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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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타인들 속에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타인들은 모두 거울처럼 나의 부끄러움을 반사한다. 더 이상 자신이 그다지 정의롭지도 대단하지도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만나는 누구나처럼. 그래서 타인들 속으로 들어가길 겁내하지만, 결국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너와 나의 세상을 산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홍상수 영화밖에 찍을 수 없는 그런 곳, 어느 정도는 그런 곳, 추한 욕망과 아집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감추고 적당히 포장하다가는 어느 순간엔 폭발하듯 그 이상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곧 그것을 기억 속에서 지우며 살아간다. 어쩌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은 그나마 축복인지도 모른다. 모든 자신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고 타인을 재단하는 눈으로 자기를 본다면, 곧 자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권여선 소설은 한없이 재밌다. 하지만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 군상의 기록이기도 하다. 「문상」의 우정미나 「약콩이 끓는 동안」의 김교수와 그의 아들들을 만난다면 뭐라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생각 끝에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나의 추함이다. 「가을이 오면」에서 학을 뗄 만큼 떼를 쓰던 로라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 학을 뗄 만큼 떼를 쓰던 때가 있었으며 「반죽의 형상」, 「문상」 속에서의 일들에 대해 ‘어머, 어쩜’이라고 내숭을 떨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진짜 싫지만, 진짜 싫어서 모른 척 하고 싶은 모습을 권여선은 쓴다.

아무래도 비극일라치면 희극이고 희극일라치면 비참한 시간의 기록임이 분명한 관계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폭소를 터뜨리다가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나의 비루한 시간들을 떠올리곤 했다. (날뛰는 생선 같은 비유도 웃음에 한 몫 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유치한데 나는 그때 얼마나 진지하게 굴며 떼를 쓰고 생지랄을 떨거나 우아한 척 굴며 자기 보호를 했던가에 대해 그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다음부턴 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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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네가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줄게  

라고 말해야지. 그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고마워 라고 말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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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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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는 앞으로 나아간다. 거침이 없는 발걸음. 주변의 손길 따윈 안중에 없다. 자기가 갈 길을 갈 뿐이다. 이 확신은 어디서 올까? 페스트에 대해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그런 종류의 우울한 투쟁을, 그 기나긴 기간 동안에 걸쳐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지배했던 그 투쟁을 계속 추적할 수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이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방인』이나 『전락』, 『정의의 사람들』을 읽을 때도 까뮈는 언제나 단숨에 나아갔다. 그래서 그 속도를 따라 책장을 넘기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은 정지한다. 까뮈의 관념을 위해서? 그런걸까? (파늘루 신부의 두 번의 연설과 그의 병명 미상의 죽음에 대한 서사는 이 작품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마 가장 거침없이 나아가는 부분일 것이다. 이는 단순한 반항이라기보다는 삶과 기독교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 이 세계가 화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짚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사놓고 이제야 읽는데, 내가 상상하던 ‘페스트’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보다는 훨씬 덜 비참한 내용이었고 그 대신 작품에서 밝히고 있듯 ‘투쟁’에 대한 일지라는 느낌이 크다. 살아있는 편에서는 그것밖에 기록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정직한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도를 넘어선 비참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오직 거기서 그치기 일수니까.

삶과 관념(삶의 카테고리를 넘어서려 하는 어떤 것-나치즘과 같이-) 사이의 관계에서 까뮈는 삶의 편에 선다. 완두콩을 옮기는 해수병쟁이 노인, 고양이에게 가래침 뱉는 것을 낙으로 삼는 노인, 한 문장을 쓰기 위해 단어를 끝없이 찾아 헤매는 하급 임시직 관리, 그 옆집에 사는 불안에 떠는 범죄자 등은 이 소설을 풍성하게 하고 계속 읽고 싶게끔 만든다. 페스트라는 병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황폐하게 도시를 망가뜨리고 어떻게 물러가는가 보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일상과 추억들이 어떻게 그들을 각자의 존재이게 하는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삶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그 삶에 대한 이미지는 정의나 관념이기 보다는 순간적으로 그들을 스치고 갔던 손길, 시간 같은 것이다. 하급 임시직 관리 그랑은 옛 아내에 대한 추억으로 삶을 이어갈 암시를 얻고, 타루는 재판장에서 겪었던 죽음과 살인에 대한 이미지가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 의미에서 까뮈의 분신은 아마 타루가 아닐까?) 해설에서 나오듯 물론 모든 인물들이 까뮈의 분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그 인물들이 살아서 이야기하는 듯한 장면이 이 소설을 훨씬 더 생생하게 만든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대단히 관념적이고 온당하며 정의로운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어떤 생생한 목소리가 이 소설에 생기를 준다.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나,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 살다보니 자신의 정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된 인물의 목소리이다.

정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로워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만 알겠다.

놀라운 점은 전락을 쓴 그 작가가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 미친 놈에 가까운 어떤 정열을 고백하던 작가가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57

쥐들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어대던 신문이 이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안에서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었다.

126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대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다만 리유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22

“용기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제 나는 인간이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가질 수 없다면 나는 그 인간에 대해서 흥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마치 온갖 능력을 다 가진 것처럼 말씀하시네요.”하고 타루가 말했다.

“천만에요. 인간은 오랫동안 고통을 참거나 오랫동안 행복해질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가 계속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타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으세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그럴 수는 없을것 같군요. 지금은…….”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서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리유는 신문기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줄곧 그를 바라보면서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

랑베르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 일어났다.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관념이죠, 하나의 어설픈 관념이죠. 인간이 사랑에게서 등을 돌리는 그 순간부터 그렇죠. 그런데 바로 우리들은 더 이상 사랑할 줄 모르게 되고 만 겁니다. 단념합시다, 선생님.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립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영웅 놀음은 집어치우고 전반적인 해방을 기다립시다. 나는 그 이상은 더 나가지 않겠어요.”




p.229

그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밖에는 없었다.




p338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 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은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하여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내 자신이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동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죄 없는 살인자가 되길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그리 큰 야심은 아닙니다.




p.386 

그러나 자기, 리유는 이긴 것이 무엇이었던가? 단지 페스트를 겪었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그가 얻은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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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쟝그르니에전집 6
장 그르니에 지음, 함유선 옮김 / 청하 /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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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면에 숨어있는 것들을 드러내도록 한다. 손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늘 우리 내면에 있어왔으나 그동안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것, 달걀 껍질을 깨부수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아주 얇은 표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장 그르니에는 그것들을 건드린다.

그의 문장 사이의 간격은 결코 좁지도 넓지도 않다. 그의 문장 사이를 쫓다보면 어느새 그와 함께 산책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주 한적한 곳을 걷는 기분.

까뮈의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대체 이 책 속에 뭐가 있는 거지. 그래, 사실 누가 무슨 책이야 라고 물어보면 잘 대답은 못할 것 같다. 한 마디로 되지 않는 것들이므로. 그저, 왜 요새 사람들 시나 글에 그다지도 고양이가 많이 등장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달까. 그러니까 그 느낌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말로 해내기는 힘든 법인데, 장 그르니에는 말로 해낸다.

읽은 지 어느 정도 돼서 더 이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부정하세요. 당신이 생각할 때는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을 하세요. 제 에미가 입으로 새끼를 물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 자신을 그냥 가만히 맡기세요.




물루는 행복하다. 세상이 영원히 자신과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는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 그 환상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는 장난을 즐기지만 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한 치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정확한 몸짓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그만 황홀해진다. 매 순간 그는 제 행동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에서 두 눈을 잠시도 떼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음식물에 빠지지 않나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만일 그가 누군가의 무릎 위에 몸을 옹크리는 것을 보면, 자기의 온갖 애정을 기울이면서 그렇게 몸을 옹크린다. 내가 그에게서 빈틈을 찾아보려고 하나 도대체 어디에서고 찾아볼 구석이 없다. 그의 행위는 그의 동작과 일치가 되고, 그의 동작은 그의 식욕과, 그의 식욕은 그의 이미지와 일치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사슬과도 같다. 어쩌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렇게 다리를 펴는 것이, 다만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를 잘 이룬 테두리에도 그와 같은 필연성은 없다.

내가 때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날이면, 그런 충만함이 오히려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다름아닌 인간임을 느낀다. 곧 나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임을 느낀다는 말이다. 나는 알고 있다. 연극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말 것이고 내 상대역이 내게 어떤 물음을 던져도 대꾸를 잃은 채 말없이 앉아 있으리라는 것을. 완전한 부재. 마침내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들에게, 나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 나는 넋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어떤 필연이 나를 내가 처해있는 상황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 빠져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루가 자신이 고양이인 것에 만족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인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물루는 옳고, 그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자리는 그들에게 버티고 있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제발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자리조차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어디론가 달아나야 하리라. 그런데 발딛고 설 만한 단단한 한 치의 땅도 있지 않다, 물루와……사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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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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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다. 현대인은 누구나 실존주의의 세례를 받는다. 실존주의뿐이 아니다. 모든 관념들이 현대인들과 함께한다. 샤르트르의 이 소설에서 나온 존재에 대한 관념은 이제 더 이상은 새롭지 않다.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이다. (다들 적당한 변주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은 도전이고 의식에 대한 혁명이었을 것이므로. 이제 어느 정도 적당히 고상해진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잡문을 통해, 블로그를 통해, 실존주의를 읊조린다. 그리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연명하는 삶을 좀 더 세련되게 해야 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비슷하니까.

존재의 우연성, 시간의 막막함에 대한 이 서술들은 그러나 정말 뛰어나다. 계몽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제 철학의 뒷언저리에서 나는 책장을 넘긴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 그것이 나에게 포섭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익숙한 것으로 대상을 포장한다. 이것은 애정일 수 있으며, 또한 관계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관계라는 권력의 자장에 대상을 묶어두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름을 붙이고 그 대상의 특징들을 제거해나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분류하려드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구토에 나오는 로캉탱의 각 존재에 대한 관념, 존재를 여분으로 취급하는 관념은 오히려 아름답다(?). 물론 어느날 문득 괴물이 된 자연이라든가, 나무 뿌리의 폭력성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미 낯익은 이미지이고 생각이지만, 모든 것을 여분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 경의를 표하고 어려워하며 대해야 하고 그럴수밖에 없으며-사실 우리는 결코 대상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없다, 물건, 사람 등등, 다만 아는 체 하길 좋아한다- 어쩌면 이 태도만이 권력이라는 속성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허무주의자인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굳이 말이란 것을 해야 한다면, 그게 아니다. 나는 단지 질문과 반성이 많은 인간일 뿐이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러니까, 허무주의 같은 그런 괴상하고 어이없는 관념들 속으로 한 인간을 집어넣으려 해서는 안된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조처, 관계라는 권력의 자장에서 우위에 서기 위한, 비웃기 위한 태도들.










p.66

나는 미래를 ‘본다’―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 말락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실현되어보았자 무엇이 더 보태질 것인가? 노파는 약간 절름거리면서, 또박또박 걸으면서 멀어진다. 그 노파는 선다. 목도리에서 삐쭉 솟은 흰 머리칼을 잡아당긴다. 노파는 걷는다. 그 노파는 저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현재에 있는지 미래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노파의 동작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노파의 동작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미래와 현재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계속된다.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노파는 쓸쓸한 거리를 전진한다. 커다란 남자 신발을 옮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란 것이다. 순수한 시간이다. 그것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다려지고,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답답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파는 길모퉁이에 가까이 간다. 그 노파는 이미 검고 작은 헝겊 뭉치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다. 조금 전에는 노파는 거기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퇴색하고 케케묵은 새로운 것이어서 절대로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없다. 노파는 길모퉁이를 돌려고 한다. 돈다―영원의 시간 속을.




p.80

내 생각은 이렇다. 가장 평범한 사건이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고 있는 점이다. 한 인간, 늘 이야기를 하는 자이며, 자기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본다. 또 그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p.81

인간이 살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배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덮친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이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소계(小計)를 낸다. 이를테면 나는 3년 간 여행을 했다. 부빌에 온 지 3년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말도 역시 없다. 여편네와 자식과 도시를 한꺼번에 떠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슷하다. 상하이도, 모스크바도, 알제리도, 2주일이 지나면 모두가 같다. 때때로―드문 일이지만―사람은 결말을 짓는다. 어떤 여자에게 붙어먹다가 더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번갯불과 같은 순간이다. 그 다음에는 행렬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은 다시 시간과 날짜의 덧셈을 시작한다. 월, 화, 수. 4월, 5월, 6월. 1924년, 1925년, 1926년.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한다.




p.112

그 모험의 감정은 확실히 사건으로부터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증명됐다. 모험이란 차라리 순간순간이 서로 얽히는 그 방법에서 생긴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즉 갑자기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 즉 한순간이 다른 순간에 인도됨,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에 그런 식으로 인도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매 순간이 사라지고, 그것을 붙잡아두는 게 어리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건에서 이 특징의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형식에 관련된 것을 내용에 연관시켜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사람은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가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는 것 같고, 또 그 여자와 더불어 자기도 늙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이 모험의 감정이다.




128

어디에 나의 과거를 간직해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다. 나는 나의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182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각기 현재 속에 처박힌 가볍고 튼튼한 가구, 즉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과 나 자신이었다.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 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것이 나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은퇴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 양식이었으며 휴가 상태, 비활동 상태였다. 각각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을 때, 스스로 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서 명예로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무(無)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나는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아무것도 없다’.




210 

각자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개인적이고 보잘것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다.




223

나는 타협하려는 거짓 노력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결국 그는 나에게 조그마한 일, 즉 칭호를 받아들여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독서광은 우쭐할 것이다. 독서광은 곧 뒤따라와서 내 앞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휴머니즘은 모든 인간의 태도에 한꺼번에 융합되기 때문이다. 만약 정면에서 그것과 충돌한다면, 우리는 그 계략에 빠져버리고 만다. 휴머니즘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먹고 산다. 완고하고 시야가 좁은 사람들, 강도들은 휴머니즘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진다. 휴머니즘은 모든 폭력이나 과격 행위를 소화해서 그것으로 희고 거품이 나는 임파액을 만든다. 휴머니즘은 반주지주의, 마네스 교(敎), 신비주의, 염세주의, 또는 무정부주의나 자기본위주의 모두를 소화했다. 그것들은 휴머니즘에 있어서만 정당성이 증명될 수 있는 단계이며 불안전한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미장트로프(인간을 싫어하는 사람, 몰리에르 희곡 중의 인물)도 인간이다. 따라서 휴머니스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장트로프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미장트로프이다. 그는 자기의 증오를 조합할 수 있으며, 후에 인간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우선 인간을 증오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사람이 나를 적분(積分)하는 것도, 나의붉은 피가 이 임파액의 짐승을 기름지게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반휴머니스트’라고 스스로 말하는 어리석은 짓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 그뿐이다.

독서광에게 나는 말한다.

“나는 인간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p230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왜 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토론에 휩쓸려들었을까? 왜 사람들은 여기에 있나? 왜 그들은 먹나?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떠나가고 싶다. 어디든지 정말 ‘나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속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아무 데도 없다. 나는 여분의 존재이다.




p.239

나는 그들처럼 “바다가 푸르‘다’, 저기, 저 높은 곳에 있는 흰 점, 그것은 갈매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 갈매기가 ‘존재하는 갈매기’라는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존재는 숨어 있다. 그것은 여기 우리들 주위에, 그리고 우리들 내부에 있다. 그것은 즉 ‘우리’이다. 존재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존재에 손을 댈 수는 없다. 내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믿었을 때, 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믿어야 옳다. 나의 머리는 비어 있었다. 혹은 꼭 한 마디가 머릿속에 있었다. ‘이다’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할까?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물은 무슨 장치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은 도구로서 쓸모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저항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을 스쳐 갔다. 만약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와서 사물의 성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 채로 부가되는 공허한 형체일 뿐이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젠 달라져버린 것이다. 갑자기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대낮처럼 분명했다. 존재가 갑자기 탈을 벗은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 범주에 속하는 무해한 자기의 모습을 잃었다. 그것은 사물의 반죽 그 자체이며, 그 나무의 뿌리는 존재 안에서 반죽된 것이다. 또는 차라리 뿌리며, 공원의 울타리며, 의자며, 드문 잔디밭의 잔디며,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사물의 다양성, 그것들의 개성은 하나의 외관, 하나의 칠에 불과했다. 그 칠이 녹은 것이다. 괴상하고 연한 것의 무질서한 덩어리―헐벗은, 무섭고 추잡한 나체만이 남아 있었다.




p.241

희극적…… 아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 중에 희극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파극 장면과 유사하다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동하는 유사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지산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 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p.242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금도 나는 그것이 두렵다―나는 그것에 뒷덜미를 잡혀서, 높은 파도처럼 들어올려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




p.247

우연성은 가장이나 지워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이다. 이 공원, 이 도시, 그리고 나 자신도 무상이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면 그것을 우리의 마음을 변하게 하고, 모든 것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요전 날 저녁때 역부 회관에서처럼 말이다. ‘구토’이다. 그것이 그 더러운 자식들―‘코토 베르’나 다른 곳의 그 더러운 자식들―이 그들의 권리를 휘둘러 숨기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얼마나 가엾은 거짓인가. 아무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히 무상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내부에서 ‘여분’이다. 즉 부정형하고 애매하고 한심하다.




p.253

허무한 나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은 광대무변 속을 떠돌아 존재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 허무는 존재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 존재였으며, 수많은 다른 존재 다음에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더러우냐, 이 얼마나 더러우냐!”




p.292

나는 도시가 두렵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나갈 수는 없다. 만약 너무 멀리까지 모험을 해서 가면 ‘식물’의 권내(圈內)에 부딪친다. ‘식물’은 도시를 향해서 수킬로미터를 땅에서 기고 있다. 그것은 기다리고 있다. 도시가 죽을 때, 식물은 도시에 침입할 것이고, 돌에 기어올라가서 그것들을 조르고, 뒤지고, 그 기다란 검은 집게로 돌을 부술 것이다. 식물은 구멍들을 틀어막을 것이고, 도처에 초록빛 발을 늘어뜨릴 것이다. 도시가 살아있는 한, 그 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도시의 입구에 있는 그 거창한 머리카락 아래 혼자서 침입해서는 안 된다. 그 머리카락이 물결치도록 아마도 보는 사람이 없는 채로 덜거덕거리게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도시에 적당히 몸을 둘 줄 알고, 짐승들이 그 구멍 속에서, 유기적인 부스러기의 퇴적 뒤에서 소화를 하고 잠자는 시간을 선택할 줄 안다면, 사람은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덜 무서운 광석밖에 부딪치지 않는다.




p.293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로 난 그 흰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p.294

나의 온 생활은 내 뒤에 있다. 나의 생활 전체를 본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 형태와 그 느린 동작을 본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내 돈을 전부 빼앗아 간 한 판의 노름이었다. 그뿐이다. 내가 엄숙하게 부빌에 들어온 지 3년이 된다. 나는 첫 판에서 졌다. 두 번째 다시 걸었으나 역시 졌다. 나는 노름에서 진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사람이 늘 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놈은 개자식들뿐이다. 이제, 나는 안니처럼 하겠다. 나는 연명하련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나무들처럼, 물탕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련다.




p.296

그들은 태연하지만, 약간 우울하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이면 사람은 약간 장식을 한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그들의 태연하고 안심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뒤집힌다. 그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대중 소설을 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만드는 엄청난 바보 짓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도시 속으로, 사무실 속으로, 막막막 대자연이 스며들었다. 그 자연은 도처에 그들의 집 속으로, 사무실 속으로, 그들 자신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연은 움직이지 않는다. 조용히 하고 있고, 그네들은 속이 자연으로 충만해서 자연을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자연이 그들의 외부에, 그들 도시에서 50킬로미터 밖에 자연이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자연을 ‘본다’. 그 자연, 그것을 ‘본다’…… 그 복종(服從)은 게으름이고, 자연에는 법칙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는 습관만이 있고, 자연은 습관을 내일이라도 바꿀 수가 있다.

무슨 일이 만약 생긴다면? 자연이 만약 갑자기 발딱거리기 시작한다면? 그때 그네들은 자연이 거기에 있고, 그들의 가슴이 삐거덕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때 그들의 둑, 그들의 성벽(城壁), 그들의 발전소, 그들의 용광로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것은 언제든지, 아마 당장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전조가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아버지가 산책을 하다가 바람결에 붉은 걸레가 자기에게로 날아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그 걸레가 아주 가까운 데까지 왔을 때, 그는 그것이 기다가 뛰다가 하면서 질질 끌려오는, 먼지가 묻은 한 조각의 고기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를 경련적으로 내뿜으면서 개천 속에서 뒹구는, 괴로운 고기 덩어리를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뺨을 보고 물을 것이다.

“그게 뭐냐? 종기냐?”

살이 약간 부어올라서 째지고 벌어지면, 어머니는 그 틈에서 제 3의 눈, 웃고 있는 눈이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은 냇물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이 골풀을 만지듯 전신에 보드라운 마찰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옷이 살아있는 물건이 된 줄 알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입 속에서 긁적거리는 그 무엇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울에 가까이 가서 입을 벌린다. 그러면 혀는 살아 있는 커다란 지네가 될 것이고, 발을 꼬고, 그의 입천장을 깎아버릴 것이다. 그는 그것을 뱉어버리려고 할 테지만 지네는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되어서 손으로 그것을 뜯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것들이 나타나니 그것들에게는 새 이름을 부쳐주어야 할 것이다. 돌의 눈, 삼각형의 커다란 팔, 지팡이의 자국, 거미의 지느러미…… 같은 이름을 말이다. 그리고 훈훈한 자기 방의 침대 속에서 잠들어버린 사나이는 푸르스름한 땅 위에서, 숲이 엉클어진 음경(陰莖)의 삼림 속에서 벌거벗고 깨어날 것이다.




p.317

왜냐하면 의식은 여분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희박해지고, 분산하고, 가로등에 연한 갈색의 벽 곁에서, 또는 저기 저 저녁 연기 속에서 없어지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절대로’ 자기를 망각하지 않는다. 의식은 자기를 망각하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식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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