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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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명해졌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차치하고라도남해금산보다도 간명해졌다. , (), 당신, 그대 등의 어휘 속에서 '사랑'하거나 '서러워'하거나 '슬퍼' 뿐이다.

아픔을 통해서만 살아있음의 징조를 깨닫고(『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뒷면), 당신을 떠남으로써 당신을 사랑하는(『남해금산 뒷면) 역설은 시집 전체에서 생생하나 어조는 차분하고 정갈하다. 시집을 읽다 김소월이나 타고르를 떠올리기도 했다.

1990숨길 없는 노래」로 소월시문학상을 받을 발표한 수상 소감이라고 한다. 이후로 산문집에 실리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길

 

 

  내가 글판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지도 어언 십 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시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는 당신의 삶과 어떤 등식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받으면  이내 말문이 막히고,  내가 어떤 유의 대답을  하더라도

부분적인 진실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예감을 갖게 된다. 하기야  그러

할 때의 막막함, 무수히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할 수 없음이야말로 시에 대한

나의 애정의 가장 근접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매혹의 근거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객관화되었을  때이

다. 사랑의 객관화는 사랑의 박제화의 길목이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을 불

러일으키는 요인들을 넘어서 존재한다.

 

 

  어떤 근거로 시에 대한 나의 애정을 설명하든, 나의 애정이 시에 대해 어떤

개념적 형태를 부여하든, 나의 애정은 그것들에  앞서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에 집착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의 맹목성을  강조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여하한

합리성, 여하한 결정론을 뛰어넘는 사랑의 위력이  우리 삶의 동력이며  의미

이며 깊이라는 점에서이다. 나에게 시의 의미는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의  의미

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방법적· 구체적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시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구체적·방법적  이행

이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

아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시의 의미는 삶 앞에서  시가 스스로를 부

정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렇다면 '이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거창한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다시금 동어반복의 늪에 사로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단언하자면, 나에게 삶이

란 주어진 현실적인 제약들을 살아내려는 노력에 다름아니다. 내가 살아내려

는 노력을 기울일 때 이 제약들은 나의 삶으로 의미화된다. 요컨대 삶은 삶을

살아내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 노력의  주체는 구체적 현실에  자각적

으로 감응하는 '깨어 있는 의식'이다. 나는 그 의식을 '나'라고 부른다. '나'가

현실의 제약들에 피동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은 생래적으로 지금,이곳이 아

닌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때문에 '나'는 현재의 상황을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이

곳이 아닌 세계에 대한 믿음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삶이란 지금, 이곳이 아닌

세계에 대한 믿음의 이행이다.

 

 

  늘상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삶이란  '집으

로 가는 길'이다. '나'의 '집'은 현실에서 찾아질 수 없다. 내가 '집'을 발견하

는 순간, 보다 정확히 말해 발견했다고 믿는 순간, 삶의 '길'은 끊어진다.  삶

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현실

에서 '집'을 찾는 노력들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한 포기는 '나' 자신의  존재

를 부정하는 일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찾아야 할 '집'

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그럼에도  현실에서 찾아야만  한

다는 믿음 사이의 모순 위에 존재한다. '나'가 그  모순을 지탱할 힘을  잃게 

될 때 출세간(出世間)의 초월주의나 입세간(入世間)의 현실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 양쪽 극단에서 보자면, '나'의 삶은 '덜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덜떨어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 집으로 가는 길은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를 얽매는

현실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할 '집'을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삶은 '숨은 그림 찾기'이다. 삶은 '나'의 현실이 곧 '나'의 '집'이라는  불가능

의 등식을 꿈꾸는 행위이다. '꿈꾸기'는 삶의 고유한 호흡 방식이다. 삶은 불

가능을 호흡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현실의 제약과 맞싸우는 '나',  즉 깨어 있는  의식의

편에서 이야기해왔다. 의식과 현실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그러나 양자는 그

관계 속에서만 각기의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의식의 편에서 볼 때, 현실

은 부정적 '현실'이다. 바꾸어 말해 현실은 진정한 '현실'의 부재로서 확인된

다. '현실'의 부재가 욕망을 낳고,  욕망이 상상을 낳고, 상상이 믿음을  낳고,

마음이 '현실'을 낳는다. 이와 같은 순환론적 폐쇄성은 다시 말해  의식과 현

실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의식을  우선시킨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하여

어둠, 불안, 절망 등은 높은 덕목으로  간주되는 반면, 원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 섭리, 자연 등은 고려의 여지 없이 부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의식의  일방적인 승리는 결코  바람직한 혹은  자연

스러운 관계는 아니다. 좋은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고 변화되는 관

계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된 현실은 의식의 편에서 바라본 현실에 지나지 않

는다. 즉 현실은 의식을 제약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의 편에서

바라보자면 문제는 달라진다. 현실은  결코 의식의 제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의식의 편에서 바라본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실

은 의식의 눈이 간파하지 못하는 '세계'의 극히 미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다. 그 '세계'는 나의 깨어 있는 의식뿐만 아니라, 잠들어 있는 의식, 깨지도

잠들지도 않는 의식, 요컨대 나의 전부를 함축한다. 나의 깨어 있는  의식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세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 갇혀 있음은  깨

어 있는 의식의 편에서 느끼는 것이지, '세계'의 편에서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편에서 보자면 그 갇혀 있음은 들어 있음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

도 세계는 '나'가 찾아 헤매던 '나'의 '집'이 된다. 이제 '세계'는 '숨은 그림'

이 아니라, '되찾은 그림'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한번 더 뒤집어 생각하면 '세계'가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은  나의

존재에 의해서이다. 즉 '세계'는 나에 의해 인지됨으로써만 '세계'로서 존재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와 '세계'는 서로가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공

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는 나에 의해 태어나고  나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나는 '세계'를 향해  다가감으로써 나의 '집'을 발견한다.  부분인

내가 전체인 '세계'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이야말로 이 관계의 종국이 될  것

이다. 확실히 이 행복한 관계는 앞서의 '나 - 현실'의 적대적 대립  관계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 - 현실'의  대립적 관계는 '나 - 세계'의  화

해적 관계를 위해 부정되고 극복되어야만 할 것인가.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실이란 의식의 눈에 나타나  보

인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세계'를 향해  다가가기 위

해서는  현실이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현실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계'와 만날, 현실의 대립항인  의식은 그것이 갈망하는 '집',  즉 '세

계'라는 '숨은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 - 세계'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나 - 현실'의 바탕 위에서이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근자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사유는 대체로 '나 -

현실'의 관계에 집중되어왔다. 내가 나의 글쓰기를 '부패의 연구'라고 이름 지

었던 것도 그러한 문맥에서이다. 그런데 근래 나는 '나 - 세계'의 관계에 주목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나 - 세계'에  대한 관심이  '나 -

현실'의 관계의 전면적 부정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는 부성적  현실

과의 갈등으로부터 모성적 세계와의 화해로의  이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요즈음  나는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 앞에  서 있다. '당신' 앞에

서 나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갖는다. 처음으로  나는 '당신'

이라는 '세계'와 연애한다. '당신'은 내가 찾아 헤매던 ' 숨은 그림'이고,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

을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깊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단순함을 호도할까 두렵다. 나의 조바심이 '당신'의 깊이를 가려버릴

까 겁난다. 또한 나는 머지않아 '당신'에게서 '당신'이라는 이름까지 벗겨드려

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 이름은 내가 '당신'에게  드린 속박이므로,  '당신'은

자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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