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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ㅣ 범우희곡선 39
테네시 윌리엄스 지음, 오화섭 옮김 / 범우사 / 199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맹렬히 뭔가 써야할 것만 같았다. 단 한 줄이라도 써야지 안 되겠다 싶어서 늦은 밤에 컴퓨터를 켰다. 마가릿의 대사가 끝나자 나는 슬프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슬프다는 것과 쓴다는 것 사이에 어떤 연계 작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나는 살고 싶기 때문인가 보다. 경기장 안에서 맹렬하게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종종 그런 게 몹시 지겹지만, 어쨌든 아직은 맹렬한 이 경기를 멈출 수가 없으므로, 쓰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게 거짓이라고도, 혹은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고도 말할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대부분은 허무맹랑해지므로. 그러나 왠일인지 태어나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살아야 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뭔가 막 분석해대고, 메스를 들이대듯 이야기의 구조를 샅샅이 뒤지고 캐릭터를 분석하고, 이런 짓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필요한 짓이지만, 지금은 이 희곡을 읽고 나서는 별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그런 건 별로 소용도 없다고 느낀다.
마거릿: 난 이대로 경기장에 있어요. 그리고 꼭 이길 결심인걸요.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가 이기는 길은 무엇일까? -알았으면 좋겠네. 아마 그대로 지붕 위에서 버텨 보는 거겠지.
브리크: 머릿속에 스위치를 켜는 것 같아요. 무더운 낮을 꺼버리고 시원한 밤을 켜는 것 같아요.
이 연극에서 내가 노린 점은 어떤 한 사람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이 겪는 체험의 진정한 성격 - 즉 위기에 놓인 인간들의 잘 보이지 않는, 그리고 깜빡깜빡하는 변동하기 쉬운 경험의 성격을 잡는 데 있다. 똑같은 위기의 번개구름 속에서 생생한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극중인물의 표현에 있어서는 언제나 신비성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실생활에 있어서 자기 자신도 모를 자신의 신비성이 있듯이. 항상 많은 성격은 신비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또 깊이 관찰하고 꿰뚫어보아야 하는 극작가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체험의 진실을 잡지 못하고 연극을 위한 연극을 만드는 그럴 듯한 결론 또는 피상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브리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건 너무 원기왕성해서 그런가봐요. 한데 전 거의 죽은 사람이나 같기 때문에 우연히 진실을 말하게 되는 모양이엥요. - 전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