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수록 타인들 속에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타인들은 모두 거울처럼 나의 부끄러움을 반사한다. 더 이상 자신이 그다지 정의롭지도 대단하지도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만나는 누구나처럼. 그래서 타인들 속으로 들어가길 겁내하지만, 결국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너와 나의 세상을 산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홍상수 영화밖에 찍을 수 없는 그런 곳, 어느 정도는 그런 곳, 추한 욕망과 아집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감추고 적당히 포장하다가는 어느 순간엔 폭발하듯 그 이상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곧 그것을 기억 속에서 지우며 살아간다. 어쩌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은 그나마 축복인지도 모른다. 모든 자신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고 타인을 재단하는 눈으로 자기를 본다면, 곧 자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권여선 소설은 한없이 재밌다. 하지만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 군상의 기록이기도 하다. 「문상」의 우정미나 「약콩이 끓는 동안」의 김교수와 그의 아들들을 만난다면 뭐라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생각 끝에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나의 추함이다. 「가을이 오면」에서 학을 뗄 만큼 떼를 쓰던 로라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 학을 뗄 만큼 떼를 쓰던 때가 있었으며 「반죽의 형상」, 「문상」 속에서의 일들에 대해 ‘어머, 어쩜’이라고 내숭을 떨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진짜 싫지만, 진짜 싫어서 모른 척 하고 싶은 모습을 권여선은 쓴다.

아무래도 비극일라치면 희극이고 희극일라치면 비참한 시간의 기록임이 분명한 관계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폭소를 터뜨리다가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나의 비루한 시간들을 떠올리곤 했다. (날뛰는 생선 같은 비유도 웃음에 한 몫 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유치한데 나는 그때 얼마나 진지하게 굴며 떼를 쓰고 생지랄을 떨거나 우아한 척 굴며 자기 보호를 했던가에 대해 그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다음부턴 사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중에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네가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줄게  

라고 말해야지. 그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고마워 라고 말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까뮈는 앞으로 나아간다. 거침이 없는 발걸음. 주변의 손길 따윈 안중에 없다. 자기가 갈 길을 갈 뿐이다. 이 확신은 어디서 올까? 페스트에 대해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그런 종류의 우울한 투쟁을, 그 기나긴 기간 동안에 걸쳐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지배했던 그 투쟁을 계속 추적할 수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이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방인』이나 『전락』, 『정의의 사람들』을 읽을 때도 까뮈는 언제나 단숨에 나아갔다. 그래서 그 속도를 따라 책장을 넘기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은 정지한다. 까뮈의 관념을 위해서? 그런걸까? (파늘루 신부의 두 번의 연설과 그의 병명 미상의 죽음에 대한 서사는 이 작품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마 가장 거침없이 나아가는 부분일 것이다. 이는 단순한 반항이라기보다는 삶과 기독교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 이 세계가 화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짚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사놓고 이제야 읽는데, 내가 상상하던 ‘페스트’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보다는 훨씬 덜 비참한 내용이었고 그 대신 작품에서 밝히고 있듯 ‘투쟁’에 대한 일지라는 느낌이 크다. 살아있는 편에서는 그것밖에 기록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정직한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도를 넘어선 비참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오직 거기서 그치기 일수니까.

삶과 관념(삶의 카테고리를 넘어서려 하는 어떤 것-나치즘과 같이-) 사이의 관계에서 까뮈는 삶의 편에 선다. 완두콩을 옮기는 해수병쟁이 노인, 고양이에게 가래침 뱉는 것을 낙으로 삼는 노인, 한 문장을 쓰기 위해 단어를 끝없이 찾아 헤매는 하급 임시직 관리, 그 옆집에 사는 불안에 떠는 범죄자 등은 이 소설을 풍성하게 하고 계속 읽고 싶게끔 만든다. 페스트라는 병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황폐하게 도시를 망가뜨리고 어떻게 물러가는가 보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일상과 추억들이 어떻게 그들을 각자의 존재이게 하는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삶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그 삶에 대한 이미지는 정의나 관념이기 보다는 순간적으로 그들을 스치고 갔던 손길, 시간 같은 것이다. 하급 임시직 관리 그랑은 옛 아내에 대한 추억으로 삶을 이어갈 암시를 얻고, 타루는 재판장에서 겪었던 죽음과 살인에 대한 이미지가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 의미에서 까뮈의 분신은 아마 타루가 아닐까?) 해설에서 나오듯 물론 모든 인물들이 까뮈의 분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그 인물들이 살아서 이야기하는 듯한 장면이 이 소설을 훨씬 더 생생하게 만든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대단히 관념적이고 온당하며 정의로운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어떤 생생한 목소리가 이 소설에 생기를 준다.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나,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 살다보니 자신의 정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된 인물의 목소리이다.

정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로워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만 알겠다.

놀라운 점은 전락을 쓴 그 작가가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 미친 놈에 가까운 어떤 정열을 고백하던 작가가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57

쥐들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어대던 신문이 이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안에서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었다.

126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대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다만 리유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22

“용기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제 나는 인간이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가질 수 없다면 나는 그 인간에 대해서 흥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마치 온갖 능력을 다 가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하고 타루가 말했다.

“천만에요. 인간은 오랫동안 고통을 참거나 오랫동안 행복해질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가 계속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타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으세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그럴 수는 없을것 같군요. 지금은…….”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서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리유는 신문기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줄곧 그를 바라보면서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

랑베르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 일어났다.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관념이죠, 하나의 어설픈 관념이죠. 인간이 사랑에게서 등을 돌리는 그 순간부터 그렇죠. 그런데 바로 우리들은 더 이상 사랑할 줄 모르게 되고 만 겁니다. 단념합시다, 선생님.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립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영웅 놀음은 집어치우고 전반적인 해방을 기다립시다. 나는 그 이상은 더 나가지 않겠어요.”




p.229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p338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 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은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하여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내 자신이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동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죄 없는 살인자가 되길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그리 큰 야심은 아닙니다.




p.386 

그러나 자기, 리유는 이긴 것이 무엇이었던가? 단지 페스트를 겪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그가 얻은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쟝그르니에전집 6
장 그르니에 지음, 함유선 옮김 / 청하 / 1988년 8월
평점 :
절판


 

내면에 숨어있는 것들을 드러내도록 한다. 손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늘 우리 내면에 있어왔으나 그동안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것, 달걀 껍질을 깨부수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아주 얇은 표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장 그르니에는 그것들을 건드린다.

그의 문장 사이의 간격은 결코 좁지도 넓지도 않다. 그의 문장 사이를 쫓다보면 어느새 그와 함께 산책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주 한적한 곳을 걷는 기분.

까뮈의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대체 이 책 속에 뭐가 있는 거지. 그래, 사실 누가 무슨 책이야 라고 물어보면 잘 대답은 못할 것 같다. 한 마디로 되지 않는 것들이므로. 그저, 왜 요새 사람들 시나 글에 그다지도 고양이가 많이 등장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달까. 그러니까 그 느낌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말로 해내기는 힘든 법인데, 장 그르니에는 말로 해낸다.

읽은 지 어느 정도 돼서 더 이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부정하세요. 당신이 생각할 때는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을 하세요. 제 에미가 입으로 새끼를 물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 자신을 그냥 가만히 맡기세요.




물루는 행복하다. 세상이 영원히 자신과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는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 그 환상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는 장난을 즐기지만 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한 치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정확한 몸짓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그만 황홀해진다. 매 순간 그는 제 행동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에서 두 눈을 잠시도 떼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음식물에 빠지지 않나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만일 그가 누군가의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리는 것을 보면, 자기의 온갖 애정을 기울이면서 그렇게 몸을 옹크린다. 내가 그에게서 빈틈을 찾아보려고 하나 도대체 어디에서고 찾아볼 구석이 없다. 그의 행위는 그의 동작과 일치가 되고, 그의 동작은 그의 식욕과, 그의 식욕은 그의 이미지와 일치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사슬과도 같다. 어쩌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렇게 다리를 펴는 것이, 다만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를 잘 이룬 테두리에도 그와 같은 필연성은 없다.

내가 때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날이면, 그런 충만함이 오히려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다름아닌 인간임을 느낀다. 곧 나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임을 느낀다는 말이다. 나는 알고 있다. 연극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말 것이고 내 상대역이 내게 어떤 물음을 던져도 대꾸를 잃은 채 말없이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완전한 부재. 마침내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들에게, 나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 나는 넋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어떤 필연이 나를 내가 처해있는 상황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 빠져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루가 자신이 고양이인 것에 만족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인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물루는 옳고, 그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자리는 그들에게 버티고 있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제발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자리조차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어디론가 달아나야 하리라. 그런데 발딛고 설 만한 단단한 한 치의 땅도 있지 않다, 물루와……사이에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