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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 2020년 개정판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0년 2월
평점 :
에우리피데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극작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극의 긴박한 국면을 마무리하는 방법인데, 이때 극작가가 사용하는 것이 여태까지 극의 내용과는 별 연관이 없이 신을 포함한 초자연적 힘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요샌 의미가 좀 더 넓어져서 한 문제적 인간을 작품의 줄거리와 별로 관계없이 작가가 목숨을 거두어, 이른바 문학적 사형집행 한 방에 모든 갈등을 제거하는 것도 포함한다. 물론 이제 정말로 이렇게 작품을 쓰면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습작 작가라 하고, 이런 습작 열라 써 봤자 그럴 듯하다고 얘기하는 인간은 1도 없을 정도로 구식이다. TV 드라마에서도 이 비슷한 결말을 구경하기 힘들지만 20세기 말에도 의례 누구 하나 죽어 자빠져야 드라마틱한 결말이라 얘기할 정도였으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사실 대단한 발명이었음직도 하다.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써먹고 한 세기가 흘러 등장한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세기전 3백년 대에 여태까지의 이야기 밖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신들에 의하여 결말이 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작품의 결말은 전적으로 작품 이야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그리스 고전은 참. 한 마디로 하자면 적나라하다. 뭐 감정을 숨기거나 그런 거 없다. 그래서 2천5백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에게 읽히고, 연구하게 만들고, 심지어 전율하게 만들 수 있는 거 같다. 열 편의 비극을 담고 있는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1》. 이 가운데 살인에 의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건 한 편도 없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살인의 대상이 직계가족만 아니라면, 죽이고 나서도 죄의식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다. 대상이 어린 아이여도 마찬가지다.
친족 살해도 참 다양하다. 내가 처음 메데이아 이야기를 들은 것이, 분명히 십대는 아니었다, 아마 대학 시절이었던 거 같은데,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1》 같은 권위있는 역자의 번역이 아니라 그저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이 대단한 축약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에도 깜짝 놀랐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원전을 읽어보니 더 대단하다. 본문을 소개하는 것 대신에 <메데이아>의 1번 주석의 부분을 옮겨보자.
“천신만고 끝에 황금 양모피를 가져온 이아손에게 펠리아스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자, 메데이아는 펠리아스의 딸들 앞에서 늙은 숫양 한 마리를 토막 쳐 약초와 함께 솥에 넣어 끓여 (팔팔 끓은 양을 다시 살려) 젊음을 되찾게 해 주고 나서, 펠리아스도 같은 방법으로 회춘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그의 딸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토막 치게 한다. 그런 다음 메데이아는 효과 없는 약초를 주어 딸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되게 한다.”
실화와 전설, 신화를 통틀어 가장 엽기적인 여성인 메데이아는 이 일 전에 잘생긴 이아손한테 반해 조국을 배신하고 이아손과 함께 도망했는데 이들을 추격하는 오라비 압쉬르토스도 죽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죽이고 보는 거다. 이 메데이아-이아손 신화 가운데 에우리피데스는 후반부를 차용해 비극을 만들었다. 당대의 그리스 관객들은 이야기의 앞부분을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모두 마찬가지지만.
이올코스에서 펠리아스를 죽이고 추방된 메데이아-이아손 부부는 코린토스로 옮겨와 아들 둘을 낳고 잘 살다가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말 그대로 신화는 드라마틱해진다. 크레온이 마녀 메데이아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당장 코린토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메데이아는 왕에게 애걸복걸을 해 하루의 기한을 연장한다. 그리고는 드레스와 머리띠에 독을 묻혀 왕의 딸에게 결혼선물로 주는데, 드레스와 머리띠를 두르자마자 왕의 딸은 비참하게 살이 썩어 급사하고 만다. 이를 본 크레온 역시 딸의 몸에 손을 댔다가 같이 죽음을 맞는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에게 가장 큰 슬픔, 아이를 잃는 아픔을 주기 위하여 아빠 닮아 잘 생긴 두 아들을 칼로 찔려 죽여버린다는 신화.
이 신화를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있던 신화의 후반부에 기초하여 비극을 쓴 것이다. 신화에서 비극으로 변신을 해야 하고, 신화에 무슨 저작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상당한 부분은 작가가 임의대로 다시 해석하여 쓰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채집한 지 150년 정도가 지난 우리나라 판소리도 여러 본에 따라 이야기의 세부사항이 다른 것처럼 신화 역시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조금씩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비극마다 약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래서 네번째 실린 <헤카베>에서는 트로이를 폐허로 만든 그리스 군이 수많은 전리품과 노예를 싣고 귀국길에 오르는 순간 아킬레우스의 영혼이 나타나 트로이의 죽은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의 딸 폴뤼세네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여, 그의 친구 오뒷세우스가 폴뤼세네를 데리러 왔을 때 헤카베가 탄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반면에 아홉 번째 작품 <트로이아의 여인들>에서는 폴뤼세네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같은데, 제물로 정해졌고 이미 새하얀 목덜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아킬레우스의 무덤을 적신 후임에도 헤카베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그렸다. 그러니 여기선 A라고 이야기하고 저기서는 B라고 할 수 있느냐, 라는 비난은 옳지 않다는 말씀이다.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 때 드라마 작가가 원작을 약간 훼손하는 것은 타당한 권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를 극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여태까지 나도 그랬지만, 작품의 스토리를 가지고 에우리피데스를 논하는 건 조금 어색하다. 신화에는, 모르기는 해도, 메데이아가 이아손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한 것에 질투가 나서 이아손의 아들들을 죽여 복수했다, 정도로 묘사되어 있을 것을, 에우리피데스는, 이아손의 아들이지만 자기가 열 달 동안 품다가 직접 낳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절절한 회한과 고통을 노래하는 데 의의가 있다. 어차피 코린토스의 왕과 왕의 딸을 죽였으니, 메데이아는 사형을 모면할 수 없을 뿐더러, 살려두면 이들이 성장하여 복수를 꾀할 것이 틀림없으리라 판단한 코린토스 왕가가 두 아들 역시 죽이리라는 것을 아는 어미가 차라리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음을 맞게 하는 편이 좋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자, 내 마음이여, 무장해라. 왜 주저하는 거지? / 끔찍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범행이 아닌가! / 자, 가련한 내 손이여, 칼을 들어라! 칼을 들고 / 고통스러운 경주의 출발점으로 다가서도록 해. / 비겁자가 되지 말고, 아이들 생각은 하지 마. / 그들은 내 귀염둥이들이고, 네가 그들을 낳았다고! / 이 짧은 하루 동안만 네 자식들을 잊었다가 나중에 / 울도록 해! 네가 아이들을 죽이더라도 아이들은 역시 / 네 귀염둥이들이 아닌가! 나야말로 불운한 여인이구나!” (78쪽)
재미있는 비극(들)이다. 그러나 6백쪽, 열 작품을 연이어 읽는 것은 조금 무리다. 휴일 이틀을 온전히 제단에 올려놓아야 한 권을 읽을 수 있는데, 나야 이제 휴일 아닌 날이 없어서 가능하지 다른 분들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서 하루에 딱 한 작품 씩 읽는다 치면, 열흘. 중간에 휴일 이틀이 있으니 휴일엔 두 편 씩 읽으면 여드레 걸린다. 좋다. 연달아 읽으면 질릴 수도 있겠으나 마음먹고 여드레에 걸쳐 읽으면 작품마다 새롭지 않을까. 다만, 책값이 조금 비싸다. 책의 가치와 비교해보라, 이런 얘기 하지 마시라. 비싼 건 비싼 거다. 도서관 이용하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