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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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
 

 

인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인류라는 종에 대해서, 어쩌다 이 지구에 인류가 뿌리내려 지금까지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나도 인류인데, 왜 이렇게 인류란 말은 멀고 아득할까

박민규의 『핑퐁』은 이런 느낌에 대한 길고 긴 답장 같다


인류는 당신을 깜빡했어요

그렇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그냥 계속 그렇게 살면 되요

이런 건 아니라는 거다.


정말 탁구를 치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써브에 당신이 스매시를 날려주고 그렇게 이어진다면, 아 물론 언젠가는 경기가 끝날 테지만, 그래도 먼 훗날 그때는 참 행복했다고,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란다. 알겠니?

해도


그럴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이는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거는 거야. 헬리를 기다리는 건, 말하자면 삶의 자세와 같은 거지. 그건 몸을 숙여 저편의 써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는 탁구를 모르니까 어떤 공도 받지 않겠다. 공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건 인류가 취할 예의가 아니라고 봐. 마치 우리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혜성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게 아니고 또 뭐냐는 거지. 그래서 우린 매달 한 번씩 핼리가 오는 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거야


가장 늦게 시기를 잡는다면,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맹수처럼 서로 물고 뜯으며 인간의 존재 이유 같은 건 엑스파일로 묻어두게 하는 게 세상사다. 인간의 존재 이유 같은 게 엑스파일이 된 마당에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있을 턱이 없다. 어서 누군가에게 프레젠테이션할만한 아이디어를 찾아내야 하고, 어서 누군가에게 책잡히지 않을 만큼 살아내야 한다. 늘 우위에 서기 위해 협박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면 긴장해야 한다. 그게 시스템 탓인지, 인간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헷갈리기만 한다. 어차피, 시스템도 인간이 고안해낸 거지만. 이렇게 된 게 필연인지 우연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거리 어딘가에 처박혀 최소(정말 죽어도 최소다)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하루 여덟 시간을 노동하고 1/7, 2/7 정도의 휴식 비슷한 것을 취하려 전전긍긍하며 사는 게 아주 당연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도 헷갈린다.

헷갈려도, 아무리 헷갈려도,

공평한 시간은, 그렇다면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알아 보세요,

이런 걸 잘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지, 주변의 눈총이나 사회경제적 구조가 허락하지 않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 속 ‘의견’이라는 말은 눈물겹다. ‘의견’이라는 건 어느 순간부터 필요치 않은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못은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개성이나 의견 같은 것도 알고 보면 남이 만들어낸 걸 따라가는 건데, 그걸 잘 몰랐던 것뿐인 인물이다. 내 ‘의견’으로 뭘 하는 게 아니라, 실은 대부분, 하라는 대로 하고, 해온 대로 한다. 주변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그 시스템에 익숙했지만, 못은 세계가 깜빡했기 때문인지 그 시스템을 익히지 못해 왕따를 당한 셈이다. 그러던 못이 탁구를 만나 '의견'보다 더 중요한 '태도'-의견은 바뀔 수 있지만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에 충격을 느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너무 많다. 뭐든 너무 많다. 그래서 나의 개성이나 나의 취향 같은 건 대단히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 그런 억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인터넷 속을 떠도는 무수한 정보들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기분, 누군가 1분쯤 눈길을 주다가 휙 다른 정보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금방 잊혀지고 마는 그런 게 되어버린 기분. 그런 의미에서, 못과 모아이가 ‘마흔한명’ 속에서, ‘육백삼십칠명’ 속에서, ‘천구백십사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 중 한 명이라는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중학생이라서 느끼는 막막함이 아니라, 현대성의 체감일 것이다. 너무 일찍, 그것을 체감해버린 것이다. 도덕 책에 나오는 ‘자아 존중’이라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아찔한 막막함을 배워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는 뭔가에 집중해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잠깐만 집중해 있다가, 깜빡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곳에 온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낯익음이라든가 친숙함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모두 다른 ‘정보’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다가 잠깐 눈을 돌렸는데, 돌아갈 길을 잃은 미아 같은 기분. 현대성이라는 말조차 지루한 게 되어버린 지금, 못과 모아이는 이 현대성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비단 못과 모아이뿐 아니라, 핼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쿨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하다- 대체 'Celebration'을 부르는 ‘Cool And The Gang'처럼 즐거울 수 없는 것이 비정상인가 고민한다.

현대성에 대한 강박 속에 아이들은 ‘탁구’를 친다. 둥근 공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탁구’는 이들에겐 최초의 정신적 몰입을 선사한다. 또한 작품 전체에서 ‘탁구’는 세계의 집약이다. 세끄라탱의 말에 따르자면, 인류는 끊임없는 듀스포인트의 연속인 것이다.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연속. 어머니가 기린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도, 세계가 냉장고에 보드라운 카스테라로 담겨 있다는 환상도 꿈꿀 수 없는, 어떤 향수나 그리움을 가질 기회도 얻지 못한 이들 세대가 꿈꿀 수 있는 건 ‘세계의 집약’ 앞에 서게 되는 일뿐이다.

세계가 탁구로 집약된다는 환상은 아마 이 세계에서 ‘음모론’이라는 단어로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라고 말하고 살기엔, 너무 억울해서 대체 그 놈의 저 너머에 도대체 어떤 진실이 사냐고 물으면, 당신과 나 두 사람이 시작이었다고, 그저 핑퐁 핑퐁 탁구를 치는 일이었노라고 그런 대답이 들려오는 세계, 먹이만 주면 째깍째깍 공을 치는 새나 쥐보다는 인간이 우월한 세계, 적어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그런 것이라면 참 좋겠다고 박민규는 말한다. 구타당하는 것이 체화된 유일한 시스템인, 반사적이고 습관적으로 치수라는 같은 인간을 겁내는 한 존재를 통해 박민규는 ‘말하자면, 다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해보려 애쓰는 것이다. 




혹은, 저 너머에 혼자 사는 진실이 탁구로 집약되지 않는다 해도,

어느날 문득,

지금 이 세계를 유지하시겠습니까 묻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래도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이 한 발작 더 멀어지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

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다면 참 좋겠다. 그냥 알고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문득 약속 장소에서 만났더니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

라고 말해준다면, 정말 좋겠다.

 

-박민규의 소설은 소설 이 시작되기 전 참 많은 말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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