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우리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이원석 / 책담 / 192쪽
(2015. 5. 11.)
동아시아 공동체의 일원답게 한자부터 살펴보자. 공부는 工夫다(실은 이것조차 to study를 번역한 것이다.) 工夫를 원래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다들 아실 게다. 바로 쿵후다. 우리가 중국 무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그것이다. 단순한 음운록적 유사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실제 어원상으로 그 단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도 깊은 상관성이 있다. 몸의 수련법으로서의 쿵후와 지적 노동으로서의 공부가 하나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P.33)
공부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동물을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무술을 단련하고(쿵후), 기술을 가다듬고(공부), 심성을 연마하는(마음공부) 것 등이 모두 '공부하다'라는 표현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곧 공부는 몸을 새롭게 만들고,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P.44)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게된 것은, 그가 언제나 달갑지 않은 진실을 알게 하는 귀찮은 존재로서, 마치 등에(쇠파리)와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많은 경우 진실을 아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직면시킬 때, 폴리스 시민들이 그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이야기를 굳이 들려주는 일은 위험한 것이다. 그는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진실/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맞짱 떴다.
(P.68)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런데 시선은 권력을 함의한다. 보는 자가 보이는 자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다. 즉,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권력이 발생한다. 시각적 주체각 권력의 주체인 셈이다. 조지 오웰의<1984>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전체주의 사회인 오세아니아에서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시민들이 감시당하고 있다. 빅브라더의 권력은 바로 이 텔레스크린을 통한 총체적 감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P.101)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이나 골라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고전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유효적절한 고전을 선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나 자신에게 와 닿는 책을 선택하라. 핵심은 내가 그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가오를 잡고자 하는 얄팍한 동기라도 좋다. 남들을 의식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 하나 최소한 내가 그 책을 읽고 싶은 매력이 있어야 한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그냥 고른다면, 겨우 생긴 열정이 금방 사그라질 것이다.
둘째, 자신에게 조금 높은 허들을 제공하는 고전을 택하는 편이 좋다. 난이도가 지나친 책은 멀리하라. 많은 고전들이 의외로 어렵지 않게 읽힌다.
(P.109)
현대인은 누구나 글을 읽고, 생각을 한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언어가 발명된 이래로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정보를 습득하고, 사유를 진행하게 되었다. 인쇄매체의 발명은 이를 가속화하였다. 물론 인간으로서 더욱 성장하려면, 그 정도를 확장해야 한다. 다독과 다상량은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핵심은 성장에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생각이다. 읽고 듣는 것조차 생각하기 위한 자양분일 따름이다.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생각할 수 있다. 바르게 읽어야 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P.117)
마음 관리의 기본에 해당하는 독서 또한 일주일에 한 권이 기본이다. 한 주라는 리듬 안에서 새로운 정보와 그에 기반한 깊은 성찰이 한주기를 이루며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최소에 해당한다. 시험이나 전쟁과 같은 위급 상황이 아니라면 한 주에 적어도 두 권 정도는 읽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독서가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다른 분야의 고수와 마찬가지로 독서가가 되기 위해서도 다른 것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서 역시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P.126)
공부는 우리 사회를 보여 주는 창문이다. 초두에 지적하였듯이 한국 사회의 문제는 공부의 맥락에서 압축적으로재현되기 때문이다. 왜곡된 욕망의 실현을 공부를 통해 주도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실상이다. 우리의 사회적 위계는 위리의 학업적 위계에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애초에 우리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은 우리에게 공부를 강요한다. 우리의 현세적 욕망이 공부의 목적이 되고, 공부가 현세적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부를 통해 들여다보는 우리 사회는 이토록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
(P.165)
한국을 구성하는 시민들 중 5퍼센트만이라도 이렇듯 공부에 입각하여 나름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해보자. 그들은 더 이상 특정 대학의 서열에 민감하지 않고, 특정 업종의 광휘에 눈이 멀지 않으며, 자신의 직급과 연수독,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등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헛되이 자녀의 성적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자녀의 성적보다 인성을 중시할 것이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방향을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지 않으며, 자신들의 생각과 욕망을 불어넣는 것을 자녀에 대한 상이라 착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자기 두 발로 성큼성큼 걸어가도록 격려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아이드로가 함께 공부하는 것일 게다. "아이가 진짜 공부를 한 뒤에 진학을 않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음을 부모는 예상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바르게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찬란한 빛을 되찾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밝은 광명을 비추어 줄 것이다.
(P.169)
제대로 된 공부는 사람을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으로 만들어 준다. 이 사회가 짜놓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사실 이 길은 조금 어렵고 불편하다. 하지만 멋있고 자유로운 길이기도 하다. 내가 나답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삶을 걸 만하지 않은가.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