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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평점 :
작년 한 시절에 신드롬 수준으로 독자를 열광시켰던 작품. 난 화이트헤드라면 대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떠올라서 일단 기가 팍 죽는다. 화이트헤드, 이 백두 선생으로 말할 거 같으면, 일찍이 야심차게 <관념의 모험>, 한길사, 한길 그레이트북 시리즈 1번에 빛나는 책을 폈다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밝히건데, 단 열 페이지도 읽어내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책을 번쩍 들고 방바닥에 내팽개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나아가, 철학이란 그냥 하면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듣는/읽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면서 말하는/글 쓰는 인간을 폼 나게 만드는가를 집중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위대한 철학자다. 그 이후 함부로 철학책에 접근하는 우를 범하게 되지 않았으니 안 읽어도 인생살이에 전혀 문제가 없는 철학책을 사고, 읽고, 독후감 쓰는 경제적, 시간적 낭비를 삼가게 만든 고마운 책, 고마운 철학자일 수도 있겠다. 철학? 이제 내가 읽는 철학책은 오직 금속공학을 다룬 것에 국한한다.
하여튼 콜슨 화이트헤드, 이이의 성씨 때문에 저 알프레드 노스 백두 선생하고 일가붙이인 줄 알아서 일찌감치 야코도 좀 죽었고, 한 번에 너무도 많은 독자들이 상찬을 거듭해, 이거 함부로 읽었다가 괜히 나만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코 깨지는 수가 있을 거다, 생각했을까? 아니. 여기서 더 솔직해져야 한다. 그저 제목을 대강 보고 책 읽기를 포기했었다. <니클의 아이들>이 아니라 <너클의 아이들>로 읽었던 거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코비드 19 이후로 늘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나는 다초점 안경을 이용하는데 마스크를 하니까, 처음 마스크 시작할 때가 아마 2020년 2월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안경을 벗고 다니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책 읽을 때는 안경을 벗고 읽었는지라, 취미생활엔 부족함이 없었다. 나머지 세상은 무척 혼미해졌다. 안경을 끼지 않고 사니 얼마나 좋은가, 눈에 뵈는 게 없어지니까 말이지. 근데 PC 화면이나 휴대폰 액정을 보면 조금씩 에러가 생긴다. 이래서 ‘니클’을 금속으로 만든 폭력 기구 ‘너클’로 읽었고, 그래 청소년 시기 난폭한 아이들의 생존기구나, 싶어서, 사나운 이야기를 유난히 싫어하는 취향 때문에 멀리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 헌책이 나왔기에 이제 한 번 읽어볼까, 싶어서 선택한 거다.
미국 조지아주의 주도 애틀랜타에서 남쪽으로 370 킬로미터를 내려가면 플로리다의 주도 탤러해시가 나온다. 플로리다, 라고 하면 의례 마이애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탤러해시가 명색이 주도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탤러해시에는 당연히 흑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쪽 사람들은 그곳을 프렌치타운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헤리엇이란 이름의 육십대 노파가 살았다. 이 할머니의 아버지는 길을 가던 백인 여자한테 길을 양보해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실관계 확인이나 사건 조사도 없었으니, 기소도 되지 않은 상태라서 판사는커녕 검사 얼굴도 한 번 못보고, 하여튼 죽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아도 답은 똑같았다. 그냥 죽었어. 백인 경찰들에 의한 폭력에 의하여, 라는 암묵의 인정.
탤러해시에는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기지, 육군 캠프 고든 존스턴과 데일 마브리 군 공항이 생겨 갑자기 흑백 군인들이 휴일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때 헤리엇의 남편 몬티는 동네 술집에 들렀다가 세 명의 사망자가 생긴 백인 군인들과 동네 흑인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몬티와의 사이에서 보기에 불안할 만큼 어두운 분위기의 여성으로 성장할 에벌린만 낳은 헤리엇은, 딸만 바라보고 키워 결혼시킨다. 사위 퍼시는 점잖고 무게있는 청년이었지만 아들, 헤리엇의 손자 엘우드를 낳은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다음에 과하게 야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퍼시는 집을 떠나 서부로 가서 행운에 도전해보겠다고 선언을 하고, 자기 아들 엘우드를 외할머니 헤리엇의 슬하에 남겨둔 채, 아내 에벌린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게 당시 보통의 남부 흑인 가정이었나보다.
헤리엇은 유서깊은 리치먼드 호텔에서 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근면하게 일을 해왔고, 딸 에벌린 역시 리치먼드에서 일 하다 절도사건에 연루되어 해고를 당했다. 딸이 사라진 후에 손자 엘우드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서 학교가 끝나면 호텔의 주방에서 숙제를 하던지, 읽을 거리를 찾아 읽던지 했는데, 이를 유심히 살피던 사장 파커 씨가 엘우드를 좋게 봐 언제라도 파트타임으로 자기 호텔에서 일을 하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정도로 엘우드는 소위 싹수가 있었다.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백인 상전한테 말대답 안 하고, 머리 좋고 등등. 그러나 엘우드는 4대에 걸쳐 한 호텔에서 일을 하는 게 어딘지 마땅하지 못한 거 같아서 이탈리아 이민인 마르코니 씨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말로 엘우드는 공부를 잘 해, 동네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갈 예정이라, 수입의 반은 생활비로, 나머지 반은 대학 등록금을 위해 저축하기로 할머니 헤리엇과 합의를 보았다.
엘우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조지아 주에서 한 흑인 여성이 버스를 타고, 법에 의하여 금지된 좌석에 털퍼덕 앉았고, 이를 마땅하지 않게 여긴 당국에서 여성을 처벌한 일이 발생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흑인이 극장에 들어가려 했다가 입구에서 처음엔 차갑게, 나중엔 폭력적으로 입장을 거절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미국 북부에서도 흑인들이 남부 지역으로 와서 흑인의 출입이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테이블을 점거하는 등의 흑인 인권운동이 발생한다. 할머니는 또 때를 맞춰 엘우드에게 마틴 루서 킹의 연설이 담긴 레코드를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었으니, 손자는 할머니의 뜻에 맞게 단단하게 인권 의식을 다지게 된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힐 선생을 마침 탤러해시에서도 벌어진 시가행진에서 만나 친한 관계를 맺는다. 엘우드가 학과 공부도 탁월했던지라 힐 선생은 탤러해시 남쪽에 있는 흑인 전용 대학인 맬빈 그리그스 기술대학에서 탁월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대학 강좌를 개설해 참여할 것을 권한다. 엘우드는 영국 문학에 관한 강의를 듣기로 하고, 첫 수업을 받기 위해 11 킬로미터를 걸어가던 중 흑인이 운전하는 눈부신 초록색 61년식 플리머스 퓨리 승용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순찰차의 검문을 받는다. 순찰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플리머스를 훔치는 건 검둥이 뿐이야.”
차량 절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미성년자 엘우드에게 판사는 교도소가 아닌 감화원 격으로 기숙 고등학교에 준하는 니클 아카데미로 갈 것을 선고한다.
처음엔 돌볼 사람이 없는 소년이나 경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모아 인성교육과 직업교육을 시켜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려고 만든 니클 아카데미는, 점차 감화원 비슷한 곳으로 변하면서 책에 의하면 흑백 차별없이 원생들에게 끝까지 가는 수준의 폭력을 구사한다. 1921년 기숙사 화재 당시엔 43구의 소년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 가운데 일곱 명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세 명은 일종의 감옥에 갇혀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로 질식해 죽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고고학과 학생 조디는 니클 캠퍼스 북쪽, 낡은 작업장과 학교 쓰레기장 사이에서 비밀묘지를 발견한다. 유해를 조사해보니 금이 가거나 구멍 뚫린 두개골은 물론이고 대형 산탄이 갈비뼈에 잔뜩 박힌 백골이 한 두 구가 아니었다. 이런 놀라운 발견은 ‘당연히’ 흑백의 차별이 어쨌거나 겉으로는 사라진 2천년대였으며, ‘당연히’ 전국적으로 방송을 탔고, 아직 늙어 죽지 않은 유일한 ‘얼’이란 이름의 당시 교사는 폭력이 저질러진 적이 없었다고 인터뷰를 한다. 그러나 니클 출신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며 5년째 연례 동창회를 열기도 하는데, 뉴욕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엘우드 커티스는, 누군가가 스펜서 학생주임에게 복수하기 위해 직접 가죽 채찍을 만들어 스펜서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몇 시간 동안 창문을 바라보다가, 복수하지 말자고 스스로 설득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읽고, 그냥 끝까지, 계획대로 해치우지 왜 그랬어, 라고 독백을 한다.
도대체 니클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직접 읽어보시라. 너클은 소수를 상대로 하는 반면에, 니클은 6백명에 달하는 감화원 원생 전부를 대상으로 사나운 폭력을 저질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