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 창비 / 216쪽
(2015.02.06.)

 

 

1980년 5월 그때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기억들!!
출장 차 들리는 광주로 가는 버스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을 들으며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필연처럼 느껴진다. 음악 속에서 읽어 내려가는 소설 속에서 우리 모두 함께 흘려야 만 했을 그때 그 오월 광주의 눈물이 느껴진다....
불과 35년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명령한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하늘아래 같은 나라에서 아직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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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남은 너는 상무관 출입계단에 걸터 앉았다. 검은색 마분지로 앞뒤 표지를 댄 장부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 아래로 느껴지는 시멘트 계단이 차가웠다. 체육복 위에 걸친 교련복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단단히 팔짱을 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따라 부르다 말고 너는 멈춘다. 화려강산, 하고 되뇌어보자 한문 시간에 외웠던 '려'자가 떠오른다. 이젠 맞게 쓸 자신이 없는, 유난히 획수가 많은 한자다. 꽃이 아름다운 강산이란 걸까. 꽃같이 아름다운 강산이란 걸까? 여름이면 마당가에서 네 키보다 높게 솟아오르는 접시꽃들이 글자 위로 겹친다. 하얀 헝겊 접시 같은 꽃송이들을 툭툭 펼쳐올리는 길고 곧은 줄기들. 제대로 떠올리고 싶어서 눈을 감는다. 가늘게 눈을 뜨자 도청 앞 은행나무들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아직 한방울의 비도 바람 사이로 튕겨져나오지 않았다.
(P.9)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발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묘ㅡ 어떤 군중은 개ㅑ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P.95)

 


  내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살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이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힌다.
(P.102)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 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삿ㅂ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롭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P.117)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단순 가담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유월까지 차례로 석방되고, 이른바 극렬분자, 총기 소지자들만 상무대에 남았습니다. 고문의 양상이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구타보다 정교하게 고통을 주는 방식, 고문하는 사람들의 체력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을 그들이 택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들의 이름으로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짓 자백뿐이었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P.118)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 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젖은 양말 속 살갗으로 눈은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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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새는 울지 않는다
박윤규 / 푸른책들 / 158쪽
(2015. 01. 29.)

 

 

큰아이와 함께 읽은 책

임을위한 행진곡의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큰아이가 이 책을 읽고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물어봐서

그렇다고 얘기 해주었다.

깜짝 놀라는 큰아이에 표정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다음은 고 윤상원, 박기순 동지의 영혼결혼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노래패가 앞으로 나오고 사회자가 주위를 정돈한다.
  "지금 부를 노래는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와 여기에 함께 문ㄷ힌 오월 영령들을 기리며 만들었습니다. 두 분을 주인공으로 한 노래극 <넋풀이-빛의 사람들>의 주제가인데, 오늘 여기서 처음 발표하는 겁니다. 유인물을 보시고 노래패의 선창에 따라 다 함께 부릅시다. 여러분,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p. 10)

 

 

  "저, 저, 저, 안 되는데......"
  민혁이 놀라서손가락질을 했다. 얼핏 돌아보니 장갑차 뚜껑을 열고 나온 군인이 총을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하늘을 찢는 굉음이 울렸다. 군인이 마구잡이로 총을 갈겨 버린 것이었다. 방울이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고 느낀 건 바로 근 순간이었다.
  "헉......!"
  무언가에 세차게 밀린 듯 방울이의 몸둥이가 붕 떠 올랐다. 이내 몸둥이는 퍽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아니, 아득히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상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길바닥에 처박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방울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p.76)

 

 

  "참 내,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될 줄이야, 처음에 기세를 확 꺾어 놓으면 쉽게 끝날 줄 알았는데, 어렵게 되었어. 최악이야, 최악."
  "그래도 절대로 발포는 안 됩니다. 시위대는 적군이 아니잖습니까?"
  "적군은 아니지만 폭도잖아. 폭도는 진압해야지."
  폭도라는 말에 방울은 움찔했다. 폭도는 나쁜 사람이다.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다. 마구 때리는 사람이다. 방울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군인들이 너무 심하게 때리니까 다지러 나왔다고 했다. 방울이 본 바로는 군인들이 폭도였다.
(p.98)

 

 

  방울은 소스라치며 날아올랐다. 진짜로 총을 쏘다니, 국군이 국민에게 총을 소다니, 울음이 터지는 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방울은 정신없이 날갯짓을 하여 그곳을 벗어났다. 구름을 향해 위로 솟구쳤다. 이 세상에서 아주아주 벗어나고 싶었다.
(p.105)

 

 

  '사람이 별보다도 곷보다도 더 아름답다니!'
  방울은 깨달았다. 새가 된 후로 사람이 무섭기만 하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빛이다. 욕심과 미련과 한으로 뭉뚱그려진 혼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안에는 저마다 아름다운 빛이 있다. 아무리 못난 몸뚱이를 가진 사람도,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 속은 보석 같은 빛으로 가득하다. 바로 생명의 본질인 영이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나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망월동에 남은 영혼들도 아름다웠다.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에게 총을 쏜 군인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은 어찌 무서워하고 미워할까. 방울은 맹세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지. 아무도 원망하지 말아야지. 그러므로 다시는 울지 않기록, 아프고 슬픈 울음일랑 울지 않고 아름다운 노래를 해야지. 영혼들의 한을 풀어 주는 씻김 노래를 불러야지. 암!
(p.141)

 

 

  그 다음날 새벽, 방울새 한 마리가 방울의 비석 앞에 동그마니 잠들어 있다. 두 발을 오므린 채 숨도 쉬지 않는다. 솜털처럼 가벼워 새벽바람에 금세 날려 갈 듯하다.
  새의 몸에서 나온 방울은 새의 몸으로 들어가던 날의 모습 그대로다. 토끼와 토끼풀이 그려진 티와 에크무늬 치마를 입었다. 종아리 아래족으로 내려갈수록 연기처럼 희미한 영혼의 모습이지만 빨간 구두 두 짝을 모두 갖추어 신었다. 그런 방울의영혼이 방울새를 가만히 바라본다.
  '저리도 가냘프고 작은 몸속에 어덯게 삼 년이나 깃들어 살았을까?'
  방울은 방울새에게 뽀뽀를 하고 어루만져 준다.
(p.151)

 

 

  벌써 오 년이 자났나 봅니다. 고등학생인 큰아이와 초등학생인 작은아이를 데리고 광주를 찾았던 날이. 민주우의 알을 품은 거대한 탑 앞에 가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했습니다. 명색이 오월문학상 수상 작가로서 참 늦은 방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마음의부담이 크기도 했는데, 유물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작은아이가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난 군대 가지 않을래요."
  "왜?"
  "군인들은 나쁘고, 무섭고, 싫어요."
  "난 말문이 콱 막혀서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 아이는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런 짓을 한 사람이 어덯게 대통령도 하고, 아직도 잘 살고 있어요?"
  나는 또 말문이 막혔고, 선뜻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이 둥뚱그려져서 터진 그날의 상황을 어떻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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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형규 / 범우사 / 534쪽
(2015. 01.28.)

 

 



  온갖 현상의 원인을 종합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원인을 탐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인가의 지력은 그 하나하나가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현상의 무수한 조건,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연관성은 캐려 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가장 알기 쉬운 것만 붙들고 이것이야말로 원인이라고 말한다. 인간 행동을 관찰 대상으로 하는 사적인 사건에서 가장 원시적인 원인이라고 생각 되는 것은 신들의 의지이고, 그 다음이 역사상 가장 현저한 위치에 서는 사람들 - 즉 역사상 위인의 의지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일지라도 그 본질 - 즉 사건에 관여한 인간 전체의 행동을 통찰하던 역사상 위인의 의지가 대중의 행동을 이끌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끌려 다니고 있다는 본질을 갈게 될 것이다.
(P.84)

 

 

  역사적인 사건에는 온갖 원인을 통일하는 유일한 원인 이외에 하등의 원인은 없을뿐만 아니라 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개개의 사건을 지배하는 법칙은 있다. 그 법칙의 일부분을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어떤 부분은 감지 할 수 있다. 이 법칙의 발견은 한 인간의 의지 가운데에서만 원인을 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때에 가능해진다. 그것은 마치 유성 운행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사람들이 지구부동설을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P.84)

 

 

  기계의 작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기계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그 기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연히 그 속에 걸려 작동을 방해하면서 찌걱거리는 나뭇조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계의 가장 근본적인 부부은 찌걱거리면서 운전을 방해하는 나뭇조각이 아니라 소리도 없이 돌고 있는 작은 톱니바퀴라는 사실은 기계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에겐 여간해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P.128)

 

 

  인간은 운동 속에 있을 때는 언제나 그 운동의 목적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1000베르스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1000베르스타의 앞쪽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이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곳이 성약의 땅이라는 신념이 필요해진다.
  프랑스 군에게 있어 진격 당시 성약의 땅은 모스크바였고 퇴각 때는 고향이었다. 그러나 고향은 너무도 멀었다.그래서 1000베르스타를 걷는 사람은 궁극긔 목적을 잊고 오늘 40베르스타만 가면 휴식과 숙박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최초의 한 행정을 나아가는 동안 이 휴식의 땅은 궁극으 땅을 은폐하고 그 속에 모든 히망과 소원을 집중해버린다. 개개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욕구는 떼를 지어 모였을 경우 언제나 확대되는 것이다.
 (P.137)

 

 

  역사적 판단의 신축, 자재한 실을 이제 더 이상 잡아 늘이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어떤 하나의 행위가 전 인류에 의하여 선 혹은 정의로 불리는 것과 명확하게 상반될 경우 역사가들은 위대라는 구원의 관념을 낳는 것이다. 마치 위대라는 것이 선악의 척도를 초월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위대한 인간에게서 악이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극악 무도한 짓일지라도 그것이 위대한 사람에게는 죄가 될 염려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렇게 말한 때는 이미 선이고 악이고가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위대한 것'과 '위대하지 않은 것'이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것'은 선이고,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악이다. 역사가들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들이 영웅이라고 부르는 어떤 특정한존재의 특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은 죽어가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 그의 의견에 의하면 - 자신이 여기까지 데리고 온 많은 사람들을 버리고 따뜻한 털외투를 뒤집어쓰고 달아나면서도 '이것은 위대한 것'이라고 느끼며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P.196)

 

 

  만약 역사가가 말하듯이 모든 목적, 예를 들면 러시아나 프랑스의 국위 선양이라든지, 유럽의 세력 균형이라든지, 혁명 사상의 전파라든지, 사회 전반의 진보라든지, 그 밖의 무엇이든지 좋지만, 그 목적의 달성을 향해 인류를 지도하는 것이 위인들이라고 한다면 우연이니 천재니 하는 관념 없이는 역사상의 여러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만약 금세기 초엽의 유럽 전쟁의 목적이 러시아의 국위 선양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은 이보다 이전에 행해졌던 많은 전쟁과 침략들이 없었더라고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목적이 프랑스의 국위 선양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은 혁명과 그리고 제정 등이 없었더라도 역시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목적이 사상 전파에 있었다고 한다면, 서적의 인쇄가 군인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이 목적을 수행했을 것이다. 만약 목적이 문명의 진보에 있었다고 한다면, 인간과 그 부의 박멸 이외에 보다 문명의 보급에 적당한 방법이 있음을 아주 쉽게 생각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행태를 취하고, 다른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결국 이런 형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연은 상황을 만들고 천재는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P.286)

 

 

  우연이란 무엇인가? 천재란 무엇인가?
  우연이니 천재니 하는 말은 실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이 말들은 다만 현상에 대한 이해의 어떤 단계를 의미하는 것에 부로가하다. 예를 들면 어떤 현상이 어째서 얼어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도저히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그것은 우연이라고 한다. 또 나는 보통 일반인의 행위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효과를 일으키는 힘을 보지만 왜 그것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면 그때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P.287)

 


  세계의 모든 민족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세계사의 역사가들은, 사건을 끌어 일으키는 힘에 관한 부분적인 역사가의 관찰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그들은 이 힘을 영웅이나 군주가 지닌 본래의 권력으로 보지 않고 갖가지 방향으로 돌려졌던 다수의 힘의 결과로 본다. 전쟁 혹은 민족의 정복을 묘사할 경우 세계사의 역사가는 사건의 원인을 한 인물의 권력에서 찾지 않고 사건에 결부되었던 많은 인물의 상호 작용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P.364)

 

 

  시골 사람들은 비의 원인에 대해서 뚜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를 바라거나 혹은 쾌청을 바라는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바람이 구름을 쫓았다고도 하고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왔다고도 한다. 세계사의 역사가 바로 그대로다. 자기들의 이론에 들어맞거나 바랐던 대로 됐을 때엔 권력은 사건의 결과라고 말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말할 필요가 있을 때에니 권력이 사건을 끌어 일으킨다고 말하는것이다. 문화사가로 불리는 제3의 역사가는 이따금 문인과 귀부인을 사건을 끌어일으키는 힘으로 인정하는 세계사의 역사가를 추종하면서도 전혀 다르게 이 힘을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문명 속에서, 지적인 활동 속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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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 창비 / 372쪽
(2015.1.24.)

 

 

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머리속에 떠오르던 영화가 있었다.
얼마전에 보았던 <국제시장>이란 영화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주요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은 같은 세대의 주인공들 이야기다.
우리 아버지 시대의 장남, 가장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국제시장>의 덕수와 <투명인간>의 만수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무엇이었을까?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보면서 맘 한구석에 불편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는 영화로 감상하고 그곳에 또다른 해석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국제시장>과 <투명인간>을 비교하며 읽고, 감상하기는 참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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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상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으리라. 친분을 넘어서는 것을 욕심내지 마라. 욕심이 과하면 탐심이 생긴다. 탐심은 남의 것을 훔치게 만든다. 도둑질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된다. 필요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내가 가진 것과 바꾸어라.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빌려라. 먼저 말을 하고 구하면 얻으이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훔치는 건 안된다. 훔치지 마라. 훔치고 나면 너는 네 것을 도둑맞게 된다. 네 삶을 도둑 맞는다.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남겠느냐.
(P.28)

 

 

  나는 유물론자다. 내생이나 전생, 영혼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나 자신으 생로병사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십대에 듯을 펴보기도 전에 큰 좌절을 겪었다. 스스로를 던져 내 가족과 가정, 주변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결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십대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던 벗들이 있다면 물을지도 모른다. 개체의 생물학적 연장인 핏줄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세계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나갈 책무를 지닌 깨어 있는 인간으로서 온당한 태도인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영세불멸의 것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이며 봉건적인 세계관의 발로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내 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바로 그게 우리가 바꿔나가려 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답고 뜨거운 마음을 지녔던 벗들은 이 누차하고 타락한 세상에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느긴다.
(P.162)

 

 

  사람이 죽을 때 등잔에 기름이 다해 불이 꺼지듯, 방 안의 전등이 꺼져 암흑에 잠기는 것처럼 의식이 스러지면 모든 것이 그만인 것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하리라. 내가 유물론자였음을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내게 입증해줄 것이다.
  자 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 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
(P.163)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정된 자원이라는 생존조건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몫을 내가 빼앗기 위해서는 배신, 속임수, 회유나 설득을 위한 정치기술을 사용하고 폭력이나 살인 같은 범죄조차 불사해야 한다. 그런 인간만이 적자로 생존할 수 있다. 나의 피에는 그러한 적자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어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가족, 친구, 연인 간의 사랑도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장치일 따름이다. 내가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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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형규 / 범우사 / 534쪽
(2015. 01.18.)

 

 

 

  전쟁과 평화는 다른 유명한 고전들과 달리 유수의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한 판본이 다양하지 않다. 톨스토이 번역은 "박형규"라는 얘기만 듣고 무조건 범우사 번역본으로 시작해서 작년부터 떠듬떠듬 1,2권을 읽고는 중간에 조금 쉬었다가 계속 3권까지 읽었지만 3권도 힘겹게 2주만에 읽었다.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속도가 나질 않는다. 3권과 같이 4권을 빌려왔는데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처럼 전쟁에 대한 내용들은 항상 내겐 감흥이 떨어지는 소재들인것 같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레미제라블의 워털루 전쟁 부분도 참 읽기 힘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아마 배경이 되는 역사적 지식의 부족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빠져든다...

 


 

  우리에게는 나폴레옹의 권세욕이 왕성하고 알렉산드르가 완강하고, 영국의 정책이 교활하고 혹은 올덴부르크 대공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수백만명에 이르는 그리스도교도가 서로를 살해하고 괴롭혔다는 사실에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과, 살육 내지 폭행의 사실 그 자체와는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또 대공이 모욕을 당했다고 해서 어째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유럽의 한쪽 끝에서 몰려와 스몰렌스크 현이며 모스크바 현의 주민들을 살해고 파멸시키고 또 자신들도 상대방에게 살해당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들, 역사가도 아니며 연구의 과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은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사건을 관찰한 후세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원인은 무수하게 상상된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깊이 파고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더 많은 원인이 발견된다. 그리고 규명된 원인의 어느 하나를 보아도, 또는 총체적으로 보아도 그 자체로서는 한결같이 정당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사건의 거대함에 비하면 너무도 사소하기 짝이 없고 우연히 중복된 다른 원인 없이는 또 그러한 시각을 야기시키기에는 너무나 무력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한결같이 거짓된 것으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P.8)

 

 

  우리는 저마다 자기를 위하여 생활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유를 이용한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수도 있고 이것을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자기의 온 존재로서 느낀다. 그러나 그가 그 행위를 하자마자 시간의 어느 한 순간에 행해진 이 행위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 되고 자유를 상실한, 그저 선천적인 의미밖에 띠지 않는 역사의 소유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P.10)

 

 

  역사상의 사건에 있어서 이른바 영웅이란 사건에 명칭을 부여한 레테르(라벨)와 같은 것이고, 레테르와 마찬가지로 사건 그 자체와의 관계는 가장 적은 것이다. 자기들로서는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둥들의 일거일동도 역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자유가 아니라 역사의 온갖 진행과 관련되어 있고 영겁의 옛날부터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
(P.11)

 

 

  피에르는 말했다.
  "전쟁이란 장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니까요."
  "그렇지" 하고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자지만 약간 차이가 있어. 장기에서는 밀야, 말을 한 개 움직이는 데도 시간의 조건을 무시하고 얼마든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야.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점이 있어. 그것은 마는 언제나 졸보다 같하고 졸 들은 언제나 졸 하나보다 강하지만 때로 실전에서는 한 대대가 한 사단보다 강할 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중대보다도 약할 때가 있어. 그러니까 군대의 상대적인 힘이란 누구든 알 수 없는 것이지. 절대로 몰라."
(P.251)

 

 

  "전쟁이란 그 전쟁에 반드시 이겨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승리가 돌아가게 마련이야. 우리가 왜 아우스테를리츠에서 졌을까? 아군과 프랑스 군의 손해는 거의 맞먹었는데도 우리는 너무나 성급하게 우리 편이 졌다고 생각해버렸어. 그래서 정말 지고 만 거야. 그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대 우리는 사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전장을 빠져나가고 싶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야. '졌다, 그러니까 도망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는 도망쳤던 거야. 만약 저녁때까지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던들 그 전투는 어떻게 끝났을지 모르지."
(P.251)

 

 

  인류의 운동도 무수한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흘러나오면서 연속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 운동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의 총화와 연속적인 운동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의 지력은 제멋대로 단편적인 단위를 허용한다. 역사의 첫번째 연구법은 연속적인 사건 중 몇 가지를 임의로 채택하여 그것을 다른 사건과 떼어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이든 절대로 그 자체가 시작인 것은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언제나 하나의 사건은 다른 사건에서 줄곧 흘러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연구법은 어느 한 개인, 즉 제왕이라든가 장군이라든가 하는 사람의 행동을 사람들의 자유 의지의 총화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의지의 총화는 절대로 일개 역사적인 인물의 행동에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P.317)

 

 

  역사와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찰 대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황제와 대신, 장군은 도외시하고 대중을 지도하고 있는 무한히 작은 같은 종류의 요소를 연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 방법으로 인간이 얼마 만큼 사적인 법칙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직 이 방법에 의해서만 사적인 법칙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 과거에 있어서 역사가가 여러 황제와 장군, 대신의 활동을 기술하고, 또한 이 같은 활동에 관한 자기의 고찰을 표백하기 위해 경주한 노력의 백만분의 1 정도도, 이 방면에는 경주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지극히 뚜렷한 사실이다.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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