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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 ㅣ 제안들 34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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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비트키예비치의 책 두 권, 희곡집 《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와 장편소설 <탐욕> 가운데 어느 책을 읽을 지 조금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다 <탐욕>을 선택했고, 6백쪽이 넘는 형이상학적 묘사를 읽느라고 오뉴월 땡볕 아래 죽을 고생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하도 인상 깊게 읽어서 《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 역시 머지않아 읽겠다고 다짐을 했다가, 세계 양궁사에 빛나는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이 쏜 화살처럼 시간이 가는지라 이제야 독후감을 쓰는데, 그것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덕택이었으니 이 게으름을 어찌할꼬.
비트키예비치는 소설 보다 초기엔 희곡으로 작품활동을 했다고 역자 정보라의 해설에서 쓰여 있는 바, 1921년에 <쇠물닭>을, 23년엔 <광인과 수녀> 그리고 <폭주 기관차>를 발표했다. <탐욕>을 발표한 것이 1927년 말이라 오늘 읽은 희곡 보다는 몇 년 뒤임에도, <탐욕>을 읽느라 워낙 칼로리 소모가 많아 희곡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순수한 형태”로의 창작을 이유로 한 마약 의존과, 형이상학,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다중의미의 단어가 빈번하게 출몰할 것이란 두려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책 머리에 출판사 워크룸 편집부에서 쓴 “이 책에 대하여”라는 소개가 있는데, 읽어보니 비트키예비치가 알프레드 자리,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 프랑크 베데킨트, 앙토냉 아르토 등의 계보를 이어갔다고 하고 다행스럽게도 그나마 작품을 읽어본 극작가들이라, 그래도 조금은 덜 무거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열었다가, 아니나 다를까, 허덕허덕, 쉽지 않은 시간을 즐겼다.
비트키예비치를 통해 계보를 넘겨준 극작가들의 면모를 보면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잔혹극, 부조리 같은 것인데 이이는 그것들이 한 작품에 몽땅 다 들어 있는 것이 나로 하여금 여러 현상을 내포하고 있을 극작품을 읽으며 허덕이게 만들었을 듯하다. 부조리극 하나만 보더라도 이게 결코 만만하지 않은 데, 한 작품 속에서 실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으니, 극장에서 시청각을 통해 극을 보는 대신 오직 활자 위에서만 상상할 수밖에 없는 독자들은, 아이고, 어쩌라는 말이냐고.
게다가 비트키예비치를 거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 아쉬케나지 족속이라는 것. 특히 <쇠물닭>을 읽으면서 주인공 쇠물닭 역할을 하는 엘쥬베타 플레이크프라바츠카라는 26세 가량의 대단히 아름답지만 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는 여성은, 초장부터 남자 주인공 에드가 바우포르에게 총을 맞아 죽임을 당하고, 이후에 어라, 다시 멀쩡하게 살아 등장하긴 하는데, 다시 에드가의 사냥총에 얼굴을 정통으로 두 방이나 맞아 한 번 더 죽음을 맞는 장면을 읽으며, 이거 혹시 구박받는 유대인을 묘사한 거 아냐?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아니겠지. 폴란드의 유대인 차별이 비록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래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결코 심하지는 않았고, 이 작품을 쓴 1923년 만 해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이라, 딱 꼬집어 유대인을 상징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부조리극 특유의 논리도 없고, 사건의 원인도 없고, 그냥 극 가는 대로의 심상만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추측만 할 뿐.
그래도 내가 읽기로 비트키예비치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잔혹극 만큼은 아니지만(<룰루>, <눈 뜨는 봄>, <카이트 후작> 등의 눈 부신 작품과는 아무래도 좀 그렇지만), 알프레드 자리의 대표작 <위비 왕>이나 앙또넹 아르또의 <첸치 일가>,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의 <직조공> 같은 것보다 (한 작품 안에서 봐도) 훨씬 다양하며 그만큼 복합적인 재미도 있고, 스토리 또한 극적이라 훨씬 읽는 맛이 난다. 앗, 그러고 보니 잔혹극의 한 이정표를 세운 앙또넹 아르또는 비트키예비치보다 열 살 이상 적은데 그의 계보를 이었다는 설명은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여간 비트키예비치의 희곡은 그만큼 갑이란 말씀. 당연히 읽기 쉽지 않기는 하지만 말씀이야.
이렇게 변죽만 울리는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내가 이이의 극작품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문법을 알아들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역자 정보라는, 독자 입장에서 화딱지 나게시리, “독자 여러분도, (마약을 빨아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순수한 형태는 발견 못해도 상관없으니 비트카찌의 뒤틀린 유머 감각과 지면 속 가상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뒤죽박죽 정신없는 사건들을 함께 한껏 즐겨 주시면 좋겠다.”는 해설을 남겼다. 극작가의 순수한 형태는 못 봐도 좋다고 했으니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뒤죽박죽 앞 뒤 없이 쏟아지는 사건들을 즐기는 것도, 뒤틀린 유머를 찾을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즐기는 것이지, 앞 뒤 조각을 맞추기에도 정신 사나와 죽겠는데, 이 와중에 다른 언어에서 한 번 바뀐 유머, 그것도 뒤틀린 유머를 어떻게 찾으라는 말인지, 정보라 선생,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외국인하고 회의할 때 제일 염병인 것이, 영어로 유머 날리면, 업무 관련해서는 웬만큼 알아 듣지만 이거 무슨 말이지, 양코 아저씨 한 마디에 귓구멍이 콱 막히는 순간, 갑자기 다들 웃고, 박수치고 난리를 치면 그게 왜 농담인지를 이해 못해 “야,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그런 거냐?” 묻고, “글쎄 말야. 미친 것들이 웃고 지랄이야.”라고 답하는 몇몇 아저씨들 심정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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