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동방 김소진 문학전집 6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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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내가 '김소진'이라니.
그의 이름을 검색해 관련 기사나 게시물들을 읽어 보고 그가 펴낸 책들이 무엇이 있나
살펴보고 그의 개인적인 사정은 어떠했나를 찾아보던 밤이 지난 가을이었을까 늦여름이었을까.
우연찮게 보게 된 '김소진'이라는 소설가의 짧은 생애와 역시 소설가였던 그의
아내 함정임의 사별 후 이야기에 아마 한밤에 뭉글뭉글하게 부푼 감상이 찔끔했을 것이다.
여하튼 그 감정 덕분에 나는 김소진 전집 6권과 『소진의 기억』, 『동행』을 과감하게?
주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집과 함께 주문한 두 권은 그를 잘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의 아내였던 소설가 함정임의 심정은 어떤가했기 때문이다.
몇몇 주목하던 작가들의 출판 동향 정도만 관심이었지 그동안 '김소진' 이라는 작가는 내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 그가 첫 소설을 쓰고 마지막 작품도 채 끝내지 못하던 그 시간동안 나는 문학이니 소설이니
하는 것에는 문외한이었다.
여하튼 주문한 책이 도착해 다른책들과 함께 윗켠에 쌓여 있기를 몇 달째. 이제 겨우 한 권을 읽었다.
원래 지르는 건 잘 하는데 읽는 건 영 시원찮다.

『그리운 동방』은 전집 제일 마지작 권인 6권이다. 산문들로 이뤄졌는데 작품보다 산문을 먼저
빼든 건 그의 개인적인 목소리와 개인사 그리고 소설 이외의 글들에 나타난 그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게
그의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다.

'발문'을 쓴 소설가 성석제의 말을 보자면 그는 참으로 '많이'쓴 작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소진'해 버린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런게 운명이란건가 싶다.
직장을 다니면서 펴 낸 작품수로는 여간 독한게 아니라는 말을 할 정도다. 그후 전업작가가 된 후로도
그의 작품 생산력은 대단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김소진' 이라는 이름을 읽으면 나는 김'소진'이라는 식으로 그의 이름이 유난하게 읽혀진다. 너무
빨리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다 못해 시간이 부족해서 할 말을 다 못한 소설가. 그렇게보면 '절필'을
선언할 수 있었던 작가들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그의 산문은 그의 자의식이 생성된 환경과 배경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첫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소설가와 결혼하게 되었는지도 약간.
김소진은 젊은 작가군들의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게, 낯설고 생경하지만 맛있는 우리말을 곧잘 구사한다.
문장 곳곳에 박혀 빛나는 그 말들을 읽는 재미는 톡톡하다. 그가 '방위'복무를 하면서 국어사전을
탐독하고 정리한 결과라고 한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의 전집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면 이
기쁨은 더욱 커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가 1997년에 세상을 등졌으니 산문 속의 시간은 10여 년 전이다. 그기 인터뷰 했던 내용을 보자면
이때 벌써 이런 생각을 한 사람도 있구나 싶고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건 없구나 하기도 한다.

세상에 없는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어떤 건 고전이 되어 읽힌다. 고전을 읽으며 작품엔 흡입되지만
그 작가가 지금은 세상에 없다는 것엔 별반 감정의 동요는 없다. 너무 먼 시간의 격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 김소진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남을진 알 수 없지만 꽤나 두툼하게
묶여진 그의 전집 한 권 한 권을 보자면 세상에 없는 그의 작품을 하나 둘씩 따라 읽어가는 건 어쩌면
고로운 독서가 될 듯하다.


관심 도서
볼프강 보르헤르트, 『오월에, 오월에 뻐꾸기가 울었다』
허균, 『숨어사는 즐거움』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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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황홀 - 보이는 것의 매혹, 그 탄생과 변주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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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온갖 잡다한 시각적인 것들의 기원에 대한 저자의 기록.
약 480개에 달하는 사진과 그림 등 그 자료의 양과 시시콜콜한 사실들의 언급에는
놀라움을 나타낼수 있겠지만, 넓다보니 깊지 못한점이 내내 '이건 뭐니?'했다.
또한 저자 자신이 '일본인'이란 것에 경도된 게 아닌가 싶은 설명이 군데군데 보여
썩 달갑지 않다.
시각적인 것들의 '기원'에 대한 저자의 노력에 비한다면 한국어판 제목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황홀? 과연 그러한 황홀감이나 황홀경에 대한 책인지 누구보다 간파했을 편집진들이 정한
제목 치고는 좀 아니올시다.


엄청스레 많은 이미지들과 꼭 마침표로 한 쪽을 끝내야 했던 편집진들의 노고가
대단했으리라 짐작된다. 나 같으면 쌍욕 수십 트럭은 퍼붜가면 진행했으리라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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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 인생의 답을 책에서 구하다
허연 지음 / 해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약 20일만에 초판 2쇄를 찍었음.

이런 종류, 특정인의 독서일기를 따라 읽는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와 더불어 한 권 속에서 다양한 책을 소개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소개에 따라 목록을
만들고 취사선택하는 기쁨 또한 더할나위 없음이로다. 그러나 문제는 지를 책도 많고 질러놓은
책도 많은데 진도가 나가지 않는 다는 점이렷다. 일종의 지적 허영심의 표본되겠다.
여하튼 한 권의 책 속에서 여러 권의 책에 숨겨진 멋진 말들과 그 말을 옮겨 적은 저자의 감정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쾌재를 부를만하다. 물론 저자의 선택에 일방적으로 따라가는거 아니냐
하겠지만 독서란 행위가 그런거 아닌가.
덕분에 눈이 번쩍번쩍 뜨이는 책들을 알게 되어 아주 만족스런 독서였다.


12p-우리는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한다. 난 그 번역이 일본의 한 대학생이 번역한 걸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오해는 바로 그 번역에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무정부주의자'라는 번역 때문에 나는 '아나키스트'하면 정부가 없는 혼란 상태를 먼저 떠올렸다. 아나키스트는 러시아 어인 '트라보로 아나르키아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그 어원이다. '선장 없는 배의 주인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서 아나키스트는 '자유연합주의' 정도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내막도 모르고 '아나키스트'를 들먹댄다면 공부 좀 해야할 듯 싶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펴냄,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공산당 선언-이진우 번역 책세상

51p-'인간은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건에 반응할 뿐이다.'
52p-'존재가 인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따라 인식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데이비드 베레비 에코리브로 펴냄

58-공익광고에는 일종의 '폭력 코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옳으니 너희들은 따라 하라'는 일방적인 지침이 담겨 있는 것이 공익광고다.
폭력과 상스러움-진중권 푸른숲 펴냄
태극기의 정체-김상섭 지음 동아시아 펴냄
'공익'이라면 무조건 예스여야 한다는 생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공익'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할 듯.

데루수 우잘라-갈라파고스 펴냄

208p-죽음을 함께 못 한 사랑은 모두 실패한 사랑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대부분 실패다. 남겨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억하는 일뿐이다.
눈물이란 무엇인가-태학사 펴냄
소설가 김연수가 <출판저널>에 올린 구절이 저자를 단박에 사로잡았다는 대목에 나도 눈이 번쩍@@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감성은 다르지 않은가 보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심노승 이라는 선비의 글을 모은 것이다.
옛 글들을 다시 한글로 옮긴 글들을 보면 그야말로 절창인 글들이 많다. 오늘날 난다긴다하는 글쟁이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얕고 가벼운 감각이 판치는 마당에 이런 글들은 그야말로 보배다. 필독!

꽃잎 한 조각 날려도 봄은 줄어들거늘
바람 불어 만 조각 꽃잎 날리니 진정 사람 시름겹게 하네
지려 하는 꽃이 눈을 스치는 것 잠시 바라보고
몸 상한다 하여 술이 입에 들어감을 마다하지 말리라
무엇 하러 헛된 명예에 이 몸을 얽어매리오 -두보의 시 曲江
당시-을유문화사 펴냄 김원중 번역

287p
'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을 것이며,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 덮인 봉우리가 위대한 것은 도처에 등산가의 유체가 묻혀 있기 때문이며, 바다가 위대한 것은 역시 곳곳에 파손된 배의 잔해가 떠다니기 때문이다. 인생이 위대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늙음과 필연적인 이별 그리고 영원한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문화답사기-미래 M&B 펴냄 위치우위

'어쩌면 끝이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상상의 목적지 말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멈출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멈춘 것뿐이다. 그래, 멈출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폐허의 도시-열린책들 펴냄 폴 오스터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펴냄
폐사지만을 돌아본 여행기.
그러게 그 빈 폐허에 가서 한참 앉아있어보고 싶네

297p
'일상생활에서 기술이나 신념, 허위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오직 본질만이 남는다.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달리기다.'
맨 다리로 달리든 자전거를 타고 달리든 결국 잡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으며 달리는 것. 동감.

308p
"남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어요."
슬픔이여 안녕-프랑수아즈 사강

312p
책에는 1980년대 <허슬러> 지 발행인인 포르노 제국의 황제 래리 플린트와 도덕적 다수파를 대표하는 폴웰 목사가 벌인 재판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법원은 플린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악의에 가득 찬 표현'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주관적 기준이고, 이 표현만으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제한이 된다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었다. 포르노 제작자든 누구든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한 명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결국 모든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선례가 된다는 걸 가르쳐준 중요한 판결이었다. 포르노 제작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 의아할 수 있지만 당시 법원의 결정은 훗날 표현의 자유 논란에 중요한 기준점 역할을 했다.
세상을 바꾼 법정-궁리 마이클 리프 외 지음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나 외국에서도 코메디 같다는 사건과 맞닿아 있는 사건 같다. 미국에서 이런 거 좀 배워라.

내가 읽은 책과 그림-씨앗을 뿌리는 사람 펴냄 라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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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키드 - 정신을 놓자! 세상이 모든 사물이, 마술처럼 보일 것이다
김경주 지음 / 뜨인돌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펄프 키드 김경주 뜨인돌 2008.10

펄프 키드는 우리말로 잡종, 잡놈, 통속적인 놈 정도의 뜻으로 해석될 것 같다. -5p

... 펄프픽션이란 미국의 192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 값싼 펄프 종이에 인쇄되어
간행되던 통속잡지를 말한다. -6p

이 책의 글 절반은 KT&G에서 연재 제안을 해 와서 <<상상마당>>웹진에 일주일에
하나씩 올렸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 추가했다. -8p


시인 김경주의 그야말로 '잡'스러운 글들을 모은 책이라 하겠다. 첫 시집으로 대단한
반향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시인의 글모음이니만큼 그를 알고 있는 치들이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기획거리의 소산이겠다.

첫 시집이후 그가 자신의 말들을 줄줄이 책으로 펴내고 있는 '현상'에 대해 그의 첫 시집
애독자였던 한 사람으로써 가지는 우려랄까 뭐 그런 감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너무 많은
말들을 '막' 쏟아내는 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시만 써서 살 수 없으니 닥치는대로 써야
하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연재'때문에 썼든 써논 걸 연재했던 알 바 아니겠으나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옳았다.
그냥 술술술술 읽힌다. 한번쯤 옛일을 돌이켜 볼 만한 사물들과 애피소드에 기대어 괜히
지난 일을 상기해 볼 정도의 글들이다. 그야말로 잡놈의 잡담일 뿐이다. 잡놈이기를 희망
하는 저자의 바람이 적절하게 구사된 한 권의 책인것 같다. (괜히 질렀다)

+
분량이 많지 않은 원고를 (때론 어거지로)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게 출판사들
본분의 한 가지다. 밥벌이가 그 바닥이다보니 어설픈 원고와 어설픈 저자들의 말들이
어떻게 해서 책으로 만들어 지는가 알게되고 눈 빠지는 수정 작업도 해보다 보니 이런 저런
책들을 보면 책이지만 책 아닌 것들도 많고 출판이라는 '문화'사업의 간판 뒤에서 주판만 졸라~
튕기는 왕 속물들이 판치는 것도 안다.
머... 본 도서도 그런 류에서 그닥 거리가 멀다고 보진 않는다. 행간을 어벙벙하게 한 편집만
봐도 그렇고 연재된 원고를 잘 물고와 책으로 만들 아이디어를 낸 기획도 그리 나이스해 보이진
않는다. 무엇보다 제일 실망(또는 짱)난 건 곱씹을 만한 그런 건더기가 별로 없는 멀국 같은
본문의 내용이다. 아무리 '잡'것을 표방한 펄프키드의 펄프픽션이라고 당당하게 까발렸다고
해도 말이지. 물론 저자의 이름 석 자에 정신줄 놓고 질러버린 그래서 책값의 5% 정도를 저자에게
던져 준 내 잘못이다만 말이지. 지고지순한 문학도의 진정성을 바라는 게 아니다. 욕심이겠지만
'최소한의 성의'를 바랬다고 한다면 내가 잡놈인 건가?


++
김경주의 思物놀이 라고 해서, 그걸 보고 김선우의 事物들 이나 김소연의 마음사전 같은
그런 책과 말들을 만나고자 막연히 무작정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
본문의 종이를 왜 형광등 처럼 하얗기만 한 종이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책이 참
'싼'티 가 난다. 편집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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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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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이후 10년 동안 쓰지 않다가 다시 시집을 낸, 내내 궁금케 했던
허연의 두 번째 시집
일찍이 허무를 알버린 자들이 시인이라는 해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허연
시의 주조는 허무다 시 편 곳곳에 재미없고 허무한 세상사에 대한 말들이다
그래서 허연의 시를 기다려 왔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왜 쓰지 않았는지는「휴면기」를 통해 밝히고 있는듯 하다
어찌보면 이제 한풀 꺾인 시인의 허무풀이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니면 이마저도 재미가 없어 영영 안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허무 쓰기가
자리매김 되기를 바란다. 덧붙여 언제나 나쁜 소년으로 서 있어 줄 것도 당부 한다.
언젠가 계간지에 발표했던 「시정 잡배의 사랑」이 실리지 않은 건 의외다.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시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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