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는 책 읽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2백 권 미만을 읽고자 했습니다만, 223권, 6만9천 페이지를 읽었군요. 내년엔 기필코 2백 권 미만을 달성하겠다고 각오해봅니다. 이 가운데 올해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 열 권과,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권을 골랐습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책 읽는 것에 관해서 잘해봤자 딜레탕트 수준인 제 기호에 좋았다, 최고다, 하는 것이니 이 목록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시면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새삼스레 다른 책과 견주는 것이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갈라테아 2.2>는 작 초반의 높은 진입장벽이 문제였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책을 읽은 후에 큰 충격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빠르게 열기가 식었습니다. <레베카>, <호모 파버>, <에쿠우스>, <어린 당나귀 곁에서> 그리고 <케이크와 맥주>는 여러 번 목록에 넣었다가 빼고, 다시 넣고 또다시 제외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2021년 Top 10,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2021년의 Top 10

 


1.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방주의 주인 노아가 낳은 아들 함의 자손들. 이 가운데 오아시스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부족이 있다. 결혼식이 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위해 광대패들이 도착한다. 음악이 이어지고 은 장신구로 치장한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 공연의 불꽃이며 혼. 베일을 쓴 얼굴과 발, 그리고 매끈한 검은 피부의 배에 가죽 끈에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 구슬. 이 관능적 묘사. 날이 새고 이미 떠나버린 광대들의 숙영지 모래밭에 떨어진 조바이다의 황금구슬을 주워든 소년 이드리스는 몇 달 전 랜드로버를 타고 와서 자신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와 동행한 프랑스 여인을 찾아 파리로의 여행을 감행하는데, 나중에야 황금 구슬, 그건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투르니에의 사진 행위와 철학을 가미한 기호가 어떻게 문장이 되고 소설로 엮이는지를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을 듯.

 


2. 빅토리아 토카레바, 《티끌 같은 나》

  동토의 왕국,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소비에트 연방 속에서도 언제나 봄의 싹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씨앗에서 발아해 태양을 향해 솟구칠 준비를 한 채 도사리고 있던 싹들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쳐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맞아 힘껏 도약을 한다. 이 속에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와 더불어 빅토리아 토카레바도 있었다. 배급경제가 빈사를 헤매면서 자신들이 소비에트를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물던 프롤레타리아들은 다시 가난과 상점 앞의 긴 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소설 역시 물질적 곤란함과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여성성을 그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카레바. 이 시크하고 쿨한 작가는 가난 속에서 치사한 애인이 도망가도, 킁, 콧방귀 한 번으로 가비얍게 물리쳐버린다. 궁상맞을 상황을 현명하고 시크하게 빠져나가는 힘이 독자에게 진하게 어필, 이이의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3. 살만 루시디, <무어의 마지막 한숨>
 

   루시디의 무시무시한 입담이 독자를 압도하는 명편. 지금은 절판이지만, 모 출판사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다른 이의 번역으로 인쇄를 할 예정이라는 귀띔을 받았다. 독자 제위께서는 아무쪼록 이 책의 제목을 기억하셨다가 책방에 깔리자마자 구입을 망설이지 마시라. 책이 두 권 6백 쪽 가량 되지만 한 번 잡았다, 하면 여간해 손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굳이 재미의 수준을 말씀드리자면, 장담하건데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하고 계급장 떼고 맞장을 붙어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무어는 인도를 처음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뿌린 씨를 받아 ‘다 가마’의 성을 갖고 있는 모계,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러날 당시의 술탄 보압딜의 후예가 부계이니 대단한 가문인데, 임신 넉 달 만에 출생을 하고, 인생을 2배속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의 거한이다. 여기에 루시디 특유의 현대사를 마구 섞어 드런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Top 10 한 자리를 꿰지 않을 수 있을까.

 


4. 앨리 스미스, <데어 벗 포 더>
 

   문제작이라고 하면, 문장적 문제작일 수도 있고, 소재의 문제작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아이디어의 문제작이다. 소설책 깨나 읽는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이, 한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초청받은 사람이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말만 듣고 난생 처음 간 집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슬그머니, 외투와 휴대전화와 기타 등등은 그냥 소파 위에 둔 채로 이층에 있는 (욕실이 딸린)손님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더니 안에서 문을 철커덕, 잠근다. 갑자기 사라진 손님이 손님방에 아직도 있다는 걸 알아챈 부부는 얼마나 겁나고 치가 떨렸을까. 이 문제의 남자 마일스 가스 씨를 방에서 꺼내기 위해 부부는 별의 별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이게 또 특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방송사는 생방송을 찍는 등 난리가 벌어지는데,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해보셨나? 발칙하고 끔찍하고 참신한 아이디어. 이 책 이후로 난 앨리 스미스의 팬이 되었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5. 패트릭 화이트, <전차를 모는 기수들>
 

  노벨문학상을 탄 유일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의 대표작.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네 명의 소외받는 주인공이 백호주의의 땅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존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정신이 조금 모자라고 못생겼으나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 대 장원과 저택의 상속 독신녀 헤어 양. 신체 건강하고 선한 마음을 지녔으나 주정뱅이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가난한 성녀 고드볼드 부인. 짐승 취급을 받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으로 입양된 백인 가정에서 도망한 청년 앨프 더보, 그리고 독일 태생 유대인으로 전직 대학교수였지만 가스실 앞에서 생명을 구해 이민을 온 후엔 공장 직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식하고 현명한 모르데카이 히멜파르프. 이들이 서로를 의지해가며 공존을 위해 애쓰는 광경이 안타깝다. 약자에 대한 비방, 비웃음, 멸시, 폭력 등을 구경하는 일이 산뜻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연합이 또한 흐뭇하다. 강자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 앞에 침묵하는 다수들, 너희들 모두 유죄다.

 

 


6. 야 지야시, <밤불의 딸들>

  이 책은 에바리스토의 역작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출연진 가운데 한 명이 다른 인물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장면 때문에 선택했다. 그러니 올해 Top 10에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 들지 못한 것을 대체하기도 한다고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가나의 옛 아샨티 왕국 맘풍 출신 미국 이민자 야 지야시의 데뷔작. 첫 작품으로 지야시는 미국 문학계의 유망한 샛별로 등장한다. ‘마메’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큰 어머니에게 고귀한 두 딸이 있었으니, 하나는 아프리카 노예수출 사업의 황금해안가에 터를 잡고, 다른 하나는 노예로 떨어져 영국을 거쳐 미국땅으로 흘러간다. 이후 수백 년 6대를 지나 서로 같은 혈통에서 시작한 형제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 황금해안에 들르게 된다. 각기 6대에 이르는 흑인들의 지난 개인사가 흥미진진하다. 고귀한 가문의 큰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노예 출신이기도 한 마메. 천국에서 추방되어 노예생활을 했고, 이제 해방을 맞았지만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고 있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

 


7.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짧은 노벨라 분량의 소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그저 지나칠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작품. 헌옷 장수 지노가 철도원 2급 신호수의 딸 니농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지만, 니농은 한 시절 우연한 충동으로 불장난 한 것 때문에 그만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당시 HIV 감염자는 마치 저 중세시대의 페스트 환자나 방울을 달고 다녀야 했던 나환자처럼 극단의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너무도 사랑하여 HIV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로 결정, 이탈리아 지노의 고향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을 위하여 아버지 2급 신호수는 프랑스쪽 알프스 모단에서 이탈리아 포강 하류의 작은 마을 고리노까지 달려가고, 어머니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고리노로 향한다. 인근 주민들은 이들을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는 가운데 지노가 직접 잡은 20kg짜리 농어와 친척들이 친절하게 요리한 음식을 차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따뜻하면서도 슬픈 이야기.

 


8.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이 작품을 Top 10에 올린 건 전적으로 내 취향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분들은 <이아생트>를 읽기 시작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더 읽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몽상이다. 굳이 음악과 비교하자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미지 말고는 전혀 없는 듯한 드뷔시의 작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5백만 평에 이르는 저 광막한 평야. 그 위에 단 하나의 호롱불이 빛을 발하고 있는 라 주네스트, 금작화라고 불리는 작은 집. 그러나 암벽 위에 올려져 있어서 밤이 내리면 마치 망망대해 속의 반짝이는 등대처럼 유일한 불빛, 또는 모종의 신호를 올리고 있는 단 하나의 지표. 넓고 넓은 암흑의 평야에 유일하고도 인류의 마지막인 듯싶은 영혼일지도 모르겠다는 상념을 들게 하는 곳. 이 마지막 집, 라 주네스트를 아직도 견디게 하는 것은 한 인간의 고통과 사색, 침잠, 상상, 그리고 몽상. 이 몽상에 동감할 수 있는 독자는 만족할 것이고, 아닌 독자는 책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9.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를 “단편의 달인”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단편집. 미국의 북동부 삼림지역에서 살다가 웬만큼 나이가 들어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하고, 자연 풍광에 반해 단편집 <와이오밍> 시리즈를 쓴 프루. 이이의 대표 단편을 모은 책. 황량한 서부지역을 배경으로 서부는 서부인데 서부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곳이란 전제로, 험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 대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사람의 이야기. 나의, 당신의, 아니면 전철 저편에 앉아 가볍게 코를 고는 승객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애절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고, 날씨를 닮아 모질기도 하고, 때론 눈물샘을 콕 누르는 듯 쓸쓸하기도 한 이야기,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애니 플루는 가장 얇은 비단실로 촘촘하게 누벼놓았다.

 

 


10.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희망을 걸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식민지 원주민의 모든 기대와 노동력을 바쳐 남중국해의 조수를 막는 제방을 건설하려는 어머니. 단 하룻밤 사이에 이민 온 식민지 거주자 가정과, 근처 원주민들의 희망을 싹 쓸어간 태평양은 이제 어머니와 남매에게 절망, 그리고 허무와 탈주의 바람만을 남겨놓는다. 그러다 딸/누이의 결혼을 대가로 어머니는 다시 제방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오빠 조제프는 지긋지긋한 해변의 소금밭을 떠날 기회를 엿본다. 이들의 절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뒤라스의 눈매와 너무도 공감을 주어 서늘하기까지 한 문장들을 읽어낸다. 모차르트는 하스킬 노파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건반을 누를 때 절창이듯이, 절망에 대한 공감 역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때 절절하다.

 

 

 

2021년 최고의 한 권.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이 책은 다 읽고 덮는 순간 올해의 책이 되리라 직감했다. 다른 작품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서사로 밑받침을 하고, 마치 돌탑을 쌓아올리듯 탄탄한 구조로 저 수백 년에 이르는 악의 연대기를 한 눈에 조망할 전망대를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걸고 얻고자 한 유일한 사랑을 위한 로망스까지 어디 한 구석 도려내 비난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지구가 편평했을 시절, 보편적 야만 속에서 가장 극악한 악에 의하여 희생당한 수사의 주머니에 든 단풍나무 씨앗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양심적인 수사의 시신을 양분으로 성장한 단풍나무로 만든 바이올린 비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또다시 살인이란 악에 의하여 소유주가 바뀌더니, 20세기, 유대인 노파의 정수리에 총알이 박히면서 또다시 악의 손에 들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패한 수사이자 잔혹한 골동품 수집상의 금고 속으로 들게 되니, 새로운 주인은 만년에 게으른 살인자라 불리는 알츠하이머의 손아귀에서 이 글을 쓰는 아드리아 아르데볼 박사의 수재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었다. 14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을 거쳐 단번에 21세기까지를 망라하는 거대한 악의 연대기. 2021년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당분간 이 작품을 능가하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과연 있을까 궁금하다. 알라딘 고객 평점 가운데 과연 누가 먼저 만점을 주지 않을지도 매우 궁금한 명작.

 

 

 


지난 몇 년 간의 올해의 책

 

2020년, 헤르만 브로흐, <현혹>


2019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2018년,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2017년, 아달베르크 슈티프터, <늦여름>

 

 


2016년,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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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1-03 14:42   좋아요 2 | URL
그동안 나이든 골드문트였다니까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2-01-03 14:45   좋아요 2 | URL
어디 댓글에 남기셨던 기억이 있는듯도 하고...^^
암튼 개명을 축하드립니다.
ㅎㅎ
아님 이름을 찾으신건가요?
ㅋㅋ

Falstaff 2022-01-03 16:34   좋아요 2 | URL
ㅎㅎㅎ 골드문트는 청소년 시절의 로망이고요
폴스타프는 골드문트의 나이 든 버전이라니까요! ^^

행복한책읽기 2022-01-04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헉. 223권 6만 9천 페이지. 이런걸 세나요?? ㅋ 헉. 글고 닉넴은 언제 바꾸셨대요?? 프로필사진과 책과 글제목 냄새가 분명 폴스타프님인데, 골드문트??? 새해 어리둥절절절. 이유를 밝혀라 밝혀라!!! ㅋㅋㅋ <나는 고백한다>!!! 요거 하나 겹침요. 대체 일하고 술마시면서 책은 운제 읽으세요?? 님도 새파랑님처럼 안 주무심??
암튼, 새해 소망 꼭 이뤄주시기 바랍니다. 12월31일에 확인 들어가겠음요. 어기면 벌칙 야쥐~~^^

Falstaff 2022-01-04 09:58   좋아요 2 | URL
ㅋㅋㅋ 평생 엑셀로 먹고 산 인간입니다. 이 정도 데이터는 기본입지요. ^^;;

프레이야 2022-01-08 14: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리나강의 다리. 보여서 반갑습니다 ㅎㅎ 2016년의 책으로 꼽으셨네요. 그 전 해에 읽었어요. 골드문트 님 뽑아주신 책 목록을 이제 보다니요.

Falstaff 2022-01-08 15:18   좋아요 3 | URL
그죠, 그죠! <드리나 강의 다리>! 진짜 재미나게 읽었는데 좋아하시는 분, 심지어 읽어다는 분도 별로 만나지 못했어요. 아쉽게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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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여, 안녕!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명백하게 오에 겐자부로의 페르소나인 주인공 조코 고기토는 전작 <우울한 얼굴의 아이> 마지막에 1960년대 학생운동을 재연하는 ‘늙은 일본 모임’ 회원들의 주책맞은 행사에서, 시위진압대 역할을 한 시코쿠 현지 젊은이들에게 납작 들려 큰 나무에 머리통을 강타당한다. 독자와 작가는 이 장면에서 사건은 미시마 신사의 신관 마키히코가 고기토에 테러 수준에 달하는 폭행을 하도록 사주했거나, 적어도 행사에 참여하는 지역 젊은이들에게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코 고기토를 사망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테스토스테론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기토는 이 사건의 결과로 스스로 비교의 대상이 된 돈 키호테가 그러했듯이, 다시 모험을 할 수 없어 고향에서 은둔하다가 숨을 거두는 일만 남게 된다. 작가니까 진짜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글을 생산하는 일, 문학적 모험은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됐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고기토는 행사 과정에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뇌출혈이 발생, 긴급 후송된 후 머리를 열고 고인 피를 뺀 다음, 아들 아카리가 태어나자마자 그러했듯, 플라스틱으로 만든 동그란 인공 뼈를 두개골에 삽입한다. 60대 후반에 접어든 고기토는 정말로 저 건너에 건너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벗과 친지들을 만나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고, 고기토의 딸 마키, 애칭 마아도 아버지의 상태가,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마음도 이쪽으로 왔는지 어떤지가 걱정일 정도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이제 고기토의 많지 않는, 많지 않았던 친구들 가운데 본 마음을 보여줄 인물들은 다 저 건너로 가버렸다고 여길 정도였는데,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면서 캘리포니아의 몇 개 대학에 교수를 하고 있던 츠바키 시게루가 떠올라, 마키가 이메일로 접촉하게 된다. 마침 시게루 역시 미국 생활을 접고 일본에 정착하려 마음을 먹은 순간이라서 시게루는 기꺼이 시코쿠에 있는 고기토의 땅과 집을 사서, 자투리 땅에 있는 구옥에서 몸을 돌볼 고기토와 이웃해 살기로 한다.
  츠바키 시게루, 이자는 고기토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작품에 한 번도 모델로 등장시키지 않았지만 고기토보다 두 살이 많고,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같은 동네에 살았다. 고기토가 ‘상하이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시게루의 어머니는 결혼을 하고 남편이 사업을 하는 상하이로 건너가게 됐는데, 이방에서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을 하니 감당이 되지 않아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는 고기토의 어머니와 동행을 한다. 그러니 상당히 친한 친구였을 터. 상하이 아주머니가 그곳에서 시게루를 낳고 돌을 넘기자 고기토의 아버지가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가서 아내를 데리고 온다. 이게 고기토가 알고 있는 것이고, 시게루는 좀 다르다. 확실한 건 상하이 아주머니, 시게루의 어머니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중국 청년과 사랑의 도주를 감행했다는 것뿐. 상하이 아주머니는 애초 불임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함께 상하이로 건너간 고기토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하여 시게루를 낳았으며, 이 사실을 알고 고기토의 아버지가 상하이까지 직접 가서 아내를 데리고 오게 된 거란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으나 힌트는 남긴다. 그러나 독후감에서는 어떤 힌트인지도 알려드리지 않겠다.
  어쨌든 상하이 아주머니와 고기토의 어머니는 시게루와 고기토를, 서로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사이로 키우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시게루가 1943년에 중학교 진학을 위해 시코쿠 숲으로 와서 보니, 고기토는 새카맣게 탄 얼굴을 한 일본의 전형적인 산골아이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네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네 엄마는 우리 어머니의 친구가 아니야. 상하이까지 데려간 하녀라고. (중략) 나를 형으로 부르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 라고 모욕을 해버린다. 당연히 극심하게 분노한 고기토가 덤벼들어 엎치락뒤치락 싸움이 벌어진다. 어린 나이에 두 살 터울이면 당최 당해내지 못할 것이겠지만, 고기토는 당시 시골 어린 아이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방법인, 돌로 시게루의 머리통을 내리쳐 두피를 찢어놓고 말았다. 이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은 시게루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고기토는 완전히 외톨이로 전락해 이후 식물도감 한 권을 갖고 산에 올라 나무 이름을 다 아는 소년으로 성장한다. 이런 사이라서 둘은 평생 살며 숱하게 만남과 절교를 거듭했는데, 이제 다 늙어 서로를 위해 자신이 죽을 관계를 기억했는지 기꺼이 남은 생을 고기토 곁에서 지내겠다고 미국 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귀국한 것.

 

  그러나 시게루는 혼자 오지 않았다. 30대 중반 러시안 아메리칸인 블라디미르, 30대 차이니즈 아메리칸 여성 싱싱(淸淸). 이들은 오에, 작중 조코 선생과 상극관계인 미시마한테 깊숙이 경도된 테러리스트들이다. 홍콩에 본부가 있는 듯한 세상의 여러 집단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들이, 세계적 건축가이며 Unbuild, 반 건설, 즉 파괴에 특히 권위가 있는 시게루의 제자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고층 건물의 핵심 위치를 빌려 그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미리 건물의 파괴를 알려 모든 사람을 대피시킨 후 테러를 감행해, 핵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국가, 거대 폭력에 대항하는 소집단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나는 여기서 무척 헷갈렸다. 고기토가 평생을 걸쳐 희구한 것은 평화, 비폭력이었으며 당연히 좌우를 따지자면 좌익에 좀 더 가깝다. <만엔 원년의 풋볼> 등에서 보듯이 우익 집단이 무리를 이루어,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굴욕을 갚기 위한, 우익테러가 실패로 돌아가는 모습에 익숙했는데 이 작품에선 난데없이 대표적인 일본의 국수 우익인 미시마를 숭배하는 집단의 테러에 소극적이나마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여태 미시마가 할복에 성공한 줄 알았다. 배를 찌르긴 했는데 긋지를 못해 옆에 서 있던 할복 도우미, 가이사쿠가 친절하게 목을 베어 데구르르 잘린 머리가 굴러갔다고 한다. 잘린 머리를 똑바로 세워 찍은 사진을 일본의 몇몇 신문이 헤드라인으로 실었고, 이를 본 고기토의 작곡가 아들 아카리는, 미시마는 요만합니다, 라며 손을 30센티미터 정도 올리는 장면이 이 책에 나온다.


  시절은 911 테러가 있고 몇 년 후. 아무리 조코 고기토(라고 읽는 오에)가 핵무기 철폐를 주장했지만, 핵보유국에 의한 미래의 거대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테러를 지지한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는 (물론 지극히 소극적이지만) 행위를 하는 내용의 작품을 썼다는 것이 매우 의아하다. 이 작품을 이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서사가 바로 이 작은 테러이다. 밤 늦도록 책을 읽는 바람에 내가 작가의 진짜 의도를 오독하고 말았기를, 지금, 바라고 있다.

 

  진짜 아이는 고블린이 데려가고 대신 요람에 올려놓은 가짜 아이인 체인질링. 고기토 안의 또다른 인격으로 몇 년 후에 숲으로 들어가 동자가 된 고기이. 나를 대신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시게루. 시게루와 함께 시코쿠 숲의 집으로 들어온 블라디미르와 싱싱. 사건이 본격적으로 커지면서 고기토를 감시하기 위해 배치한 다케시와 다케.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되는 고기토와 돈키호테. 그리고 베케트 희곡 <고도를 찾아서>의 블리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커플들을 고기토는 ‘상보적인 2인’이라고 호칭한다. 그러니까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 3부작을 대표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개념이 상보적 2인이다. 이 작품에서는 더군다나, 만일 평소에 어떤 일이든 조금 과장해 그것이 진실인 듯이 말하는 습관이 있는 시게루의 말이 정말 진실이라면, 시게루와 고기토는 씨 다른 형제다. 그래서 어머니끼리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시게루의 어머니는 시게루가 어려서 야반도주를 했으니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도 있고, 살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사이였을 수도 있을 듯. 그러나, 꽃노래도 삼세번이라고 이 상보적 2인을 1~3부, 1천5백 쪽 동안 비슷하게 읽고 있으려면 약간의 현기증과 어지럼증, 그리고 경미한 구토의 느낌을 숨기기 힘들다.
  한 번에 같은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세 권 읽기는 무리다. 더구나 이미 <만엔 원년의 풋볼>과 <익사> 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무한 반복하고,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하는 일이 계속하여 어린 나가 늙은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사람 속의 또다른 인격의 존재 등을 연속하는 건 사실 (나름 단련되었다고 생각하는)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만일 이 삼부작을 읽고자 한다면 한 작품을 읽고 일정 기간 터울을 둬 앞에 읽은 내용의 기억이 조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 불문학을 전공하고, 영어도 능숙하게 쓰며,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은 오에 겐자부로 답게 온갖 서양 작품에 천착하고 상세 내역까지 인용도 하고 해석해 작품과 연계시키는 건 처음엔 참신했다가, 점점 식상해지다가 나중엔 지긋지긋해질 정도였다. <책이여, 안녕!>에선 예이츠의 시 여러 편과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을 집중해서 해석하는 장면으로 독자로 하여금 넌더머리가 나게 한다. 잘난 척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탈아입구를 주장했던 일본인 특유의 열등감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삼부작으로 자신의 소설 창작을 마무리할 예정이었겠지만 이후에도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쓴다. 왜? 물론 쓰지 않는 작가는 있을 수 없겠지만, 작가의 숙명일 수도 있으나, <책이여, 안녕!>에서 솔직하게 고백을 했듯이, 지출은 줄지 않고 수입을 기존 작품의 인세로 충당할 수 없을 터이니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계속 작품활동을 할 수밖에. 오에 또는 고기토에겐 노부부의 남은 생애만 버틸 수 있는 재력 말고도 작곡가이기는 하지만 지적 장애가 있는 (오에의 아들) 하카리, 또는 (고기토의 아들) 아카리의 남은 삶도 버틸 수 있는 복지까지 마련해주고 싶었을 것이니.
  오에 겐자부로 특유의 사소설. 여태까지의 오에 겐자부로는 작품마다 비슷하지만 독특한 분위기와 특유의 역사인식으로 독자에게 색다른 일본식 사소설의 맛을 선물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삼부작은 <만엔 원년의 풋볼>의 잔영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어 굳이 삼부작을 써야 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오에 필생의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대담하게 뱀의 발, 몸통보다 훨씬 더 큰 뱀의 발을 그린 걸, 안 봤으면 속이나 편한데, 보고 불편해져버린 느낌. 이게 삼부작을 읽은 솔직한 독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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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30 0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말년과 3부작의 마무리가 안타깝네요.
나이가 들면 지킬게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모험을 줄이게 되면서, 글도 틀을 벗어나지 못하나봐요.
쓰지 않으면 살수 없는 작가의 숙명도 어쩔수 없고... 잊혀지고 싶지 않은, 잊혀지지 않는 방법이겠죠

Falstaff 2021-12-30 09:14   좋아요 3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좋게 읽히지 않아서, 거 참, 그것도 난처하더군요.
어쩌겠습니까. 다 사람 사는 일인 것을요.

잠자냥 2021-12-30 1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한 번에 같은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세 권 읽기는 무리인데 그걸 하셨군요.
근데 페이퍼에서 그 지긋지긋함이 정말 절로 느껴져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2-30 11:57   좋아요 4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아우, 정말 일주일 내내 고생 많았습니다.
지금 읽어보니 독후감도 만만치 않게 지루하네요. ㅋㅋㅋㅋ
 
우울한 얼굴의 아이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우울한 얼굴의 아이>는 겐자부로 삼부작 가운데 두번째 순서로, 물론 이 책만 읽어도 독립적으로 읽히기는 할 듯하다. 그러나 스토리는 <체인지링>에서 그대로 연결되어 있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은 아무래도 <체인지링>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스토리를 연속으로 읽느라고 진이 빠진다는 것이지만.
  주인공 고기토의 성이 바뀌었다. <체인지링>에선 나가에 고기토였는데, 이 책에선 오에의 다른 책들과 같이 작가의 페르소나, 조코 고키토다. 오에가 자신을 대신하는 ‘큰 상’ 받은 작가의 이름을 왜 고기토라고 했느냐 하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처음으로 쓴 명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라틴어 표기 “Cogito, ergo sum”의 첫 단어 ‘Cogito’를 가져왔다. 오에 겐자부로답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사람이 고기토의 아버지 조코 씨였다. 오에의 책에서 아버지 조코 씨의 죽음을 다룬 것이 <익사>.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여 아메리카 군인들이 신성한 섬 땅을 밟게 된 사실은 인정하되 어찌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내주겠는가, 하여 테러를 준비하는 젊은 장교 모임에 우연히 가담한다. 그러나 도중에 큰 홍수가 생겨 배를 타고 나섰다가 강물에 빠져 죽는다.
  아버지는 시코쿠에서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연성도장’이라는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훈련을 하는 등 당시의 젊은이들 마음 속에 일본 특유의 민족의식을 주입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더 세월이 흘러 1부 <체인지링>에서 미군 통역 장교 한 명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쓰던 고장난 소총과 정상적인 피스톨 한 정을 구하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두고두고 우리의 주인공 조코 고키토를 쫓아다니며 작은 테러를 가해 고통을 안기기도 한다. 두세명이 고기토를 꼼짝 못하게 좌우에서 압박하고, 신발과 양말을 벗긴 후, 눈높이에서 ‘탄환’이라 부르는 웬만큼 무게가 있는 금속을 왼쪽 엄지발가락의 뿌리 부분으로 떨어뜨리는 것. 가뜩이나 통풍 기가 조금 있는 고기토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는 행위였다. 스톡홀름 궁정 만찬을 앞두고도 거기까지 따라온 이들에게 당한 적도 있다고. 독자여, 이건 소설이다. 믿건 말건 자유, 나는 허구라고 생각한다.
  고기토의 아내 치카시는 1부 <체인지링>이 끝난 것과 동시에 자살해 죽은 오빠 고로의 어린 애인이었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우라와 조만간 태어날 우라의 아이(고기토 가족과 아무 상관없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고기토가 밤낮 세빠지게 글 써서 번 돈을 써서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치카시는 우라가 아이를 낳고, 독일인 애인이 생기고, 육아 방편을 다 마무리한 후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빈 자리는 로즈라는 이름의 조코 고기토 논문으로 박사를 준비중인 미국인 30대 여성이 맡는다. 당연히 아내도 아니고, 잠자리 파트너도 아니다. 원래 <돈키호테> 연구자였다가 고기토를 심화 학습하기 위하여 장학금을 받아 일본으로 날아와, 마침 기회가 되어 1년 정도 계획으로 함께 지내게 됐을 뿐. 그래서 책에서는 쉴 새 없이 조코 고기토를 17세기 초반의 위대한 몽상가 돈키호테와 비교하는 망언을 멈추지 않는다.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고기토의 어머니가 운명한다. 아흔살이 훨씬 넘은 나이이니 호상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도 맑은 정신을 가졌던 현명한 노인이다. 오에, 이 노회한 작가가 어머니가 그냥 숨을 거두게 할 턱이 없다. 현명한 어머니는 두 가지 중요한 언질을 주는 역할을 한다.
  첫째는, 소설은 거짓이라는 것에 대하여 소설 속 거짓에, “윤리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나같이 나이먹은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일 뿐이라 하면서, 동시에 “고기토가 거짓말 소설을 산 하나가 될 만큼이나 쓰고나서 이제는 나이를 먹어 종이 한 장 만큼이라도 진짜 이야기를 쓴다면, 그건 사실이라고 믿어주면 좋겠다.”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이 당부 역시 오에의 거짓 주장이다. 이 책에 쓴 건 전부 사실이라고 독자더러 믿으라는 건데 하여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지상 최고 거짓말쟁이의 글을 믿으라고 하니 말이지. 하여튼 책을 진지하게 읽어달라는 작가의 부탁 정도로 접수하고 말자.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동자童子를 언젠가는 고기토가 제대로 연구하기 위하여 귀향을 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 어머니의 이런 선견지명으로 오에는 고기토가 도쿄, 아들 아카리를 위한 모든 시설과 소프트웨어가 있는 도쿄를 떠나 고향 시코쿠의 두메산골인 마키 면(町), 주조시키로 돌아와 새로 집을 옮겨 살 제대로 된 이유를 만들었다. 때마침 미국에서 온 로즈와 함께. 이제 고기토는 고향에서 여전히 터전을 일구고 사는 여동생 아사 부부, 먼 친척으로 조카뻘인 청년 아요의 도움을 받아 마키 면에서 텃세 깨나 부리는 B급 전범의 위폐를 모신 미시마 신사의 신관 마키히코와 후쇼쿠 절의 주지 마츠오, 다베 콘체를 호텔의 다베 부부 등과 협력 또는 갈등을 빚는다.
  그럼 동자는 무엇일까. 한자를 그냥 풀면, 어린 아이라는 뜻인데, 고기토의 주장을 보자. 다섯 살 무렵의 고기토는 ‘또 한 사람’의 자신, ‘고기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일년 후 고기이 혼자 숲으로 들어가 동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자가 되면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오가 수 있다. 고기이 역시 어느 날, 하오리 입은 팔을 양쪽으로 벌리더니 커다란 새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 사라져버렸다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이건 작품을 관통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함의를 가진 말이다.
  이야기는 만엔 원년인 1860년으로 넘어간다. 오에의 전작 <만엔 원년의 풋볼>에 소개했듯이, 메이지 이전 시대 첫번째 민중반란이 메이스케라는 젊은이의 지도하에 일어났는데,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관군에 체포되어 죽임을 당할 시간이 도래하자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나타나 그를 위로한다. “괜찮아, 괜찮아. 죽임을 당한대도. 내가 바로 다시 낳아줄 테니!” 즉 어머니를 통해 메이스케는 환생을 할 수 있다는 말. 이들은 메이스케가 옥사하고 6,7년이 흘러 환생한 메이스케가 농민 반란의 지도자를 도와 신정부가 보낸 관리와 투쟁하게 했고, 더 시간이 흘러 베츠시 구리광산의 스미토모 광업소에서 광부 폭동을 일으켰다고 믿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 후의 청년장교들에 의한 반란까지? 그건 모르겠다. 즉 동자는 환생할 수 있다는 믿음인데, 그것도 절차가 있다.
  이 지역 시코쿠에서 태어나 죽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나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이 육체를 떠나 골짜기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공간을 나선형으로 올라가 ‘자기 나무’ 뿌리에 머문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나선형을 그리며 항아리 모양의 공간을 내려와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육체로 들어가 환생하는 사이클을 지닌다. 오해하지 마시라. 깊은 ‘골짜기’의 항아리 형태 공간이 자기 나무 뿌리보다 아래쪽에 있어서 나선형을 그리며 올라가 뿌리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풀린다. 고기토의 아내이자 전편 <체인지링>에서 자살한 고로의 동생인 치카시는 고로의 애인이었던 우라의 아이를 고로의 환생으로 생각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갔던 거다.

 

  이 책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전작 <체인지링>과 연관이 되어 있고, 오에 겐자부로답게 이미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 놓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무.한.반.복. 하고 있다는 거.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 걱정이 많아지는 것과 비례하는 거 같다. 그래서 지루해지는 걸 어쩔 수 없는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온갖 철학적, 비교문학적 사색과 대화를 첨부하기까지 한다. 나는 다 읽고 왜, 하필이면 공부하는 미국인 여성을 주조시키까지 데려왔는지 참 의아했다. 재미는 있지만 오에가 자신의 페르소나인 고기토를 돈키호테와 비교하는 것도 자뻑이고, 돈키호테니까 당연히 허황한 대결로 인한 부상도 빼놓을 수 없는데, 부상을 당하는 과정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읽었다. 아직까지 고기토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세계에서 제일 ‘큰 상’을 받은 고기토가, 그토록 거만하고, 무게잡고, 할 말 아끼지 않고, 체면 차리는 고기토가 당국에 신고 한 번 하지 않으면서 누군지 알 것도 같은 집단에 의하여 계속적인 (작은)테러, 린치를 당하고 그걸 참고만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들이 전부 다 은유라고 하면 안 될 일도 없다. 그러면, 저 위에서 고기토의 어머니가 진실 한 장을 쓰더라도 믿어 달라고 한 얘기는 진짜일까 구라일까.
 하여튼 마지막 편, <책이여, 안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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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7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이선형 옮김 / 연극과인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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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작 나는 인상깊게 읽지 못했지만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극작가인 베르나르-마리 콜테스가 쓴 희곡. 1948년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젤 주에 있는 도시 메츠에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전쟁 등에 참전했던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알제리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선형이 쓴 역자 후기에 적혀 있다. “알제리 전쟁은 그의 삶 속에 강하게 작용한다.” 어떻게 작용을 했을까? 프랑스 군인이 무려 1만2천 명 전사했다고? 이 가운데 외인부대를 뺀 순수 프랑스 인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가 잡아 죽인 알제리 사람의 수가 백만이 넘고 70만이 넘는 사람을 투옥해 갖은 고문을 자행한 건 물론 어린 콜테스는 몰랐겠지.
 하여튼 소년기를 벗어나기도 전에 콜테스는 거의 모든 작가가 그렇듯이 몰리에르, 랭보, 데카르트, 디드로, 셰익스피어, 러시아 작가들을 비롯한 문학작품과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영화인 <벤허>, <십계>, <스파르타쿠스>, <로빈 후드>를 거쳐 프리츠 랑, 오손 웰스, 알프레드 히치콕, 엘리아 카잔, 페데리코 펠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명장의 작품들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목록을 보고 짐작하건데 콜테스는 아예 처음부터 연극, 영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그 방면으로 살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아,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말씀이지. 스물여섯 살이 된 1974년에 공산당에 입당을 하고, 75년엔 우울증 증세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가, 1976년 기어이 마약 중독까지 경험하고 만다. 이때부터 동성애 성향이 있었는지 자신의 마약 경험을 동성애 잡지 『마스크』에 기고를 한다.
 서른 살이던 1978년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여행을 하더니 다음 해엔 세계적으로 가장 정세가 불안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을 여행하면서 스페인 말도 통하지 않는 과테말라의 벽지에 틀어박혀 희곡 한 편을 쓰니 그것이 바로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이다. 이 작품은 1983년 프랑스 오드센 주 낭테르의 아망디 극장에서 세계 초연을 한다. 1980년대 초중반에 HIV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콜테스는 당시만 해도 걸리기만 하면 곧 죽어야 하는 역병이라서 겨우 열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마흔한 살, 1989년에 짧은 삶을 접고 말았다. 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번으로 출간한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를 통해 표제작과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만 읽어보았는데, 앞서 얘기했듯이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출판사 연극과인간의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7’로 낸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을 읽고 콜테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작품활동의 사실상 마지막 해였던 1988년 작인 <로베르토 쥬코>를 집어들었고, <서쪽 부두>가 절판인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역자 이선형은 해설에서 콜테스의 특징으로 ① 성향이 반문명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이며 제의적이며 원시적이고, ②연극이 시적이고 주술적인 언어로 축조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썼다. 성향에 대한 의견은 동의하지만 시적이고 주술적인 언어로 축조되었다는 건, 원어가 아니라 번역문으로 읽는 독자가 어떻게 맛을 알겠는가. 그렇다. <목화밭…>에서 내가 감각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간 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반문명, 무정부, 제의적, 원시적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해서 였을 수 있겠구나 싶다.
 네 명의 등장인물이 두 개의 사건으로 극을 만들어간다.
 장소는 가상의 아프리카. 프랑스 건설업체가 다리를 완공하지 못한 상태의 현장이다. 젊디젊은 현장 노동자 한 명이, 당연히 흑인인데, 시간을 채우지 않고 현장을 이탈하려 해서, 엔지니어인 칼이 안 된다고 제지했다. 그랬더니 어린 검둥이가 침을 찍 뱉았고, 그게 칼의 신발 앞 십 센티미터 앞에 탁 떨어졌다. 입술을 조금만 더 들고 침을 뱉았으면 신발 콧잔등에 맞았을 것이고, 턱을 약간만 들었더라면 바지에 묻었을 터이며, 척추를 삐긋 휜 상태였다면 여지없이 칼의 얼굴을 향했을 것이다. 이후 사실 여부는 다음으로 하고, 칼이 주장하는 바를 완전히 믿는다면, 엄청난 비가 내렸고 자기가 배 위에 올려놓고 잠을 자는 개 뚜밥이 검둥이를 쫓아갔는데, 때마침 번개가 치더니 뚜밥이 픽 쓰러졌고, 이어서 검둥이도 픽 쓰러지더라는 것이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나무를 때린 번개가 이들을 태워버렸다는 얘기.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커다란 트럭이 속력을 전혀 줄이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가 때마침 그 자리에서 도로 쪽으로 쓰러진 검둥이를 깔아버렸다며, 어린 흑인 원주민의 죽음은 별개로, 검둥이들이 자기 개 뚜밥을 잡아먹었을 거라 불평을 늘어놓는다.
 좋다. 일단 독자의 의무로 초장에 소개되는 칼의 주장을 믿기로 하자. 그러나 문제가 있으니, 죽은 지 하루 안에 매장을 해야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이슬람을 믿는 북아프리카 사람들의 풍습(친기즈 아이트마토프, <백년보다 긴 하루> 참조) 또는 콜테스의 전매특허인 반문명적, 원시적 주술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린 흑인의 시신을 찾으러 정체가 모호한 흑인 알부리가 나타나 시신을 돌려달라고 공사장의 현장소장인 ‘오른’에게 요구한다. 아프리카 토착어인 우어로프 어를 쓰지만 프랑스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알부리는 말 그대로 정체가 모호하다. 어떻게 보면 ‘개들’, 복수형이니까 진짜 개 뚜밥을 포함한 개 선호지역의 인간들, 쉬운 얘기로 희곡에 등장하는 모든 백인들과 대척점에 선 토종 원주민일 수도 있고, 그들의 토속신앙적 토템의 의인화일 수도 있다. 알부리는 시신을 되찾지 못하면 밤마다 주검의 어머니가 현장을 배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멈출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고, 사건 또는 사고라고 주장하는 이미 벌어진 일을 무마할 책임이 있는 현장소장 오른은 사고의 대가로 150달러를 제시하며 중재자 알부리에겐 2백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즉, 나무 그림자에 숨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 신비한 중재자에게 중계료 명목으로 50달러를 주겠다는 것.
 사건, 또는 사고를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는데 이젠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칼이 처음엔 쓰레기장 꼭대기에 갖다 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아 연못에 빠뜨렸다. 거기는 너무 얕아 가라앉지 않아서 다시 건져 하수도에 빠뜨리고 말았다. 근데 하수도도, 이게 지하에서 흐르는 물이라, 시신을 찾으러 가보니 시체는 벌써 밀려드는 분뇨에 밀려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보이지 않고 쇠똥만 잔뜩 묻힌 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다른 사건은 환갑을 맞은 현장소장 오른이 휴가 동안 파리에 가서 젊은 아가씨 레온을 아내로 삼기로 했고, 색시를 피부색 흰 여자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아프리카 공사 현장에까지 데려온 것. 현장엔 피가 펄펄 끓는 청년 엔지니어 칼이 굵은 작대기를 짚고 서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레온이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그들 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현지인 알부리를 만나게 된다. 독자는 ‘젊은 여성’ 레온이 등장할 때부터 ‘젊은’ 칼과의 사이에 불똥 튀기는 연애사건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그건 정확하게 김칫국이고, 오히려 알부리의 부족원이 되고 싶어 하는 레온의 행위에 경악을 하게 된다. 물론 어떤 행위인지는 안 알려드린다.
 여기에 하나 더. 이건 작품을 다 읽고나서 해설을 봐야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레온과 알부리의 대화 장면이었다. 읽는 중에 약간의 의심이 들긴 했다. 레온이 알부리에게 독일어로 말을 하는 반면, 알부리는 레온이 사용하는 독일어를 다 해독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은 레온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프리카 토속어인 우어로프 어를 쓴다는 점. 레온은 프랑스에서 낳고, 자라고 여태까지 파리에서 살다 이제 막 아프리카에 도착한 여성. 이이가 독어를 쓴다는 것까지만 놀랐었다. 근데 해설을 읽어보니 레온은 차츰 알부리의 우어로프 어를 이해하는데, 이는 레온의 전생이 알부리와 관련이 있으며, 알부리는 괴테의 시 <마왕>에서 주인공 격인 악마의 이미지라고 한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희곡을 읽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다. 이런 작품은 책 뒤에 실린 해설까지 통독을 해야 제 맛을 알게 된다. 물론 작품해석이 항상 옳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문가가 제대로 짚어준다면 그게 표준적 독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잘 읽었다. 잘 읽은 김에 오늘은 맛난 음식에 쐬주 한 병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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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2-28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읽으셨구나! 전 이거 앞 부분 읽다가 쉽게 읽을 작품이 아닌 거 같아서 일단 내려놨어요. ㅎㅎㅎ 쐬주를 부르는 작품이군요?! 저도 곧 다시 도전하겠습니다요~

Falstaff 2021-12-28 10:45   좋아요 2 | URL
옙. 근데 저도 이거, 정말 쉽지 않았어요.
먼저 한 번, 무슨 얘기 하는지도 모르면서 읽고, 그래도 도무지 모르겠어서, 역자 해석 보고, 다시 한 번 읽으니 그때서야 재미있더라고요. ㅋㅋㅋㅋ

참, 인생이라니. 이 정성 가지고 공부를 했더라면....씨.....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피터 케리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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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오스카와 루신다>로 1988년에 처음 부커상을 받은 피터 케리에게 부커상을 두 번 받은 네 명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되게 해준 작품. <오스카와 루신다>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를 배경으로 한, 개척시대 호주 소설이다. 케리의 작품은 딱 두 개 읽었지만 굵직한 상을 받게 해준 대표작으로 미루어, 이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코맥 매카시 같은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내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그래도 매카시보다 표현이 훨씬 부드러워 읽으면서 사납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총상을 입은 상처를 불에 달군 쇠로 불소독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매카시는 십육세 소년 존 그래디 콜 스스로 권총의 총열을 발갛게 데워 총알이 뚫고 지나간 상처에 쑤셔박는 장면을 연출한 반면, 케리는 열일곱 살 먹은 댄 켈리가 총상을 입어 곪은 부위에 I 자형 낙인을 달궈 불소독을 할 때, 이왕이면 형 네드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책을 다 읽고 ‘네드 켈리 Ned Kelly’를 검색해보니 정말로 실존했던 오스트레일리아 인물이다. 바이오그래피를 읽어보니 피터 케리가 쓴 소설 내용과 일치한다. 1854년, 아일랜드 남부의 농촌 소도시 티퍼레리에서 죄를 짓고 저 멀리, 지금은 테즈메이니아 섬이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벤 디멘스 랜드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출소해 빅토리아 주에 와서 살던 빨강머리에 주근깨투성이 남자 존 ‘레드’ 켈리의 여덟 자식들 가운데 세번째 자식이자 첫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테즈메이니아 출신 리처드 플래너건의 책들 속에 야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섬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기도 한데, 야생이란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지 속에서 살라고 하면, 그것도 그토록 울창한 밀림 속에, 오직 그 섬에서만 사는 고립종 야생동물이 숱한 곳의 감옥 안에서 사는 건, 지옥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드의 아버지는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경찰들과 엮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그게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긴 하지만.
  네드가 아직 열살도 되지 않은 유년시절에 아버지를 관찰하고 있던 오닐 경사를 통해 어떻게 아버지 존 ‘레드’ 켈리가 밴 디멘스 랜드를 거쳐 빅토리아 주에 와 정착을 했는지 알게 된다. 티퍼레리의 한 농장주가 잉글랜드 법으로 적법하게 소작인을 해고해버린 일이 생긴다. 이에 티퍼레리의 농부들은 회합을 갖고 해고의 적법성을 떠나 이의 부당성에 관하여 토론을 했고, 지주에 대한 징계를 결의를 하고 이를 실행했는데, 좀 과했다. 농부들은 지주의 집에 쳐들어가 눈에 뭐가 씌었는지 집을 홀랑 불태우고 지주의 가족들을 여자, 아이들까지 보이는 족족 학살해버린 것. 이때 가담했던 농부 가운데 한 명이 젊디젊은 존 켈리였다. 이로써 1788년부터 80년간 기록된 무려 16만2천 명의 이송 죄수의 명단에 존의 이름도 쓰이게 된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을 보면 이송 죄수가 다시 영국 땅을 밟으면 죄수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지 아마? 토마스 하디의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던가, 아니던가.
  책을 읽다가 보면, 불운한 네드 켈리의 인생이 아버지 존과 은근히 비슷하게 닮았다. 아버지 존은 아일랜드 농촌에서 잉글랜드에서 파견한 식민지 관리와, 잉글랜드가 함부로 만들어 반포한 법령과, 기존의 불문율을 싹 무시하고 새 법령을 지극히 일방적으로 적용하려는 (잉글랜드 이민자인지 아일랜드 토박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주에게, 다른 소작인들과 마찬가지로 핍박을 받고 있다가, 동료 소작인이 소위 ‘합법적인’ 그러나 불문율에 의하면 ‘가혹하게’ 또는 ‘있을 수 없는 방법으로’ 소작을 떼는 것을 보고, 일종의 농민 봉기를 일으킨 거였다. 물론 지주를 징계하는 방법이 과하긴 했다. 지주 살해야 19세기 문법으로 크게 이상하진 않지만 여성과 아이까지 죽인 건 스스로의 목숨으로 갚아야 할 만한 범죄였으리라. 아들 네드는 소년 시절부터 중범죄 중에서도 중범죄자들이 수용되는 벤 디멘스 랜드 출신의 존 켈리를 애초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 찍어 수시로 밀착감시를 해오던 공권력, 경찰들과 순회법원 판사의 폭력과 거짓 고발, 법원에서의 위증 등에 저항하다 자연스레 범죄조직 켈리 갱단의 두목이 되어, 경찰을 살해하고 은행을 터는 중범죄자가 되었다. 억울한 희생자들이란 이야기인데, 맞는 말이다. 세상에 이런 스타일의 범죄자 거의 대부분은 동시대에 존재하던 악법, 악습, 권력자의 악행에 저항하다 본의가 왜곡된 것이었다.

  작가 피터 케리가 네드 켈리와, 네드가 이끄는 세 명, 친동생 댄 켈리, 상습 아편 복용자 조 번, 댄의 친구이자 네드 숭배자 스티브 하트를 뭉쳐 “켈리 갱”이라 일컫는, 명약관화한 산적무리를 일방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서 서술하려 마음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어쨌든 위키피디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네드의 아내 메리가 있(다고 치)고 메리는, 켈리 갱들에게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밀항하자는 제의가 거절당하자, 네드가 은행을 턴 돈을 챙겨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그곳에서 네드의 딸을 낳았다고 전제를 했다. 책의 막바지에 자기한테도 핏줄, 19세기였으니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딸이라도 충분히 만족해서, 이전까지는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오스트레일리아의 양심적인 국회의원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편지를 쓰던 것을, 이제 자신이 생각나는 모든 인생, 유년시절부터 마지막 제릴데리의 호텔에서 철갑을 뒤집어쓰고 수십명의 경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기 바로 직전까지의 삶을 수백장의 종이에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9할 이상이 네드가 딸에게 쓴 편지 또는 자서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드가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아 그가 쓴 문장이 매끄러울 수 없을 터이니, 이것도 작가가 적당하게 개입해서 문법이나 구두점 같은 것을 조정하여 약간 미숙한 문장으로 읽히게 만들었다. 여기에 어려서부터 극빈한 환경에서 자라, 열살이나 됐을까 했을 때 닥친 가뭄으로 너무 배가 고파 이웃 머리 씨네 암송아지를 잡는 바람에 아버지를 대신, 또다시 감옥으로 보낸 걸로 시작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인간의 전형으로, 욕설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래도 딸에게 남기는 글이라 욕설을 그대로 쓰지 않고 일부 생략하는 체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래서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네드 켈리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일관할 수 있게 된다. 어디까지나 네드가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경찰과 법원, 특히 경찰들의 집요하고 가혹한 처리와 거짓말, 심지어 경찰에 의하여 벌어지는 범죄행위와 배신에서 시작한 것이며, 스스로는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대신 집안의 맏아들로 건실하게 농부일을 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주장의 일부는 맞을 것이다. 뒤로 가면,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나중에는 켈리의 갱들이 마치 잉글랜드 로빈후드나 우리나라 임꺽정 패들처럼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그들 편에 서서 관가, 그러니까 부당한 경찰력에 저항한 의적 비슷한 광경도 나오지만, 천만의 말씀. 범죄집단이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신이 부자들에게 (네드 켈리의 경우엔 국립은행에서) 빼앗은 양곡이나 돈을 거저 먹으라고 구빈활동을 하는 일은 홍명희의 책에서나 나오는 거다. 갱은 어떻게 해서든지 갱이고, 화적패당도 결국 화저패당일 뿐이다. 네드 켈리와 켈리 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내 생각엔, 오스트레일리아가 침략을 당하거나 원주민만큼 심한 수탈의 역사를 갖지도 않았고, 나라 자체의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만일 구세계 정도로 오랜 경험을 축적했더라면, 네드 켈리의 행위는 저 미하엘 콜하스 같은 불행한 운명의 민란 지도자 정도로 미화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가장 최선의 미화 왜곡은 우리나라의 <장사의 꿈> 같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장사로 태어났지만 이를 알아낸 권력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영웅 같은 거.

 

 

  오늘은 작품의 스토리는 거의 소개하지 않았다. 네드 켈리 Ned Kelly가 실존인물이고, 구글 검색하면 위키피디아에 켈리의 일생이 그대로 나와 있을 뿐더러 사진, 교수형 장면, 심지어 데스 마스크까지 다 볼 수 있어서 완전히 읽은 느낌으로만 독후감을 썼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를 읽으면서 알 수 있던 건, 나는 개척시대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피터 케리에게 첫번째 부커상을 안긴 <오스카와 루신다>도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두 작품 다 권위있는 상을 받았으니 그저 내 소양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 뿐임은, 다행스럽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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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2-27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폴스타프님의 페이퍼는 제가 (감히) 댓글 남기기 어렵게 정질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오늘은 총상 소독 장면을 세세히 비교하시는 데서 압도됩니다^^

테즈메이니아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온라인 자료로 읽었는데, 리처드 플래너건이 그 지역 출신이라 하셔서 제가 온라인 클릭질로 얻은 정보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지네요^^

Falstaff 2021-12-27 11:20   좋아요 1 | URL
아휴, 뭐 그 정도 가지고 이러십니까. ㅋㅋㅋㅋㅋ 얼굴 붉어지게시리...

혹시 테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모두 죽었다는 거 아닐까요? 거기 사람들 살고 있어요. 하다못해 관광 안내원 또는 입도 금지라면 사람들 접근 못하게 지키고 있는 관리인들이 있을 거 같은데요. 원주민을 몰살했다면, 20세기 중반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라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얄라알라 2021-12-27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지금 제가 제 댓글 다시 읽어보니 ˝정질 정보˝는 뭘까요? ㅋㅋㅋㅋㅋ‘정밀‘을 ‘정질‘로 쓰니 ‘저질‘로 잘못 읽으면 큰일 나겠습니다 ....ㅇㅎㅎㅎㅎ 네, 원주민이 모두 사망했다, 마지막 원주민은 인류학자들이 연구대상 삼았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의 거주인을 말하는 건 가보네요

Falstaff 2021-12-27 14:31   좋아요 2 | URL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들이 원주민은 ˝애버리지니˝라 부르면서 아예 불가촉 원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 이들을 미개인에서 건져내는 프로젝트를 만듭니다. 1900년 부터 1970년까지 무려 70년 동안 애버리지니 원주민의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아 백인 가정에 입양해 도덕과 종교 등을 배우게 하는데 말이 그렇지 급여 없는 하인으로 써먹습니다.
테즈메이니아는 죄수 가운데서도 가장 죄질이 안 좋은 죄수들만 골라서 보낸 곳이라 그곳 원주민들이 제일 가혹한 고통을 당했을 것 같네요.

ㅎㅎㅎ 제가 잘 알아서가 아닙니다. 지금 마침 패트릭 화이트가 쓴 <전차를 모는 기수들>이란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이 책의 무대가 1950년대 오스트레일리아라서 적절하게 아는 척을 할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ㅋ 인생이란!

얄라알라 2021-12-27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밀을 수정. 초정밀이라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