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브루노 슐츠 작품집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61
브루노 슐츠 지음, 정보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평점 :
.
브루노 슐츠는 생전에 딱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이 두 작품집을 한 권으로 묶어 <저주토끼>의 저자인 정보라가 번역해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61번으로 출간했다. 그것이 2013년.
폴란드 문학이 우리에게, 아니면 적어도 내게 이름을 알린 것은 <쿠오바디스>를 쓴 헨릭 시엔키에비치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알게 된 비톨트 곰브로비치, 그리고 201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아 장안의 종잇값을 올린 올가 토카르추크 정도였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매력적인 장편소설 비트키예비치의 <탐욕>을 읽는 행운을 누렸고, 이 작품의 해설 속에서 비트키예비치에 못지 않는 난해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작가 브루노 슐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출간한지 9년이나 된 을유세계문학 61번 책을 주저없이 사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트키예비치와 곰브로비치, 그리고 슐츠. 도대체 1920년대와 30년대 폴란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하 역자의 작품 해설을 인용함.) 브루노 슐츠는 1892년 당시 갈리치아 왕국의 드로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유대교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슐츠 가족은 드로호비츠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는데, 책을 통해 짐작해보면 1층은 포목점이고, 2층은 슐츠 가족이 살며, 3층 이상은 다른 사람들이 입주한 아파트 형태의 집 구조를 가졌던 거 같다. 이 아파트가 슐츠 씨의 소유인지 아닌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아닌 것으로 봐야할 것이 포목점 하나에 모든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었다고 하니 방세를 받아 살림에 보태지는 않았을 터. 1차 세계대전 와중이던 1915년 아버지가 병사하고 11세 위의 형 이지도르마저 1935년에 타계하는 바람에 슐츠 혼자 과부 형수와 조카, 19세 위인 과부 누나와 조카들의 생계도 전적으로 슐츠가 책임을 져야 했다고 하니, 미술 교사로 근근이 먹고 살던 그에겐 어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슐츠는 에로틱하고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기묘한 분위기의 미술작품집 《우상숭배의 책》을 내 폴란드에서 어느 정도 주목을 받기도 했고, 자신의 모교인 김나지움에서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하지 않아 기간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위키피디아는 브루노 슐츠를 작가, 미술가, 문학비평가, 교사로 소개한다. 이후 슐츠는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비트키예비치, 데보라 포겔 등과 교류하게 되고, 1937년에는 비톨트 곰브로비치, 레오폴트 스타프 등 주요 인사들과 친교를 맺는다. 더욱 놀라운 건, 인생을 통틀어 딱 두 권의 단편집만 낸 슐츠가 1937년 폴란드 문학 아카데미 훈장을 받았다는 것.
그러나 영광의 시절은 짧았다.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터가 된 폴란드의 게토에 머물러야 했던 슐츠는 1942년 11월 19일, 드로호비츠의 게토 거리에서 게슈타포의 총에 뒤통수를 맞아 길거리에 시신이 버려진다. 해설에 의하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을 위하여 빵을 구하러 나갔다가 총에 맞았다는 말도 있고, 게슈타포 경찰이 슐츠가 그려준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을 쏘았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어찌 됐던 당시에 유대인 시신을 함부로 수습하는 것도 금지사항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방치되었다가 다른 유대인 시신들과 함께 한꺼번에 매립된 것으로 추정한단다.
이 책은 두 권의 단편집 《계피색 가게들》과 《모래시계 요양원》을 실었다.
폴란드 문학에 과문해서 몰랐는데 브루노 슐츠는 20세기 세계문학사에서 자기 만의 특별한 영역을 가진 작가들,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 비톨트 곰브로비치와 더불어 특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폴란드에서 있었던 아방가르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고 한다. 전위예술. “기성의 예술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한 예술 운동 또는 그 유파.” 그러니까 애초에 아무 대비 없이 슐츠의 책을 읽겠다고 덤비면 난처한 입장을 당하기 좋다.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준비운동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소설 읽기의 스트레칭. 만일 소설 따위를 읽는데 무슨 준비운동이고 스트레칭이냐, 준비운동과 스트레칭? 아니, 무슨 같은 말을 두 번 하느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수사법, 모든 상징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출몰하는 일견 기괴한 작품을, 아름답게, 맞아, 맞아, 아름답게, 아무리 아방가르드 소설이지만 간혹 주머니 속의 바늘처럼 불쑥 삐져나온 아름다움을 찾기 위하여는 미리 어느 정도의 독서가 준비되어 있으면 더 좋겠다는 뜻이다. 부탁하니, 이 제안을 잘난 척이라 여기지 말아 주시기를.
당신은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면 카프카는 됐다. 곰브로비치의 <페트리두드케>는?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소위 아방가르드 적 ‘아름다움’은 어떻게 됐는가. 그걸 찾기 위해서 비트키예비치의 길고 긴 장편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전위적 아름다움은 그냥 책을 읽으면서 알아가는 것으로 치자. 어차피 아방가르드의 아름다움이나 그냥 우리 주위의 들꽃처럼 지천에 깔려 있는 아름다움이나 그게 그거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누구나 찾을 수 있을 터이니. 그러니 됐고, 여기에 (내가 특히 좋아하지 않는 작가 두 명만) 더 보태면 저 남미 사람, 아쉽게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아르헨티나의 맹인 작가 보르헤스와 초현실주의의 대표선수 앙드레 브르통. 이 정도의 예비 독서가 있으면 《브루노 슐츠 작품집》을 그나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나는 선독서가 있으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고 했지,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브루노 슐츠는 문자와 단어와 문장과 문단으로 헝클어진 작품을 만들어 당신의 대뇌 역시 마구 헝클어 놓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내가 읽은 슐츠는 특히 카프카 가운데서도 <변신>과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것 같았다. 그의 시각으로 보면 세상과 인물과 객체는 관찰자의 시점에 의하여 수시로 다양하게 변하는데, 이때 변하는 정도가 카프카나 브르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혁신적으로 변용한다.
역자 정보라는 해설을 통해 “폴란드의 아방가르드 작품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무척 이해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충격적이고 그러면서도 더없이 매혹적인데 어째서 매혹적인지 설명해보라면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브루노 슐츠의 작품도 바로 그러하다.”(p.419)라고 했다.
좋다. 정보라가 인디애나 대학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평론가가 아닌 작가, 역자라니 이 정도면 더 없이 솔직한 의견으로 접수할 수 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온갖 미사여구를 첨부하는 직업 평론가보다 훨씬 보기 좋다. 물론 이건 정보라가 하는 겸양의 말이다. 이후 해설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신화적 상상력와 풍성한 묘사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 슐츠의 소설이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쉽기는 하다.
브루노 슐츠의 단편집. 말이 단편집이지 딱 정형화시켜 놓은 한 가족을 일인칭 화자 유제프의 시선으로 관찰해서 연작 장편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계피색 가게들》과 《모래시계 요양원》을 읽으며 왜 내가 이 작품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설명해주는 평론가, 문학자 또는 요즘 각광받는 직업인 서평가가 있다면, 서슴지 않고 만 원 주겠다. 나는 브루노 슐츠의 책이야말로, 저번에 비트키예비치의 <탐욕>을 읽고 쓴 독후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건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재미는 아니더라도 매우 흥미롭게 읽은 건, 한 결론을 향해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힘이 아니라 특정한 장면이나 순간의 기분 또는 감상을 포착해서 그 상황을 마치 에세이처럼 설명하는 묘사, 그러니까 문장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어찌 쉬운 책만 읽을 수 있을까. 때론 난마처럼 뇌가 헝클어지는 고난도 겪어야 할 터. 이 책을 권하는 이유는 당신도 책 읽는 고생을 한 번 해보라는 심통이 아니다. 가끔 격렬한 스포츠를 한 후의 특별한 개운함을 경험하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 함부로 덤볐다가는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본전 생각이 간절해질 수도 있을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