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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경비원 - 2021년 퓰리처상 수상 장편소설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지예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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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카렌 루이스 어드리크는 1954년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어드리크 씨와, 반은 오지브웨 족 치페와 인디언, 반은 프랑스계 혼혈인 엄마 고노 여사 사이의 일곱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가 노스다코타 주 와페턴의 인디언 기숙학교 교사로 근무해 어드리크도 어려서부터 인디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장했다. 이이는 오지브웨 부족인 치페와 인디언의 터틀 마운틴 지역에 등록된 인디언의 일원이란 신분으로 소설과 시, 아동문학 활동을 하면서 미국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중견 작가이며, 대표적 “아메리카 원주민 르네상스의 2세대 작가”라고 불린다. 실제로 <밤의 경비원>을 읽으면 종종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 르네상스 1세대 작가라고 일컫는 레슬리 마몬 실코. 루이스 어드리크보다 여섯 살 언니로 미국의 대표소설 Top 100, Top 50 같은 걸 뽑을 때 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식Ceremony>을 쓴 바로 그이다. 아, 진짜 언니라는 말은 아닌 거 아시지? 실코는 곳곳에 메사 지형이 있는 황량한 사막 지대에 터를 잡은, 뉴멕시코의 라구나 푸에블로 족이다.
"The Night Watchma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야경꾼’하면 될 거 같은데, 이 제목은 작품의 주인공 토머스 와샤스크의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로, 인디언 보호구역인 터틀 마운틴 지역에 입주한 “터틀 마운틴 보석 베어링 공장”에서 일하는 야간 전담 경비원이라, 우리말 어감으로 마치 방범대원이나 순찰 순경 등 말단 공적public 경비의 의미가 강한 야경꾼 대신 ‘밤의 경비원’이라 했다. 그러나 ‘밤의 경비원’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서문 격으로 쓴 메모에서와 같이 그냥 “야간 경비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책 파는 데 ‘밤의 경비원’이 더 유리할 거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의 외할아버지 패트릭 고노가 주인공 토머스 사향쥐, 와샤스크의 실제 모델이다. 고노 씨는 토머스 와샤스크처럼 터틀 마운틴에 있던 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지역 치페와족 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미합중국 정부는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 여러 부족과 “국가 대 국가”의 협정을 맺어 원주민의 시각으로 보면 형편없이 좁은 지역으로 추방해버리는 대신 약간의 지원을 하는 서류에 서명을 했던 것 같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파괴적 농업, 축산업, 공업, 상업 자본이 거의 비어 있는 원주민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이들은 합법적인 또는 불법적인 로비활동을 통해 정부와 원주민 사이에 맺은 조약의 종료를 법제화하는 순서로 접어든다. 사실 미국 근현대사에 무지한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반칙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짐작하는 것뿐이니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란다.
<밤의 경비원>은 1953년 8월 1일에 미국 의회가 실제로 발표한 “상하원 합동 결의안 제108조”에서 시작한다. 이 결의안은 “풀이 자라고 강물이 흐르는 한” 유효하기로 서약한 원주민 국가와 미의 국가 대 국가 간 협약의 파기를 말하는 것으로, 위 문단에서 짧게 언급한 미국 정부의 인디언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의미였다. 작 중 모르몬 교도이기도 한 아서 V. 왓킨스 상원의원이 이 법안을 제안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정치적으로 거물이 소설에서 거의 그렇듯이 매우 권위적인 악당이지만,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왓킨스 의원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단다. 이 책의 절반은 보석 베어링 공장의 야간 경비원 토머스 와샤스크를 정점으로 상하원 합동 결의안 제108조가 발동이 되지 않도록 성명을 발표하고, 호소문을 서명을 받고, 경비를 마련해 워싱턴을 방문해 청문회에서 발언을 한 후, 이에 합당한 활동을 계속하여 협정의 종료를 막는 일에 할애한다.
다른 절반은 건강하고, 힘도 세며, 수영도 잘하는 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한 픽시, 퍼트리스 퍼랜토를 주인공으로 하는 젊은이들의 광장.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아직 상하수도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벽촌 지역인 터틀 마운틴에서 도무지 비전을 찾지 못하는 청춘들이니 어찌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나. 퍼트리스의 아버지 퍼랜토 씨는 젊은 시절 대단히 총명하고 튼튼하고, 무엇보다 점프 실력이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였는데, 뭐 그래봐야 지역에서 그랬다는 것이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며, 살림을 하다가 입에 대기 시작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에 덜미를 잡혀, 부족의 주택공급 대상자에 들지도 못해 낮고 기울어진 집의 가장으로 늘 술에 절어 폭력과 주사를 부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퍼트리스도 힘 좋은 처녀로 성장을 하고, 자신도 알코올에 뼈가 녹아버려 이젠 스스로 집을 나가 버렸고, 엄마 자낫과 딸 퍼트리스는 작은 도끼를 침대 밑에 놓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남편)아버지가 돌아오면 아예 죽여버리겠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켑투케 중단편집》에서 봤듯이, 이런 모진 환경에 사는 젊은이들 가운데 대개 남자들은 이 속에서도 고향에 남아 가족들이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마을 또는 도시로 가서 정착하려 하는 거 같다. 이 퍼랜토 씨 댁에서도 맏언니 베라는 연애를 해 새신랑과 함께 미니애폴리스에 가서 정착했다. 정착한 줄 알았다. 퍼트리스는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마침 들어선 군수회사인 보석 베어링 공장에 오퍼레이터로 취직해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며, 회사에서도 ‘뛰어난 1등’의 솜씨를 발휘하는데, 미안하지만 회사에선 ‘뛰어난 1등’은 관심만 받을 뿐 진급이나 고과에선 오히려 감점요인이라는 건 몰랐겠지. 퍼트리스도? 당연하지. 터틀 마운틴 지역의 모든 원주민들은 안다. 이 아가씨가 똑똑하고, 예쁘고, 장작을 퍽퍽 팰 정도로 힘도 좋고, 말도 잘하고, 강단도 세고, 무엇 하나 꿀릴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루는 미니애폴리스로 가서, 간 것 까지는 좋은데, 가서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언니 베라를 찾겠다고 직접 열차를 타고 간다. 때는 1953년. 아직 인종차별 정책인 짐 크로우 법이 시뻘겋게 살아 있던 시절에, 유색인 아가씨 혼자서.
퍼트리스는 미니애폴리스 역 앞에서 거의 납치당한다. 자신의 발로, 택시인 줄 알고 탄 것이긴 했지만 수상한 업소로 유인 당한 거다. 그리고 고향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당 50달러와 별도의 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고무로 만든 암소 모형의 잠수복을 입고 커다란 유리 수조 속에서 춤을 추는 수중 쇼걸 일을 하게 된다. 폐허 비슷하게 변한 언니의 주소지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다. 그런데 유독 수중 쇼걸을 하는 여자들은 아주 빨리 죽는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이 고무 잠수복 내부, 쇼걸의 피부에 닿는 면에 칠하는 유독한 화학물질 때문이라는 건 독자만 안다. 퍼트리스를 짝사랑하는 지역 권투선수 우드 마운틴이 날짜를 딱 맞추어 이 시점에 등장해 본인은 몰랐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퍼트리스를 구출해낸다. 베라 언니는 미시시피 강을 타고 왕복하는 배 안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가 되었을 거라는 언질 또는 귀띔을 한 채. 이들은 우드 마운틴의 씨 다른 누이의 집에서 베라의 갓난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퍼트리스도 우드 마운틴을 사랑하느냐고?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사랑이 뭐지? 나는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우드 마운틴의 복싱 코치이자 터틀 마운틴 학교의 수학 교사인 백인 로이드 반스도 퍼트리스를 사랑한다. 비록 퍼트리스가 그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아 결국 퍼트리스의 친한 친구 밸런타인 블루에게 시선을 돌리기는 하지만. 뭐 그런 거다.
여기에 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등장하는 초자연적 이야기. 영혼과 정령, 샤먼, 그리고 유령. 죽었지만 아직 영혼은 세상을 배회하는 유령들. 그들은 수시로 살아 있는 사람들 주변에서 서성이며 대화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심지어 워싱턴 의사당에까지 쫓아와 훈수를 두기도 한다.
레슬리 마몬 실코의 역작 <의식>에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에 나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생을 해 PTSD에 시달리는 인디언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해주는 일종의 주술사 노인의 의식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보았기에 새롭지는 않았지만, 인디언들이 유지해가는 그들의 문화를 엿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일 터.
책은 두 주인공, 토머스와 퍼트리스를 중심으로 해, 이야기 두 개가 엇갈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론 간혹 이야기들이 맞물리기도 한다. 저자 후기까지 580쪽에 달하는 장편이라도 읽기 힘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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