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
박상우 / 세계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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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는 생이 에고의 치열한 투쟁임을 고백한다. 모든 사랑의 이기적 속성(굳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 이외에도 모든 행위가 동반하는 사랑의 감정까지를 포함하여)을 간파하는 이 시의 5, 6연에서 시인은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그 누구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중의적 비유로도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없는 삶, 그리고 그 암묵적인 삶의 한가운데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박상우의 소설 『블랙리포트: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는 ‘내’가 사막(111 통제구역~999통제구역)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횡단하여 사각지대라 불리는 통제 받지 않는 구역에 있는 ‘루시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지독히 단독적이며 내면적이다. 여러 명의 인물이 소설에 등장해 음성을 내뱉지만, 이는 ‘나’의 내면에 남겨진 음성, ‘나’에 의해 편집된 풍경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나’ 이외에 부피감을 갖추고 등장하는 인물은 오로지 나의 여정을 시작하게끔 해준 ‘루시아’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루시아는 나에 의해 설명될 뿐이다. 어느 날 사막을 건너 찾아온 루시아는 내게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나 버린다. (-거짓말이야.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럴 수도 있잖아.‘)‘나’는 그녀에 의해 사막을 인식하게 되고 사막을 통과해 통제당하지 않는, 그러나 일절 삶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각지대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한때 루시아가 혁명을 꿈꾸며 떠났던 곳으로.


앞에서 인용한 황지우의 시와 박상우의 소설은 삶의 풍경을 사막으로 상징한다. 이는 자칫 달라 보일 수도 한다. 황지우의 시는 사막을 개인의 내면 풍경을 상징화하지만, 박상우는 섹스, 폭력, 환각, 종교적 이념 등으로 얼룩진 세계를 각각 특징에 따라 분류해 번호를 매겨 사막 통제구역으로 둔다. ‘나’는 이 황폐화되어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이 세계를 사막으로 상징했을까. 단지 세계가 인간성을 상실해 가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나일 수 없게 하는 것과의 선명한 싸움.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며 언제나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상태……내가 원해온 것은 오직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침해하는 외부와의 싸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음 흔들릴 때마다 툭, 툭, 귓전에서 마른 잎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리던 시간들……


앞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박상우의 상징은 세계의 황폐함 때문이기 보다는 내면의 고독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막을 횡단하며 벌이는 투쟁은 철저하게 자아와 세계와의 투쟁인 것이다.


-그런 밤이 일생에 몇 번이나 더 되풀이되어져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으로 뒤바뀌어버리던 시절. 터무니없는 기다림을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만 내가 내게 돌아와 그 거센 날갯짓을 잠재울 수 있을까. 그게 나와 나 사이에 가로질러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환상의 끝은 언제나 내 등뒤에 있었고, 돌아서서 내다보면 세상은 언제나 불모지대와 같은 황량함으로 턱없이 드넓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투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분열적 소설 공법을 선택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 이 때문에 소설은 구체적인 갈등이 드러나지 않고 ‘시네마 파라다이스, 전광뉴스, 중앙정보통제국 체포지령’ 등등의 단편적인 세계를 드러내주는 삽화적 글들이 삽입된다. 이 글은 영화 광고 문구, 신문 기사를 첨부한 형식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하나의 풍경이며 ‘나’는 다름아닌 이 풍경, 다른 말로 하면 이 세계 전체와 갈등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에고의 사막을 횡단하기 위한 한 편의 서사시인 셈이다.


-죽어도 환절기의 서사시를 쓰지 않겠노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굳게굳게 맹세를 했다.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고, 무화되어, 마침내 내가 있던 자리에 나라는 욕망의 주체 대신,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하나의 기류가 형성될 때까지, 나를 치고, 나를 죽이고, 그리고 염두에 둔 나를 끝없이 없애야 하리라.



그러나 그의 서사시는 무법이 다른 문법의 창조가 되고 마는, 멸하지 않으면 결코 고독의 무게가 늘 인간을 짐지우는 세계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으며 끝이 난다.


-다가오는 것과 멀어져가는 것, 기억에 남는 것과 기억에서 소멸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투과시키는 장치로서의 몸이 우리에게는 필요할 뿐이었다. 첨삭도 불필요하고 수식이나 폄하도 또한 불필요한 것. 모든 것이 투사되고 투과되고,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동시에 투명함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상태 - 그런 상태로 가는 길에 바로 우리들의 삶의 노정이란 게 던져져 있는 건 혹시 아닐까?


-내가 선택한 무법이 또 다른 문법의 창조였다는 사실. 삶이 끝나야 법이 풀린다는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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