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형규 / 범우사 / 534쪽
(2015. 01.28.)
온갖 현상의 원인을 종합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원인을 탐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인가의 지력은 그 하나하나가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현상의 무수한 조건,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연관성은 캐려 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가장 알기 쉬운 것만 붙들고 이것이야말로 원인이라고 말한다. 인간 행동을 관찰 대상으로 하는 사적인 사건에서 가장 원시적인 원인이라고 생각 되는 것은 신들의 의지이고, 그 다음이 역사상 가장 현저한 위치에 서는 사람들 - 즉 역사상 위인의 의지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일지라도 그 본질 - 즉 사건에 관여한 인간 전체의 행동을 통찰하던 역사상 위인의 의지가 대중의 행동을 이끌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끌려 다니고 있다는 본질을 갈게 될 것이다.
(P.84)
역사적인 사건에는 온갖 원인을 통일하는 유일한 원인 이외에 하등의 원인은 없을뿐만 아니라 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개개의 사건을 지배하는 법칙은 있다. 그 법칙의 일부분을 우리로선 알 수 없지만 어떤 부분은 감지 할 수 있다. 이 법칙의 발견은 한 인간의 의지 가운데에서만 원인을 구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때에 가능해진다. 그것은 마치 유성 운행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사람들이 지구부동설을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P.84)
기계의 작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기계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그 기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연히 그 속에 걸려 작동을 방해하면서 찌걱거리는 나뭇조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계의 가장 근본적인 부부은 찌걱거리면서 운전을 방해하는 나뭇조각이 아니라 소리도 없이 돌고 있는 작은 톱니바퀴라는 사실은 기계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에겐 여간해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P.128)
인간은 운동 속에 있을 때는 언제나 그 운동의 목적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1000베르스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1000베르스타의 앞쪽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이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곳이 성약의 땅이라는 신념이 필요해진다.
프랑스 군에게 있어 진격 당시 성약의 땅은 모스크바였고 퇴각 때는 고향이었다. 그러나 고향은 너무도 멀었다.그래서 1000베르스타를 걷는 사람은 궁극긔 목적을 잊고 오늘 40베르스타만 가면 휴식과 숙박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최초의 한 행정을 나아가는 동안 이 휴식의 땅은 궁극으 땅을 은폐하고 그 속에 모든 히망과 소원을 집중해버린다. 개개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욕구는 떼를 지어 모였을 경우 언제나 확대되는 것이다.
(P.137)
역사적 판단의 신축, 자재한 실을 이제 더 이상 잡아 늘이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어떤 하나의 행위가 전 인류에 의하여 선 혹은 정의로 불리는 것과 명확하게 상반될 경우 역사가들은 위대라는 구원의 관념을 낳는 것이다. 마치 위대라는 것이 선악의 척도를 초월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위대한 인간에게서 악이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극악 무도한 짓일지라도 그것이 위대한 사람에게는 죄가 될 염려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렇게 말한 때는 이미 선이고 악이고가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위대한 것'과 '위대하지 않은 것'이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것'은 선이고,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악이다. 역사가들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들이 영웅이라고 부르는 어떤 특정한존재의 특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은 죽어가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 그의 의견에 의하면 - 자신이 여기까지 데리고 온 많은 사람들을 버리고 따뜻한 털외투를 뒤집어쓰고 달아나면서도 '이것은 위대한 것'이라고 느끼며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P.196)
만약 역사가가 말하듯이 모든 목적, 예를 들면 러시아나 프랑스의 국위 선양이라든지, 유럽의 세력 균형이라든지, 혁명 사상의 전파라든지, 사회 전반의 진보라든지, 그 밖의 무엇이든지 좋지만, 그 목적의 달성을 향해 인류를 지도하는 것이 위인들이라고 한다면 우연이니 천재니 하는 관념 없이는 역사상의 여러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만약 금세기 초엽의 유럽 전쟁의 목적이 러시아의 국위 선양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은 이보다 이전에 행해졌던 많은 전쟁과 침략들이 없었더라고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목적이 프랑스의 국위 선양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목적은 혁명과 그리고 제정 등이 없었더라도 역시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목적이 사상 전파에 있었다고 한다면, 서적의 인쇄가 군인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이 목적을 수행했을 것이다. 만약 목적이 문명의 진보에 있었다고 한다면, 인간과 그 부의 박멸 이외에 보다 문명의 보급에 적당한 방법이 있음을 아주 쉽게 생각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행태를 취하고, 다른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결국 이런 형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연은 상황을 만들고 천재는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P.286)
우연이란 무엇인가? 천재란 무엇인가?
우연이니 천재니 하는 말은 실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이 말들은 다만 현상에 대한 이해의 어떤 단계를 의미하는 것에 부로가하다. 예를 들면 어떤 현상이 어째서 얼어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도저히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그것은 우연이라고 한다. 또 나는 보통 일반인의 행위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효과를 일으키는 힘을 보지만 왜 그것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면 그때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P.287)
세계의 모든 민족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세계사의 역사가들은, 사건을 끌어 일으키는 힘에 관한 부분적인 역사가의 관찰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그들은 이 힘을 영웅이나 군주가 지닌 본래의 권력으로 보지 않고 갖가지 방향으로 돌려졌던 다수의 힘의 결과로 본다. 전쟁 혹은 민족의 정복을 묘사할 경우 세계사의 역사가는 사건의 원인을 한 인물의 권력에서 찾지 않고 사건에 결부되었던 많은 인물의 상호 작용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P.364)
시골 사람들은 비의 원인에 대해서 뚜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를 바라거나 혹은 쾌청을 바라는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바람이 구름을 쫓았다고도 하고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왔다고도 한다. 세계사의 역사가 바로 그대로다. 자기들의 이론에 들어맞거나 바랐던 대로 됐을 때엔 권력은 사건의 결과라고 말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말할 필요가 있을 때에니 권력이 사건을 끌어 일으킨다고 말하는것이다. 문화사가로 불리는 제3의 역사가는 이따금 문인과 귀부인을 사건을 끌어일으키는 힘으로 인정하는 세계사의 역사가를 추종하면서도 전혀 다르게 이 힘을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문명 속에서, 지적인 활동 속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