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 전집 4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덕애 엮음 / 솔출판사 / 1996년 9월
평점 :
절판


이상하다. 아니, 나는 바보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은 지 한 이주일쯤 됐나, 버스 좌석에 앉아 숱한 감탄사를 내뱉으며-이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유명하구나 식의- 읽었던 이 책의 어느 부분에 내가 감동 받고, 놀라워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적어놓은 문장들을 읽어보니, 그 느낌이 희미하게 다가올 뿐이다. 그때의 그 선명한 일렁임은 다 잊고 기억나는 건 752번 버스의 조명등과 삼각지 주변 거리의 탁 트인 밤거리 뿐이다. 책을 읽다 밖을 보니, 거리가 참 시원스러웠다, 이런 식의 쓰잘 데 없는, 기억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래서, 책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으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새 위기를 느낀다. 이전엔 왜 책을 두 번 읽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지만, 일반 독자에서 머무르고 싶지 않다면, 책은 다시, 다시 또 음미할 필요가 있다. 1차적인, 내러티브의 재미, 발견의 재미를 넘어선, 다른 재미를 찾아야 한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독서의 행위와 같이.

일반을 넘어서, 흥미를 넘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방식을 내 글로 쓸 줄 알 때까지 글을 읽어야 한다. 그 어떤 방식으로 세상으로 뛰어들었는가, 헤엄쳤는가 등등.

버지니아 울프의 이 책은 정말 흥미롭다. 일반독자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 중 몇 개를 뽑아 번역해낸 이 책은 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문학사에 존재하는 여러 작가들에게 슬며시 다가가고, 그들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분석이 아닌,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상을 울프 방식으로 그려내고, 그 그림은 추상화 보다 훨씬 명확하고, 직선적이고, 쉽지만, 단순하지는 않다. 그것은 울프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마음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사람이 쓰는 글이다. 아래 인용한 ‘현대 소설’의 일부분이 있기에 이러한 산문이 나온다고 하면, 누가 과연 내 말을 이해해줄까.

초반 고전 부분은 워낙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글이고, 문학이 덜 발전한 시대에 대한 고찰이므로 어느 정도 괴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전에 대한 글인 「뉴카슬 공작부인」이나 「스위프트의 『스텔라에게 보내는 일기장』」은 그들의 문학성에 대한 비평보다는 그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뉴카슬 공작부인이 얼마나 독특한 여성이었던가, 그녀는 그 시대 여성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들을 마음껏 글로 써낸 인물이었음을, 『걸리버 여행기』의 스위프트 이야기는 그의 벗이자 연인이었던 스텔라와의 관계를 이야기함으로써, 글은 지루하지 않다. 누군가의 스캔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에.

그리고도 내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더 이상 사생활이 아닌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그 작품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음에도 울프의 글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울프는 문학적인 언어로 문학을 이야기한다. -기억의 동물인 까닭에 나는, 내가 울프의 「선녀여왕」이라는 글을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지 잊었다. 그러나 책을 펼쳐보니 목차에 ‘최고’라는 다소 유치한 말을 그 단락에 써놓은 게 보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며 나는 이 글을 쓰던 중 다시 그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최고’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울프는 인간적인 언어로 문학을 이야기한다. 어려운 비평적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한다.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분석의 과정을 서술한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즐겁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현재 살아있는 시인 중에서 어떤 유형에 들어맞는 인물을 묘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각자 인간의 거주지 중 하나의 방에만 국한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스펜서와 함께라면 우리는 여기 오늘날 우리 존재의 한 부문에서나마 잠깐 문을 열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

그리고 「현대소설」부터 「기울어가는 탑」까지 다섯 개의 글은 울프가 살던 시대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뭐,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문학적 조건이 아닐까 싶다. 우리 역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글을 쓰는 게 몇몇 계층의 인간을 위해서는 아니므로, 우리는 이제 숱한 무정형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므로, 울프의 이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막 계급 구조가 사라진 시대, 그러나 아직 계급구조의 희미한 옛 그림자가 남아있던 시대의 변화상과 그에 따른 문학의 변화에 대해 울프는 이야기한다.

뿐만이 아니다. 소설에서 인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인물이란 이런 것이다 정도의 말이 아니다. 자신이 인물을 묘사할 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당위성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 현대소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울프의 고민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을 더 접해보고 싶다고 느꼈다. 내가 글을 쓸 거라면, 나의 감상문도 이 층위는 아니지 않나, 이런 고민이 든다, 문득





만약 다른 모든 것이 멸망해도 그가 남아 있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하기를 계속할 거예요. 그리고 만약 다른 모든 것이 남아 있고 그는 무로 돌아간다면 우주는 막강한 이방인으로 변하겠죠. 내가 그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지 않겠죠.’

-에밀리 브론테,『폭풍의 언덕』中



하지만 시를 읽는 것은 복합 예술이다. 마음은 여러 층을 갖고 있고, 그리고 시가 위대할수록 더 많은 층이 일깨워지고 행동으로 유도된다. 또한 그 층들은 질서 있게 존재하는 것 같다.

-「선녀 여왕」中



모든 서두와 논의를 다 파괴해버리고 그는 가장 짧은 길로 시 안에 바로 뛰어든다. 시구 하나가 모든 준비를 다 소모해버린다.

-「3세기 이후의 단」中



속을 들여다보면 인생은 ‘이렇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 평범한 날의 한 평범한 마음속을 한순간 조사해보라. 그 마음은 무수히 만은 인상들을 받아들인다-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 또는 강철의 날카로움으로 새긴 것. 모든 방향에서 인상들은 수없는 원자의 끊임없는 소나기로 내린다. 그것들이 내려올 때 그리고 스스로를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으로 구성할 때 예전과는 다른 곳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중요한 순간은 여기서가 아니라 저기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작가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면, 만약 그가 반드시 써야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쓰고자 선택한 것을 쓸 수 있다면, 만약 그가 전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작품을 기초할 수 있다면 줄거리도, 희극도, 비극도, 사랑의 관심이나 재앙도 없을 것이며 본드가의 양복장이들이 달듯이 가지런히 달려 있는 단추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생은 균형 있게 열을 맞추어 늘어선 일련의 마차등이 아니다. 인생은 희미한 광채요. 우리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의 봉투이다. 이 다양하고 알 수 없고 제어되지 않은 정신을 아무리 그것이 탈선이나 다양함을 보여준다 해도 이질적이거나 외적인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섞지 않은 채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단지 용기와 성실함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올바른 소재는 습관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끔 했던 것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깊은 그리고 마침내 원망스러운 절망감을 가득 안기는 희망 없는 의문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에도 인생은 계속 타진해보도록 남겨진 질문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든다.

-「현대 소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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