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몽테뉴 / 민희식 / 육문사 / 640쪽
(2014. 04. 06.)

 


  몽테뉴에게 있어 인간의 지식이란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보편적이고 영원한 절대적 진리는 신에게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의거할 기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며 진리인 것은 만인에게 통하는 보편성과 확실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절대적인 진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성과 판단력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빠지기 수윈 오류를 피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노력은 그러한 상대적 진리의 탐구에 지향되고 있다. 그 방법의 하나는 정신을 상대적 진리 탐구로 향하도록 훈련하는 것으로, 그것을 위해서는 올바른 대화법을 습득해야 한다. 몽테뉴가 대화의 즐거움을 서술하면서 거기에 동반되는 진리 의식의 효과를 열거하고 대화에 임하는 태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첫째, 자존심을 버리고 쓸데없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평무사한 태도를 일지 않도록 할 것. 둘째, 대화자의 외형에 사로잡혀 그릇된 상상에 빠짐으로써 사실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셋째, 대화의 질서와 형식을 지킬 것 등이다. 몽테뉴 자신은 성격적으로 그것들을 용이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P. 27)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특별한 호의로써 이 감정을 존중하지만 나는 이 감정을 좋아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슬픔으로 지혜와 덕과 양심을 장식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괴이한 장식인가! 이탈리아인들은 이 감정을 사념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 감정은 언제나 유해하고 광적이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이 감정을 비겁하고 저열한 것으로 보아 금하고 있다.
(P. 45)

 

 

  자신이 얼마나 강한 열정에 불타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그다지 강하지 않은 열정인 것이다. (페트라르카)
(P. 48)

 

 

  울창한 숲이 바람의 진행을 가로막으면 바람은 힘을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 (루카누스)

  이와 마찬가지로 혼란되어 동요하는 영혼은 붙잡을 어떤 것을 제공하지 않는 한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러므로 목표를 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을 영혼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50)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도 있듯이 인간은 사물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해 그가 가지는 견해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이 말이 모든 경우에 있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비참한 인간적 운명을 구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행이 오직 우리의 판단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는 불행들을 무시해 버리거나 유익한 것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 79)

 

 

  우리의 견해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사물을 평가함에 있어 사물 그 자체로서 보려 하지 않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보려 한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물들의 질이나 유용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물을 얻는 데에 소요된 노력이나 비용만을 생각한다. 마치 그것이 사물의 본질의 일부이기나 한 듯이. 그리하여 사물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을 그 사물의 가치라고 부르고 있다.
(P. 99)

 

 

  인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너희가 인생이라는 무대를 선에게 제공하느냐 악에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선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악의 무대가 되기도 할 뿐이다.
(P. 138)

 

 

  어린아이들의 교육에는 공부에 대한 욕구와 흥미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을 짊어진 당나귀로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매질하면서 아이들 주머니에 지식을 가득 넣어 주고는 잘 간직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식이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부에 간직해 두기만 해서는 안 되며, 그 지식을 정신과 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P. 266)

 

 

  만일 공부를 해야만 한다면 우리 상태에 적합한 공부를 하자. 어떤 사람이 "그처럼 늙은 나이에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보다 선량한 인간으로서 보다 만족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다.
(P. 502)

 

  나와 반대되는 견해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들의 견해가 나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진리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쌍방 공통의 목적이어야 한다. 분노의 감정이 판단력을 지배하고 혼란에게 이성의 자리를 빼앗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P. 578)

 

 

  스크라테스가 자기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항상 웃으면서 받아들인 것은 그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승리는 항상 자신의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영광을 위한 제료로서 비난을 기거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보다 뛰어난 반대자들이 우리를 경멸한다고 느끼는 것만큼 민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래서 오히려 약한 쪽이 자신을 힐책하고 바로잡아 주는 반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P. 580)

 

 

  우리는 서로를 비난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어떤 일이 모순되었다고 따지고 반박함으로써 도리어 우리 자신이 비난 받고 공격받을 수 있으며,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걸려들게 된다. 이에 관해 고대인들은 많은 예를 남기고 있는데,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는 뒤에 눈이 달리지 않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백 번쯤 이웃 사람들을 비웃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비웃는 것이며 자신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면서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뻔뻔하게 그 결함들에 놀라움을 나타낸다.
(P.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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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聖學輯要)
이이 / 김태완 / 청어람미디어 / 686쪽
(2014. 03. 23.)

 

 

  이 책은 제왕이 학문을 할 때 근본이 되는 것과 말단이 되는 것, 정치를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본래 타고 난 덕을 밝힘[明德]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제 효과와 백성에게 덕을 자각하게 하여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新民] 실제 자취의 얼개를 모두 대략적으로나마 밝혀놓았습니다. 작은 일을 유추하여 큰 일을 인식하고, 자신[此]을 근거로 삼아 대상[彼]을 밝힌다면 참으로 온 세상의 도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신의 글이 아니라 성현의 글입니다 비록 신의 식견이 천박하고 콱 막혀서 앞뒤 순서도 없이 엮었을망정 여기에 모은 말씀은 한 글귀가 곧 한 가지 약과 같아서[一句一藥] 어느 것 하나 몸에 절실한 교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정자[程子]는 "학문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말은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의 말이라도 따르면 도에 들어 갈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설사 이 책이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변변치 못하다고 해서 말까지 버려서는 안 될 터인데 하물며 성현의 말씀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제 만 번 죽움을 무릅쓰고 조심스럽게 책 세 권을 흰 보에 싸서 임금님께 엎드려 바칩니다. 혹시라고 임금님께서 이 책을 열람하여[乙覽] 이전 성현의 교훈을 깊이 음미하고, 선왕들의 빛나는 업적을 계속 이어서 빛내도록 더욱더 노력하여 땅처럼 넓고 두터워서 만물을 싣고, 하늘처럼 높고 밝아서 만물을 덮어주는 덕을 갗추는 경지에 이르신다면 변변치 못하나마 충성을 다하려는 신의 뜻을 조금은 펼 수 있겠습니다.

(P. 12)

 

 

  학문을 할 때는 본래 널리 배워야지 지름길을 따라 요약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배우는 사람이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마음을 굳게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넓히는 것만 일삼으면 마음과 생각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아 취하고 버리는 것이 정확하지 못하고, 혹 본질에서 벗어나 진실을 잃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먼저 요긴한 길을 찾아서 확실하게 문과 뜰을 열어 놓은 다음에라야 제한된 분야가 없이 널리 배울 수 있고, 한 가지 사례를 유추하여  앎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의 한 몸은 나라의 모든 일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때는 많고 글을 읽는 때는 적으니, 만약 그 강유룰 붙잡고 그 종지를 정립하지 않고서 오로지 넓히는 데만 힘쓰면 문장을 기억하고 외는 습관에 얽메이거나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고 다듬는데 빠져서 진리를 탐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도에 관해서는 반드시 참으로 터득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P. 19)

 

 

  글을 읽으면서도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처음 배우는 사람의 공통된 문제이다. 이것은 대부분 평소에 많이 읽기만 하고 많이 얻는 데만 힘썼을 뿐 자세하게 터득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대충 이것저것 마구 읽은 탓이다. 지금 이런 일을 깊이 경계하여 말끔히 씻어 없애고 따로 규범을 세월 글을 보되. 더욱 중요하고 가장 급한 것을 택하여야 한다. 또한 책 한 권을 보되 하루에 힘을 쓸 수 있는 만큼식 한두 단락을 보아서 한 단락을 깨달은 뒤 또 한 단락을 보아 책 한 권이 끝나면 다른 책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마음을 비우고 가운을 고르게 하여 자세히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한 글자 한 구절이 모두 귀결되는 곳이 있고 여러 학자들이 주석과 풀이가 하나하나 일관되게 통한 다음에라야 옳고 그름을 비교하여 성현이 말씀하신 근본 뜻을 찾을 수 있다. 비록 터득하였다 하더라도 또다시 되풀이하여 되새겨서 의리가 살에 배고 골수에 젖은 다음에라야 학문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읽을 때 처음에 의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다음에는 점점 의문이 생기고 중간에는 마디마다 의문이 생긴다. 이런 고비를 지난 뒤 점점 의문이 풀리고 여러 가지 사리에 통하여 의문스러운 것이 모두 없어져야 비로소 배웠다 할 수 있다.
(P. 76)

 

 

  "독서를 하는 방법은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검증하여 그윽하고 한가로운 가운데 조용히 한 곳에 집중하여 마음속으로 깨닫고 책에 씌어진 말고 표현된 의미를 넘어서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깨달은 것이 있는 듯하지만 책을 놓기만 하면 평소 그대로인 것 같은데, 문제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자가 대답했다. "이것은 몸에서 구하지 않고 오로지 책에서만 구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나의 일생생활에서 도가 아닌 것이 없다. 글이란 이 마음을 도와 연결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몸에서 찾은 뒤에 책에서 구하여야만 책을 읽어도 바로 참다운 맛이 있다."
(P. 77)

 

 

  주자가 말했다. "먼저 『대학』을 읽어서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서 근본을 세우며, 다음에 『맹자』를 읽어서 탁월한 점을 관찰하고, 다음에 『중용』을 읽어서 옛 사람의 미묘한 뜻을 탐구해야 한다. 『대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이햐하여 의문이 업어진 뒤에 『논어』와 『맹자』를 읽을 수 있고, 또 『논어』와 『맹자』에 대해 의문이 없어진 뒤에 『중용』을 읽을 수 있다."
(P. 83)

 

 

  증자가 말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꾸미는 데 충실하지 않았는가? 벗들과 사귈 때 믿음직하지 않았는가?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주자가 말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전(傳)이란 스승에게서 받은 것을 말하고, 습(習)이란 자기에게서 익숙해지는 것을 말한다. 증자는 이 세가지로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여 이런 문제가 있으면 고치고 이런 문제가 없으면 더욱 노력하였다. 이처럼 그는 성실하고 절실하게 자신을 다스렸으니 학문을 하는 근본을 터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가지의 차례는 또한 충(忠)과 신(信)으로써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는 것과 근본으로 삼는다."
(P.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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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라처드 바크 / 류시화 / 현문미디어 / 105쪽
(2014. 03. 17.)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그는 달빛을 받으며 바다 위를 흘러다니고 있었다. 찢어진 날개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실패의 중압감이 더욱 무겁게 등을 내리눌렀다.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이대로 그 무게가 자신을 부드럽게 바다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모든 것이 끝나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가 물에 잠겨 떠다니고 있을때, 낯설고 공허한 어떤 목소리가 그의 안에서 울려왔다.
  '어쩔 도리가 없다. 난 한 마리의 갈매기일 뿐이다. 난 나의 본성에 의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만일 내가 나는 것에 대해 그토록 많은 걸 배우도록 태어났다면, 난 머릿속에 바다 지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더 빨리 날도록 태어났다면, 매의 짧은 날개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고기 대신 생쥐를 먹고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이 어리석음을 잊어야만 한다. 갈매기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가련하고 능력의 한계를 지난 한 마리 갈매기로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만족해야 한다.'
(P. 18)

 

 


  조나단 시걸이 해변의 갈매기떼에게로 돌아왔을 때는 밤 깊은 시각이었다. 그는 머리가 어지럽고 몹시 피곤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쁨에 넘쳐 둥글게 원을 그리며 착륙을 하면서 땅에 닿기 직전에는 한 바퀴 공중 회전을 했다. 다른 갈매기들이 그의 한계 돌파에 대해 듣는다면 모두들 기뻐서 날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삶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게 되었는가! 하찮은 먹이를 얻기 위해 끝없이 고기잡이 배와 해변 사이를 단조롭게 오가는 대신, 삶의 이유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이 탁월하고 지성적이며 뛰어난 재능을 지닌 존재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나는 법을 배울 수가 있다!
(P. 31)

 

 
  한때 그가 갈매기 전체를 위해 소망했던 것을 이제 그는 그 자신만을 위해 획득했다. 그는 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치러야 했던 대가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조나단 시걸은 지루함과 두려움과 분노가 갈매기의 삶을 그토록 짧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생각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참으로 길고 훌륭한 삶을 살았다.
(P. 44)

 

 
  그는 매우 단순한 것을 말했다. 즉 나는 것은 갈매기의 권리라는 것, 자유는 모든 존재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 그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종교적인 의식이든 미신이든 어떤 형태의 제약이든 깨부수어야 한다는 것을.
  "깨부수라구요?"
  무리들로부터 한 목소리가 말했다.
  "갈매기떼의 법이라 할지라도요?"
  조나단이 말했다.
  "단 하나의 진정한 법은 자유로 인도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P. 88)

 

 
  "사랑하는 플래처, 그대 눈이 그대에게 말하는 것을 믿지 말라. 그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모두 한계가 있다. 그대의 이해를 통해 바라보고, 그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발견하라. 그러면 그대는 나는 밥을 알게 되리라."
  가물거리던 빛이 멈추었다. 조나단 시걸은 텅빈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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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쇼
김광수경제연구소 / 왕의서재 / 280쪽
(2014. 03. 12.)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늘 진실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것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알고자 해도 어떻게 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잘 모르거나 진실을 감추려 하거나 왜곡하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아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또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것은 기득권 때문입니다.
(P. 4)

 
  이 책은 일반서민들의 경제적 삶의 문제에서 왜곡되고 있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좋아진다, 잘하고 있다, 올라갈 것이다, 등등 온갖 진실을 왜곡하는 주장과 정책과 기사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일반서민들에게 진짜 올바른 정보가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P. 11)

 
  전·월세가 급등한 것은 정부가 잘못된 주택 정책으로 주택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양질의 임대주택을 공급하기보다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는 분양 공급 정책을 고집한 것이다. 게다가 금리가 하락하면서 집주인들이 금리 하락으로 생긴 전세보증금의 이자 수입 감소분을 전세를 올리거나 월세를 받아 보상하려 해 서민들이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P. 23)
 
 
  사람들 대부분이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열심히 산다. 너나 나나 온힘을 다해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제대로 취업이 안 된다는 것은 개인 문제라기보다는 '경제 시스템'이라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개인 차원에서 일자리 문제를 대처하기가 아려운 까닭이다. 개인 차원에서 일자리 문제를 대처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결국 정치 문제로 귀결된다. 국민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머지않아 정치·경제적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P. 37)
 
 
  서민금융은 복지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서민금융은 서민에게 부담 없이 자금을 융통해 주면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후의 방파제이기 때문이다. 설령 부실이 조므 발생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지원해줘야 한다.
(P. 49)
 

  노후 생활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국민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시장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잘못된 시장경제 구조에서는 아무리 국민연급 제도를 강화한다 한들 노후 보장이 불가능하다. 시장경제 구조를 바로잡은 후에 국민연금은 사회보험 형태로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후생활 보장, 즉 복지적 성격의 기초연금으로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P. 84)

 

 

  경제민주화의 의미는 크게 경제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인데도, 정치권에서는 주로 경제민주화를 재별 개혁으로 한정하고 있다. 재벌의 지배구조 개혁과 불공정 거래를 근절학ㅆ다는 게 핵심으로 출자총액 제한제도 폐지나 불공정 거래 행위 단속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근시안적으로 재벌을 소재로 한 민심 얻기에 하나쯤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사장경제를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경제 정이라고 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의', 즉 자본과 시장경제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정의란 무엇일까? 바로 '지배구조의 정의'다. 즉 소유구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재벌그룹이 상호출자를 근간으로 산업과 경제를 장악하고 동네 상권까지 무차별적으로 넘보는 잘못된 지배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P. 215)

 

 

  자본과 시장이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선 3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재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해야 하며, 둘째는 자본의 지배구조를 건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재벌의 순환출자나 편법적인 세습을 통한 잘못된 지배구조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셋째는 독과점 금지와 공정거래 확립이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건전하게 발전시켜 지속 가능한 동반성장을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본과 시장의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책, 법, 제도 그리고 경제의 틀을 총체적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재벌 대기업의 희생이나 헌선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정정당당하게 공정게임을 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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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5분 책읽어주기의 힘
짐 트렐리즈 / 북라인 / 288쪽
(2014. 03. 10.)

 

 

 
(옮긴이의 글)
  어떻게 하면 아이를 똑똑하게 키울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 짐 트렐리즈는 명쾌하게 말한다. "하루 15분씩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세요!" 그것도 아이가 뱃속에 있을때부터 열네 살이 될 때까지(아이의 듣기 수준과 읽기 수준은 열네살 무렵에나 같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수십 년간 책읽어주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유가, 글 잘 쓰고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이 일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우리도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지 모른다. 책 속에 길이 있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책 속에서 지혜와 정의를 배운 아이들이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되리라는 것을.
(P. 09)

 

 

  읽기는 교육의 중심에 있다. 읽기가 최우선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읽기에서 비롯된다. 수학 문제를 풀려면 복잡한 시험 문제를 읽고 이해해야 한다. 과학과 사회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읽기야말로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P. 40)

 

 
  책을 읽지 않는 국가는 지식 수준이 낮다. 지식 수준이 낮은 국가는 가정과 시장과 법정과 투표소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쉽다. 그리고 이 선택들이 결국 국가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P. 40)

 

 


  읽어주기의 장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1) 책 읽는 것을 즐기게 된다. (2) 배경 지식을 늘려 준다. (3) 어휘를 늘려 준다. (4) 독서의 모범을 보여 준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가 책을 즐겁게 읽는 비율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어른이 책을 읽어 주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중학생쯤 되면 거의 아무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다. 매번의 읽어주기가 읽기의 즐거움을 선전하는 광고 방송이라고 할 때, 광고 횟수의 감소가 수요의 감소, 즉 즐거운 독서의 감소로 이어지는 셈이다.
(P. 48)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일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난다. 첫째, 아이와 책 사이에 즐거움이라는 끈이 연결된다. 둘째, 함께 책을 읽으면 부모와 아이가 같이 배운다(이중 학습). 셋째, 단어를 소리와 음절의 형태로 아이의 귀에 쏟아 붓는다.
  그 단어는 귀 안에서 듣기 어휘라는 저수지에 모인다. 단어가 그 안에 충분히 차면, 저수지는 넘치기 시작한다. 넘치는 어휘는 말하기 어휘, 읽기, 쓰기 어휘라는 세 갈래로 물고를 터 냇물이 되어 흘러간다. 듣기 어휘는 세 갈래 물줄기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P. 94)

 

 
  혼자 읽을 줄 아는 아이에게도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학년이 올라가고 공부할 것이 많더라도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 빽빽한 필독 목록을 가져다주고 읽으라고 강요하거나, 독후감식의 숙제를 늘리는 식의 방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책에 대한 염증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 책에는 손도 대지 않을 학창시절독자만 양산할 따름이다.
(P. 105)

 

 
  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이들에게 같은 책을 읽어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옷 하나를 몸집이 다른 두 아이에게 입힐 수 없듯이, 그 아이들에게 같은 책을 읽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 차이가 나는 아이들에게 같은 책을 일어 주는 것은, 읽을거리의 재미를 희석시켜 최대공약수인 다섯 살배기의 입맛에 맞추고 열 살배기의 입맛을 달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각기 다른 책을 읽어 주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부모 노릇은 시간을 절약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시간을 더 들이고 투자를 하는 거이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P. 106)

 

 
  부모가 일대일로 책을 읽어 주면 아이의 집중력과 어휘력의 신장 이외에 다른 소득도 얻게 된다. 책에서 '진지한 생각거리'를 만나면, 많은 경우 아이 자신의 '진지한 생각거리'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때 곁에 빈정대는 형제가 없으면, 아이는 부모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비밀을 함께 나누면 '결속력'이라는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진정한 힘이다.
(P. 107)

 

 
  배운 사람들 중에는 한번 시작한 책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식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있다. 내 생각에는 이런 사람들은 배탈이 나더라도 한번 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은 끝까지 다 먹을 이들이다. 나는 몇 장 읽어 보고 변변치 않으면 책을 치워 버리는 편에 속한다. 어쩌다 잘못 고른 책을 아이에게 끝까지 읽어 주기 보다는, 몇 장을 먼저 읽어 본 후 결정하는 것이 좋다.
  낸시 펄은 그녀의 책 <책에의 갈망>에서 책을 읽어 주는 어른과 스스로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50세가 되기까지는 모든 책에 50페이지의 기회를 줘라. 50세가 넘으면 100에서 나이를 뺀 페이지만큼의 기회를 줘라." 그년 이것을 '50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즉 독자가 작가로부터 받아야 하는 정신적 고문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P. 162)

 

 

(읽어주기 습관 들이기)
-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책을 읽어 주자.
-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틈틈이 읽어 주자.
- 듣는 능력은 습득되는 것이다. 꾸준히 가르치면 조금씩 나아진다.
(P. 166)

 

 

  모니터를 통해 읽고 이해하는 것은 책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화면 독서가 25퍼센트나 느린 까닭은 책의 해상도인 600dpi에 훨씬 못 미치는 72dpi의 해상도로 글자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컴퓨터 환면이 책에 비해 여덟 배나 불명확한 것이다. 대학생들을 조사한 비교 연구에서도, 화면의 글을 읽는 것은 인쇄물을 읽는 것에 비해 이해 정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학생도 화면을 통해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웹의 자료를 인쇄해서 읽는다고 했다. 정보기술계의 권위자인 빌 게이츠는 말했다. "모니터로 읽는 것은 종이로 읽는 것보다 그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나는 4, 5쪽이 넘어가면 인쇄해서 가지고 다니며 밑줄을 치고 메모하는 것을 좋아한다."
(P.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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