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7
위룽쥔 지음, 홍영림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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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위룽진喩榮軍. 대학에서 공부한 건 예상외로 스포츠 의학. 무사히 졸업까지 했다. 졸업 후에 의학의 길 대신 상하이 트라마센터에서 서포팅 업무를 하다가 틈틈이 극작을 썼던 모양이다. 1971년생. 2000년부터 60여 편에 달하는 연극, 오페라, 발레극, 전통극, 신체극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다. 중국은 각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징적인 연극과 음악극의 혼합형태(곤극, 곡극 등)가 발전해서 이이가 썼다고 하는 ‘신체극’이, 우리나라의 경우에 신체시新體詩라 불리는 것처럼 기존의 연극양식에 서구의 극 형식을 적용한 것인지, 아니면 몸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임mime을 신체극身體劇이라 했는지 문외한으로는 도무지 구별할 수 없다. 하긴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역자 홍영림은 이 작품 <손님>을 부조리극이라 규정한다. 등장인물은 단 세 명.
  작품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이 있다. 1976년의 중국을 경천동지하게 만든 사건. 7월 28일, 당시 베이징에서 불과 2백 킬로미터 떨어진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해 상당히 축소해 발표하지 않았나 싶은 중국정부의 공식집계로 242,769명이 사망한 일. 중국 정부는 과거 10여 년간 지식인 계층을 잡도리하느라고 당연히 학업에 관심이 없어 의사의 수가 엉망으로 부족한 지경에 이르러 사망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하며, 문화혁명 기간에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현지의 상황을 알기 위해 털털거리는 고물 자동차가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먼짓길을 며칠을 달려 베이징에 도착해야 했단다.
  지진 43일 후인 9월 9일에 한 번 더 난리가 나는데, 이번엔 중국의 가장 빛나는 붉은 별, 마오가 세상을 뜬다. 절대 권력자의 죽음은 그의 아내가 벌여놓은 문화혁명의 조종을 울려 같은 해 10월엔 사인방으로 불린 마오의 처 장칭을 위시해 야오원위안, 왕훙원, 장춘자오를 체포해버린다. 우리나라에선 1976년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에서 양정모 선수가 건국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따, 남한 정부도 세계에서 금메달감인줄 알았던 시기였지만, 중국은 그야말로 현대사가 격동했던 시기였다.


  여전히 문화혁명의 서슬이 퍼렇던 7월에 35세가 채 안 된 꽃다운 청춘 마스투馬時途는 상하이의 회사에 다니다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지금은 방직공장 노동자인 약 28세의 아내 모상완莫桑晩을 두고 탕산으로 출장을 간다. 일단 갔다고 생각하자.
  탕산에서 일을 마치고 거액의 물품대금이 든 가방을 메고 다시 상하이로 오는 새벽기차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버스가 죽어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길 양편에서 집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탕산 대지진 당시 무려 530만 채의 건물이 무너졌다고 한다. 붉은 혁명열사의 집안 출신, 그러니까 이른바 진골 화랑 출신인 마스투는 즉시 버스에서 내려 묻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이 와중에 물품 대금으로 받은 현금은 어느 벽돌더미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진이 진정되고 구호상황이 끝난 후 마스투는 상하이로 돌아왔다. 하여튼 돌아왔다고 가정하자. 아직 마오가 죽기 전이라 혁명열사 가문의 진골 화랑이 불가촉 향·소·부곡 출신인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여성과 결혼한 것도 마뜩하지 않은데, 이제 탕산에 출장을 가 지진이 났다는 핑계로 거액의 현금을 횡령이나 착복, 아니면 적어도 망실한 죄를 물어 회사는 마스투를 고소해버렸고, 법원은 죄가 마땅하다는 선고를 내려 긴 형기를 만기 출소하게 됐다. 이제 마스투와 모상완한테는 상하이의 마천루 사이 중심가에 낡은 단층집 하나만 마치 알박기라도 하듯 남아 있을 뿐. 이제 그것마저 조속히 팔지 않으면 강제철거를 당할 처지에 몰렸다.


  앞에서 이 드라마를 부조리극이라 한다고 했다. 위에 적어놓은 내용은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그런데 극의 본론 격인 2막에 들어서면 내용이 완전하게 바뀐다. 보자.
  마스투가 탕산으로 출장 가서 대지진을 만나는 것까지는 같다. 이 와중에 마스투 역시 무너지는 벽돌에 깔려 오른쪽 다리 하나가 바스러진다. 말이 바스러지는 거지, 40년이 지나도 후유증으로 다리를 약간 저는 정도면 그냥 부러진 거였을 확률이 훨씬 높다. 뼈가 바스러지면 아주 복잡한 외과수술이 필요한데 당시 절대 부족한 의사진이 그런 것까지 즉각 해주었을 턱이 없다. 이 와중에 물품대금 역시 사라졌다. 다리가 부러지고 까무러친 마당에 누군가 훔쳐갔을 수도 있고, 마스투와 마찬가지로 폐허에 묻혔을 수도 있다. 하여튼 7개월 만에 자리에서 일어난 마스투는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고 예쁜 용모에 머리도 총명한 젊은 아내 모상완을 위해 엉망이 된 도시에서 다시 호적을 정리하는 틈을 타 이름도 마신런馬新人, 다시 태어난 자로 개명해 그대로 탕산에 주저앉는다.
  모상완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혁명열사 가문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면서 기회를 얻자 다시 공부를 해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다. 이때 마스투는 탕산에서 신문을 통해 모상완의 내력을 스크랩해두고 관찰하면서 대학 학비를 보내주기도 한다. 물론 머리가 제대로 박힌 모상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신세를 질 수 없어 우편환을 다시 돌려보내지만. 모상완은 승승장구, 이후 박사가 되고, 많은 저술을 내기도 하면서 네 살 많은 테너 가수 샤만텐夏滿天과 결혼해 여태 함께, 마스투가 살던 상하이 시내 한복판 마천루 사이의 단층집에서 살고 있다.
  마스투가 탕산으로 향한지 40년이 흘러 이제 마신런이 되어 다시 모상완을 방문했을 때, 모상완은 남편 샤만텐과 아침밥상을 매개로 소소한 일상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던 터. 이 작자는 왜 난데없이 모상완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폐암에 걸려서 말이지. 이때 마스투는 일흔다섯, 모상완은 예순여덟, 심장병이 있는 샤만텐은 일흔둘.
  왜 왔는지 가르쳐드릴까? 싫다.


  그런데 말이지, 만일 마스투가 아예 탕산에 가지 않아서 지진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여태 상하이 중심가 마천루 사이의 단층집에서 모상완과 살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세 가지를 놓고 보는 것 자체가 부조리다. 극에서 자주 나오듯이 어차피 삶에 ‘만약’은 없는 거니까. 인생은 그저 한 번 살아가면 그걸로 끝.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래? 다시 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난 싫다.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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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8 09: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왜 왔는지 가르쳐 드릴까? 싫다에서 강한 뽐뿌의 예감이 듭니다. ㅎㅎ
저도 옛 시절로 돌아가고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으련다에 좋아요 보냅니다. ^^

Falstaff 2021-04-18 10:01   좋아요 3 | URL
이 작품은 작년에 우리나라 노 배우들이 낭독 공연을 했답니다. 연륜있는 배우들이라서 그런지 매우 환상적이었다는 소식을 들었습지요.
코로나가 끝나면 낭독 공연이 아니라 정식 공연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데, 어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대가 되는 공연입니다만 연극은 막이 올라봐야 아니까요.
 
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 - 세계현대작가선 2
살만 루시디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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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절판이라니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가, 말았다. 왜냐하면 2021년 4월 현재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가 새롭게 작업해 일부 교정까지 마쳤다고, 100자 평에 비밀댓글을 달아주신 서재 동무님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누구냐고? 안 알려드림. 그럼 비밀댓글 다신 이유가 읎잖여, 그잖여? 아무렴, 이런 책은, 만일 품절시키면 안 되는 목록이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니까.
  저 서반아의 안달루시아 산골마을 베넨겔리. 내전 당시 팔랑헤당을 지지해, 이제 프랑코가 죽어 공화주의 편에 섰던 에라스모 마을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이곳에 인도 출신의 화가 바스코 미란다가 큰돈을 벌어 제2의 알함브라 궁전 같은 저택을 짓고 살았다. 미란다가 화가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인도의 진정한 천재 화가 오로라 조호비에게 극도의 열등감을 갖고 살았다. 평생 독신으로 산 미란다도 이제 늙어 마약에 의지해 인생의 황혼을 버티고 있는 처지. 어느 날, 오로라 조호비의 외아들 모라에스 조호비, 애칭 무어가 찾아온다. 무어는 미란다의 저택에 감금되어 (왜냐고 묻지 마시라) 이 소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원고 거의 대부분을 쓰고,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기적같이 탈출에 성공해 어느 묘석에 앉아 묘석에 새긴 글, RIP, 즉 Rest in Peace를 손으로 더듬어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어. 참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이는 우리 계산으로 애 들어선지 닷 달 만에, 서양식으로 얘기하면 임신 4개월 만에 세상 구경을 한다. 그것도 매우 크게 자란 상태로. 그러나 오른손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네 개가 한데 붙어 있고, 엄지도 겨우 흔적기관처럼 조금 돌출되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6피트 6인치까지 키가 크지만 성장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딱 두 배다. 겨우 열 살에 195cm의 키와 완전한 2차 성징이 이미 다 발현되어 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해 여성 가정교사를 통해 모든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물론 몸 교육을 포함해서. 그러나 나중에 장애가 있는 오른손이 말 그대로 망치 같은 펀치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사는 건 사실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밖에 없다.
  무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귀하게 태어난 한 잡종인간. 외갓집으로 말할 거 같으면 조상이,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까지 올라간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와서 지내다가 죽고, 8년간이든가 묻혔다가 다시 백골로 포르투갈로 귀국할 때까지 설마 독신이었다고 믿지는 않겠지? 이때 남긴 가족의 후손이 무어의 외갓집으로 ‘다 가마’라는 이름을 쓴다. 책은 1876년생인 무어의 증조부 프란시스코 다 가마와 1877년생인 증조모 에피화니아 다 가마부터 소개를 한다. 증조부는 대대로 물려받은 향신료 무역을 비롯해 그들이 터를 잡고 사는 남인도의 중요한 무역항인 코친항과 인근 카브랄 섬의 대농장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현지 부자들이 그렇듯 영국인들의 위세엔 당하지 못했다.
  사실 무어의 외갓집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정말 재미있다. 재미만 따지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진짜 한 번 맞장을 붙여보고 싶을 정도. 마르케스도 입담에 관해선 세계 챔피언 급이지만 루슈디 역시 말발하면 절대 2등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작가라서 현란한 단어들이 밤하늘 별똥처럼 우수수 쏟아진다. 그건 정말 읽어봐야 맛을 아는데, 그걸 따로 떼서 소개하면 또 제 맛이 나지 않으니 참으로 아쉬울 수밖에. 뭐 어쩔 수 없다.
  그럼 친가 조호비 가문은? 놀라지 마시라.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무어 족을 이베리아에서 쫓아낼 당시의 마지막 무어 족 술탄 보압딜의 후예. 무어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망명한 왕의 풍모를 갖춘 대단한 외모를 한, 다 가마 개인 유한회사의 창고 사무원이었는데, 자기보다 21세가 어린 다 가마 가문의 후계자이자 무어의 친모인 열다섯 살 오로라의 눈에 들어, 그날로 산처럼 쌓아놓은 향신료 부대의 꼭대기에 올라 온몸에 향신료의 향기를 품으며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이다. 그렇다. 먼저 발견하고 반해서 두 손으로 턱을 들어올려 얼굴을 바라본 사람은 열다섯 살짜리 오로라 다 가마였다. 물론 보압딜의 정비queen는 아니고 유태인 애인이 생산한 후손이다. 보압딜의 이베리아 철수 후에 스페인 왕실이 내린 추방령에 의거, 인도로 출발할 당시 보압딜과 헤어지는 마당에 보석이 무수하게 박혀있는 왕관을 훔쳐냈고, 이때가 임신 중이어서, 아이의 이름을 ‘불운한 보압딜’이란 의미로 ‘엘 조호비’라고 했다. 조호비가 ‘운이 없는’이란 뜻이란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조하비는 애초엔 반 유태인이었다가, 인도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유태인과의 혼인을 통해 이젠 거의 유태인이라고 봐야 한다. 스페인 출발이 16세기 초, 무어의 부모가 혼인을 한 게 1939년, 4백년 이상 유태인하고만 혼인을 했으니까.
  근데 루슈디의 장난을 한 번 보자. 아브라함이 오로라와 결혼하는 1939년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다. 이때 천애고아가 된 어린 오로라 대신 향신료 무역을 총괄하게 된 아브라함이 세 번 향신료를 가득 싣고 영국으로 배를 출항시켰는데 동아프리카에서 독일 군함에 의하여 세 번 다 침몰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회사가 거덜이 났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어머니 플로리 조호비에게 쫓아가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엄마 전에 봤던 보석들 좀 줘요, 해서, 첫아들을 할머니에게 보내는 조건으로, 낮은 이율로 빌려와 다시 대상단을 꾸려 유럽에 보내 대박을 친다. 여기서 무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억은 다 만들어진다고. 술탄 보압딜의 왕관이 아니라 인도에서 밀수꾼들이 훔쳐온 보석, 그러니까 장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밀수꾼들이 몽땅 잡혀 죽으니까 그걸 여태 팔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던 거였을 거라고. 여지없이, 여태까진 아주 근엄하고 위세 있게 자랑하듯 얘기한 것을 안면 싹 바꾸고 이렇게 말해버린다.
  무어의 큰할아버지 아이리쉬 다 가마는 엄마 에피화니아 다 가마의 친정 쪽 조카인 카르멘 로보와 결혼을 하는데, 첫날 밤 늦게 신방에 들어오더니, 정성껏 옷을 벗고, 꼼꼼히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벗겨 그걸 자기가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가 보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청년, 항해사 프린스 헨리와 함께 먼 바다로 노를 저어간다. 아이리쉬가 집안의 향신료 사업 운영을 포함한 모든 걸 상속받으려면 자손, 특히 아들이 필요한데, 아무리 카르멘이라도 자빠져 하늘을 봐야 별을 따거늘 도대체 자빠뜨리지를 않으니 이를 어쩔꼬. 그래 집안의 가업계승은 증조부에 이어 둘째 아들인 무어의 할아버지 까몽쉬 다 가마, 이어서 유태인 아버지 아브라함 조호비로 이어지고, 거기서 끝난다. 왜? 아브라함 조호비의 나이 아흔 살일 때 무어는 37세. 그러나 세월을 2배속으로 먹는 무어는 몸과 마음이 벌써 74세.
  여기에 절묘하게 섞이는 것이 각 시대별로 겹치는 인도의 기구한 현대사. 할아버지 형제 까몽쉬와 아이리쉬 다 가마는 사회주의 운동과 댄디즘에 경도되어 평소엔 허물없는 친구 같았던 인도 경찰서의 영국인 경찰서장에게 체포되어 콩밥을 먹고, 아브라함 조호비는 극도로 부패한 시대와 정부의 허점을 틈타 폭력세력과 힘을 합쳐 온갖 나쁜 일을 다 해 거부의 자리를 유지한다. 크게는 1차, 2차 세계대전과 내전, 종교분쟁과 인도 분할, 소비에트 소멸, 테러 등까지 다 섞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고귀하게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인종적 잡종인간이 몰락해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 재미있다. 온갖 난장판이 다 벌어지는 속에서 별의 별 형태의 사랑이 등장하고, 또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랑의 성공이 아니라, 드런 사랑 이야기, 애초 배신하기로 결심을 하고 시작하는 사랑, 각종 형태,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거짓말 속의 사랑, 배신을 넘어 등에 칼 꽂으면서 앞에선 모든 헌신을 하는 사랑, 그러나 당하는 쪽에선 내 목숨 말고는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진실한, 하지만 결국 무너지는 사랑 같은 거 몽땅 다 나온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냐고? 하 참. 당신은 실패한 사랑 안 해보셨나? 안 해 봤다면 여태 헛산 거고, 해봤다면 그것도 진실한 사랑, 어쩌면 더 진실한 사랑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말씀이야.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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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15 1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새로 나오는 책으로 꼭 읽어보겠습니당~

Falstaff 2021-04-15 10:39   좋아요 4 | URL
옙. 진짜 재미난 책입니닷!!

새파랑 2021-04-15 11: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절판이라는데 포기했다가 새로나온다니 장바구니로 ㅋ 폴스타프님이 재미나다고 하시니^^

Falstaff 2021-04-15 11:04   좋아요 3 | URL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21-04-15 1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역자가 루슈디의 말장난의 리듬을 다 살렸다는 평입니다.
여러분.... 새로 나올 책, 기대해주세요.
개.봉.박.두!!!!!

coolcat329 2021-06-30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새로 나오는군요! 기대할게요~^^
 
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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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에 대해 말을 더 보태면 입이 아플 정도로 잘 알려진 콜롬비아 작가. 그가 썼다면 이름값 딱 하나만 믿고 사서 읽어도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후회한 적도 있긴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이건 제목부터 참 불량했다. ‘내 추억’인지 ‘창녀들의 추억’인지도 모르겠고, ‘슬픈 창녀’인지 ‘슬픈 추억’인지도 헷갈렸는데, 책을 다 읽어도, 하긴 책을 읽은 게 15년도 넘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나, 하여튼 그랬다.
  그거 말고는 특별히 까탈을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읽은 <사랑과 다른 악마들> 역시 같은 소감. 전형적인 마르케스.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된다면. 하긴 세상에 못할 말이 어디 있나.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출신으로 무자비한 노예 매매업자, 냉혹한 군단장으로 이름을 높인 두에냐스 후작 1세의 유일한 후계자 이그나시오를 (후작 1세가 보기에)정신박약 증세가 있고, 글자도 해독하지 못하는 어리버리로 설정해놓고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정신병원의 환자 둘세 올리비아와 눈이 맞아 둘세의 특기인 종이비행기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할 작가가 세상 천지에 마르케스 말고 또 있느냐 말이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후작 1세는 덜 떨어진 아들 이그나시오를 본국 명문가의 아름다운 여성 올라야 데 멘도사와 혼인을 하긴 하는데, 올라냐는 처녀성을 간직한 채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다시 혼자가 된 이그나시오는 천박한 메스티소 여자 베르나르다 카브레라와 결혼하게 만든다. 당시엔 유혹적이었던 베르나르다를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그나시오를 그녀가 거의 겁탈하다시피 해놓고, 어느 날 베르나르다의 아버지가 총을 가져와 이그나시오에게 건네주면서, “도련님 제게 이 총으로 죽을 즐거움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면 내가 도련님을 죽일 거 같아서 말입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얼른 혼례미사를 올리는 것도. 마르케스의 입담이 워낙 세계챔피언 수준이라 베르나르다를 어떻게 소개하느냐 하면,
  “베르나르다 카브레라는 그날 새벽 드라마틱한 설사약을 먹었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탐욕스럽고 수다스러우며, 능히 대대 병력을 만족시킬 만큼 굶주린 하복부를 지녔다. 집시 눈동자처럼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해지고, 총기도 사라지고, 피똥을 싸고 위산까지 게워냈다. 게다가 마스티프 종 사냥개들까지 기절초풍할 정도로 우렁차고 고약한 방귀를 뀌어 댔다.”
  하여튼 이렇게 카살두에로 후작 2세이자 다리엔의 영주 이그나시오 데 알라로 이 두에냐스와 베르나르다 카브레라 사이에 칠삭둥이 외동딸이 태어나 열두 살이 된 해 사달이 벌어진다.


  책의 서문 격으로 쓴 걸 보면, 마르케스가 신문사 기자를 하던 1949년에 산타클라라 수녀원이 팔려 그 자리에 오성급 호텔을 건설하는 바람에 갑자기 하게 된 납골묘를 비우는 작업을 취재하다가 강렬한 구릿빛의 생생한 머리카락이 22미터 11센티에 달하는 소녀의 두개골을 발견했고, 비석엔 시에르바 마리아 데 토도스 로스 앙헬레스라고만 쓰여 있어 성family name을 알 수 없었는데, 이걸 보고는 할머니가 얘기해준 전설, 머리카락을 웨딩드레스처럼 땅바닥에 끌고 다니던 열두 살 먹은 후작의 딸이 개에 물려 광견병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가 떠올라 소설을 쓰게 됐다고 깔아둔다. 물론 구라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두피가 평생 9미터 42센티의 머리카락을 길러낼 수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모발의 끄트머리까지 영양분을 공급하기가 어려워 9미터도 사실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구라를 치려면 적당히 한 11미터 정도로 해야 그래도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지. 22미터라니, 애초부터 지금부터 구라를 풀기로 작정했던 것.
  이 다음에 할 이야기는 시에르바 마리아 아가씨가 전설상 사인course of death인 광견병.
  우리나라에서는 광견병과 같은 말로 물을 무서워하는 병, 즉 공수병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검색해보면, 광견병의 증세로, 발병 후기에 불면증, 불안, 혼돈, 흥분, 부분적인 마비, 환청, 흥분, 타액·땀·눈물 등의 과다분비, 연하곤란, 물을 두려워하는 증세를 보이고, 이 정도로 진행하면 평균 4일 이내에 섬망, 경련, 혼미, 혼수에 이르며 호흡근 마비 또는 합병증으로 죽는다고 한다. 나 어렸을 적에도 동네에 가끔 벌건 눈에 침을 흘리며 유난히 사납게 구는 미친개가 횡행하고는 했는데, 그때도 광견병 또는 공수병은 대단히 무서운 병으로, 걸리면 미쳐서 죽는 줄 알았다. 근데 희한한 게 미친개는 있었지만 개한테 물려 진짜로 광견병에 걸린 사람은 못 봤다는 거.
  서양의 경우에 유일하게 본 건,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주인공 재니 크로포드의 세 번째 남편 티 케이크가 바로 이 광견병에 걸려 죽는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 무대는 18세기 말 콜럼비아의 무역 항구도시 카르타헤나.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의 라틴 아메리카라면, 스페인 본국보다 오히려 더 교조화된 가톨릭이 유럽 이민자들과 반half 백인들을 지배하고 있어서, 여전히 종교재판과 고문, 심지어 화형까지 집행되곤 하던 시절이다. 중요한 조연 가운데 한 명인 토리비오 데 카세레스 이 비르투데스 주교는 장교 출신의 성직자로 엑소시즘을 사제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로 보는 인간이다. 동시에 광견병 후기에 나타나는 불면, 혼돈, 흥분, 섬망증 등을 사탄이 환자의 몸에 들어와 저지르는 사악한 행위로 간주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했고, 스스로 라이프니츠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교의 땅은 미신이 지배하고 있던 것.
  라틴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을 스페인으로 보내던 주요 항구 카르타헤나의 시장에 하녀 하나를 데리고 구경나온 시에르바 마리아의 왼쪽 복사뼈 부근을 표도 나지 않게 개가 물었다고 해서 대수롭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 길을 가다 주인 없는 개나 고양이에게 물리는 일이 수다했던 터. 그러나 이날, 문제의 회색빛 개에 물린 다른 세 명의 흑인 노예는 며칠 후 발작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깨물어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에 묶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물린 곳엔 벌써 딱지가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광견병의 잠복기가 때론 5년에 이를 때도 있어서, 카르타헤나의 숨겨진 박식한 명의 아브레눈시아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시에르바 마리아의 부모, 후작 2세와 베르나르다로 말할 거 같으면 애초에 개와 원숭이 사이였지만 엄마 베르나르다가 애인 후다스 이스카리오테, 성경에 나오는 발음대로 하자면 가롯 유다와 질펀한 혼외정사가 끝나는 때를 기점으로 서로 남은 감정이라고는 이제 증오밖에 없다. 원래 서방이 싫으면 애새끼도 싫은 법이라, 시에르바 마리아가 어렸을 적부터 베르나르다가 직접 딸을 돌본 적이 거의 없이 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손에 의해 자랐다. 이 결과 시에르바 마리아는 스페인 출신의 백인들이 보기엔 악마나 구사할 수 있는 이교도의 언어를 서너 개 씩이나 능숙하게 말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토템을 상징하는 목걸이 같은 것이었으니 이거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시에르바 마리아가 미친개에게 물렸다는 소문은 어느새 주교의 귀에 들어가고, 후작을 호출한 주교는 시에르바 마리아를 산타클라라 수녀원으로 보내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한 엑소시즘을 시행할 것을 ‘명령’한다. 주교, 영어로 bishop. 이거 대단한 지위다. 신부는 father. 신부, 즉 아버지가 꼼짝도 못하고 계율에 의하여 순응해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이 주교 아닌가 말이지. 그래 가뜩이나 쫄보 성향이 농후한 이그나시오 어쩌구저쩌구 카살두에로 후작 2세는 자신이 사랑하는지도 몰랐던 딸 시에르바 마리아를 직접 이끌고 산타클라라 수녀원, 미신적 가톨릭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원장 수녀를 비롯한 불쌍한 영혼들이 득시글거리는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후작 2세는 몰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는 자신의 딸을 못 보게 될지.


  재미있는 책. 그러나 아쉽게 지금은 품절이고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 그래 나머지 이야기도 더 해주고 싶기도 하고, 나도 오랜만에 시간이 철철 남아 더 자유롭게 써내려가고도 싶지만 이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것이라서. 기다리시라. 그랬다가 시중에 다시 깔리는 순간, 머뭇거리지 마시고 구해 읽으시라. 짧아서 한 나절이면 다 읽고 독후감도 쓴다. 별점 네 개? 마르케스라면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현란하고 더 재미있어야 할 거 같은 욕심이 들어서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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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13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견병 걸린 사람 미드에선 봤어요. 실제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드에선 일단 개처럼 바뀌더라구요.😳 저는 <백년의 고독>부터 읽어봐야 겠네요.
이 책도 제목이 좀 중의적으로 보이는데용?

Falstaff 2021-04-13 19:33   좋아요 3 | URL
광견병의 말기에 잠깐 그런 증세가 있는 거 같더라고요. 섬망. 근데 또 ‘섬망‘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잖아요. 그게 미드에서 나오는 과장 장면 같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ㅋㅋㅋ
당연히 백년고독 부터 읽으셔야지요.

mini74 2021-04-13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야기속에 또 이야기가 그것도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무슨 배추속처럼 담겨 있어서 ㅎㅎ이 책 끝이 너무 궁금해요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엔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1-04-14 08:44   좋아요 1 | URL
옙! 그 책 대빵 재밌습니다. 노인네들 연애하는 것도 그렇지만 역시 마르케스의 농담 하나가 절 까무러치게 했습지요.
라틴 아메리카를 호령하는 막강한 산적떼가 등장하는데 걔네들 두목 이름이 글쎄, 아이고 어머니, 폴란드에서 출생해 젊은 시절 배타고 세상을 누비기도 했던 스타 작가 조지프 콘래드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ㅋ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시선 359
김성규 지음 / 창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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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생. 시집은 2013년 출간.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 당시 시인은 명지대 문창과를 나와 같은 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냈다. 물론 일 년 후에 김구용 시문학상을 수상하고, 바로 이 시집으로 신동엽 문학상까지 넙죽 받으리라는 건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2014년 시인으로서는 큼직한 두 개의 상을 받은 이후 상의 무게감 때문일까 아직 후속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시집의 제일 뒤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흙을 퍼먹는 기분이다. 나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 (중략) … 시간을 함부로 소모하고, 견딘다는 것. 몸이 아파 누워 있다. 창문을 열어보니 봄이 온 느낌이다.” 라고 쓰고 있어서 혹시 건강문제로 더 이상, 세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김성규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자주 쓰는 말을 한 번 더 해야겠다.
  나는 시를 거의 모른다. 좀 읽기는 했지만 거의 교과서 수준의 시를 교과서 수준으로 이해하는 정도. 그리하여 앞으로 어떤 감상을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준 아마추어의 의견으로 이해해달라는 것. 불편한 말이 나와도 무슨 특별한 주관이 있어서 시와 시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십사 하는 것이다.
  김성규의 시는 지금 크게 유행하고 있는 시의 파편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시인의 함의를 눈치는 챌 수 있는 시도 들어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된다. 그래도 처음 실린 시를 읽자마자 평론가 조재룡이 쓴 해설 「영벌(永罰)받은 자의 노래」를 먼저 읽고 김승규의 시 독법에 대해 배워야 했다. 조재룡은 평론가 역시 문학인의 한 명으로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듯 문장 적 과시를 조금 한 후 이렇게 말한다.


  “김성규는 폭력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대안을 찾아 삶의 피안을 기웃거리며 희망이라는 차가운 형이상학을 염원하는 대신, 재난의 한복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뛰어들어,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가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한다.”  (p.121~122)


  좀 현란한 문장이다. 따온 문장과 해설의 제목 「영벌(永罰)받은 자의 노래」를 합해서 생각해보면, 시인 자신이 영벌, 사전적 의미로, “(기독교)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벌” (표준국어대사전)을 받고 있는 자라서 그의 노래는 한없이 고통스러운데, 그게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읽어도 무리는 없겠다. 그러면 영원한 벌이 무엇일까. 뭐긴 뭔가. 시를 쓰는 일이지. 그럼 시를 안 쓰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쉽나 어디.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니, 시인에겐 시를 쓰는 일이 끝나지도 않을 천형과 같은 영벌,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한 대가로 영원하게 받아야 하는 벌이라는 뜻이다.

 

  외모는 복스러운 순둥이 같이 보여도, 김성규의 시는 이래서 고통스럽다. 예컨대, 짧기도 하니 처음 실린 시 <적도로 가는 남과 여>를 읽어보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
  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
  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
  너는 왼쪽으로 걸어
  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
  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


  지뢰밭 가운데서
  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전문)



  앞에서 말했다. 이 시를 읽고 곧바로 해설로 가서 시 독법에 관해 배워야 했다고. 역시 평론가는 다르더라. 1연에서 일직선으로 남자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건물 오른쪽으로 여자를 찾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어서, 이제 그는 적도를 향해 걸어가자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여자는 벌써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니까 이미 건물 사이를 지나 왼쪽으로 걸어본 다음, 적도를 향해 떠난 후다. 그리하여 이들은 앞으로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평론가의 시 독법에 이렇게 한 번 놀란 이후, 난 예상외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실제로 몇 십 편의 시를, 마치 주관식 국어 시험을 치루는 기분으로 온갖 품사와 시제와 단어의 중의성과 수사법을 따져가며 읽게 됐고, 그리하여 곧바로 시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 확실하게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독자지 평론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읽는 건 평론가나 밥벌이로 하는 짓이지, 일반 독자인 나는 그저 시를 읽으면서 공감하고 좋다, 아니다, 덜 좋다, 덜 싫다, 이 정도의 평을 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다가 시의 매력에 빠져 더 열심히 읽다보면 평론가 각하들의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되겠지.
  그러다가 이 시를 만난다.



  방언(方言)


  점자를 읽듯 장님이 칼을 만진다


  칼날에 피가 흐른다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는다


  칼은 따뜻하다!
  자신이 새긴 글씨가 상처인 줄 모르고
  기뻐하는 장님을 보라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핥으며
  자신도 모르는 글씨를
  칼날에 새기고 있다


  몸에서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더 빨리
  더 빨리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
  온몸으로 받아 적고 있다  (전문)



  ‘방언方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투리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 쓰는 말로 “신약 시대에, 성령에 힘입어 제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외국 말을 하여 이방인을 놀라게 한 말, 또는 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하여 말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이다. 시에서는 두 번째 뜻으로 제목을 정했을 것.
  대학에 입학해서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가, 학생식당 오전에 남녀 무리 넷이 앉아 자기들의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갑자기 웅얼웅얼 뭔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바치는 거였다. 처음엔 조용히 나지막하게, 그러다가 크레센도, 크레센도 에다니만도, 거의 광분상태. 모교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학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매우 낯설었다. 뜨악한 느낌. 이걸 방언이라고 하는가보다, 본능적으로 알게 되더라.
  이 시에서 터진 방언은? 기독교 말고 적그리스도의 마귀가 불러주는 기도문. 장님이 자기 손이 예리하고 예리하며 예리한 칼날에 베어 자신의 피로 칼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귀의 방언을 칼에 새기고 있는 행위. 그게 시인이, 정확하게 얘기해서 시인 김성규가 시를 쓰는 일이다. 이러니 김성규의 시를 읽고 고통스럽다할밖에. 시를 쓰는 행위를 읽었으니 다음엔 <시인>이 어떤 직업인이란 걸 넘겨다보자.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
  두루미
  목을 부르르 떤다


  부리에서 삐져나온
  푸른 낚싯줄
  흘러내리는 핏물


  목구멍에 걸린
  바늘을 토해내는
  날개를
  터는 소리


  한번 삼킨 것을
  토해내기 위해
  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
  걸어가는 길


  살을 파고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두루미가 운다  (전문)



  시가 되겠다 싶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 삼켰더니, 아뿔싸, 낚시 미늘을 삼킨 물고기를 삼킨 것이었다. 그래 두루미라는 시인의 목에도 낚싯바늘이 걸려 토해내야 하긴 하겠는데 그게 나오진 않고 목구멍에서 피만 흐르고 있는 광경. 이 정도면 비참하다. 김성규가 몇 년이 흘러도 다음 시집을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시인의 몸 또는 마음의 병이 원인이 아니길 바라는 심정을 이젠 아시겠지? 이러니 평론가 조재룡이 시인을 “영벌 받은 자”라고 하고 시집을 “영벌 받은 자의 노래”라고 했던 것. 시인이여, 비노니, 제발 건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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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12 1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읽었네요. 학교때 시험으로 반감이 생긴 후로는 시는 굳이 해석을 찾아보지 않았는데 슬쩍 호기심이 고개를 듭니다. 이런 시라면 한 번쯤?하고요ㅋㅋㅋ

Falstaff 2021-04-12 10:12   좋아요 2 | URL
그래도 요즘 시는 어려워요. 너무 개별적이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추상화 구경하는 거 같아 예전 시를 주로 읽었는데, 난데없이(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번에 현대시 시집 여섯권을 덜컥 사놔서 지금 고민이 한 바가집니다. ㅜㅜ

청아 2021-04-12 10:14   좋아요 2 | URL
요즘 시는 미술사에서 그런 것처럼 자꾸만 파격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팔스타프님 후기 벌써 기대됩니다!ㅋㅋㅋㅋ

새파랑 2021-04-12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정말 강렬하네요. 시도 인상적이고~ 전 시적 감수성 부족(이과 출신...)으로 자주 읽지 않지만 이런식으로 접하니 좋네요.
폴스타프님의 독서 범위가 정말 굉장하다는 걸 느낍니다 ^^

Falstaff 2021-04-12 11: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여기 이과 출신 많아요. 저도 미적분 하나는 귀신같이 풀 줄 압니다.
감수성 부족이 어딨어요, 걍 읽고 내 맘에 든다, 아니다만 있지요. ㅋㅋㅋ
저도 딱 그 수준입니다! ^^
 
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 - 세계현대작가선 2
살만 루시디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씨. 이거 절판?
마르케스의 백년고독하고 이 책하고 인기투표 시키면 어떻게 될까? 겁나 궁금할 정도.
진짜 20세기 후반의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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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1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1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1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