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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60
김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2월
평점 :
매드맥스, 블레이드러너 영화를 보면서 정말 우리들의 미래는 암담함으로 치닷고 있는거구나 했다. 수 십억 년의 지구 나이에 비하면 우리들의 나이는 고작, 아니 나이랄 것까지도 없을, 학창시절 생물 시간에 배우던 착상이나 수정 뭐 그런 단계라고 말하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한때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보다 우리가 지구 위에 살아온 시간은 짧다. 그런데도 우리는 벌써 우리의 미래를 감히 암울함으로 그려내고 있다.
온 시집 곳곳에 그러한 암담함과 절망이 넘쳐흐르고 있다.
끝없는 "중력과 부력이 어깨를 대고 싸우는"(자유부동) 대립만이 세상을 활개치고 있다. 공존할 수 없는 대립 속에서 결국에 찾아올 것은 소비의 극으로 치달음이 가져다줄 파국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미는 실을 잣고 돼지는 밥을 먹네/돼지는 도착하고 거미는 떠나네"(새벽,호텔,창가) 라고 시인은 말한다. 실 잣는 거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나고 밥만 먹는 미련한 돼지만이 도착한다. 이른 아침 거미줄을 치고 있던 거미와 그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을 더 이상 쉬이 볼 수 없는 우리의 환경과 갈수록 증가 일로에 있는 육식주의 때문에 무참히 사육되고 도축되어 가는 생명들의 핏값에 대한 보상을 어쩌면 우리 인간의 종말로 보상해야 한다고 본다면 너무 억측일까? 그리고, 시집의 제목 "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음이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내 집 앞에서 거미줄 치는 거미를 쉽게 볼 수 있게 돌이켜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과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맹신일 뿐이리라.
암담한 오늘의 끝을 보고있는 시인에게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징그럽고 징그러움은 아름다워라"(향연) 라고, 사랑마저도 미추의 가면을 벗겨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닌 현실뿐이다.
"저 반투명의 벽을 찢고 나오는/태아는 얼마나 기괴한가?/실수로 혹은 일부러 떨어뜨려도/
너는 부서지지 않고 야멸차게 우는"(향연) 아이가 자라나서 다시 "돋보기로 지렁이를 태워 죽이며 논다/강아지 목을 매달고 몽둥이로 때리며"(피아노) 노는 현실 앞에서 "旣生이 未生이고 未生이 旣生이라. 슬프고도 기뻐라. 旣生이 未生이라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蛙傳
라고 허탈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시인에게 이 세상은 온통 기괴함 투성이다.
"잘린 팔로 구걸하는 자의 손목이 다시 돋아나"(산책), "허공의 門을열고 해골이 천천히 걸어나왔다"(난초), "천사가 늙은이를 벼랑으로 떠"(겨울비)미는 세상에서 "꿈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寄生現實)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마비된 곳, 슬픈 곳."(희생)이다.
"나비가 나는 곳은 나비를 위하여 아무것도 날지 않는 곳."(희생)에서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희망하며 살 수 있겠는가?
다행히 시인은 우리에게 한자락 희망을 남겨두었다.
"시를 읽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세바스토폴 거리의 추억)라며 시인의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삶, 곧 詩에 대한 욕망을 내비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시는 곧 삶 아니겠는가.
"새 한 마리 육중하게 웅크리고 알을 품"(힘)었다. 나비를 위해 아무것도 날지 않는 곳에서 시인은 날지 않는 새가 되어 절망의 알을 품어 안았다. 하지만, 그것은 깨어져서 희망이 부활할 알이다. 이렇듯 우리는 시인을 통해 희망의 부활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