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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쟝그르니에전집 6
장 그르니에 지음, 함유선 옮김 / 청하 / 1988년 8월
평점 :
절판
내면에 숨어있는 것들을 드러내도록 한다. 손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늘 우리 내면에 있어왔으나 그동안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것, 달걀 껍질을 깨부수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아주 얇은 표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장 그르니에는 그것들을 건드린다.
그의 문장 사이의 간격은 결코 좁지도 넓지도 않다. 그의 문장 사이를 쫓다보면 어느새 그와 함께 산책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주 한적한 곳을 걷는 기분.
까뮈의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대체 이 책 속에 뭐가 있는 거지. 그래, 사실 누가 무슨 책이야 라고 물어보면 잘 대답은 못할 것 같다. 한 마디로 되지 않는 것들이므로. 그저, 왜 요새 사람들 시나 글에 그다지도 고양이가 많이 등장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달까. 그러니까 그 느낌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말로 해내기는 힘든 법인데, 장 그르니에는 말로 해낸다.
읽은 지 어느 정도 돼서 더 이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부정하세요. 당신이 생각할 때는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을 하세요. 제 에미가 입으로 새끼를 물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 자신을 그냥 가만히 맡기세요.
물루는 행복하다. 세상이 영원히 자신과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는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 그 환상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는 장난을 즐기지만 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한 치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정확한 몸짓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그만 황홀해진다. 매 순간 그는 제 행동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에서 두 눈을 잠시도 떼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음식물에 빠지지 않나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만일 그가 누군가의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리는 것을 보면, 자기의 온갖 애정을 기울이면서 그렇게 몸을 옹크린다. 내가 그에게서 빈틈을 찾아보려고 하나 도대체 어디에서고 찾아볼 구석이 없다. 그의 행위는 그의 동작과 일치가 되고, 그의 동작은 그의 식욕과, 그의 식욕은 그의 이미지와 일치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사슬과도 같다. 어쩌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렇게 다리를 펴는 것이, 다만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를 잘 이룬 테두리에도 그와 같은 필연성은 없다.
내가 때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날이면, 그런 충만함이 오히려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다름아닌 인간임을 느낀다. 곧 나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임을 느낀다는 말이다. 나는 알고 있다. 연극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말 것이고 내 상대역이 내게 어떤 물음을 던져도 대꾸를 잃은 채 말없이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완전한 부재. 마침내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들에게, 나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 나는 넋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어떤 필연이 나를 내가 처해있는 상황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 빠져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루가 자신이 고양이인 것에 만족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인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물루는 옳고, 그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자리는 그들에게 버티고 있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제발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자리조차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어디론가 달아나야 하리라. 그런데 발딛고 설 만한 단단한 한 치의 땅도 있지 않다, 물루와……사이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