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 씨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외르케니 이스트반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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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에 <장미 박람회>를 읽을 때는 이 유대인 출신 헝가리 작가가 이렇게 희비극적이고 다층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기막힌 전쟁소설도 쓸 지는 몰랐다. 외르케니는 유대인 출신 헝가리 군으로 독일 연합군 일원이었지만 유대의 낙인 때문에 총도 없이 거의 작업 노예 정도로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다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오히려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명이 높은 소비에트 수용소에서 늘 죽음의 곁에 있었다는 건 <장미 박람회> 독후감에서 말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헝가리는 헝가리 제2 공화국을 열었으나 소련의 무력에 굴복해 문을 닫고, 헝가리 인민 공화국으로 재건, 이후 40년이 넘는 통제의 시대로 접어든다.


​  <토트 씨네>는 세계대전 중일 수도 있고, 제2 공화국 시절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전쟁은 3년이 넘게 진행 중이어서 산 좋고 계곡 깊은 시골 마을 마트라센탄나에서도 가구의 60퍼센트 이상이 가족 가운데 한 명 이상의 남자를 전선에 보냈을 정도였다. 이 마을에 토트 러요시 씨는 8년 동안 철도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자리를 옮겨 마트라센탄나의 의용 소방대장으로 온 사람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좋고, 생기기도 잘 생겼으며 사람이 온후하고 공정해, 동네의 온갖 대소사를 결정할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일의 처리에 관해 상의하고 결정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토트 씨는 소방대원 정복을 입고 근엄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의견을 주면, 사람들은 이 의견이란 것이 누구나, 심지어 자기들도 늘 해오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토트 대장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치 틀림없는 것이려니 싶어 하는 현상을 보인고는 했다. 운이 좋은 데다가 사람 자체가 좋은 운에 어울리는 이런 행운아가 살다 보면 정말로 있다. 그게 바로 토트 러요시. 이이는 이십 년 전에 머리슈커 아가씨와 결혼해 아들 줄러를 낳았고, 터울을 조금 두어 다시 총명한 딸 어기커도 낳았는데, 줄러는 무럭무럭, 그리고 건전하게 자라 학교 교사를 하다가 어린 나이에 입대를 하여 군대의 최연소 사관으로 최전방에서 근무중이었다.

  토트 줄러가 최연소 사관이라고 하니까 18세나 19세쯤 되지 않을까 싶다. 동생 어기커가 방년 16세. 그러던 어느 날, 전방 부대에서 줄러가 군사우편을 보내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줄러의 지휘관으로 버로 소령이란 사람이 있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2주간의 병가를 승인 받았다. 줄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지휘관에게 쪼르르 달려가 아뢰기를, 저희 집이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아 헝가리 각지에서 휴양객이 몰려오는 마트라센탄나거든요. 소령님의 증세는 육체적 고통이라기보다 저 소비에트 빨치산들의 시도 때도 없는 기습공격 때문에 신경쇠약이 도져 심한 불면증 등 하여튼 신경이 유난히 날카로워져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경질도 늘어나고 참을성도 없어지고, 조금만 맘에 들지 않아도 필요 이상으로 지랄을 하시고요. 소령님의 가시고자 하는 소령님 아우님 댁이 카드뮴 공장 바로 옆인데 어찌 충분히 요양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일이 이러하니 고려시대 때부터 휴양지로 이름이 높았던 마트라센탄나의 쇤네 집에서 편하게 거하시면 깊은 숲속에서 뿜어져나오는 소나무 향 같은 자연치유 효과로 소령님의 모든 증세가 개운하니 고쳐질 거라고 사료됩니다요. 그래서 버로 소령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토트 씨네 집으로 향하게 됐고, 이 덕분에 줄러도 다음 차로 따라오라 했으니, 토트 버로는 이제 석달 열흘 만에 목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 거였다.


​  편지를 받은 토트 씨가 제일 먼저 소령을 맞이하기 위해 한 일은, 변소의 정화조 처리에 관해, 유명 법학박사이지만 정화조 청소를 하는 것이 벌이가 두 배 이상이 된다는 걸 알고 직업을 바꾼 박사와 정화통 청소의 적당한 시기에 관한 토론이었다. 냄새가 지독하지는 않지만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라, 소령이 오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었다. 법학박사는 청소를 하면 냄새가 가라앉기 전까지 오히려 더욱 극악하게 날 터이니, 청소를 하려면 지금보다 오히려 소령이 다녀간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학자적 양심에 입각한 조언을 받아들인다. 줄러 사관의 엄마 머리슈커는 예전 사장이 있을 당시 청소일을 했던 영화관에 찾아가 새 주인을 만나서 2주일 동안 분무기를 빌려온다. 이는 소령이 소나무 향기를 좋아한다고 해, 솔향을 낼 수 있는 재료를 물에 희석해 소령이 머무는 동안 내내 칙칙 뿌려줄 생각이었다. 동생 어기커는 16세 소녀답게 사춘기적 자아를 찾느라고 절대 쪽팔린 일은 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건만 결국 오빠를 위하여 오빠의 생사여탈을 손아귀에 잡고 있는 소령의 편의를 위해 볼품없는 손수레를 끌고 동네를 다니면서 필요한 여러 자질구레한 장비를 빌려온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에 간 남자들이 많은 동네 사람들은 최전선에서 지휘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치 자기네 남자들의 지휘관이라도 되는 양, 단번에 관심 폭발, 멀리서나마 한 번 봤으면 하는 모양이 역력했고, 그래서 자기들이 빌려줄 수 있는 편의 품목은 서로서로 빌려주기 위해 경쟁까지 할 정도였다.

  드디어 소령이 도착하기로 한 날의 며칠 전. 토트 씨네로 전보 한 통이 온다.


​  “전보. 최연소 사관 토트 줄러 군이 전투지역번호 8/117에서 적국과의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헝가리 적십자사.”


​  멀쩡한 남자들이 다 군대로 끌려가 비어 있는 우편 배달부 자리를 임시로 맡고 있는 사람이 주리 아저씨였다. 곱추에다가 말도 더듬고 생각이 단순하며 정신마저 오락가락 하는 인물로 우편물을 거의 다 먼저 뜯어 읽어본 다음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한테 온 좋은 소식,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온 나쁜 소식은 전해주지 않고 우체국 처마 밑의 빗물 통에 던져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주리 아저씨가 보기에 마을 소방대장 토트 러요시 씨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멋있고 점잖고 넉넉한 사람이라, 이렇게 슬프기 그지없는 소식을 전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입을 싹 씻고 있는 동안 드디어 버스 정류장에 소령이 나타난다. 그것도 두 명이. 한 명은 빼빼 마른 몸매에 강단있는 체력과 누가 봐도 군인 같은 모습. 다른 하나는 작달막한 키에 후줄근한 복장과 장화를 신은 장교. 토트 씨네 세 가족은 군인 같은 소령에게 꽃다발까지 건네며 환영을 했지만 그는 신경질만 벅벅 내고 맥주 한 조끼를 급하게 마신 후에 타고 온 버스를 다시 타고 꽃다발도 든 채로 돌아가버렸다. 엉뚱한 곳에서 내린 것. 그래 다른 한 명의 소령을 데리고 집에 도착한 토트 씨네.

  전장에서 바로 휴양소로 온 버로 소령. 신경은 끝간 데 없이 날카로워져 있고, 온 몸이 전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한다. 제일 먼저 나타난 증세는 자신의 뒤를 끊임없이 관찰한다는 것. 특히 빨치산의 야간전투가 빈번할 때, 뒤에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그게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터. 소령은 마주 앉은 토트 씨, 앉은 키도 큰 토트 씨의 눈이 자신의 뒤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토트 씨에게 계속 묻는다. “왜 내 뒤를 보고 있는 거죠?”

  두 번째로 일상화된 야간전투로 인해 버로 소령의 바이오리듬도 낮에 잠을 자고 밤에 깨어 있는 것. 밤에 잠들지 않는 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서,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점. 부대에서는 체스를 두거나, 카드를 하지만 시골사람 토트 씨는 체스도, 카드도 할 줄 모른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이곳에선 여자들이나 심심풀이로 가욋돈이나 벌어볼까 싶어 하는 붕대 상자 만들기. 버로 소령은 뜻밖에도 이 상자 만들기에 전심전력을 다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보름 동안 누적이 되니까 여태까지 불가침적인 성역이었던 가정에서 토트 씨는 갈 바를 모르게 된다.

  선량한 산골 마을의 가정에도,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 있던, 자기 아들의 생사를 가르는 권력을 쥔 지휘관이 오자마자 작은 마을, 작은 가정 하나는 여지없이 전쟁의 폭력 속으로 꼬나 박힌다.

  그걸 외르케니 이슈트반은 이렇게 희비극적으로, 종말 부분의 놀라운 전환이 벌어져 가볍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잔혹극을 선택해, 광기에 대항해 작은 단위를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 하나만 읽기 위해서라도 구매 버튼을 클릭하거나 도서관 방문을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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