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 서병훈 / 책세상 / 155쪽

(20.4.5. - 20.4.16.)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등의 도덕 규범이 성립한 수 있는 궁국적 기반은 무엇인가? 인간 본성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가, 아니면 도덕이나 윤리는 그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계약의 산물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조수미와 이미자 중 누가 더 훌륭한 '가수'인가?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조수미와 이미자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며 조수미 쪽에 손을 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소리냐, 이미자 노래의 참맛을 모르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마다 취향과 생각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를 세거나 길이나 무게를 재는 것에 대해서는 쉽사리 의견이 일치한다. 경험적 판단을 재정할 확실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 또는 존경받을 일이고 수치스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각각 생각이 다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가치 문제는 각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만물의 척도'가 되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신이란 인간의 주관적 판단을 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체계를 뜻한다. 넓게 보면 서양 철학사는 이 두 주장을 중심으로 한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오늘날에는 대체로 소피스트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자유주의자 중에서도 객관적, 보편적 가치를 찾는 사림들이 있다 그중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이 대표적이다.

(P.6)

밀이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쾌락에 집중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의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밀은 또한 인간이 사회적 감정social feeling을 타고난다고 믿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일체감을 느끼는 사회적 존재가 바로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결국 밀의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과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두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의 성가를 드높이는《자유론On Liberty》도 이런 바탕 위에서 꽃피었다. 자유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공리주의가 고민하는 가치의 방향과 어긋나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다.

(P.8)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둘러싼 논쟁은 별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식의 발전 과정을 되돌아볼 때, 이것만큼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또 있을까?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임에도, 이 문제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심각한 낙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이 처음 생기면서부터 최고선summum bonum, 달리 말하면 도덕성의 기초에 관한 의문이 사변 철학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그동안 최고의 지성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온몸으로 매달렸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저 치열한 논전 끝에 여러 분파와 학파로 갈라졌을 뿐이다.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는 나이 많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말을 경청한 뒤(플라톤의 대화편이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벌어진 대회를 담고 있다면), 당시 영향력이 컸던 이른바 소피스트의 도덕률에 대항해서 공리주의 이론을 주장했다. 이후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홀렀지만, 여전히 똑같은 토론이 이어지면서 철학자들이 두 학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다. 오늘날 사상가 또는 넓은 의미의 인류가 이 주제에 의견이 일치될 가능성은 소크라테스 시대보다도 높지 않다.

(P.13)

어떤 한 과학 분야의 제1원리라고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들은 그야말로 그 분야에서 익숙하게 다루는 기본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의 최종 결론이다. 이런 진리와 과학의 관계는 건물과 주춧돌보다는 나무와 뿌리의 관계에 더 가깝다. 뿌리는 땅 위로 파헤쳐져서 햇빛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특정 부분의 진리가 일반 이론보다 먼저 발견되지만, 도덕이나 입법 활동 같은 실천적인 분야에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행동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행동 규칙도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특성과 색깔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 추구할 때는 그것에 관해 먼저 분명하고 자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순서가 뒤바뀐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을 시험하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거꾸로 이미 가려낸 것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P.13)

나는 이 책에서 더 이상 다른 이론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다만 공리주의 또는 행복 이론을 소개하고 평가하며. 그것을 입증하는 일에만 치중하려 한다. 그런 이론을 지칭하는 용어 자체의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입증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궁극적인 목적에 관한 질문은 직접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좋은 것이라고 증명되려면, 따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무엇인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전부 포함하는 포괄적 법칙이 있으며, 그 나머지 좋은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법칙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 된다. 그러나 그 법칙은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의미의 증명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수용 또는 거부가 맹목적 충동이나 자의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증명이라는 말 속에는 여러 뜻이 들어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되는 다른 철학적 명제만큼이나 이 문제도 증명 대상이 될 수 있다. 주제는 이성적 능력의 인식 대상이 된다. 이성적 능력은 단지 직관에만 힘입어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깊이 고려해 지성은 특정 주장에 대해 동의 또는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증명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P.18)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이 이론은,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는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쾌락의 결핍과 고통은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이 정립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고통과 쾌락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그러나 소소하게 설명할 것이 많다고 해서 이 도덕 이론의 핵심 명제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즉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다른 모든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에서도 바람직한 것은 무수히 많다)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가 된다.

이 이론은 많은사람들, 특히 느낌feeling과 목적purpose에 관한 대표적 사상가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말하듯) 인생에는 쾌락보다 더 높은 목적이 없다고, 다시 말해 쾌락 이상으로 더 좋은 욕망과 더 고상하게 추구할 만한 것이 없다면 이것은 극단적으로 야비하고 천박한 이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을 돼지에 비유하면서 심한 야유를 보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에 들어서도 이 입장을 취하는 사림들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의 공격자들로부터, 비록 표현이 점잖기는 하지만,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런 공격을 받으면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은 늘 똑같은 방식으로 반격을 가했다. 즉 자신들을그렇게 비웃지만, 인간이 돼지가 즐길 수 있는 쾌락 이상의 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정하는 그들이야말로 인간을 비참한 존재로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돼지와 똑같이 규정히는 자들이라면 그와 같은 비난에 반박할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근거 없는 비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돼지와 똑같은 쾌락을 즐긴다면, 한쪽에 좋은 삶의 규칙이 다른 쪽에 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말하는 삶의 방식과 짐승의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것은 짐승에게 해당되는 쾌락이 인간의 행복 개 념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공리주의 원리에서 자신들의 행동 규범을 도출해내는 과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하자면 기독교뿐과 아니라 스토아 학파의 여러 요소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의 인간존재 이론치고 단순 감각 작용에서 생기는 쾌락보다 지성, 느낌과 상상력, 도덕 감정의 쾌락에 대해 더 큰 값어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리주의 이론가들도 정신적 쾌락이 내재적 본질에서는 몰라도 항구성, 안전성, 비용 등의 주변적 장점에서 육체적쾌락보다 한결 더 우월하다고 주장해왔다.

(P.24)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가장 적합한 개념은 인간으로서의 품위sense of dignity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형태로 지니고 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커진다. 그리고 그런 의미의 품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 품위가 행복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따라서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길고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인간적 품위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행복을 잃게 된다고, 다시 말해 상황이 비슷할 경우 우월한 사람이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 비해 행복을 덜 느끼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과 만족content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을 혼동한 결과다. 즐거움을 향유하는 능력이 낮은 사람 일수록 손쉽게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반면에 그런 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 이라는 것은, 세상이 늘 그렇듯,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것을 감내할 만하다면, 그는 그것을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때문에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민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데스가 더 나은 것이다. 바보나 돼지가 이런 주장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한쪽 문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들은 두 측면 모두잘 알고 있다.

​(P.28)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세상 또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입각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선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개인들의 이익이 모여 사회의 이익이 형성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아주 덕스러운 사림이라고 해서 자기와 관련되는 특정인을 넘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권리 즉 정당하고 합법적인 기대를 침해하게 된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주변 사람듣을 더 위하기 마련인 것이다. 공리주의 윤리에 따르단 행복을 증대하는 것이 덕스러움의 목표다. (1,000명에 한 사람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누구게든지, 공익 자선사업가처럼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발휘해서 덕스러운 일을 광범위하게 벌일 수 있는 상황은 아주 예외적으로만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공공의 효용을 우선 고려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경우에는 그도 사적 고용 즉 일부 사람들의 이익 또는 행복을 증진하는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항상 포괄적인 목표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해 절제가 필요한 경우--때로 유익한 결괴를 낳을 수도 있지만, 도덕적 고려 때문에 하지 않는 경우-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해를 끼질 것이기 때문에 하지 말이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경우인데도, 이것에 대해 확실 하게 의식하지 못한다면 양식 있는 행위자라고 할 수 없다. 이 정도의 공공 이익에 대해서는 여타 모든 도덕률도 신경을 쓰라고 한다. 사회에 분명히 해를 끼치는 일인데 누가 그것을 제지하지 않겠는가?

(P.44)

행복이 도덕의 목적이며 목표라는 명제를 설정한다고 해서.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을 만들면 안 된다거나. 그 방향으로 가는 사림에게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충고한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선원들이 항해력을 계산하느라 기다릴 수 없다고 해서 항법술이 천문학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선원들은 합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항해력을 계산할 수 있는 상태에서 바다로 나간다. 마찬가지로 모든 합리적인 존재는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구분하는 훨씬 어려운 여러 문제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상적인 문제에도 대처하기 위해 마음을 미리 일정한 방향으로 잡고서 인생이라는 바다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을 근본적인 도덕 법칙으로 채택하든지 간에 그것에 입각해서 하위 규범도 만들어내야 한다. 다른 모든 이론 체계도 그렇지만, 그런 하위 규범이 없다면 특정 상황을 맞아 아무런 주장도 펼 수가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2차 원리들이 존재할 수 없다거나, 인류가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어떤 일반적인 결론을 끄집어내는 일 없이 지금까지 지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각종 논쟁으로 가득 찬 철학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주장이다.

(P.53)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나머지 논거는 주로 인간 본성이 일반적으로 나약하다는 것과 양심적인 사람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 곤혹스러워한다는 사실에 집중 되어 있다. 흔히 공리주의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도덕 규칙을 예외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고, 유혹을 받으면 규칙을 지키기보다 그것을 위반하는 쪽으로 효용을 해석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과연 효용이 악행을 정당화하고 우리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신념 체계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도덕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된 견해를 보이는 수많은 이론이 있다. 정상적인 사람 들이 믿고 따르는 모든 이론이 다 그렇다. 따라서 행동 규칙에 예외가 생기는 것은 특정 신념 체계의 결함이라기보다 인간사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행동도 언제나 의무적으로 따라야 한다거나 반대로 항상 지탄받아야 마땅하다고 이분법적으로 잘라서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윤리 체계도 특수한 상횡에 부응하기 위해 행위자의 도덕적 책임 아래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함으로써 그 규칙의 엄격성을 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빈틈이 있기 때문에 각종 신념 체계마다 자기 기만과 부정직한 궤변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도덕 체계 속에 명백하게 모순된 의무 조항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윤리 이론이 까다롭고 복잡하며 개인 행동을 양심적으로 지도하는 일이 진정 어려워진다. 정도는 다르지만 각 개인의 지성과 덕성에 힘입어 이런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간에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그리고 상호 갈등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해 판정을 내려줄 궁극적 기준을 가지는 데 자격이 따로 있는 것처럼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P.54)

일반 행복은 윤리적 기준으로 일단 받아들여지기만하면 공리주의 도덕의 힘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감정이 바로 이런 굳건한 기초가 된다. 사회적 감정이란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데, 이것은 이미 인간 본성 속에서 강력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다 행스럽게도 굳이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에 비례해 점점 강해진다. 사회 상태social state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또한 익숙한 것이라서 어떤 예의적 상황 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자신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야만 상태의 고립을 점점 멀리하면서 이런 사회적 결합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 상대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은 무엇이든지 보는 사람의 존재 상황에 대한 인식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고. 따라서 인간의 운명을 구성하는 큰 인자(因子)가 된다. 주인과 노예 관계라면 모를까, 이제 어떤 인간 사회도 관련된 사람들의 이익을 골고루 반영하지 않고는 아예 존재하기도 어렵다.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존립이 가능하다. 문명사회라면 절대군주를 제외하고는 각자가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원칙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방향으로 진보가 일어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에게 심각한 해를 끼쳐서는 안 되고,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수에) 서로 견제하며 사는 것 정도만 허용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타인과 협력하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익을 (적어도 당분간은) 행동의 목표로 삼도록 자신에게 다짐하는 일에 의숙하다. 그들이 서로 협력하는 한, 각자의 목표가 서로 일치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 된다고 하는 감정이 일시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모든 것, 그리고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은 각자가 타인의 복리에 대해 실제적으로 더욱 관심 갖게 할 뿐 아니라, 타인이 좋은 일에 대해 더욱 감정적 일체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일에대해 점점 더 강력하게 실제적으로 관심을 쓰게 해준다. 그래서 마치 본능적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대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존재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들에게 좋은 일을 우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반드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맟 생존을 위한 물리적 조건인 것처럼 된다. 그 결과 이런 감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강화하는데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강력한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들도 그런 감정을 가지도록 추구할 것이다. 혹은 설령 자기는 그런 것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 못지않게 진지하게 느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정심이 확산되고 교육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아주 작은 감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난다. 그리고 강력한 외부적 제재에 힘입어 그것을 둘러싼 집단 협력이 광범위하고 긴밀하게 일어난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 자신과 인간의 삶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일은 점점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해관계의 대립을 초래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대다수 사람들의 행복을 무시하는 개인 또는 계급 사이의 법적 불평등을 발전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정치적 진보가 한 걸음 한 걸음 더욱 그런 방향으로 역사를 몰아간다. 인간 정신의 발전과 발을 맞추어, 각 개인의 마음속에 사회의 나머지 사람 전부와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강해진다. 이런 일체감이 완벽해진다면. 다른 사람을 배제한 채 자기에만 유리한 상황을 생각하거나 갈망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지금 이런 일체감을 하나의 종교인 것처럼 가르칠 수 있다고, 그리고 한때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교육과 제도와 여론의 모든 힘이 말과 실천이라는 두 측면에서 사람들을 유아기에서 벗어나 크게 성장할 수 있게 한다고 상정한다면, 이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 그 누구로 행복이라는 도덕률이 궁극적 정당성을 충분히 지닌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P.67)

돈이 가치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지고 다른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돈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갈망, 즉 원하는 것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에 대한 집착은 인간 삶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며, 돈보다 더 고상한 다른 목적에 대한 갈망이 전부 사그라질 때도 돈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위한다기보다 그 목적의 일부분으로서 돈을 갈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 그 자체로 행복에 관한 개인의 생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다른 위대한 목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권력이나 명성 같은 것도 그렇다. 물론 이런 것에는 각각 어느 정도 즉각적인 쾌락이 따라다니며, 그런 성질이 적지 않게 자연스럽고 내재적인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한다는 점에서 돈과 엄연히 구분된다. 그런 것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권력과 명성이 지닌 가장 강력한 매력은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매우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명성에 대해 사람들이 그토록 심하게 집착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른 어떤 욕망보다 더 애착을 갖는 것은 그것과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대상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수단이 목적의 한 부분이 된다. 아니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그 목적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한때 행복을 얻기 위한 도구로 갈망되던 것이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되면서 행복의 한 부분으로서 갈망되고 있다. 사림들은 단지 그것을소유한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지거나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행해 진다. 그것에 대한 갈망은 행복에 대한 갈망과 다르지 않아서, 음악에 대한 사랑 또는 건강해지고 싶어 하는 갈망보다 더 강렬하다. 그것은 행복에 다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행복에 대한 갈망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인 것이다. 행복이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하나의 전체다. 따라서 그것이 그 전체의 부분이 된다. 공리주의의 기준은 이와 같은 관계를 정당화하고 인정한다. 처음에는 우리의 원초적 갈망을 충족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그런 발향에 도움의 되거나 일정한 상관관계를 가진 정도였던 사물들 자체가, 그 영향을 받는 인간 삶의 영역 속에서 지속성, 심지어는 강도의 측면에서 원초적 쾌락보다 더 가치가 있는 쾌락의 원천이 되곤 한다. 만일 세상 이치가 이렇지 않다면 인생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행복을 느끼기에도 대단히 부족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P.78)

도덕 이론가와 입법가들이 볼 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행복권을 누려야 한다는 말은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인간사를 살아가면서 불가피한 경우. 그리고 모든 개인이 관련되는 일반 이익을 위해 그런 원칙이 일정 부분제한받을 수밖에 없지만, 이런 경우도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정의에 관한 격률과 마찬가지로 행복권 역시 보편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그와는 반대로 사회적 편의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여러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일단 원칙이 적용된다면, 그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부 공인된 사회적 편의 때문에 제한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회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은 단순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 불의라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짓밟는 그런 처사가 지금까지 어떻게 용인되어 왔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역시 사회적 편의라는 개념에 대해 똑같이 잘못 이해한 나머지 다른 불평등에 대해 눈을 감고 지내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거두고 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눈감고 지내온 것들이나 장차 혹독하게 비판하려는 것이 똑같이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진보의 전 역사는 수정과 변화로 점철되고 있다. 사회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던 괸습이나 제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의나 폭압으로 낙인찍히며 오명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노예와 자유인, 지주와 농노, 귀족과 평민의 관계가 그랬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가시권 안으로 들어와 있지만, 피부책과 인종, 성별에 따라 신분의 차이가 매겨지는 것도 앞으로는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

(P. 123)

<해제>

공리주의는 흄David Hume을 거쳐 벤담에 의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벤담은 원래 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새로운 도덕 이론을 만드는 것보다 현실을 개혁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가 공리주의를 체계화한 것 역시 현실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원리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벤담은 효용이라는 잣대를 제시했다. 효용을 증대할 수 있는 사회 정책이라면 좋은 것이라는 논리를 전파해 나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내용의 공리주의를 통해 당시 팽배하던 직관주의적 도덕관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벤담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보습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쾌락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굳이 무시하려 드는 기존의 도덕 철학에 대해 냉소적 자세를 취했다 벤담은 공리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정리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고통과 쾌락이라는 절대 군주와도 같은 힘의 지배를 받는다. 이 두 요소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게 해줄 뿐 아니라 나아가 어떻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이 힘을-거역하면 할수록 결국은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될 뿐이다.

벤담은 인간의 삶은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각자 자유로이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다면, '최대 다수의 최다 행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 127)

밀이 정신적 방황을 극복하는 데는 워즈워스의 시가 큰 힘이 되었다. 사색과 분석 못지않게 수동적인 감수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1836년 “공리주의가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의 틀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성 못지않게 감성이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시가 철학의 필수 요건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밀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면서 음악, 시, 미술 등이 인간의 교양을 넓히는 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로크, 흄, 하틀리 대신에 워즈워스, 콜리지, 괴테 등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밀은 아버지와 벤담의 그늘을 벗어나게 된다.

밀은 공리주의자를 자칭했지만 전통적 공리주의자. 특히 벤담과 여러모로 달랐다. 우선 두 사람의 세계관이 달랐다 밀은 행복이라는 말을 벤담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 뿐 아니라 밀은 각 사물이 내포한 가치의 객관적 차이를 인정했다. 효용이라는 논리적 도구를 빌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밀의 공리주의는 벤담과 큰 차이가 난다.

(P. 132)

공리주의는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는 이론이다. 밀은 행복을 제외하면 사람이 진정 갈망하는 것은 없다는 확신 아래,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삶에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거나 쾌락을 주거나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좋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 된다. 이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다.

밀은 이처럼 행복의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을 효용이라고 부르면서, 이 기준에 따라서 도덕률을 확립하고자 했다. 어떤 행위든 행복을 증진시켜주면, 즉 쾌락을 늘려주거나 고통을 줄여주면 정당한 것이 되고. 그 반대면 나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림들은 흔히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고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공리주의지들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회생 그 자체가 선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림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을 증대해주는 등, 행복의 전체 양을 증진하지 않는 희생이란 쓸데없는 허비라고 보는 것이다.

(P.133)

밀에 관한 전통적 해석은 밀이 공리주의의 한계를 직시하며 그것을 극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저술가 벌린Isaiah Berlin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밀은 자유가 수단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공리주의적 시각과 반대로 전체 복리의 증진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 이 두 상반된 관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채 문제 해결에 실패 했다. 밀은 직관이 아니라 이론을 추구한다면서 공리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라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직관적 당위론을 주장했다. 밀이 이러한 모순의 늪을 헤쳐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벌린의 생각이다

밀은 인간이 사회성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체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자기 발전 또는 진보가 효용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상정하는 이런 가치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충분한 경험과 웬만한 수준의 이성을 갖춘 사람들이 합심하여 토론한 결과 얻어낸 결과물인가? 그들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난 뒤 도달하게 된 결론의 결정체인가? 아니다. 밀이 홀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성만 해도 그렇다 밀 자신이 말했듯이, 인간은 잘못된 사회 제도와 교육의 결과로 인해 이기심에 젖어 있고 그 결과 남보다 앞서 가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적어도 경험과 관찰을 통해 본 인간의 실상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밀은 어떻게 해서 사회성이라고 하는 천성적 경향을 발굴해낼 수 있었을까? 스스로의 직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밀은 직관주의에 빠져 있다.

(P. 144)

결국 밀의 기대와 달리, 공리주의가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기준을 둘러싼 논쟁에 결정적인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도덕성의 기초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열려 있다. 이 대목에서 '정의론'의 대가 를스John Rawls에 대한 평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롤스의 구성주의는 규범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그의 장담(혹은 기대)과 달리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 했다. 그럼에도 규범 회의주의에 맞서 '정치철학의 부활'을 이끌어낸 를스의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밀의《공리주의》도 마찬가지다. 비록 제1원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지만, 철학이 가야 할 길, 도전해야 할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돋보이는 것이 바로《공리주의》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시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웃사람들을 내 몸처럼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지 등에 관한 밀의 성찰은 철학이 죽은 시대, 철학을 폄하하는 사회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P. 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