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적으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대신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그 결과는 우울증이나 다른 형태의 질병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낯선 영역으로 나아가면 불안이 우리의 변함없는 동반자로 작용할 것이다. 심리적 또는 영적 발달을 이루려면 불안과 모호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태를 받아들이고, 견디며, 삶에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성숙을 말해주는 도덕적 척도이다. - P70

개인 삶의 모든 결정적 순간에 갱신된다. 이러한 선택에 직면했다면 불안과 모호함을 선택하라. 왜냐하면 불안과 모호함은 언제나 우리의 발전을 꾀하지만, 우울은 퇴행적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특효약이고 우울은 진정제다. 전자는 우리를 삶의 가장자리로 몰이붙이고, 우울은 어린 시절의 잠 속에 머물게 한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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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문제는 그것이 무의식적이라는 데 있다. 자신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할 만큼 충분히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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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뒤로 기억되지만 반드시 앞으로 살아야 한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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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우리가 생각을 시작한 최초의 순간부터 현재까지 자신과 맺은 가장 깊은 직관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영혼은 우리 자신의 깊이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흐르는 목적 지향적 에너지, 의미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일상적인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직관적인 느낌이다. 영혼은 우리를 더욱 심오하고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고, 또 우리의 인생 여정이 풀어낼 네 가지 신비의 질서에 더욱 의식적이고 현명하게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긴다. 네 가지 신비로 (1) 우리가 맹렬한 속도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이 우주 (2) 우리의 집이자 환경인 광활한 자연 (3) 관계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가까운 타인들 (4) 언제나 묻고, 주장하며, 잊히기를 거부하는 우리 자신의 파악하기 어렵고 반항적인 ‘자기‘이다. - P25

개성화는 타인의 신비를 존경하는 동시에 각자가 자신의 신비 앞에 서서, 삶이라는 이 여정에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더 온전히 책임지도록 요구한다. - P30

우리가 어렸을 때 직관적으로 알았다가 그 후 접촉을 잃어버린 더 큰 존재가 전체 유기체를 생존, 성장, 발전 그리고 의미를 추구하는 쪽으로 이끌고 있다. - P30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은 단지 자아의 제한된 기능일 뿐이며, 자이는 영혼이라고 불리는 무지갯빛 바다 위에 떠 있는 얇은 의식의 조각에 불과하다.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굳이 굳히려 드는 자아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자기‘를 명사로 생각하지 않고 동사로 여기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자기는언제나 우리를 이롭게 한다. 심지어 자아가 우리를 죽음 쪽으로 몰아붙일 때조차도 우리를 돕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 P31

결정적인 선택이 요구되는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길이 나를 확장시킬까, 아니면 축소시킬까‘라고 묻는다면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내면에서 알고 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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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처럼 나도 외로워서
김현성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그와 통인동인지 효자동인지 경복궁역 어디 즈음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여러 번 모임을 같이 했는데도 왜 이 기억이 가장 먼저 나는지 모르겠다. 딱 이만큼의 추위 때문인가. 그때 누가 같이 있었지?


기억이 다 헝클어졌는데 이 샌드위치 집은 기억이 난다. 비싼 고급 샌드위치 가게라서일까. 그날 우리는 샌드위치 가게를 들렀다가 사람이 많아 가지 못하고 그 동네 시장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잔치국수 집에서 국수를 먹고 카페에 갔었나. 샌드위치 가게는 위치만 기억해두고 다른 친구와 갔던가. 그때 그가 그 동네로 이사를 가고 얼마 안 돼서 인가.


생각해보면 모임은 늘 경복궁역에서 했다. 대학 이후 대학교 친구들과 했던 모임도, 대학원 이후 대학원 친구들과 했던 모임도 그랬다.


아주 친하지는 않았는데 안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대학 이후 대학생활 추억하기 아니면 대학 생활에서 얻은 것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발판을 함께 마련하기를 했고 대학원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생각해보면 대학 이후, 대학원 이후 그 학창시절과 결별하는 과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딱 부러지게 헤어질 줄을 모르니까. 심지어 학창시절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 같다.


그 역시 친하지도 안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었고


모임에서 자주 만났고 글을 잘 썼다.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소설이 두 편 정도인 것을 보면. 나는 왜 그가 세상에 소설가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아니 세상과 나의 시각의 편차 때문에 혼자 놀기로 했다고 해야 할까.


세상은 능력이나 재능만으로 되는 곳이 아니라


운과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 홈런을 한 방 칠 수 있을까 말까 한 곳이라는 것


이 말이 좋은 말인 것도 같지만 어느 날 보면 답답해 미치게 한다는 것.


때로 대단히 편협하게 굴기도 하는 나는


이 지점에서 대단히 편협해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걸까.


 


평일 경복궁역 부근은 한산하고 깨끗하다.


아직 서촌이 이렇게까지 급부상하기 전에 모임을 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때 왜 우리만 이렇게 한량처럼 사는가


나는 부잣집 딸도 아니고 예술적 재능을 허벌나게 인정받은 것도 아닌데


아무도 내게 이 증표를 부여해주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사는 거지


이건 죄악이야


이런 생각도 더러 했다.


현실 속으로 들어가자고


9시부터 6시까지 좀 더 쥐어짜내며 견디는 곳


그 견딤이 현실일까


지금 이곳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떠나는 일을 업으로 하다가


좀 더 멀리 떠나왔다.


떠나는 일을 업으로 할 때도 9시부터 6시까지라는 이 일정표 안에서 초침을 계속 바라보는 기분이 들게 하는 날이 있었고(심지어 6시가 땡치는 시간이 아닌 날이 많아 배신감이 더했으며)


여기서도 그렇다.


그런데도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 정말 6시가 되면 내 하루가 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쓰레기통이나 하수구 속으로 흘러들어간 것도 같고


몇 푼의 돈과(이 돈이 없으면 나는 못 사는) 맞바꾼 것도 같고


왜 세상은 돈과 시간을 맞바꾸려할까


그렇게 인간을 통제해서 시스템을 이루고


그것이 언젠가 발전으로 이어지고


나는 한 마리 작은 개미라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떠날 준비를 함께 하던 그


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는 그냥 예술가로 계속 살고 있다.


이제 나는 완전히 떠나서 다른 곳에서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역시 다른 의미로 한국을 떠나서 어딘가를 돌아다녔고 그 기록을 책으로 냈다.


 


페이스북에서 보고 그가 맞나 확인해봤다.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집이라 서운했지만


첫 걸음이 무엇이든 뭐...


 


 


사실 이 세계에서 나에게 오는 메시지는 무언가를 사라는 것 말고는 없게 된 것 같다.


돈을 주고 우리가 만든 물건을 사라는 것.


우리에게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오늘 온 3통의 카톡도 그랬다.


유니클로, 맥심, 카카오페이,


이 고유명사들은 모두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판매를 좀 더 예쁘게 포장해 말을 건다. 하지만 나는 자본주의의 혹독함과 세련됨이 싫을 뿐이다.)


무지막지 쓸쓸한 일이다.


 


페이스북의 메시지도 그런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반가웠다.


 


책은 읽어서 뭐하게


이 질문으로부터 나는


요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책을 사고 빌리고 때로 읽는다.


한동안은 점심시간에 그림책을 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으나


점차 생각도 그림책 같아지고


그림책 같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케치북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더는 한 발자국을 나가지 않고 있다.


 


요새 읽은 책도 빌려온 책도


대부분 에세이집인 것을 보면


정말 에세이가 판 치는 시대다.


더는 소설을 읽기 어려운 시대라서일까


남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잠시간의 마음이 맞는 대화 같은 것인가.


(책을 읽다보니


그 시절 안국동 코코브루니 2층에서 놀던 기억이 새록새록하긴 하다)


 


 


그래도 어제 현성 오빠의 '고해소' 글 때문에


나는 맥주를 안 마시고 잠들 수 있었다.


새벽에 1층 편의점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


나는 고해소의 글을 떠올리고 그냥 잤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이 그의 에세이보다 좋다.


 


 


 


-나는 가끔 다음 생에는 인디언으로 태어날 거야


이런 말을 한다.


그러면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조낸 불행해하는 인디언의 마지막 자손 즈음이 돼서 다음 생에는 다시는 인디언으로 태어나지 않을 거야


이런 말을 하게 될 걸


이런 농담으로


이번 생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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