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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 푸르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33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11월
평점 :
시인 최승자 그가 펴낸 '이 時代의 사랑', '즐거운 日記',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이상 네 권의 시집을 펼쳐들고 있는 내내 드는 생각 느낌 그림 그러한 것들이 그리 유쾌한 독자는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나는 통쾌함을 엿본다. 그래서 그의 시가 좋기도 하다.
관, 죽음, 밤, 무덤, 공포, 비극, 절망, 고통, 좌절, 절망 ... 그의 시집을 온통 뒤덮고 있는 낱말 몇 가지를 추려보았다. 어디에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로 시작하는 유행가처럼 명랑도 발랄함도 찾아 볼 수 없다. 하기사 그런 것들을 읊어대는 시가 어디있겠는가만은.
너무나 뻔뻔하게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푸른 초원 위의 풍경이 아닌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곳 그 어둡고 깊은 골짜기를 파헤치고 돌아다니며 은근슬쩍 감추고 속이는 세상의 검은 속내를 낱낱이 파헤쳐 보여주기 때문에 통쾌한 것 같기도 하다.
문학이 읽는 이에게 위로는 될 수 있어도 구원은 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최승자의 시를 읽어나갈 때 어느 정도의 위무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고통 그의 현실 그의 시일 뿐. 책을 탁 덮어 하얗고 까만 책장만 보여지던 내 시선이 다시 내 앞의 현실을 바라볼 때 좀 전 내 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던 그의 외침과 힘찬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잠시 그의 시를 통해 내 안에서 응어리져 분탕질을 치던 것들이 한눈을 팔아 고요해 지는 것처럼 느꼈을 뿐 난장판은 여전할 뿐이다.
그가 그의 시를 통하여 그의 절망과 고통을 어느 정도 퍼 올렸는지는 알 수 없고 그것이 다시 파고들었다고 하여도 조심스러이 짐작한다면 시를 쓸 때만큼은, 최소한 시를 쓰겠다고 뭣이든지 다잡고 앉았을 그 어떤 밤 아니면 어느 날 만큼은 기쁘지 않았을까 하는. 비록 기쁨의 시간은 짧았겠지만.
그는 그의 수필집 '어떤 나무들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무엇을 쓰는가' 라는 질문 이였는데, 나는 정말로 이런 유의 질문을 싫어한다. 나는 왜 쓰지도 않고 나는 무엇을 쓰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쓸 뿐이다. 그게 왜가 되고 그게 무엇이 된다면 좋고 안되도 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네 권의 시집들은 한결같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한번쯤 아니 너무 자주 들을 수 있고 또 꼭 묻고 싶은 질문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겠지만.
그의 시를 붙잡고 '너는 왜 절망과 고통을 그렇게 지독스럽게도 몰고 가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말대로 거기엔 '왜'도 '무엇'도 없을 것이다. 그냥 쓸 뿐이다, 그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냥 쓰는 것 그것이 '그' 일 테니까. 그의 시집 속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있을 뿐 무슨 이유를 달고 어떻게 따질 수가 있을까.
그의 시를 읽을 때 어느 정도의 위무를 받는다고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어느 정도의 '동병상련'은 아닐까. 하지만 '읽고' '보는' 입장인 나로서는 그의 시들이 어떤 때는 참 쉽게, 빨리 읽혀진다. 물론 쓰는 사람의 심정을 감히 짐작이야 하겠느냐만은. 그의 '절망의 시'가 주는 위로는 어떤 때는 나를 더 깊은 절망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 밑으로 등 떠밀기도 한다. 아직 그처럼 능수 능란하게 '비명'을 질러대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그의 비명과 내 비명은 소리도 크기도 다르고 각자의 비명은 각자의 목과 입으로 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만 앞서 걷고 있는 한 사람의 시인과 그의 시를 계속 관찰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