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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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가 넘어감에 따라 이 작품을 읽은 다음에 마음먹고 독후감을 쓰려면 원고지 3백장도 쓰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메르시어는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베른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단다. 서양 소설을 읽으면 학생들이 가장 고통을 겪으며 배우는 과목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인데 여기에 히브리어까지 더 했고,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철학자다. 이후 유명 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1세기 들어 대학에까지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껴 은퇴를 했으니 좌파 지식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야 나는 파스칼 메르시어가 <리스본 행 야간열차>의 지은이라는 걸 알았는데, <…야간열차>는 제목 때문인지 좀 스릴러나 추리극 아닐까 싶어서 여태 거들떠보지도 않은 책이었다. 지금 후회하고 있다. 좀 읽어볼 것을. 하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만간에 빌려 읽겠다.

  철학자들이 소설도 많이 쓴다. 인상 깊게 읽은 철학자가 쓴 소설로 나는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가 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꼽는다. 피어시그는 책에서 십대 아들을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태우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질, 품질, Quality가 무엇인지, 소설의 기법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 책 <언어의 무게> 속에서 파스칼 메르시어는 언어, 언어를 기호화하는 문자, 문자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단어, 단어의 연속인 문장, 문장을 발음할 때의 독특한 음감, 이것들이 각 민족의 입 안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면서 같은 뜻일 망정 미묘하게 다르게 전달하는 뉘앙스를 재미있게, 정말 재미있게 풀어냈다. 말 가운데서도 선정된 몇 가지 단어를 중첩 사용함으로써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만의 바운더리를 형성하는 권력 기구, 좌파 지식인이니까 당연히 그들을 향한 비판의 시선까지 매우 다양하게 언어를 이야기한다.

  나도 평상시에 언어와 언어의 사용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라, 메르시어의 주장을 정독해서 읽어야 했고, 그리하여 피어시그의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을 때 하고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고 믿었는데, 세상에 뭐든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라서 630쪽에 불과한 책 한 권을 읽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게다가 작품 속에는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요즘 장편소설 하고는 좀 다르게 중요한 조연들이 숱하게 나오고, 그러니까 당연히 심각한 에피소드도 많이 달려 나오고, 친절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는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로 하여금 이미 11년 전에 죽은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매사에 능력 있어서 돈도 잘 벌었던 아내 리비아에게 결코 짧지 않은 편지를 자주 써서 그동안의 내용을 요약해 독자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과공은 비례라서過恭非禮, 이런 친절은 처음엔 괜찮았으나 5백 쪽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도무지 읽기가 싫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뭐하러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또 듣고(읽고) 있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명 철학자라서 그런지 신중하고 진지한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텐션을 유지하며 읽게 만들었다. 나 아니고 당신이 읽더라도 이 책은 정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읽지 말던가, 아니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  원고지 3백장 정도의 독후감. 이것도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서로 뒤섞여 있다. 그래도 귀띔을 해드리자면, 메르시어가 심성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서 모든 이야기(들)의 결말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

  위 단락에서 메르시어가 대학에서 교수질을 하다가 때려치운 것이 (한 시절엔)상아탑(이라고 불리던 곳)에서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횡행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작품의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를 보자면, 조부 크리스토퍼 셀던 레이랜드 경은, 경sir니까 귀족은 귀족이지만 세습하지 않는 귀족으로, 인도의 독립을 강력 반대하던 인물이며, 이것 때문에 아들 애슈턴 첸들러와 마찰을 빚었었다. 하지만 애슈턴 챈들러가 잘한 것이라고는 프랑스와 독일의 피가 흐르는 아내를 맞아 아들 사이먼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뿐이었다. 그리 총명하지 않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는지 아들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 구경 갔다가 잘 정돈된 잔디를 발 뒤꿈치로 파헤쳐 놓기도 한다.

  애슈턴 첸들러의 동생이자 사이먼의 삼촌인 워런 숀은, 동양의 언어를 평생 공부한 사람이다. 이이들이 말하는 동양은 서아시아 지역. 워런 숀은 저 라오스 문자까지 해독하기 위해 다 늙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은 인물이다.

  아무리 좌파 작가라도 일단 배워야 작품을 쓰는 거니까 공부는 그렇다고 치자. 사이먼은 김나지움을 나와 옥스퍼드 존 던 학교에 들어가 1년 만에 그곳에서 도망 나온다. 존 던은 영국의 위대한 시인. 하지만 존 던 학교에서는 존 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존 던을 망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서 몇 번을 망설이다 런던으로 뛰쳐나간다. 열일곱 살이었는데 세 살을 더 보태 스무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벨사이즈 리트리트 호텔의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해 조금씩 돈을 모은다. 몰타 여행을 하기 위하여. 평소 좋아하는 워런 삼촌의 집에 걸려있는 지중해 지도를 보면서 지중해를 감싸고 있는 모든 지역의 언어를 알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고, 이때 삼촌이 “몰타는 빼지 말아라.”라고 말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진짜로 가게 되는데, 아무리 가보고 싶었지만 정말로 가보면 기대한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일은 다 경험해 보셨지? 사이먼도 그랬다.

  다시 런던의 호텔 야간 경비원으로 돌아와 독일어로 된 아동 도서를 번역할 기회를 잡고, 이러저러한 일로 이탈리아 여성 리비아 페르토트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도 해서 딸과 아들을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장인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중견 출판사를 통째로 차지하게 된다. 십여 년을 아내가 경영하고 자신은 번역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11년 전엔 아내가 장인과 같은 증상인 급성 심정지로 세상을 떠 이제 처가 재산이 몽땅 자기 재산이 된다. 그리고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사는 워런 삼촌이 숟가락을 놓으면서 집을 통째로 상속해준다. 좋아, 좋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지. 그런데 어쨌든 좀 세월을 두긴 했지만 장인이 죽어, 아내도 죽어, 삼촌도 죽어서 이제 사이먼은 무지하게 많은 돈을 갖게 되는데, 대학에도 자본주의 논리가 쳐들어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 둔 교수…가 쓴 소설의 주인공답게, 사이먼 레이랜드는 자기 주변에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 친구들에게 펑펑 돈지랄을 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망해가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문 닫을 일만 남은 친구의 출판사에 5십만 파운드의 돈을 출자해주는 것이 아니고, 증여를 하는 걸로 사이먼의 활수한 돈지랄은 시작한다. 10년을 바쳐 천 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쓴 파올로의 작품의 출판비를 자기가 내겠다고 하고, 러시아 작품을 훌륭한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실력을 지닌 안드레이 쿠츠민을 위하여 트리에스테의 건물 한 동을 통째로 사서 쿠치민한테 월세를 제해주기도 한다. 이거 안 웃겨? 이러면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난 정말 궁금했다. 사이먼의 돈지랄이 언제까지 갈지. 근데 딱 거기까지.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몇 사람들에 국한한다. 대신 프란체스카라는 돈 많은 작가의 미발표 소설을 통해, 돈을 준 사람이 아니라 돈을 받은 사람의 채무감 같은 걸 무지하게 상세하게 그렸다. 돈 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지.


​  나는 여태까지 작품과 작가에 관하여 언짢은 점만 골라 썼다.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이 쓸 수 있다.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가를 쓰려고 하자면 아예 독후감이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다.

  특히 초두에서 말한 특별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집단들과 특정 시키고자 하는 백색 카스트와 흑색 카스트에 대한 신랄한 필설 같은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꼭 빼지 말고 독후감에 써야 하는 것으로, 역자 전은경이 정말 고생했겠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을 보시라. “언어의 무게”. 언어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를 작가가 철학적 의미까지 넘치게 담아 설명하는 책의 번역을 어떻게 가볍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한 번 인용해볼까?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의 직업도 번역자인데 그가 말하기를;


​  “번역자만큼 책을 자세히 읽는 사람은 없다네. 불필요한 반복이나 틀린 점, 리듬에서의 더듬거림, 미끄러진 장면,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진부하고 형편없는 것들을 발견해내지. 다른 언어로 복제하려면 모든 것, 정말 모든 것을 캐내야 하니까. 어떤 문장을 읽으며 내가 그저 복제하는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네. 번역자만큼 작가에게 가까운 사람은 없지. 번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한 친밀함, 연인 사이의 육체적 친밀함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주네. 번역자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것, 그의 상상력에 숨어 있는 알파벳을 알게 되니까. 그 알파벳이 번역자에게는 지극히 낯설 수도 있네. 그럴 때 번역자가 느끼는 낯섦은 평범한 만남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보다 싸늘하고 위협적이지. 번역은… 낯선 내면세계로 향하는 엄청난 침입일세. 위험하지. 번역자는 작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또한 그 누구보다고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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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3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301페이지 너무 좋네요. 저도 이 책을 갖춰두고 있습니다.

작가의 전작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주인공이 교수였던 걸로 기억해요. 다리 위를 지나다가 자살하려던 여자를 구해주는데 그 여자가 포르투갈 여자였나, 그래서 포르투갈 어에 매력을 느끼고 갑자기 그 언어에 대한 열정으로 막 공부하던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소설을 통틀어 그 장면, 외국어에 열망을 느끼고 몰입해 공부하던-이 제일 좋았어요. 그 장면 때문에 영화를 봤는데, 영화에서는 제가 원했던 만큼의 그런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래돼서 희미하지만요.

아, 저도 이 책 읽어야겠어요. 저는 나흘 이상이 걸릴듯 합니다.

Falstaff 2023-07-13 17:12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댓글 아침에 읽고... 이노무 알라딘은 셀폰에서 답글쓰기가 언짢아서 말입죠, 야간열차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는데요, ㅋㅋㅋㅋ 아래 대화모음 보니까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3-07-1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0장으로 다시 써오거라.

Falstaff 2023-07-13 17:11   좋아요 0 | URL
정말 3백 장 쓸 거 같다니까요! 근데 쓰면 뭐합니까. 누가 읽는다고. ㅋㅋㅋ

잠자냥 2023-07-13 17:13   좋아요 0 | URL
저랑 락방이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3-07-13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큭 저 이 책 사실 작가의 전작이 제겐 별로였어서 이 작품도 노관심이었는데 이 글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23-07-13 10:37   좋아요 1 | URL
리스본이요? ㅎㅎ
저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만큼 좋진 않았어요. 찌찌뽕~

잠자냥 2023-07-13 11:01   좋아요 0 | URL
찌찌뽕~ 저는 영화도 그냥 그랬어요........-_-

다락방 2023-07-13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도 별로 …

Falstaff 2023-07-13 17:13   좋아요 1 | URL
도서관 가셔요. 그게 장땡입니다. 맘에 들면 소장용으로 한 권 사시면 되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