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이상운 지음 / 하늘연못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김정란의 소설 평론집 『연두색 글쓰기』에서 이 작품의 평론을 보고(알고 보니 『탱고』 뒤에 삽입된 작품 해설이었다)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우주, 거대한 시간의 연속성과 순간, 카오스적 내면, 우연. 내가 이런 쪽에 어느 정도 나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아니, 이전에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영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개인의 종말 이외엔 관심이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삶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영원이라고 시간을 넓게 확장시켜 보는 태도는 일종의 자기애적 편집증에 가깝다는 것. 영원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두려움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한 방식일 가능성이 크다.

이상운의 『탱고』는 연애소설이라고 보는 게 가장 맞을 것 같다. 하긴, 연애소설이 아닌 소설이 정말 어디 있을까 싶지만, 사랑보다 더 커다란 사건이 이 우주에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이 연애소설은 그러나, 사랑을,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똑바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우주라는 거대 공간 속에서 자신을 점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사랑의 위대성을 감당하기를 주저한다. 이 소설 안에서, 혜리라는 존재는 미궁의 존재, 환상의 존재에 머물다 마지막에서야 편지 형식을 통해 그 껍질을 한 꺼풀 벗는다. 하지만, 그 껍질을 벗는 건 두 사람이 만남을 통해, 은밀하면서도 직설적인, 예감을 품은 대화와 사건을 통해서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혜리는 캐릭터가 없는, 그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여인, 이상의 그 누구도 되지 못한다. 그녀가 그 어둠 속에 몸을 감추는 방식이 바로 그녀의 캐릭터일진대, 그 방식이 약간의 상징과 해석하지 않으려드는 사건 속에 놓임으로 해서 이러한 벽이 생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많은 문장들이 내게는 그닥 의미 있는 울림으로 읽히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춤을 춘다던가, 가끔 함께 춤을 추지만 다시 각자의 춤을 춘다는 뜻의 문장들이, 너무 자주 반복되며, 소설을 답답한 구석으로 몰고가는 기분이었다. 소설은 코너에 몰려있음에 대한 자기 고백이 아니라 코너에 몰렸을 때 그에 대해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끝없이 투쟁하는 인간을.

김정란의 평론은 이 작품이 역사와 맞물린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녀의 평론을 읽으면 수긍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작품을 읽고 그 정도로까지 해석을 해내는 건 지독한 애정이 없다면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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