊은 웨이트리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후한 팁을 남긴 일. 밤중에 잘 자라는 말도 없이 혼자 방에 들어가 잠든 일. 아침에 잠깐 이야기할 시간을 갖자고 했으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나’를 겁먹게 한 것. 친구 집 저녁 파티에 가서 ‘나’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은 것. 내 남편이 ‘나’를 모든 과일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못생긴 ‘귤’을 닮았다고 한 일. 딸 아이 생일 파티에 ‘나’가 초대해 방문한 가장 친한 이웃 옆집 아내에 친절하게 대한 일.
이럴 때 ‘나’는 내 남편의 일상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침에 가벼운 애무를 해주지 않거나, 내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두 번 정도 아예 휴대전화를 받지 않거나, 평소에 놓아두는 곳에 잘 둔 열쇠를 내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어 바쁜 아침 시간에 허둥대게 만들거나, 서류봉투를 숨겨두어 사무실에 가서 ‘나’에게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게 만들고 심부름 값으로 점심식사를 같이 하게 만들거나, 여기까지는 귀여운 복수라고 쳐도, 간혹 심각한 처벌을 위해 그저 문자로만 데이트를 하던 남자를 갑자기 만나 대낮 호텔방에서 내 남편은 전혀 서비스해주지 않은 갖가지 방법으로,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오르가슴에 오르게 하는 남자와 땅거미가 질 때까지 여러가지 기교와 다양한 체위로 섹스를 하거나, 흠, 여기까지만 하자. 직접 읽어보실 분 있을지 모르니까.
내 남편의 범죄에 대한 ‘나’의 처벌은 내 남편의 행동과 ‘나’의 행동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중요한 것으로 ‘나’는 이것을 일종의 “회복적 정의의 원칙”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만 부부간에 최소한의 공평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은 처벌이니 복수니 했지만, 이런 ‘나’의 행위가 결코 “응보적 정의” 즉 원수 갚음의 수단이 아니라는 뜻인데, ‘나’도 알다시피 내 남편은 ‘나’가 아는 한 ‘나’와 달리 애인이 없다. 그런데 참 희한도 하지, ‘나’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한 날이면 내 남편도 꼭 섹스를 원하거든. ‘나’의 몸에서 다른 남자 냄새를 맡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자기 영역, 자기 암컷을 지키려는 유전자의 지시를 수행하는 것인지 거 참 아리송하다.
아휴, 나는 이런 소설 안 좋아한다. 이 작품이 프랑스와 영어권에서 얼마나 대박을 쳤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하고 맞지 않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다. 처음엔 귀엽게 시작했다가 읽어가면서 점점 답답해지고 막 읽기 싫어지기까지 했다. 대낮의 정사 씬이 흥미로웠지만 그거 말고는 대체 내가 왜 이런 종류의 책을 선택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까지 해서 읽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 시마오 도시오가 쓴 <죽음의 가시>와 결은 달리 하고, 시마오에 비하면 굉장히 순화된 여성이기는 하다. 그래도 읽는 일 자체가 징글징글했으며, 난데없는 에필로그에 이르러서는 경악했다. 아오, 프랑스 사람과 나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르구나.
오늘은 도서관 휴관일.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아내한테 아욱국 끓여 먹였고, 점심 때는 국수장국하고 양념장 만들어 국수 삶아 먹였다. 저녁이 다가오니 뭘 해준다? 고추장 양념해서 오겹삽 볶음 해줄까, 아니면 마트 가서 우럭 한 마리 사와 우럭 매운탕을 해줄까? 이 정도면 난 “회복적 정의”를 당하지는 않겠지? 사는 게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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