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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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개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른 것과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인간적 삶의 묘사 속에서 극단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삶의 풍부함과 또 이러한 풍부한 삶의 묘사를 통해서 살아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소설가와 얘기꾼」(『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中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전투가 동시에 치러졌고, 내 몸뚱이는 넓은 싸움터에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다른 천사, 다른 충동, 다른 자아관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다른 외국 작가들에 비하자면, 폴 오스터는 우리나라에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다. ‘열린책들’의 오밀조밀한 폴 오스터 선집은, 어쩌면, 읽고 싶다기보다는 서가에 소장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며 서점에 나란히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대체 폴 오스터가 누구길래 이렇게 많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거야

라고 묻는 사람은 이 책을 집어들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이들에게는, 그의 잘 알려진 소설책 한 권이, 폴 오스터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잘 읽히느냐에 답해줄 것이다. 문장 속에 스며있는 폴 오스터라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닮은 분위기는 그의 소설 속에서 더욱 잘 발산된다. 그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이 단정은 그러나, 내가 그의 소설책을 두, 세 권 읽었다는 가정을 뒷받침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은, 그의 희뿌연한 분위기의 소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에세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삶, 고독을 곁에 두고, 그 고독과 함께 의사소통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따르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때 ‘고독’은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추적하는 일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폴 오스터의 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서 한국이라는 이 작은 나라에까지 번역될 수 있었던 건 왜일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밥을 먹고 똥을 싸고 한 군데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으로써의 삶에 대해 폴 오스터는 말한다. -제목이 『빵굽는 타자기』가 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원제는 ‘Hand To Mouth’이다.

다시 말해, 성공이라는 것의 좌표는 불확실하지만, 실패에 대한 예감은 늘 뒤켠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그 자리, 우둔한 미련일지도 모를,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겪었던 모험담(?)이 이 책의 주내용이다. 이국 파리의 거리를 방황하고, 선원으로 근무하며, 물질을 축적하는 대신, 소설의 자산이 될지도 모를 인상을 쌓는 삶을 택한 노정이 담담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노정에는 엄청난 위험 부담이 전제된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이 결정되지 않으며, 딱히 정해진 어떤 노선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기 자신만의 솔직하고 순수한 검열 이외에 다른 누구도 그에게 잘하고 있다, 혹은,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치기였지만, 그 배후에는 불안과 혼란이 숨어 있었다. 나는 왜 실패를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빈정조의 거만한 말투와 지적 과시의 태도는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내가 스스로 선택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었고, 그런 상을 제정한 진짜 속셈은 나 자신을 승자로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뚤어진 응모 규정은 인생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타격을 피하고, 돈을 분산 투자하여 위험을 줄이려는 방책이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게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나는 정신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나는 벌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재치있는 농담과 빈정조의 어투 속에 그 두려움을 파묻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은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경우, 그가 처음 1부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을 때, 편집장으로 있던 앙드레 지드는 그의 작품을 다시 되돌려보냈다. 그의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소설가가 좋은 작품을 세계에 내보낸다 해도, 그 성공 여부에 대해 당장 내려진 선고가 옳지는 않은 경우도 많다. 어떤 소설가가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경로란 우여곡절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요소(시대적 상황, 출판계의 정황 등등 사회적인 요소와 우연적인 요소 등등)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 소설가의 지독할 정도의 순수함은 당연히 수반되어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 다 잘 되지는 않는 것이다. 폴 오스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뉴욕 3부작』 같은 경우를 되돌아보면, 그 소설은 뭐라고 딱히 정의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돈 한 푼 없는 상황으로 자주 치닫게 되면서도, 직업을 갖는 평범한 삶 대신 은밀하게 고수한 무엇(이 역시 나의 언어적, 인식적 한계로는 뭐라고 딱히 해명할 수는 없다)일 것이다. 삶은 선택적 성격(살아간다는 자체가 죽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나 지금 당장 죽을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밖의 현재의 삶의 모든 제반 요소-시간을 돈으로 환원하고, 노동력으로 돈으로 환원하는 모든 행위)는 알고 보면 자신만의 고유한 선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H.L. 흄스에 대한 삽화는 이 책의 성격을 강렬하게 해준다. 단 두 권의 책을 출판한 뒤 세계와 융합하지 못한 소설가의 삶은 폴 오스터의 삶과 어떤 교집합을 갖지만, 전혀 다른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H.L, 흄스의 방식-거리를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돈을 주며 그 돈을 얼른 없애라고 함으로써, 돈의 기호화를 폭로하는-은 폴 오스터가 추구하려는 삶을 극적으로 과장한 것처럼 보인다. H.L,흄스의 목적이 진실로 지구에 뿌리내린 자본주의를 뿌리뽑기 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지각하고 있었으리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은밀한 퍼포먼스-이 퍼포먼스는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내밀한, 개인적인 종류의 즐거움을 주지만 인류와 소통을 통해 이 즐거움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개인적 작업을 통해 인류와 소통하려 드는 소설의 양식과 비슷하다-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계획을 떠벌였는데,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행위라기보다 일종의 정신적 퍼포먼스였다. H.L. 흄스는 화성의 지령 센터에서 훈련을 받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의식의 얕은 여울에 좌초하여 약탈당하고 불타버린 작가였지만,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기력을 북돋우기 위해 이 광대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돈 덕분에 그는 다시 관객을 얻었다. 사람들이 구경하는 동안은 생기와 의욕이 솟아나, 혼자서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처럼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그는 어릿광대처럼 뽐내며 걸어다니고, 재주를 넘고, 불꽃 사이를 통과하고, 대포에서 튀어나가는 인간 탄환이 되었다. 짐작컨대 그는 그 순간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수필의 본래적 성격대로, 이밖에 여러 가지 일화가 나열된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다. 폴 오스터라는 사람의 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책이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그의 작업은 결코 여유로운 작업이 아닐 테지만.

뒤에 소개된 희곡 같은 경우는 그의 소설 『뉴욕 3부작』 중 하나를 희곡화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마치 DVD의 디렉터스컷과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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