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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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千五年 초가을에 받은 시집을 이제야 읽는다. 방은 따뜻하고 그래서 졸리운건가. 아니면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인가, 라디오에서는 낯익은, 낮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시집을 받은 날에는 장석남 선생님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을 읽고 있었다. 인사동이었고 막 해가 질 무렵, 이었다. 그때 나는 좀 천천히 걸었고, 좀 천천히, 살려 했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는 내게 천천히 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듣는 말은 다를 테지만, 나는 이 시집 속에서 속됨과 속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어쩌면 그 속됨이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말을 듣는다. 일부러 젠 체 하며 사는 삶은 또 얼마나 가식적인지. ‘연애’라는 말처럼 가볍지만, 그 말 속의 가벼움을 쉬이 받아들이지는 않는, 그저 그 속의 설레임만을 받아들이는, 속됨, 같은 것을 나는 이 시집 속에서 봤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랑’은 흔한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이라서, 그 속은 조금 더 깊고, 그것은 속삭이듯 쌓이지만 결국 오랜 것을 찢고 만다. 그것은 ‘아무 데에나 있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절벽 위 ‘폭포’처럼 아찔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흉내내지 않은 그저,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소란스러움을 소란스러움으로 둔 채로도, 소소한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싶어 나는 이 시집을 필사할지도 모르겠다.


시집 뒤에 실린 김연수의 평은 몹시 즐거웠다. 이 김연수가 소설가 김연수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즐거운 평이었다.




목돈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폭설

-山居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 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大寂의 이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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