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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경애의 마음>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 김금희의 작품집을 선택할 때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아홉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너무 한낮의 연애》.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표제작과 2015년 젊은작가상 입선(이라고 해두자)작인 <조중균의 세계>를 망라하고 있는데, 역시 두 작품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물론 <세실리아>, <반월>도 마음에 찼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건 서평이나 분석을 포함한 어떠한 형태의 평가가 아니라, 이 책 《너무 한낮의 연애》 읽기를 막 끝내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을 적고 있다는 것을, 보잘것없는 독후감을 읽어주시고 계신 분들은 이해해주기 바란다.
김금희는 전에 읽은 수작 <경애의 마음>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너무 한낮의 연애>와 <조중균의 세계>에서도 직장생활을 하다 보직을 박탈당하거나(<너무 한낮…>), 직원들과 격리된 생활을 하는(<조중균…>) 급여생활자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나는 특히 <조중균…>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필경사 바틀비가 21세기 서울에서 산다면 영락없이 조중균씨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허먼 멜빌이 극단적인 바틀비를 창조하여 다분히 우화적 느낌까지 내긴 했다. 이에 김금희는 정상적이지 않은 외통 고집의 조중균에게 부적응으로부터 시작하는 당연한 소외와, 소외의 결과로 탈락까지, 빠짐없는 종합선물세트를 준비했다. 바틀비와 조중균씨의 공통점은 “I would prefer not to.”선언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고 자신이 준비한 수첩에 확인 사인을 요구하는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의 비타협성에 있다.
내가 조중균씨의 이야기를 읽으며 단박에 바틀비를 생각하게 된 것은, 조중균씨의 태도를 포함한 모든 것에 들어있는 우울과 치유할 수 없는 부적응 증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대학시절 필수과목 시험을 볼 당시에, 이름만 적고 시험시간을 채워 퇴장하기만 하면 좋은 학점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시험지에 ‘지나간 세계’라는 시를 적고 이름은 쓰지 않은 채 답지를 제출해 군대에 가야했던 인물. 그러니까 매사에 타협불가능한 사람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을 직접 만나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조중균씨는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에 잘못된 것이 없어서 독자로 하여금 동정과 안타까움이 들게 만든다. 물론 정말로 함께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작품 속 사무실 직원들은 복장이 터졌겠지 싶기는 하지만.
이에 비해서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는, 공감할 수 있기는 한데 아쉬웠다. 영업팀장으로 근무했던 주인공 필용은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융통성을 발휘하고는 했는데 그게 주로 현금과 관련된 융통성이어서, 이것 때문에 영업팀장에서 보직 해임을 당하고 시설관리팀의 직원으로 전보된다. 필용은 직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기가 뭐해서 좀 멀리 떨어진 종로까지 걸어가 맥도날드 햄버거로 때우고는 했다. 그러다 작은 공연장을 발견하고, 한 시절 유학을 위해 영어 학원에 같이 다니던 ‘양희’라는 6년 후배를 떠올리고, 당시 그 아이가 쓰던 연극 대본 <나무는 크크크 하고 웃지 않는다>가 생각났는데, 맥도널드에서 바라다 보이는 공연장에서 주위 사무실의 급여 생활자를 위한 작은 공연의 제목이 <나무는 ㅋㅋㅋ 웃지 않는다>라서, 양희가 배우는 아닐망정 혹시 연출을 하는 연극이 아닌가 싶어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공연은 얼굴까지 의상을 뒤집어 쓴 배우가 나와 관객 가운데 한 명을 무대에 끌어올려놓고 마주 앉아 서로 마주보는 것이 다다.
아쉽게도 나는 이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것으로 관련 정보는 잊고 있었지만 작품의 뒤에 작은 글씨로 써 놓았다. “연극의 형식은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예술가가 여기 있다>에서 착안했다.”
뉴욕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퍼포먼스에서는 이이가 젊었을 때 정말로 연애했던 옛 연인이 붉은 드레스를 입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앞에, 마리나가 모르는 상태로 등장해 서로를 마주보다가 몇 초 후에 눈물을 펑펑 쏟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리나 앞에 나타난 초로의 신사가 아우, 정말 멋있게 늙은 남자라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뭐 그럴 수 있다. 기존에 있었던 퍼포먼스를 차용해 사용할 수도. 그러나 좀 아쉬웠던 건, 단편소설의 분량, 널럴한 편집의 34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작품에서 퍼포먼스가 여러 차례, 적지 않은 분량으로 나온다는 거. 작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한 번 짜보는 노력을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아울러 보직해임을 당한 것도 모자라 한직인 시설관리팀의 팀원으로 발령 난 필용의 성격이 좀 약하다. 회사는 필용을 문제사원으로 찍어놓고 특별히 관리하는 중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다. 김금희는 회사생활을 정말로 해본 적 있는 것 같지만, 인사이동 결과 퇴직 권유 수준의 한직으로 발령받아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필용의 처지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특히 인사팀장은 공연관람을 위해 점심시간 몇 분 일찍 외출해 몇 분 늦게 복귀하는 필용에게 최하점의 인사평가를 주고, 가랑비에도 안 젖게 조심하라고 주의시킨다.
약하다. 필용의 암산에 의하면 그간 자신이 빼먹은 시간이 하루, 즉 여덟 시간은 안 될 거라고 하는데, 그 정도면 인사위원회 회부해 징계절차를 밟아 중·약 정도의 징계를 받아야 한다. 팀장까지 경험한 필용 역시 이를 알고 있어 그렇게 오래 근태를 태만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소외당할 때 더욱 공격적인 성격으로 바뀐다. 내가 본 필용의 성격은 너무 약하다.
그러나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를 마음에 차지 않게 만든 건 역시 중요한 제재인 “차용한 퍼포먼스” <나무는 ㅋㅋㅋ 웃지 않는다>가 작품에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자기 아이디어를 쓰지 않으면, 이미 경험한 독자는 하품을 멈출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아이디어 짜기 피곤해? 그럼 글을 쓰지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