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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샤베르 대령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0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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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발자크. 발자크의 인생극 시리즈가 워낙 방대해, 그나마 발자크를 열심히 읽는다고 했는데도 아마 반의 반도 못 읽었을 거다. 세계 소설사의 두 천재라고 하면 대부분 19세기 초반을 누볐던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를 꼽지 않을까 싶다. 한 번 책상에 앉았다 하면 엉덩이에 뾰루지가 생기건 말건 날을 꼬박 새우면서 소설을 쓴 사람들. 그것도 가끔 그런 것이 아니라 하고 한 날 손가락에 박인 굳은 살 물어 뜯어내 가면서 (발자크는) 파리의 상류사회 사람들하고 노닐다가 진 빚 갚느라, (도스토옙스키는) 섰다나 도리짓고땡 하다가 진 노름빚 때문에, 이게 놀라운 것으로, 거의 퇴고할 새도 없이 작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썼는데, 그게 후대 평론가, 독자들한테 명작이라 상찬을 받았다는 말이지. 일필휘지로 써갈긴 작품이 눈부시면 그게 천재지 어떤 사람이 천재란 말인가?
하여간 이 손목 힘 좋은 발자크는, 이제 겨우 단행본 열 권을 읽은 데 불과하지만, 읽을 때마다 사실 내가 기가 넘어가는 일이 있으니, 손목 힘이라기보다 사물을 휙 한 번 둘러보고 그걸 하이퍼 레알리즘 회화painting처럼, 그대로 장황하게 묘사하는 눈썰미다. 21세기 작가들이 만일 발자크처럼 극한 묘사에 힘을 기울인다면, 참으로 애는 많이 쓰지만 찾아 읽는 독자는 별로 없어서 틀림없이 원고료나 인세만 받아 가지고는 자기 한 몸 먹고 살기도 쉽지 않으리라. 그러니 작가 지망생들이여, 비록 발자크가 모범적인 선배이자 천재 소설가임은 분명하나 닮고 싶어하지 말아라.
이 책 《사라진 ∙ 샤베르 대령》에서도 <사라진>은 분명 단편소설임에도 본문만 50쪽이 넘어가서, 우리나라에선 대략 원고지 2백매 이상 되면 중편소설로 치지만, 발자크 표 상세 묘사를 제외한다면 그저 한 20에서 30쪽 정도면 충분할 수준이다. 즉, 세월이 갈수록 빠른 스피드에 적응이 된 현대 독자들에겐 느긋하고 세밀한 발자크의 작품을 읽다가 더딘 속도감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호흡이 빨라져 높아진 혈류속도에 의하여 열을 동반한 뇌졸중의 위험이 약간, 아주 약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 이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자크를 읽는, 그것도 눈에 띄면 띄는 대로 족족 읽어버리는 건, 저 오래 전에 중국의 동파 소식이 여차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복어만 봤다, 하면 미친듯이 덤벼들었다며?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발자크가 은근히 사람을 끄는 것이 있다니까 그래.
<사라진>에서 “사라진”은 영어로 disappeared가 아니다. 사람 이름이다. 에르네스트장 사라진. Sarrasine. 화자 ‘나’가 랑티 백작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거기서 백 살에 육박하는 왜소한 늙은이를 만난다. 근데 이 집 사람들, 백작은 모르겠고, 백작부인과 딸 마리아니나, 아들 필리포 등이 이 볼품없는 늙은이, 게다가 가까이 오면 갑자기 내 피부까지 냉기가 돌 것 같은 싸늘한, 즉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진짜로는 아니겠지만 어딘가 사악한 느낌이 나서 재수없는 늙은이가 있어, 영 께름칙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파티 중에 우연히 이 영감하고 마주친 후작 부인이 기겁을 해서 그를 피해 도망을 갔는데, 우연히 한 규방에 들어간 거였다. 근데 방에 정말 아도니스라고 해도 안 믿을 사람이 없을 만큼 완벽한 미모를 가진 남자의 초상을 발견한다. 틀림없이 남자를 그린 초상이지만 남자라고 하기엔 과하게 아름다운 사람. 화자 ‘나’의 마음에 질투심이 뿜뿜 치밀게 할 정도의 미남자.
그리하여 ‘나’는 나이 든 후작부인과 하루 밤을 지새고, 하룻밤의 대가로 다음 날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프랑스 프랑슈콩데 지방 검사의 아들로, 검사나 판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뭉개고 조각가가 된 에르네스트장 사라진이 로마에서 있었던 젊은 시절의 연애와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그럼 이 아도니스를 닮은 남자가 사라진이냐고? 아니지. 그렇게 쉬운 결론을 내비치면 그건 발자크가 아니지. 좀 더 재미있고, 19세기 중엽 당시 시선으로는 기묘하고, 심지어 쇼킹했을 거 같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건 끝까지 읽어봐야 안다.
<샤베르 대령> 역시 재미있다. 샤베르 대령이 누구냐 하면, 원래는 그냥 병사였다가 혁명이 일어나 공포정치, 총재 정부를 거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이 되고, 이집트 정벌에 나설 때부터 나폴레옹 수하의 용맹한 장교로 활약한 인물이다. 워낙 용감해 나폴레옹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1807년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연합군과 맞짱을 뜬 아울라우 전투에서 당대 프랑스 최고의 기병장군 조아킴 뮈라 부대의 선봉에 서서 연합군 군대를 박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만 말이 폭탄 파편에 맞는 바람에 말하고 함께 우당탕쿵쾅, 엎어졌고, 용감한 선봉대에 이어 밀물처럼 들이닥친 우군 기병에게 숱하게 밟히는 바람에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죽었다. 이렇게 알려졌다. 나폴레옹이 한숨을 쉬더니, 기어이 눈물도 한 방울 짜내면서, 그 불쌍한 새끼 시체라도 꼭 찾아봐라, 했지만 결론은, 없는뎁쇼, 여서 그냥 전사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산처럼 쌓인 말과 사람의 시체들 사이에 끼여 산소부족으로 숨 쉬기만 힘들었을 뿐, 물론 여기저기 욱신거리기도 했고 자잘한 뼈다귀도 부러졌겠지만, 하여간 죽는 데는 실패하여 엄동설한의 1월달에 지금으로 치면 폴란드 땅에서 다친 몸을 끌고, 거지꼴을 해가며 몇 년 만에 파리로 기어들어온 거다. 하여간 백작이라고 하고, 대령 신분에 전사했으니 계급 하나 올려 줘 장군이 됐고, 레종도뇌르 훈장 수훈자이며 빵빵한 재산이 있어서 집에만 오면 다시 팔자가 필 줄 알았겠지. 그러나 파리의 저택은 그동안 일대 전부를 리모델링 해 거대한 주택단지가 됐고, 애칭 ‘로진’으로 부르는 사랑하는 아내 로즈는 이아생트 샤베르 백작의 전 재산을 상속받은 후에 야심가 페로 백작한테 새로 시집을 가 순서대로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행복했느냐고? 에이, 세상에 행복이 어딨니? 로즈가 몸매 좋고 얼굴 예쁘고 다 좋은데 도무지 친정 쪽으로 내세울 사람이 없어서 그게 페로 백작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백작은 파리 정계, 특히 겁 많은 루이 18세한테 비벼서 한 번 크게 출세해볼까, 싶어하다가 정신차려 보니까, 그러려면 로즈 말고 권세있는 집안의 여자를 고르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로즈는 매사에 머리 팽팽 돌리고 있었겠지? 맞다. 그랬다.
이런 와중에 샤베르 대령이 파리에 나타나 편지도 보내고, 거지꼴을 한 주제에, 정말 거지꼴, 몇 년에 걸쳐 땡전 한 푼 없이 폴란드에서 파리까지 걸어왔으니 몰골이 어떠 했겠느냐 말이지, 하여간 이 꼴을 하고 대담하게 소송대리인 사무소에 들러 자신의 아내와 재산을 찾는 소송을 시작하고자 했으니, 정말로 죽었는 줄 알고 이미 새로 시집 가 아들 딸 낳고 사는 로즈 마음이 어떠했을꼬. 둘 가운데 하나. 자기와 자식의 앞날을 위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려? 아니면, 조강지부가 첫정이니 살림 다 때려치고 이아생트 샤베르 대령한테 돌아가?
하여간 골 아프게 됐다. 발자크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건 안 알려드리지. 직접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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