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피터 케리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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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오스카와 루신다>로 1988년에 처음 부커상을 받은 피터 케리에게 부커상을 두 번 받은 네 명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되게 해준 작품. <오스카와 루신다>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를 배경으로 한, 개척시대 호주 소설이다. 케리의 작품은 딱 두 개 읽었지만 굵직한 상을 받게 해준 대표작으로 미루어, 이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코맥 매카시 같은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내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그래도 매카시보다 표현이 훨씬 부드러워 읽으면서 사납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총상을 입은 상처를 불에 달군 쇠로 불소독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매카시는 십육세 소년 존 그래디 콜 스스로 권총의 총열을 발갛게 데워 총알이 뚫고 지나간 상처에 쑤셔박는 장면을 연출한 반면, 케리는 열일곱 살 먹은 댄 켈리가 총상을 입어 곪은 부위에 I 자형 낙인을 달궈 불소독을 할 때, 이왕이면 형 네드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책을 다 읽고 ‘네드 켈리 Ned Kelly’를 검색해보니 정말로 실존했던 오스트레일리아 인물이다. 바이오그래피를 읽어보니 피터 케리가 쓴 소설 내용과 일치한다. 1854년, 아일랜드 남부의 농촌 소도시 티퍼레리에서 죄를 짓고 저 멀리, 지금은 테즈메이니아 섬이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벤 디멘스 랜드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출소해 빅토리아 주에 와서 살던 빨강머리에 주근깨투성이 남자 존 ‘레드’ 켈리의 여덟 자식들 가운데 세번째 자식이자 첫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테즈메이니아 출신 리처드 플래너건의 책들 속에 야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섬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기도 한데, 야생이란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지 속에서 살라고 하면, 그것도 그토록 울창한 밀림 속에, 오직 그 섬에서만 사는 고립종 야생동물이 숱한 곳의 감옥 안에서 사는 건, 지옥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드의 아버지는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경찰들과 엮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그게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긴 하지만.
  네드가 아직 열살도 되지 않은 유년시절에 아버지를 관찰하고 있던 오닐 경사를 통해 어떻게 아버지 존 ‘레드’ 켈리가 밴 디멘스 랜드를 거쳐 빅토리아 주에 와 정착을 했는지 알게 된다. 티퍼레리의 한 농장주가 잉글랜드 법으로 적법하게 소작인을 해고해버린 일이 생긴다. 이에 티퍼레리의 농부들은 회합을 갖고 해고의 적법성을 떠나 이의 부당성에 관하여 토론을 했고, 지주에 대한 징계를 결의를 하고 이를 실행했는데, 좀 과했다. 농부들은 지주의 집에 쳐들어가 눈에 뭐가 씌었는지 집을 홀랑 불태우고 지주의 가족들을 여자, 아이들까지 보이는 족족 학살해버린 것. 이때 가담했던 농부 가운데 한 명이 젊디젊은 존 켈리였다. 이로써 1788년부터 80년간 기록된 무려 16만2천 명의 이송 죄수의 명단에 존의 이름도 쓰이게 된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을 보면 이송 죄수가 다시 영국 땅을 밟으면 죄수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지 아마? 토마스 하디의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던가, 아니던가.
  책을 읽다가 보면, 불운한 네드 켈리의 인생이 아버지 존과 은근히 비슷하게 닮았다. 아버지 존은 아일랜드 농촌에서 잉글랜드에서 파견한 식민지 관리와, 잉글랜드가 함부로 만들어 반포한 법령과, 기존의 불문율을 싹 무시하고 새 법령을 지극히 일방적으로 적용하려는 (잉글랜드 이민자인지 아일랜드 토박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주에게, 다른 소작인들과 마찬가지로 핍박을 받고 있다가, 동료 소작인이 소위 ‘합법적인’ 그러나 불문율에 의하면 ‘가혹하게’ 또는 ‘있을 수 없는 방법으로’ 소작을 떼는 것을 보고, 일종의 농민 봉기를 일으킨 거였다. 물론 지주를 징계하는 방법이 과하긴 했다. 지주 살해야 19세기 문법으로 크게 이상하진 않지만 여성과 아이까지 죽인 건 스스로의 목숨으로 갚아야 할 만한 범죄였으리라. 아들 네드는 소년 시절부터 중범죄 중에서도 중범죄자들이 수용되는 벤 디멘스 랜드 출신의 존 켈리를 애초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 찍어 수시로 밀착감시를 해오던 공권력, 경찰들과 순회법원 판사의 폭력과 거짓 고발, 법원에서의 위증 등에 저항하다 자연스레 범죄조직 켈리 갱단의 두목이 되어, 경찰을 살해하고 은행을 터는 중범죄자가 되었다. 억울한 희생자들이란 이야기인데, 맞는 말이다. 세상에 이런 스타일의 범죄자 거의 대부분은 동시대에 존재하던 악법, 악습, 권력자의 악행에 저항하다 본의가 왜곡된 것이었다.

  작가 피터 케리가 네드 켈리와, 네드가 이끄는 세 명, 친동생 댄 켈리, 상습 아편 복용자 조 번, 댄의 친구이자 네드 숭배자 스티브 하트를 뭉쳐 “켈리 갱”이라 일컫는, 명약관화한 산적무리를 일방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서 서술하려 마음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어쨌든 위키피디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네드의 아내 메리가 있(다고 치)고 메리는, 켈리 갱들에게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밀항하자는 제의가 거절당하자, 네드가 은행을 턴 돈을 챙겨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그곳에서 네드의 딸을 낳았다고 전제를 했다. 책의 막바지에 자기한테도 핏줄, 19세기였으니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딸이라도 충분히 만족해서, 이전까지는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오스트레일리아의 양심적인 국회의원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편지를 쓰던 것을, 이제 자신이 생각나는 모든 인생, 유년시절부터 마지막 제릴데리의 호텔에서 철갑을 뒤집어쓰고 수십명의 경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기 바로 직전까지의 삶을 수백장의 종이에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9할 이상이 네드가 딸에게 쓴 편지 또는 자서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드가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아 그가 쓴 문장이 매끄러울 수 없을 터이니, 이것도 작가가 적당하게 개입해서 문법이나 구두점 같은 것을 조정하여 약간 미숙한 문장으로 읽히게 만들었다. 여기에 어려서부터 극빈한 환경에서 자라, 열살이나 됐을까 했을 때 닥친 가뭄으로 너무 배가 고파 이웃 머리 씨네 암송아지를 잡는 바람에 아버지를 대신, 또다시 감옥으로 보낸 걸로 시작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인간의 전형으로, 욕설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래도 딸에게 남기는 글이라 욕설을 그대로 쓰지 않고 일부 생략하는 체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래서 책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네드 켈리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일관할 수 있게 된다. 어디까지나 네드가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경찰과 법원, 특히 경찰들의 집요하고 가혹한 처리와 거짓말, 심지어 경찰에 의하여 벌어지는 범죄행위와 배신에서 시작한 것이며, 스스로는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대신 집안의 맏아들로 건실하게 농부일을 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주장의 일부는 맞을 것이다. 뒤로 가면,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나중에는 켈리의 갱들이 마치 잉글랜드 로빈후드나 우리나라 임꺽정 패들처럼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그들 편에 서서 관가, 그러니까 부당한 경찰력에 저항한 의적 비슷한 광경도 나오지만, 천만의 말씀. 범죄집단이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신이 부자들에게 (네드 켈리의 경우엔 국립은행에서) 빼앗은 양곡이나 돈을 거저 먹으라고 구빈활동을 하는 일은 홍명희의 책에서나 나오는 거다. 갱은 어떻게 해서든지 갱이고, 화적패당도 결국 화저패당일 뿐이다. 네드 켈리와 켈리 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내 생각엔, 오스트레일리아가 침략을 당하거나 원주민만큼 심한 수탈의 역사를 갖지도 않았고, 나라 자체의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만일 구세계 정도로 오랜 경험을 축적했더라면, 네드 켈리의 행위는 저 미하엘 콜하스 같은 불행한 운명의 민란 지도자 정도로 미화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가장 최선의 미화 왜곡은 우리나라의 <장사의 꿈> 같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장사로 태어났지만 이를 알아낸 권력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영웅 같은 거.

 

 

  오늘은 작품의 스토리는 거의 소개하지 않았다. 네드 켈리 Ned Kelly가 실존인물이고, 구글 검색하면 위키피디아에 켈리의 일생이 그대로 나와 있을 뿐더러 사진, 교수형 장면, 심지어 데스 마스크까지 다 볼 수 있어서 완전히 읽은 느낌으로만 독후감을 썼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를 읽으면서 알 수 있던 건, 나는 개척시대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피터 케리에게 첫번째 부커상을 안긴 <오스카와 루신다>도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두 작품 다 권위있는 상을 받았으니 그저 내 소양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 뿐임은, 다행스럽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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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2-27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폴스타프님의 페이퍼는 제가 (감히) 댓글 남기기 어렵게 정질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오늘은 총상 소독 장면을 세세히 비교하시는 데서 압도됩니다^^

테즈메이니아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온라인 자료로 읽었는데, 리처드 플래너건이 그 지역 출신이라 하셔서 제가 온라인 클릭질로 얻은 정보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지네요^^

Falstaff 2021-12-27 11:20   좋아요 1 | URL
아휴, 뭐 그 정도 가지고 이러십니까. ㅋㅋㅋㅋㅋ 얼굴 붉어지게시리...

혹시 테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모두 죽었다는 거 아닐까요? 거기 사람들 살고 있어요. 하다못해 관광 안내원 또는 입도 금지라면 사람들 접근 못하게 지키고 있는 관리인들이 있을 거 같은데요. 원주민을 몰살했다면, 20세기 중반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들이라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얄라알라 2021-12-27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지금 제가 제 댓글 다시 읽어보니 ˝정질 정보˝는 뭘까요? ㅋㅋㅋㅋㅋ‘정밀‘을 ‘정질‘로 쓰니 ‘저질‘로 잘못 읽으면 큰일 나겠습니다 ....ㅇㅎㅎㅎㅎ 네, 원주민이 모두 사망했다, 마지막 원주민은 인류학자들이 연구대상 삼았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의 거주인을 말하는 건 가보네요

Falstaff 2021-12-27 14:31   좋아요 2 | URL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자들이 원주민은 ˝애버리지니˝라 부르면서 아예 불가촉 원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 이들을 미개인에서 건져내는 프로젝트를 만듭니다. 1900년 부터 1970년까지 무려 70년 동안 애버리지니 원주민의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아 백인 가정에 입양해 도덕과 종교 등을 배우게 하는데 말이 그렇지 급여 없는 하인으로 써먹습니다.
테즈메이니아는 죄수 가운데서도 가장 죄질이 안 좋은 죄수들만 골라서 보낸 곳이라 그곳 원주민들이 제일 가혹한 고통을 당했을 것 같네요.

ㅎㅎㅎ 제가 잘 알아서가 아닙니다. 지금 마침 패트릭 화이트가 쓴 <전차를 모는 기수들>이란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이 책의 무대가 1950년대 오스트레일리아라서 적절하게 아는 척을 할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ㅋ 인생이란!

얄라알라 2021-12-27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밀을 수정. 초정밀이라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