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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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가 넘어감에 따라 이 작품을 읽은 다음에 마음먹고 독후감을 쓰려면 원고지 3백장도 쓰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메르시어는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베른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단다. 서양 소설을 읽으면 학생들이 가장 고통을 겪으며 배우는 과목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인데 여기에 히브리어까지 더 했고,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철학자다. 이후 유명 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1세기 들어 대학에까지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껴 은퇴를 했으니 좌파 지식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야 나는 파스칼 메르시어가 <리스본 행 야간열차>의 지은이라는 걸 알았는데, <…야간열차>는 제목 때문인지 좀 스릴러나 추리극 아닐까 싶어서 여태 거들떠보지도 않은 책이었다. 지금 후회하고 있다. 좀 읽어볼 것을. 하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만간에 빌려 읽겠다.

  철학자들이 소설도 많이 쓴다. 인상 깊게 읽은 철학자가 쓴 소설로 나는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가 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꼽는다. 피어시그는 책에서 십대 아들을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태우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질, 품질, Quality가 무엇인지, 소설의 기법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 책 <언어의 무게> 속에서 파스칼 메르시어는 언어, 언어를 기호화하는 문자, 문자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단어, 단어의 연속인 문장, 문장을 발음할 때의 독특한 음감, 이것들이 각 민족의 입 안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면서 같은 뜻일 망정 미묘하게 다르게 전달하는 뉘앙스를 재미있게, 정말 재미있게 풀어냈다. 말 가운데서도 선정된 몇 가지 단어를 중첩 사용함으로써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만의 바운더리를 형성하는 권력 기구, 좌파 지식인이니까 당연히 그들을 향한 비판의 시선까지 매우 다양하게 언어를 이야기한다.

  나도 평상시에 언어와 언어의 사용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라, 메르시어의 주장을 정독해서 읽어야 했고, 그리하여 피어시그의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을 때 하고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고 믿었는데, 세상에 뭐든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라서 630쪽에 불과한 책 한 권을 읽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게다가 작품 속에는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요즘 장편소설 하고는 좀 다르게 중요한 조연들이 숱하게 나오고, 그러니까 당연히 심각한 에피소드도 많이 달려 나오고, 친절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는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로 하여금 이미 11년 전에 죽은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매사에 능력 있어서 돈도 잘 벌었던 아내 리비아에게 결코 짧지 않은 편지를 자주 써서 그동안의 내용을 요약해 독자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과공은 비례라서過恭非禮, 이런 친절은 처음엔 괜찮았으나 5백 쪽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도무지 읽기가 싫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뭐하러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또 듣고(읽고) 있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명 철학자라서 그런지 신중하고 진지한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텐션을 유지하며 읽게 만들었다. 나 아니고 당신이 읽더라도 이 책은 정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읽지 말던가, 아니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  원고지 3백장 정도의 독후감. 이것도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서로 뒤섞여 있다. 그래도 귀띔을 해드리자면, 메르시어가 심성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서 모든 이야기(들)의 결말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

  위 단락에서 메르시어가 대학에서 교수질을 하다가 때려치운 것이 (한 시절엔)상아탑(이라고 불리던 곳)에서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횡행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작품의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를 보자면, 조부 크리스토퍼 셀던 레이랜드 경은, 경sir니까 귀족은 귀족이지만 세습하지 않는 귀족으로, 인도의 독립을 강력 반대하던 인물이며, 이것 때문에 아들 애슈턴 첸들러와 마찰을 빚었었다. 하지만 애슈턴 챈들러가 잘한 것이라고는 프랑스와 독일의 피가 흐르는 아내를 맞아 아들 사이먼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뿐이었다. 그리 총명하지 않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는지 아들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 구경 갔다가 잘 정돈된 잔디를 발 뒤꿈치로 파헤쳐 놓기도 한다.

  애슈턴 첸들러의 동생이자 사이먼의 삼촌인 워런 숀은, 동양의 언어를 평생 공부한 사람이다. 이이들이 말하는 동양은 서아시아 지역. 워런 숀은 저 라오스 문자까지 해독하기 위해 다 늙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은 인물이다.

  아무리 좌파 작가라도 일단 배워야 작품을 쓰는 거니까 공부는 그렇다고 치자. 사이먼은 김나지움을 나와 옥스퍼드 존 던 학교에 들어가 1년 만에 그곳에서 도망 나온다. 존 던은 영국의 위대한 시인. 하지만 존 던 학교에서는 존 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존 던을 망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서 몇 번을 망설이다 런던으로 뛰쳐나간다. 열일곱 살이었는데 세 살을 더 보태 스무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벨사이즈 리트리트 호텔의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해 조금씩 돈을 모은다. 몰타 여행을 하기 위하여. 평소 좋아하는 워런 삼촌의 집에 걸려있는 지중해 지도를 보면서 지중해를 감싸고 있는 모든 지역의 언어를 알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고, 이때 삼촌이 “몰타는 빼지 말아라.”라고 말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진짜로 가게 되는데, 아무리 가보고 싶었지만 정말로 가보면 기대한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일은 다 경험해 보셨지? 사이먼도 그랬다.

  다시 런던의 호텔 야간 경비원으로 돌아와 독일어로 된 아동 도서를 번역할 기회를 잡고, 이러저러한 일로 이탈리아 여성 리비아 페르토트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도 해서 딸과 아들을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장인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중견 출판사를 통째로 차지하게 된다. 십여 년을 아내가 경영하고 자신은 번역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11년 전엔 아내가 장인과 같은 증상인 급성 심정지로 세상을 떠 이제 처가 재산이 몽땅 자기 재산이 된다. 그리고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사는 워런 삼촌이 숟가락을 놓으면서 집을 통째로 상속해준다. 좋아, 좋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지. 그런데 어쨌든 좀 세월을 두긴 했지만 장인이 죽어, 아내도 죽어, 삼촌도 죽어서 이제 사이먼은 무지하게 많은 돈을 갖게 되는데, 대학에도 자본주의 논리가 쳐들어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 둔 교수…가 쓴 소설의 주인공답게, 사이먼 레이랜드는 자기 주변에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 친구들에게 펑펑 돈지랄을 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망해가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문 닫을 일만 남은 친구의 출판사에 5십만 파운드의 돈을 출자해주는 것이 아니고, 증여를 하는 걸로 사이먼의 활수한 돈지랄은 시작한다. 10년을 바쳐 천 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쓴 파올로의 작품의 출판비를 자기가 내겠다고 하고, 러시아 작품을 훌륭한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실력을 지닌 안드레이 쿠츠민을 위하여 트리에스테의 건물 한 동을 통째로 사서 쿠치민한테 월세를 제해주기도 한다. 이거 안 웃겨? 이러면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난 정말 궁금했다. 사이먼의 돈지랄이 언제까지 갈지. 근데 딱 거기까지.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몇 사람들에 국한한다. 대신 프란체스카라는 돈 많은 작가의 미발표 소설을 통해, 돈을 준 사람이 아니라 돈을 받은 사람의 채무감 같은 걸 무지하게 상세하게 그렸다. 돈 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지.


​  나는 여태까지 작품과 작가에 관하여 언짢은 점만 골라 썼다.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이 쓸 수 있다.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가를 쓰려고 하자면 아예 독후감이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다.

  특히 초두에서 말한 특별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집단들과 특정 시키고자 하는 백색 카스트와 흑색 카스트에 대한 신랄한 필설 같은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꼭 빼지 말고 독후감에 써야 하는 것으로, 역자 전은경이 정말 고생했겠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을 보시라. “언어의 무게”. 언어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를 작가가 철학적 의미까지 넘치게 담아 설명하는 책의 번역을 어떻게 가볍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한 번 인용해볼까?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의 직업도 번역자인데 그가 말하기를;


​  “번역자만큼 책을 자세히 읽는 사람은 없다네. 불필요한 반복이나 틀린 점, 리듬에서의 더듬거림, 미끄러진 장면,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진부하고 형편없는 것들을 발견해내지. 다른 언어로 복제하려면 모든 것, 정말 모든 것을 캐내야 하니까. 어떤 문장을 읽으며 내가 그저 복제하는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네. 번역자만큼 작가에게 가까운 사람은 없지. 번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한 친밀함, 연인 사이의 육체적 친밀함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주네. 번역자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것, 그의 상상력에 숨어 있는 알파벳을 알게 되니까. 그 알파벳이 번역자에게는 지극히 낯설 수도 있네. 그럴 때 번역자가 느끼는 낯섦은 평범한 만남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보다 싸늘하고 위협적이지. 번역은… 낯선 내면세계로 향하는 엄청난 침입일세. 위험하지. 번역자는 작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또한 그 누구보다고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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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3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301페이지 너무 좋네요. 저도 이 책을 갖춰두고 있습니다.

작가의 전작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주인공이 교수였던 걸로 기억해요. 다리 위를 지나다가 자살하려던 여자를 구해주는데 그 여자가 포르투갈 여자였나, 그래서 포르투갈 어에 매력을 느끼고 갑자기 그 언어에 대한 열정으로 막 공부하던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소설을 통틀어 그 장면, 외국어에 열망을 느끼고 몰입해 공부하던-이 제일 좋았어요. 그 장면 때문에 영화를 봤는데, 영화에서는 제가 원했던 만큼의 그런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래돼서 희미하지만요.

아, 저도 이 책 읽어야겠어요. 저는 나흘 이상이 걸릴듯 합니다.

Falstaff 2023-07-13 17:12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댓글 아침에 읽고... 이노무 알라딘은 셀폰에서 답글쓰기가 언짢아서 말입죠, 야간열차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는데요, ㅋㅋㅋㅋ 아래 대화모음 보니까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3-07-1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0장으로 다시 써오거라.

Falstaff 2023-07-13 17:11   좋아요 0 | URL
정말 3백 장 쓸 거 같다니까요! 근데 쓰면 뭐합니까. 누가 읽는다고. ㅋㅋㅋ

잠자냥 2023-07-13 17:13   좋아요 0 | URL
저랑 락방이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3-07-13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큭 저 이 책 사실 작가의 전작이 제겐 별로였어서 이 작품도 노관심이었는데 이 글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23-07-13 10:37   좋아요 1 | URL
리스본이요? ㅎㅎ
저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만큼 좋진 않았어요. 찌찌뽕~

잠자냥 2023-07-13 11:01   좋아요 0 | URL
찌찌뽕~ 저는 영화도 그냥 그랬어요........-_-

다락방 2023-07-13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도 별로 …

Falstaff 2023-07-13 17:13   좋아요 1 | URL
도서관 가셔요. 그게 장땡입니다. 맘에 들면 소장용으로 한 권 사시면 되지요 뭐.
 
토트 씨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외르케니 이스트반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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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에 <장미 박람회>를 읽을 때는 이 유대인 출신 헝가리 작가가 이렇게 희비극적이고 다층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기막힌 전쟁소설도 쓸 지는 몰랐다. 외르케니는 유대인 출신 헝가리 군으로 독일 연합군 일원이었지만 유대의 낙인 때문에 총도 없이 거의 작업 노예 정도로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다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오히려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명이 높은 소비에트 수용소에서 늘 죽음의 곁에 있었다는 건 <장미 박람회> 독후감에서 말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헝가리는 헝가리 제2 공화국을 열었으나 소련의 무력에 굴복해 문을 닫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으로 재건, 이후 40년이 넘는 통제의 시대로 접어든다.


​  <토트 씨네>는 세계대전 중일 수도 있고, 제2 공화국 시절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전쟁은 3년이 넘게 진행 중이어서 산 좋고 계곡 깊은 시골 마을 마트라센탄나에서도 가구의 60퍼센트 이상이 가족 가운데 한 명 이상의 남자를 전선에 보냈을 정도였다. 이 마을에 토트 러요시 씨는 8년 동안 철도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자리를 옮겨 마트라센탄나의 의용 소방대장으로 온 사람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좋고, 생기기도 잘 생겼으며 사람이 온후하고 공정해, 동네의 온갖 대소사를 결정할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일의 처리에 관해 상의하고 결정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토트 씨는 소방대원 정복을 입고 근엄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의견을 주면, 사람들은 이 의견이란 것이 누구나, 심지어 자기들도 늘 해오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토트 대장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치 틀림없는 것이려니 싶어 하는 현상을 보인고는 했다. 운이 좋은 데다가 사람 자체가 좋은 운에 어울리는 이런 행운아가 살다 보면 정말로 있다. 그게 바로 토트 러요시. 이이는 이십 년 전에 머리슈커 아가씨와 결혼해 아들 줄러를 낳았고, 터울을 조금 두어 다시 총명한 딸 어기커도 낳았는데, 줄러는 무럭무럭, 그리고 건전하게 자라 학교 교사를 하다가 어린 나이에 입대를 하여 군대의 최연소 사관으로 최전방에서 근무중이었다.

  토트 줄러가 최연소 사관이라고 하니까 18세나 19세쯤 되지 않을까 싶다. 동생 어기커가 방년 16세. 그러던 어느 날, 전방 부대에서 줄러가 군사우편을 보내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줄러의 지휘관으로 버로 소령이란 사람이 있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2주간의 병가를 승인 받았다. 줄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지휘관에게 쪼르르 달려가 아뢰기를, 저희 집이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아 헝가리 각지에서 휴양객이 몰려오는 마트라센탄나거든요. 소령님의 증세는 육체적 고통이라기보다 저 소비에트 빨치산들의 시도 때도 없는 기습공격 때문에 신경쇠약이 도져 심한 불면증 등 하여튼 신경이 유난히 날카로워져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경질도 늘어나고 참을성도 없어지고, 조금만 맘에 들지 않아도 필요 이상으로 지랄을 하시고요. 소령님의 가시고자 하는 소령님 아우님 댁이 카드뮴 공장 바로 옆인데 어찌 충분히 요양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일이 이러하니 고려시대 때부터 휴양지로 이름이 높았던 마트라센탄나의 쇤네 집에서 편하게 거하시면 깊은 숲속에서 뿜어져나오는 소나무 향 같은 자연치유 효과로 소령님의 모든 증세가 개운하니 고쳐질 거라고 사료됩니다요. 그래서 버로 소령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토트 씨네 집으로 향하게 됐고, 이 덕분에 줄러도 다음 차로 따라오라 했으니, 토트 버로는 이제 석달 열흘 만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 거였다.


​  편지를 받은 토트 씨가 제일 먼저 소령을 맞이하기 위해 한 일은, 변소의 정화조 처리에 관해, 유명 법학박사이지만 정화조 청소를 하는 것이 벌이가 두 배 이상이 된다는 걸 알고 직업을 바꾼 박사와 정화통 청소의 적당한 시기에 관한 토론이었다. 냄새가 지독하지는 않지만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라, 소령이 오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었다. 법학박사는 청소를 하면 냄새가 가라앉기 전까지 오히려 더욱 극악하게 날 터이니, 청소를 하려면 지금보다 오히려 소령이 다녀간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학자적 양심에 입각한 조언을 받아들인다. 줄러 사관의 엄마 머리슈커는 예전 사장이 있을 당시 청소일을 했던 영화관에 찾아가 새 주인을 만나서 2주일 동안 분무기를 빌려온다. 이는 소령이 소나무 향기를 좋아한다고 해, 솔향을 낼 수 있는 재료를 물에 희석해 소령이 머무는 동안 내내 칙칙 뿌려줄 생각이었다. 동생 어기커는 16세 소녀답게 사춘기적 자아를 찾느라고 절대 쪽팔린 일은 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건만 결국 오빠를 위하여 오빠의 생사여탈을 손아귀에 잡고 있는 소령의 편의를 위해 볼품없는 손수레를 끌고 동네를 다니면서 필요한 여러 자질구레한 장비를 빌려온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에 간 남자들이 많은 동네 사람들은 최전선에서 지휘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치 자기네 남자들의 지휘관이라도 되는 양, 단번에 관심 폭발, 멀리서나마 한 번 봤으면 하는 모양이 역력했고, 그래서 자기들이 빌려줄 수 있는 편의 품목은 서로서로 빌려주기 위해 경쟁까지 할 정도였다.

  드디어 소령이 도착하기로 한 날의 며칠 전. 토트 씨네로 전보 한 통이 온다.


​  “전보. 최연소 사관 토트 줄러 군이 전투지역번호 8/117에서 적국과의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헝가리 적십자사.”


​  멀쩡한 남자들이 다 군대로 끌려가 비어 있는 우편 배달부 자리를 임시로 맡고 있는 사람이 주리 아저씨였다. 곱추에다가 말도 더듬고 생각이 단순하며 정신마저 오락가락 하는 인물로 우편물을 거의 다 먼저 뜯어 읽어본 다음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한테 온 좋은 소식,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온 나쁜 소식은 전해주지 않고 우체국 처마 밑의 빗물 통에 던져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주리 아저씨가 보기에 마을 소방대장 토트 러요시 씨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멋있고 점잖고 넉넉한 사람이라, 이렇게 슬프기 그지없는 소식을 전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입을 싹 씻고 있는 동안 드디어 버스 정류장에 소령이 나타난다. 그것도 두 명이. 한 명은 빼빼 마른 몸매에 강단있는 체력과 누가 봐도 군인 같은 모습. 다른 하나는 작달막한 키에 후줄근한 복장과 장화를 신은 장교. 토트 씨네 세 가족은 군인 같은 소령에게 꽃다발까지 건네며 환영을 했지만 그는 신경질만 벅벅 내고 맥주 한 조끼를 급하게 마신 후에 타고 온 버스를 다시 타고 꽃다발도 든 채로 돌아가버렸다. 엉뚱한 곳에서 내린 것. 그래 다른 한 명의 소령을 데리고 집에 도착한 토트 씨네.

  전장에서 바로 휴양소로 온 버로 소령. 신경은 끝간 데 없이 날카로워져 있고, 온 몸이 전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한다. 제일 먼저 나타난 증세는 자신의 뒤를 끊임없이 관찰한다는 것. 특히 빨치산의 야간전투가 빈번할 때, 뒤에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그게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터. 소령은 마주 앉은 토트 씨, 앉은 키도 큰 토트 씨의 눈이 자신의 뒤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토트 씨에게 계속 묻는다. “왜 내 뒤를 보고 있는 거죠?”

  두 번째로 일상화된 야간전투로 인해 버로 소령의 바이오리듬도 낮에 잠을 자고 밤에 깨어 있는 것. 밤에 잠들지 않는 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서,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점. 부대에서는 체스를 두거나, 카드를 하지만 시골사람 토트 씨는 체스도, 카드도 할 줄 모른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이곳에선 여자들이나 심심풀이로 가욋돈이나 벌어볼까 싶어 하는 붕대 상자 만들기. 버로 소령은 뜻밖에도 이 상자 만들기에 전심전력을 다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보름 동안 누적이 되니까 여태까지 불가침적인 성역이었던 가정에서 토트 씨는 갈 바를 모르게 된다.

  선량한 산골 마을의 가정에도,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 있던, 자기 아들의 생사를 가르는 권력을 쥔 지휘관이 오자마자 작은 마을, 작은 가정 하나는 여지없이 전쟁의 폭력 속으로 꼬나 박힌다.

  그걸 외르케니 이슈트반은 이렇게 희비극적으로, 종말 부분의 놀라운 전환이 벌어져 가볍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잔혹극을 선택해, 광기에 대항해 작은 단위를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 하나만 읽기 위해서라도 구매 버튼을 클릭하거나 도서관 방문을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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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 제안들 34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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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초에 비트키예비치의 책 두 권, 희곡집 《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와 장편소설 <탐욕> 가운데 어느 책을 읽을 지 조금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다 <탐욕>을 선택했고, 6백쪽이 넘는 형이상학적 묘사를 읽느라고 오뉴월 땡볕 아래 죽을 고생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하도 인상 깊게 읽어서 《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 역시 머지않아 읽겠다고 다짐을 했다가, 세계 양궁사에 빛나는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이 쏜 화살처럼 시간이 가는지라 이제야 독후감을 쓰는데, 그것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덕택이었으니 이 게으름을 어찌할꼬.

  비트키예비치는 소설 보다 초기엔 희곡으로 작품활동을 했다고 역자 정보라의 해설에서 쓰여 있는 바, 1921년에 <쇠물닭>을, 23년엔 <광인과 수녀> 그리고 <폭주 기관차>를 발표했다. <탐욕>을 발표한 것이 1927년 말이라 오늘 읽은 희곡 보다는 몇 년 뒤임에도, <탐욕>을 읽느라 워낙 칼로리 소모가 많아 희곡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순수한 형태”로의 창작을 이유로 한 마약 의존과, 형이상학,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다중의미의 단어가 빈번하게 출몰할 것이란 두려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책 머리에 출판사 워크룸 편집부에서 쓴 “이 책에 대하여”라는 소개가 있는데, 읽어보니 비트키예비치가 알프레드 자리,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 프랑크 베데킨트, 앙토냉 아르토 등의 계보를 이어갔다고 하고 다행스럽게도 그나마 작품을 읽어본 극작가들이라, 그래도 조금은 덜 무거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열었다가, 아니나 다를까, 허덕허덕, 쉽지 않은 시간을 즐겼다.

  비트키예비치를 통해 계보를 넘겨준 극작가들의 면모를 보면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잔혹극, 부조리 같은 것인데 이이는 그것들이 한 작품에 몽땅 다 들어 있는 것이 나로 하여금 여러 현상을 내포하고 있을 극작품을 읽으며 허덕이게 만들었을 듯하다. 부조리극 하나만 보더라도 이게 결코 만만하지 않은 데, 한 작품 속에서 실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으니, 극장에서 시청각을 통해 극을 보는 대신 오직 활자 위에서만 상상할 수밖에 없는 독자들은, 아이고, 어쩌라는 말이냐고.

  게다가 비트키예비치를 거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 아쉬케나지 족속이라는 것. 특히 <쇠물닭>을 읽으면서 주인공 쇠물닭 역할을 하는 엘쥬베타 플레이크프라바츠카라는 26세 가량의 대단히 아름답지만 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는 여성은, 초장부터 남자 주인공 에드가 바우포르에게 총을 맞아 죽임을 당하고, 이후에 어라, 다시 멀쩡하게 살아 등장하긴 하는데, 다시 에드가의 사냥총에 얼굴을 정통으로 두 방이나 맞아 한 번 더 죽음을 맞는 장면을 읽으며, 이거 혹시 구박받는 유대인을 묘사한 거 아냐?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아니겠지. 폴란드의 유대인 차별이 비록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래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결코 심하지는 않았고, 이 작품을 쓴 1923년 만 해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이라, 딱 꼬집어 유대인을 상징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부조리극 특유의 논리도 없고, 사건의 원인도 없고, 그냥 극 가는 대로의 심상만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추측만 할 뿐.

  그래도 내가 읽기로 비트키예비치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잔혹극 만큼은 아니지만(<룰루>, <눈 뜨는 봄>, <카이트 후작> 등의 눈 부신 작품과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만), 알프레드 자리의 대표작 <위비 왕>이나 앙또넹 아르또의 <첸치 일가>,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의 <직조공> 같은 것보다 (한 작품 안에서 봐도) 훨씬 다양하며 그만큼 복합적인 재미도 있고, 스토리 또한 극적이라 훨씬 읽는 맛이 난다. 앗, 그러고 보니 잔혹극의 한 이정표를 세운 앙또넹 아르또는 비트키예비치보다 열 살 이상 적은데 그의 계보를 이었다는 설명은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여간 비트키예비치의 희곡은 그만큼 갑이란 말씀. 당연히 읽기 쉽지 않기는 하지만 말씀이야.

  이렇게 변죽만 울리는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내가 이이의 극작품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문법을 알아들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역자 정보라는, 독자 입장에서 화딱지 나게시리, “독자 여러분도, (마약을 빨아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순수한 형태는 발견 못해도 상관없으니 비트카찌의 뒤틀린 유머 감각과 지면 속 가상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뒤죽박죽 정신없는 사건들을 함께 한껏 즐겨 주시면 좋겠다.”는 해설을 남겼다. 극작가의 순수한 형태는 못 봐도 좋다고 했으니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뒤죽박죽 앞 뒤 없이 쏟아지는 사건들을 즐기는 것도, 뒤틀린 유머를 찾을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즐기는 것이지, 앞 뒤 조각을 맞추기에도 정신 사나와 죽겠는데, 이 와중에 다른 언어에서 한 번 바뀐 유머, 그것도 뒤틀린 유머를 어떻게 찾으라는 말인지, 정보라 선생,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외국인하고 회의할 때 제일 염병인 것이, 영어로 유머 날리면, 업무 관련해서는 웬만큼 알아 듣지만 이거 무슨 말이지, 양코 아저씨 한 마디에 귓구멍이 콱 막히는 순간, 갑자기 다들 웃고, 박수치고 난리를 치면 그게 왜 농담인지를 이해 못해 “야,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그런 거냐?” 묻고, “글쎄 말야. 미친 것들이 웃고 지랄이야.”라고 답하는 몇몇 아저씨들 심정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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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08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이퍼 제목에서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완전 공감합니다.

Falstaff 2023-07-08 17:49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까! ㅎㅎㅎ 하여튼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어떻게 읽었는지 몰겄네요. ㅎㅎㅎ
 
사라진·샤베르 대령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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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발자크. 발자크의 인생극 시리즈가 워낙 방대해, 그나마 발자크를 열심히 읽는다고 했는데도 아마 반의 반도 못 읽었을 거다. 세계 소설사의 두 천재라고 하면 대부분 19세기 초반을 누볐던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를 꼽지 않을까 싶다. 한 번 책상에 앉았다 하면 엉덩이에 뾰루지가 생기건 말건 날을 꼬박 새우면서 소설을 쓴 사람들. 그것도 가끔 그런 것이 아니라 하고 한 날 손가락에 박인 굳은 살 물어 뜯어내 가면서 (발자크는) 파리의 상류사회 사람들하고 노닐다가 진 빚 갚느라, (도스토옙스키는) 섰다나 도리짓고땡 하다가 진 노름빚 때문에, 이게 놀라운 것으로, 거의 퇴고할 새도 없이 작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썼는데, 그게 후대 평론가, 독자들한테 명작이라 상찬을 받았다는 말이지. 일필휘지로 써갈긴 작품이 눈부시면 그게 천재지 어떤 사람이 천재란 말인가?

  하여간 이 손목 힘 좋은 발자크는, 이제 겨우 단행본 열 권을 읽은 데 불과하지만, 읽을 때마다 사실 내가 기가 넘어가는 일이 있으니, 손목 힘이라기보다 사물을 휙 한 번 둘러보고 그걸 하이퍼 레알리즘 회화painting처럼, 그대로 장황하게 묘사하는 눈썰미다. 21세기 작가들이 만일 발자크처럼 극한 묘사에 힘을 기울인다면, 참으로 애는 많이 쓰지만 찾아 읽는 독자는 별로 없어서 틀림없이 원고료나 인세만 받아 가지고는 자기 한 몸 먹고 살기도 쉽지 않으리라. 그러니 작가 지망생들이여, 비록 발자크가 모범적인 선배이자 천재 소설가임은 분명하나 닮고 싶어하지 말아라.

  이 책 《사라진 ∙ 샤베르 대령》에서도 <사라진>은 분명 단편소설임에도 본문만 50쪽이 넘어가서, 우리나라에선 대략 원고지 2백매 이상 되면 중편소설로 치지만, 발자크 표 상세 묘사를 제외한다면 그저 한 20에서 30쪽 정도면 충분할 수준이다. 즉, 세월이 갈수록 빠른 스피드에 적응이 된 현대 독자들에겐 느긋하고 세밀한 발자크의 작품을 읽다가 더딘 속도감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호흡이 빨라져 높아진 혈류속도에 의하여 열을 동반한 뇌졸중의 위험이 약간, 아주 약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 이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자크를 읽는, 그것도 눈에 띄면 띄는 대로 족족 읽어버리는 건, 저 오래 전에 중국의 동파 소식이 여차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복어만 봤다, 하면 미친듯이 덤벼들었다며?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발자크가 은근히 사람을 끄는 것이 있다니까 그래.


​  <사라진>에서 “사라진”은 영어로 disappeared가 아니다. 사람 이름이다. 에르네스트장 사라진. Sarrasine. 화자 ‘나’가 랑티 백작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거기서 백 살에 육박하는 왜소한 늙은이를 만난다. 근데 이 집 사람들, 백작은 모르겠고, 백작부인과 딸 마리아니나, 아들 필리포 등이 이 볼품없는 늙은이, 게다가 가까이 오면 갑자기 내 피부까지 냉기가 돌 것 같은 싸늘한, 즉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진짜로는 아니겠지만 어딘가 사악한 느낌이 나서 재수없는 늙은이가 있어, 영 께름칙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파티 중에 우연히 이 영감하고 마주친 후작 부인이 기겁을 해서 그를 피해 도망을 갔는데, 우연히 한 규방에 들어간 거였다. 근데 방에 정말 아도니스라고 해도 안 믿을 사람이 없을 만큼 완벽한 미모를 가진 남자의 초상을 발견한다. 틀림없이 남자를 그린 초상이지만 남자라고 하기엔 과하게 아름다운 사람. 화자 ‘나’의 마음에 질투심이 뿜뿜 치밀게 할 정도의 미남자.

  그리하여 ‘나’는 나이 든 후작부인과 하루 밤을 지새고, 하룻밤의 대가로 다음 날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프랑스 프랑슈콩데 지방 검사의 아들로, 검사나 판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뭉개고 조각가가 된 에르네스트장 사라진이 로마에서 있었던 젊은 시절의 연애와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그럼 이 아도니스를 닮은 남자가 사라진이냐고? 아니지. 그렇게 쉬운 결론을 내비치면 그건 발자크가 아니지. 좀 더 재미있고, 19세기 중엽 당시 시선으로는 기묘하고, 심지어 쇼킹했을 거 같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건 끝까지 읽어봐야 안다.


​  <샤베르 대령> 역시 재미있다. 샤베르 대령이 누구냐 하면, 원래는 그냥 병사였다가 혁명이 일어나 공포정치, 총재 정부를 거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이 되고, 이집트 정벌에 나설 때부터 나폴레옹 수하의 용맹한 장교로 활약한 인물이다. 워낙 용감해 나폴레옹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1807년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연합군과 맞짱을 뜬 아울라우 전투에서 당대 프랑스 최고의 기병장군 조아킴 뮈라 부대의 선봉에 서서 연합군 군대를 박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만 말이 폭탄 파편에 맞는 바람에 말하고 함께 우당탕쿵쾅, 엎어졌고, 용감한 선봉대에 이어 밀물처럼 들이닥친 우군 기병에게 숱하게 밟히는 바람에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죽었다. 이렇게 알려졌다. 나폴레옹이 한숨을 쉬더니, 기어이 눈물도 한 방울 짜내면서, 그 불쌍한 새끼 시체라도 꼭 찾아봐라, 했지만 결론은, 없는뎁쇼, 여서 그냥 전사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산처럼 쌓인 말과 사람의 시체들 사이에 끼여 산소부족으로 숨 쉬기만 힘들었을 뿐, 물론 여기저기 욱신거리기도 했고 자잘한 뼈다귀도 부러졌겠지만, 하여간 죽는 데는 실패하여 엄동설한의 1월달에 지금으로 치면 폴란드 땅에서 다친 몸을 끌고, 거지꼴을 해가며 몇 년 만에 파리로 기어들어온 거다. 하여간 백작이라고 하고, 대령 신분에 전사했으니 계급 하나 올려 줘 장군이 됐고, 레종도뇌르 훈장 수훈자이며 빵빵한 재산이 있어서 집에만 오면 다시 팔자가 필 줄 알았겠지. 그러나 파리의 저택은 그동안 일대 전부를 리모델링 해 거대한 주택단지가 됐고, 애칭 ‘로진’으로 부르는 사랑하는 아내 로즈는 이아생트 샤베르 백작의 전 재산을 상속받은 후에 야심가 페로 백작한테 새로 시집을 가 순서대로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행복했느냐고? 에이, 세상에 행복이 어딨니? 로즈가 몸매 좋고 얼굴 예쁘고 다 좋은데 도무지 친정 쪽으로 내세울 사람이 없어서 그게 페로 백작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백작은 파리 정계, 특히 겁 많은 루이 18세한테 비벼서 한 번 크게 출세해볼까, 싶어하다가 정신차려 보니까, 그러려면 로즈 말고 권세있는 집안의 여자를 고르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로즈는 매사에 머리 팽팽 돌리고 있었겠지? 맞다. 그랬다.

  이런 와중에 샤베르 대령이 파리에 나타나 편지도 보내고, 거지꼴을 한 주제에, 정말 거지꼴, 몇 년에 걸쳐 땡전 한 푼 없이 폴란드에서 파리까지 걸어왔으니 몰골이 어떠 했겠느냐 말이지, 하여간 이 꼴을 하고 대담하게 소송대리인 사무소에 들러 자신의 아내와 재산을 찾는 소송을 시작하고자 했으니, 정말로 죽었는 줄 알고 이미 새로 시집 가 아들 딸 낳고 사는 로즈 마음이 어떠했을꼬. 둘 가운데 하나. 자기와 자식의 앞날을 위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려? 아니면, 조강지부가 첫정이니 살림 다 때려치고 이아생트 샤베르 대령한테 돌아가?

  하여간 골 아프게 됐다. 발자크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건 안 알려드리지. 직접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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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06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목 힘 좋은 발자크 ㅋㅋㅋㅋㅋ 손목에 커피를 들이부은 인간인가. 저도 발자크는 전작 도전하고 싶은 작가인데 그것참 어렵네요! 하나 읽음 한동안 못 읽겠는 작가라서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07-06 14:47   좋아요 1 | URL
눈을 좀 씻어줘야 하는 ;;;
13인당 이야기에서 심하게 데인 사람입니다;;

Falstaff 2023-07-06 16:54   좋아요 1 | URL
발자크 읽다보면 여러 번 다칩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흑흑흑....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고, 그래서 다른 책 읽어보면 정말 뭔가 있고 말입죠. ㅎㅎㅎ

stella.K 2023-07-06 0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재 보단 글 써서 먹고 살 수 있을만한 사회에서 한평생 호의호식하며 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ㅋ

Falstaff 2023-07-06 16:55   좋아요 1 | URL
전 그냥 이렇게 살겠습니다. 어떤 다른 세상이 온다는 기대....도 없고요.
세상이 다 그렇지요. ㅎㅎㅎㅎ

다락방 2023-07-06 10: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겠다. 사라진, 은 설명 안해주셨으면 디스어피얼드 인줄 알았을겁니다. 후훗.

잠자냥 2023-07-06 10:12   좋아요 1 | URL
이 인간 또또 책 살 핑계 찾았네!

다락방 2023-07-06 10:25   좋아요 2 | URL
골드문트 님께 땡투하고 벌써 샀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7-06 10:34   좋아요 1 | URL
그새 골드문트에게 소줏값 보태준 다부장

Falstaff 2023-07-06 16:57   좋아요 2 | URL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재미납니다. 19세기 전반에 썼다고 생각하면 진짜 골 좀 때렸을지도 모르겠구먼요. ㅎㅎㅎ
읽기 편한 발자크입니다. 머뭇거리지 마셔요.
땡투 고맙습니다! 모아, 모아서 게이샤 커피 사먹어야지. ㅋㅋㅋㅋ

stella.K 2023-07-07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게이샤 커피! 음주 줄이시고 게이샤 커피에 꽂히셨나 봅니다. 맛있나요? ㅎㅎ

Falstaff 2023-07-07 09:56   좋아요 1 | URL
지금 알라딘에서 파는 거 말고 전에 한 봉지 사 먹어본 적 있습니다. 예. ㅎㅎㅎ 맛있더라고요. 별로 좋지 않은 제 미각으로 비싸기만 한 블루 마운틴 보다 더 좋았습니다. 향이 죽이더군요. ^^
 
밤의 경비원 - 2021년 퓰리처상 수상 장편소설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지예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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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카렌 루이스 어드리크는 1954년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어드리크 씨와, 반은 오지브웨 족 치페와 인디언, 반은 프랑스계 혼혈인 엄마 고노 여사 사이의 일곱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가 노스다코타 주 와페턴의 인디언 기숙학교 교사로 근무해 어드리크도 어려서부터 인디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장했다. 이이는 오지브웨 부족인 치페와 인디언의 터틀 마운틴 지역에 등록된 인디언의 일원이란 신분으로 소설과 시, 아동문학 활동을 하면서 미국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중견 작가이며, 대표적 “아메리카 원주민 르네상스의 2세대 작가”라고 불린다. 실제로 <밤의 경비원>을 읽으면 종종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 르네상스 1세대 작가라고 일컫는 레슬리 마몬 실코. 루이스 어드리크보다 여섯 살 언니로 미국의 대표소설 Top 100, Top 50 같은 걸 뽑을 때 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식Ceremony>을 쓴 바로 그이다. 아, 진짜 언니라는 말은 아닌 거 아시지? 실코는 곳곳에 메사 지형이 있는 황량한 사막 지대에 터를 잡은, 뉴멕시코의 라구나 푸에블로 족이다.


  "The Night Watchma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야경꾼’하면 될 거 같은데, 이 제목은 작품의 주인공 토머스 와샤스크의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로, 인디언 보호구역인 터틀 마운틴 지역에 입주한 “터틀 마운틴 보석 베어링 공장”에서 일하는 야간 전담 경비원이라, 우리말 어감으로 마치 방범대원이나 순찰 순경 등 말단 공적public 경비의 의미가 강한 야경꾼 대신 ‘밤의 경비원’이라 했다. 그러나 ‘밤의 경비원’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서문 격으로 쓴 메모에서와 같이 그냥 “야간 경비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책 파는 데 ‘밤의 경비원’이 더 유리할 거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의 외할아버지 패트릭 고노가 주인공 토머스 사향쥐, 와샤스크의 실제 모델이다. 고노 씨는 토머스 와샤스크처럼 터틀 마운틴에 있던 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지역 치페와족 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미합중국 정부는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 여러 부족과 “국가 대 국가”의 협정을 맺어 원주민의 시각으로 보면 형편없이 좁은 지역으로 추방해버리는 대신 약간의 지원을 하는 서류에 서명을 했던 것 같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파괴적 농업, 축산업, 공업, 상업 자본이 거의 비어 있는 원주민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이들은 합법적인 또는 불법적인 로비활동을 통해 정부와 원주민 사이에 맺은 조약의 종료를 법제화하는 순서로 접어든다. 사실 미국 근현대사에 무지한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반칙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짐작하는 것뿐이니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란다.

  <밤의 경비원>은 1953년 8월 1일에 미국 의회가 실제로 발표한 “상하원 합동 결의안 제108조”에서 시작한다. 이 결의안은 “풀이 자라고 강물이 흐르는 한” 유효하기로 서약한 원주민 국가와 미의 국가 대 국가 간 협약의 파기를 말하는 것으로, 위 문단에서 짧게 언급한 미국 정부의 인디언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의미였다. 작 중 모르몬 교도이기도 한 아서 V. 왓킨스 상원의원이 이 법안을 제안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정치적으로 거물이 소설에서 거의 그렇듯이 매우 권위적인 악당이지만,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왓킨스 의원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단다. 이 책의 절반은 보석 베어링 공장의 야간 경비원 토머스 와샤스크를 정점으로 상하원 합동 결의안 제108조가 발동이 되지 않도록 성명을 발표하고, 호소문을 서명을 받고, 경비를 마련해 워싱턴을 방문해 청문회에서 발언을 한 후, 이에 합당한 활동을 계속하여 협정의 종료를 막는 일에 할애한다.


​  다른 절반은 건강하고, 힘도 세며, 수영도 잘하는 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한 픽시, 퍼트리스 퍼랜토를 주인공으로 하는 젊은이들의 광장.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아직 상하수도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벽촌 지역인 터틀 마운틴에서 도무지 비전을 찾지 못하는 청춘들이니 어찌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나. 퍼트리스의 아버지 퍼랜토 씨는 젊은 시절 대단히 총명하고 튼튼하고, 무엇보다 점프 실력이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였는데, 뭐 그래봐야 지역에서 그랬다는 것이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며, 살림을 하다가 입에 대기 시작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에 덜미를 잡혀, 부족의 주택공급 대상자에 들지도 못해 낮고 기울어진 집의 가장으로 늘 술에 절어 폭력과 주사를 부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퍼트리스도 힘 좋은 처녀로 성장을 하고, 자신도 알코올에 뼈가 녹아버려 이젠 스스로 집을 나가 버렸고, 엄마 자낫과 딸 퍼트리스는 작은 도끼를 침대 밑에 놓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남편)아버지가 돌아오면 아예 죽여버리겠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켑투케 중단편집》에서 봤듯이, 이런 모진 환경에 사는 젊은이들 가운데 대개 남자들은 이 속에서도 고향에 남아 가족들이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마을 또는 도시로 가서 정착하려 하는 거 같다. 이 퍼랜토 씨 댁에서도 맏언니 베라는 연애를 해 새신랑과 함께 미니애폴리스에 가서 정착했다. 정착한 줄 알았다. 퍼트리스는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마침 들어선 군수회사인 보석 베어링 공장에 오퍼레이터로 취직해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며, 회사에서도 ‘뛰어난 1등’의 솜씨를 발휘하는데, 미안하지만 회사에선 ‘뛰어난 1등’은 관심만 받을 뿐 진급이나 고과에선 오히려 감점요인이라는 건 몰랐겠지. 퍼트리스도? 당연하지. 터틀 마운틴 지역의 모든 원주민들은 안다. 이 아가씨가 똑똑하고, 예쁘고, 장작을 퍽퍽 팰 정도로 힘도 좋고, 말도 잘하고, 강단도 세고, 무엇 하나 꿀릴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루는 미니애폴리스로 가서, 간 것 까지는 좋은데, 가서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언니 베라를 찾겠다고 직접 열차를 타고 간다. 때는 1953년. 아직 인종차별 정책인 짐 크로우 법이 시뻘겋게 살아 있던 시절에, 유색인 아가씨 혼자서.

  퍼트리스는 미니애폴리스 역 앞에서 거의 납치당한다. 자신의 발로, 택시인 줄 알고 탄 것이긴 했지만 수상한 업소로 유인 당한 거다. 그리고 고향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당 50달러와 별도의 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고무로 만든 암소 모형의 잠수복을 입고 커다란 유리 수조 속에서 춤을 추는 수중 쇼걸 일을 하게 된다. 폐허 비슷하게 변한 언니의 주소지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다. 그런데 유독 수중 쇼걸을 하는 여자들은 아주 빨리 죽는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이 고무 잠수복 내부, 쇼걸의 피부에 닿는 면에 칠하는 유독한 화학물질 때문이라는 건 독자만 안다. 퍼트리스를 짝사랑하는 지역 권투선수 우드 마운틴이 날짜를 딱 맞추어 이 시점에 등장해 본인은 몰랐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퍼트리스를 구출해낸다. 베라 언니는 미시시피 강을 타고 왕복하는 배 안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가 되었을 거라는 언질 또는 귀띔을 한 채. 이들은 우드 마운틴의 씨 다른 누이의 집에서 베라의 갓난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퍼트리스도 우드 마운틴을 사랑하느냐고?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사랑이 뭐지? 나는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우드 마운틴의 복싱 코치이자 터틀 마운틴 학교의 수학 교사인 백인 로이드 반스도 퍼트리스를 사랑한다. 비록 퍼트리스가 그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아 결국 퍼트리스의 친한 친구 밸런타인 블루에게 시선을 돌리기는 하지만. 뭐 그런 거다.


​  여기에 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등장하는 초자연적 이야기. 영혼과 정령, 샤먼, 그리고 유령. 죽었지만 아직 영혼은 세상을 배회하는 유령들. 그들은 수시로 살아 있는 사람들 주변에서 서성이며 대화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심지어 워싱턴 의사당에까지 쫓아와 훈수를 두기도 한다.

  레슬리 마몬 실코의 역작 <의식>에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에 나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생을 해 PTSD에 시달리는 인디언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해주는 일종의 주술사 노인의 의식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보았기에 새롭지는 않았지만, 인디언들이 유지해가는 그들의 문화를 엿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일 터.

  책은 두 주인공, 토머스와 퍼트리스를 중심으로 해, 이야기 두 개가 엇갈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론 간혹 이야기들이 맞물리기도 한다. 저자 후기까지 580쪽에 달하는 장편이라도 읽기 힘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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