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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울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21년 10월
평점 :
≪라스트 울프≫를 읽으면서, 이번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접경을 이루는 두에로 강변에 아홉 마리 남은 늑대에 관한 서사보다도, 문장이 끝나지 않고 쉼 없는 쉼표를 나열시킬 때 독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관해 생각이 많았다. 작품의 앞 부분 조금을 인용해보자.
“그저 웃음이 났다, 거리낌 없이 튀어나온 웃음이었지만, 그러다 한편으로는 허무함과 다른 한편으로 멸시감 사이에 어떤 차이라도 있는가, 또한 그 모든 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왜냐면 이게 늘 제 곁에 따라붙어, 돌이킬 수 없이 세상만사 모든 것에 늘 상관이 있고, 세상만사,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것에서 번져나가니까, 게다가, 실로……”
이게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중편 <라스트 울프>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보이는 것처럼 “그저 웃음이 났다,”의 구두점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역자 구소영은 헝가리 어가 쉼표만 찍어 놓으면 얼마든지 길게 늘여 쓸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라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정작 딱 한 문장으로 된 작품을 정말로 보고, 읽게 되니, 혹시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의도적으로 문장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구분짓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말, 문장의 경우 주어, 목적어, 동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주어는 가끔 생략되기도 한다. 바로 쓴 문장처럼 “~다.”로 대부분의 문장이 끝난다. 그래 인용한 부분에 첫 절 “그저 웃음이 났다,”가 쉼표로 끝나는 바람에,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독자로 하여금 “~다”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절을 끊지 말고, 쉼표의 취지에 맞게 아주 잠깐만 숨을 고른 다음 곧바로 이어서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강박인지는 모르겠다. 강박이 아니라는 전제로 말하자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자신의 중편 <라스트 울프>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라고 주문한 것일 수 있다. 이 작품보다 더 짧은 <헤르먼>의 경우에는 마침표가 찍힌 문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애초에 상상을 초월하게 긴 문장을 선호하는 작가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
전직이 교수인지, 하여튼 한 시절 교수라고 불리기도 했던 남자가 베를린의 꾀죄죄한 주점 슈파쉬바인의 바에 앉아 제일 싸구려 맥주 슈턴부르크 한 잔을 두세 시간, 혹은 서너 시간에 걸쳐 핥아 먹듯 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이이에게 어떤 것을 주문하겠느냐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슈턴부르크 한 조끼를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테이블에 텅, 내려놓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를 상대로, 한 때 자기를 초대한 마드리드의 단체 덕택에 스페인의 엑스트레마두라에 간 이야기를 한다. 두에로 강변에 모두 아홉 마리로 구성된 늑대 집단이 있었는데 이 늑대들이 좀 얌전하게 있었더라면 북아메리카에선 늑대 복원 사업을 시작하던 1980년대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을지도 모르건만, 비록 늙고 약한 것들에 해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가축을 잡아먹는 바람에, 그리고 늑대라는 유럽인들의 음습한 악마주의의 영향으로 괜히 과장된 두려움 때문이겠으나, 한 마리, 한 마리 씩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래 독일의 싸구려 맥주 슈턴부르크 한 잔을 앞에 놓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헝가리인 바텐더처럼, 독자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으라는 작가의 취지로, 끊임없이 쉼표를 나열해 단 하나의 문장으로 작품을 쓴 것이라고 이해했다.
못 믿겠으면 읽어보시라. 마치 내가 헝가리인 바텐더인 듯, 처음엔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리 중요해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라고 어깃장을 놓고 싶기도 하고, 거기다가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문장이 낯설기도 하고, 하필이면 읽은 날이 휴일 낮술에 절어 피곤이 가중된 월요일 오전이라면, 호시탐탐, 어떻게 책을 그만 읽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까, 궁리를 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늑대 이야기가 나오면, 여태 했던 딴짓을 멈추고 솔깃해 교수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헝가리 출신 바텐더처럼, 어느새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자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독자가 <라스트 울프>를 단숨에 읽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함께 실린 <헤르먼>은 같은 사건을 “사냥터 관리인”과 “기교의 죽음”이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냥터 관리인은 곧바로 헤르먼이란 사람을 지칭한다. 두 작품을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읽으면 모르겠지만 <라스트 울프>를 읽고 바로 <헤르먼>까지 읽으면, 사실 늑대와 헤르먼이 달리 발음하는 하나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벌판과 삼림지대가 같이 있고, 이에 걸맞는 음산하고 비정하고 잔인한 동화가 널리 구전되는 동, 북유럽의 경우에, 늑대와 헤르먼은 이들 주민에게 막연한 공포를 제공하는 개체들이다.
물론 늑대와 달리 사냥터지기이자 능숙한 덫 사냥꾼인 헤르먼은 나중에, 살짝 맛이 갔다고 봐야 할 수준이 되어, 주민들이 제시한대로 과하게 번식한 포식동물을 사냥하다가, 결국엔 진짜 광포하고 무모하고 최상위의 포식자인 사람을 대상으로 덫 사냥을 시도하고 성공하는 캐릭터로 변모해, 두에로 강변의 늑대보다 훨씬 위험한 야수가 되긴 한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헤르먼이야말로 유럽의 마지막 늑대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 책에 표제작하고 함께 실릴 수 있었지 않을까 싶었다.
<헤르먼>의 첫번째 판인 “사냥터 관리인”은 맞던 틀리던 하여튼 읽어내긴 했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건 두번째 판 “기교의 죽음”의 부제를 “미시마 유키오와 상반하여”라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정작 본인은 별다른 이상이 없음에도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입대하지 못해 전쟁에도 나가지 못했던 인물이 자위대 앞에서 미국과 굴욕적인 군사협정을 맺고자 하는 현 정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극우 보수적 연설을 한 후에 할복 자살을 해치운 미시마 유키오를 이야기한 건 아닐 터. 짐작하건데 그의 정치적 행보와 전혀 다른 극단의 심미적 문장과 미학을 염두에 두고 부제를 지었을 것이라 보지만, 사실 내가 미시마 유키오를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감이 안 오기도 할 터이다.
짧은 작품들이다. 가볍게 접근했다가 코 깨지기 쉽겠다. 그렇다고 못 읽을 만큼 어렵지도 않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읽기로 마음먹으면 충분히 즐길 만하다. 여러 독자의 감상평을 듣고 싶은 책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