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어스 / 두행숙 / 들녘 / 406쪽
(2018. 6. 2.)
“그럼 오름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격한 감정이 불쑥 솟구쳐 올라와 좀 당황해서 물었다.
골고는 마치 별을 바라보듯이 터널의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주 속에는 하나의 오름이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적 착상들은 모두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 마찰을 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는 이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의 창조적 밀도는 엄청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음악의 바다와 순수한 영감의 강물들. 그리고 번뜩이는 정신들에 둘러싸여 움찔거리면서 생각들을 분출하는 화산들로 가득찬 보이지 않는 천체입니다. 그것이 오름입니다. 거대하게 자신의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힘의 장(場)입니다. 그러나 모두한테 내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선택된 이들에게만 보여줍니다.”
(P.42)
나는 부흐링 족의 왕국으로 들어와 들어와 살게 된 날짜 세는 일을 중단했다. 왜냐하면 수를 센다는 것은 결코 내 장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여기 에서는 시계는 물론, 원래 날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그동안 몇 가지 배운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해서 뽐내는 것은 아니다. 그 난쟁이들이 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것만으로도 내 어휘력은 대단히 늘어났으 며, 이제 수도 없이 많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희곡, 시, 신문, 그리고 편지들의 줄거리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잠에 빠질 때까지 쉴 새 없이 경구들을 암송할 수 있었고, 또 무수한 풍경들에 대한 묘사도 능숙해져서 어느 대륙 전체를 그런 묘사 문장들로 장식할 수도 있었다. 플롯의 틀, 클라이맥스의 곡선, 등장인물의 성격, 놀라운 반전, 호흡이 긴 이야기의 전개, 극적인 열쇠 등, 부호링 족은 내가 평생이 걸려도 읽어내지 못했을 아주 많은 문학 자료와 기술을 나한테 전수해주었다. 나는 이제 좋은 대화란 어떤 소리로 울려야 하는지 알았으며. 책을 쓸 때 어떻게 시작하면 독지들을 순식간에 빨아 들일 수 있고, 또 어떻게 하면 수천 명이나 되는 소설 속 인물들을 서사적인 호흡에 따라 체계적으로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시를 들어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시어로 말을 했으며, 눈(雪)에 해당되는 단어는 레타 델 브라트피스트만큼이나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혹시나 부흐링 족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마치 낙원에서 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늘 조회롭지만도 않았다. 비록 나는 이 작은 외눈박이들을 아주 좋아했지만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정말 대단히 신경에 거슬리기도 했다. 사실 내가 그들 누구와도 문학적인 취향을 완전히 같이할 수는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게다가 작기들의 작품을 무조건 암송하고 있는 부흐링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기 어려웠다.
(P.97)
오, 내 충실한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늦은 저녁 막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안식을 취하려 하는데, 문득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느낌을 아는가? 그럴 개연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방 안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을? 문도 열리지 않았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데도 나를 위협하는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불을 켜보면 물론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불안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어린아이처럼 두려워했던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불을 끈다. 그러자 다시 거기에 뭔가 있다. 무언가 어둠 속에서 엿보고 있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제는 심지어 숨소리도 들린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와 침대 주위를 슬그머니 돌아다닌다. 그러고는 그대들의 목덜미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숨결을 내뿜는다.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그대들은 눈을 뜨고 공포에 떨며 벌떡 일어난다. 다시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어둠과 더불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당혹스런 의심은 남는다. 불빛이 꺼지면 빛을 두려워하는. 우리가 숨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듯 어둠이 필요한 보이지 않는 족속의 마법의 영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남은 밤을 촛불을 켜놓은 채 몸에 안 좋은 반수면 상태로 보낸다. 안 그런가?
(P.155)
"내 친구는 절망했다. 많이 쓰면 쓸수록 그의 글은 할 말이 더욱 적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다. 며칠, 몇 주, 몇 달을 텅 빈 종이 앞에 앉아서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그러자 눈물의 여관으로 가서 꿈의 실에다 목을 매달 생각까지 했다. 바로 그때, 전혀 뜻밖에도 그는 그의 생애에서 아마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가장 행복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출판업자를 찾았겠지요?"
내가 반문했다.
그림자 제왕이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하자. 나는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한 데 대해 창피함을 느꼈다.
“그의 몸속에 오름이 관통했다.”
마침내 그가 말을 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레 집중적으로, 그래서 그는 처음에 자신이 죽는 거라고 믿었다."
아니, 그림자 제왕이 오름을 믿고 있단 말인가? 보니까 이 대륙 안에서는, 아무리 지하 깊은 곳까지 헤집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이런 신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장소를 찾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시건방진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아주 갑작스럽게 그를 관통했다. 오름은 그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주었고 그를 우주의 아주 먼 곳으로, 모든 예술적 착상들이 서로 만나 결합되는 장소로 높이 인도해갔다. 그곳은 물체도 생명도 없고 단 한 개의 원자도 없었지만. 너무도 간결한 상상력들로 가득 차 있는 천체여서 별들이 춤추면서 그 가까이로 다가올 수 있도록 유도했다. 거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가도 불가능한 순수한 상상과 힘 속으로 젖어들 수 있었다. 그 힘의 영역에 단 한순간만 머물러 있어도 한 편의 소설을 탄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는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효력을 잃은 듯이 보였으며. 일, 이, 삼차원들은 정리 안 된 원고들처럼 서로 마구 겹쳐졌다. 죽음이라는 것도 그냥 시시한 농담처럼 보였고. 영원조차도 마치 눈 깜박할 사이처럼 여겨지는 터무니없는 장소였다. 그가 그 장소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머릿속은 낱말들, 문장들, 착상들로 가득차서 터질 지경이었다. 그것들은 이미 모두 갈고 닦아 정제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글로 써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펜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느끼면서 행복했지만, 동시에 지신이 실제로 그 훌륭함에 기여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고는 당황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이 오름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냥 펜대를 잡고 마치 저절로 써가듯이 글을 쓰는 것, 그런 것이야말로 게으른 시인의 꿈이었다. 아무렴 그랬다.
(P.207)
“아니다. 문학은 영원한 것이 아니야!"
호문콜로스가 외쳤다.
"순간적인 것이다. 아무리 쇠로 책을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글자를 새긴다 해도 언젠가는 이 지구와 함께 태양에 부딪치면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영원한 것이란 없는 법이다. 예술에는 전혀 없다. 한 작가가 죽은후에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희미한 램프처럼 서서히 꺼져 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활활 타오르는가다.
"그건 성공적인 작가의 좌우명이겠지요.”
내가 반박횠다
“살아 있는 동안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 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문콜로스가 말했다.
"어떤 책이 얼마나 간 팔리고 팔리지 않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 혹은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한 작가를 인지하는가 안 하는가는 전혀 상관없다. 그런 것이 규범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우연과 부당함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내 말은, 네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네 안에서 얼마나 환하게 오름이 타오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은 오름을 믿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는 음울하게 말했다.
"다만 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전부다."
(P.252)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그가 말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작가라고 부르지. 그리고 작가들보다 좀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다른 시인들보다 좀더 글을 잘 쓰는 시인들이 있다.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은 오름에 도달할 수 있는 자들이다."
오 이런, 또다시 오름이라니! 내가 아직도 오름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빌어먹게도 고집스럽게 내 발치에 붙어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외딴 구석까지도 나를 쫓아다녔고 지하 수 킬로 미터 아래 살아 있는 책들의 도서실까지 쫓아와 나를 찾아낸 것이다.
"오름이 지니고 있는 장조적인 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만 안다면 말이다."
(P.266)
"작가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있는 거지. 체험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네가 무엇을 체험하려면 해적이나 책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네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써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너 자신으로부터 창조해낼 수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다."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